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95화 (195/305)

195화. 고비(1)

오래간만에 아버지와 둘이 먹는 점심이었다.

“하하, 최수원 선수. 찾아주셔서 영광입니다.”

“아닙니다. 제가 괜히 눈치 없이 예의상 해주신 말씀에 덥썩 찾아온 게 아닌지 모르겠네요.”

최근에 시구하러 온 사람 중에 자기 식당을 운영하는 쉐프가 하나 있었다.

뭐 요즘에는 식당보다는 인터넷 방송으로 더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는데 마침 내가 휴식일이라서 시구 요령을 도와줬었다.

“요즘 제일 잘 나가시는 분인데 오히려 제가 영광이죠. 이따가 사진이랑 사인 좀 꼭 부탁드립니다. 이왕이면 저희 구독자분들한테 인사도 잠깐 해주시면 더 감사하겠고요.”

사실 굳이 이런 인맥을 사용할 생각은 없었다. 근데 아버지랑 좀 근사하게 점심을 먹으려고 했더니 서울에 좀 유명한 파인 다이닝은 하루 이틀 전에 예약이 죄다 불가능하더라.

“오늘 네 덕분에 정말 별 걸 다 먹어보겠구나.”

“네? 아버지도 근처에서 종종 식사 하지 않으세요?”

“그렇기는 한데 우리는 이런 식당은 좀······. 보통 저기 고깃집으로 많이 가지.”

이런 코스 요리는 좀 감질나고 양도 적다고 들었는데 생각 외로 양은 적지 않았다. 특히 고기가 상당히 푸짐했는데 그래도 아는 사이라고 곱빼기로 준 건가 싶었다. 근데 나중에 계산하는데 내가 운동선수라고 거의 3인분 정도를 챙겨준 거라고 해서 좀 놀랐다. 아니, 이게 3인분이면 대체 1인분은 얼마나 적은 걸까······.

“보기 좋구나.”

“네? 뭐가요? 아, 요즘 먹는 양 좀 늘은 거요?”

“아니, 이런 곳도 이렇게 찾아오는 것 말이다. 우리 직원들한테 이야기하니까 예약도 엄청 힘들고, 아까 그 사장도 유명한 사람이라고 하던데. 야구만 한다고 주변 신경 안 쓰고 살지 않고 그래도 인간관계도 신경을 쓰는 것 같아 보기 좋단 말이다.”

“아, 딱히 인간관계를 신경 쓰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제가 요즘 워낙 잘 나가니까요.”

“쯧, 교만하기는. 이전에도 몇 번이나 말했지만 잘될 때일수록 겸손해야 하는 법이다. 모난 돌이 정을 맞고, 튀어나온 못이 망치질 당하는 법이야.”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도 항상 듣던 잔소리였다.

당시에는 이런 말을 들으면 괜히 불뚝해서 요즘 그런 구닥다리 같은 게 어딨냐고. 자기 홍보가 안되면 안되는 시대라고 큰소리를 쳤었다. 하지만 이제는 알 수 있었다.

아버지라는 건 원래 그런 거다.

팀에 정말 똘똘한 동료도 자기 아들 일만 되면 이유 없이 잔소리를 늘어놓는 경우가 많았다. 심지어 미국에서 뛰던 시절에 어떤 코치는 자기 딸이 어떤 남자를 만나는데 누가 봐도 완벽한 남자였음에도 그냥 있는 트집 없는 트집을 다 잡아댔다. 물론 안 그런 아버지들도 많겠지만 어쩌겠는가. 내 아버지는 저런 것을.

그래서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에는 약속이 있다고?”

“네, 오래간만에 휴식일이라서 사람 좀 만나려고요.”

“그래, 젊을 때 연애 같은 것도 좀 하고 해야지. 두루두루 만나봐야 누가 좋은 사람이고 누가 나쁜 사람인지 알 수 있는 법이다.”

아버지 입에서 연애 이야기가 나오는 순간 나도 모르게 전처가 떠올랐다.

이제는 돌아오지 않을 미래. 내 인생 최대의 실수. 당시 아버지는 나의 결혼을 매우 찬성하셨다. 그리고 나중에 이혼했을 때는 본인도 처음부터 전처가 영 탐탁지 않았다고 하시는 걸로 면피를 시도하셨더랬다.

“연애하는 거 아니고요. 그냥 친구 만나는 겁니다.”

“그러냐? 흐음······. 그래도 뭐 소문에 듣자 하니 미국에 갈 것 같다고 그러던데. 이왕이면 혼자 가는 것보다는 둘이 가는 것이······.”

“아니, 아버지. 저 이제 열아홉입니다. 내년 돼봐야 스물이고요. 둘이 가긴 뭘 둘이 갑니까.”

“그래도 미국에 가면 그 미국인 만날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난 외국인 며느리는 좀 별로다.”

“아버지.”

“응?”

“김칫국도 너무 거나하게 들이키시면 속에 안 좋습니다.”

***

“왔어?”

“어.”

오래간만에 보는 얼굴이었다.

크게 변한 것 같지는 않았는데 뭐랄까? 미묘하게 부분 부분이 예뻐졌다. 본래도 피부가 하얗고 깨끗했는데 살짝 태닝이 되긴 했지만 더 맑아진 느낌이다. 게다가 눈코입도 묘하게 잘 정돈된 느낌이었고.

“뭐야? 왜 그렇게 얼굴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거야? 오래간만에 보니까 막 설레고 그래?”

“뭐라는 거야. 그냥 얼굴 좀 달라진 것 같아서.”

“왜? 예뻐졌어?”

“어, 예뻐졌네.”

박은진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뭐야. 졸업하더니 갑자기 능글맞아지고. 뭐, 너도 좀 더 멋있어진 것 같긴 하네.”

“나? 나도 좀 크긴 컸지. 키도 1cm 더 컸고. 몸무게도 7kg 늘었고.”

“어? 몸무게가 7kg이나 늘었다고? 그렇게는 안 보이는데. 너 몇 키로인데?”

“지금 94kg인가?”

“진짜로? 94kg이면 내 두 배가 넘는데 네가 94kg이라고?”

“뭘 놀래냐. 오히려 네가 내 1/2도 안된다는 말에 내가 놀래야 할 판국이구만. 그보다 어떻게 된 거야. 데뷔한다는 말도 없이. TV에 갑자기 너 나오길래 깜짝 놀랐잖아.”

“하하······. 그냥 어쩌다 보니까. 운이 좋았지.”

“그래서 갑자기 무슨 일로 만나자고 한 거야? 데뷔할 때도 연락 없던 우리 박은진 씨가.”

며칠 전.

내가 올스타전에서 기념할만한 성적을 기록한 그 날. 정말 많은 축하 메시지와 섭외 관련한 메시지들이 홍수처럼 밀려왔다. 심지어 내가 번호를 알려준 적도 없는 모르는 사람들에게서까지 메시지들이 밀려왔는데 그 가운데 박은진의 메시지가 있었다.

솔직히 박은진에 대한 감정은 좀 복잡했다.

뽀송뽀송한 고등학생이 나 좋다고 따라다니는데 걔가 좀 예쁘다. 싫을 수가 없다. 게다가 고등학생 정도 되면 외모로는 성인과 크게 구분하기 힘들다. 심지어 박은진처럼 화장까지 하고 다니면 더더욱 그렇다.

다만 그 어린 녀석이 또 나름대로 꿈이 있다. 아이돌이라는 쉽지 않은 꿈인데 그걸 위해 정말 열심히 살아간다. 기특했고 응원해주고 싶은 마음이 들 수밖에 없다. 근데 그 여자 아이돌이라는 거, 연애랑은 완전 상극이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이 도덕적인 부분에서 너무 찝찝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보면 나는 박은진과 동갑내기다. 그런데 껍데기야 그렇다 치더라도 알맹이가 너무 서른넷이다. 도덕과 양심에 따라 거부감이 느껴질 수밖에 없다. 차라리 최근에도 종종 연락하고 지내는 고려일보의 지연이 쪽이 거부감이 덜하다.

그리고 그 모든 상황은 이제 둘 다 성인이 된 지금도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TV로 볼 때는 화장도 좀 더 진하고 의상도 노출이 좀 있었는데 이렇게 보니까 오래간만에 보는데도 여전히 솜털이 뽀송뽀송한 것이 그냥 나 좋다고 달려들던 동료의 어린 여동생을 보는 느낌이다.

“아니, 그냥. 나도 이전에는 너무 정신없이 바빴고. 지금은 일단 시간이 좀 생겨서 연락해봤지.”

“그거 안 좋은 소식 아니야? 일이 없어서 한가하다는 이야기잖아. 한참 바빠야 할 시기 아닌가?”

“뭐라는 거야. 학교 축제 기간도 다 끝났고 행사도 슬슬 비수기라서 그런 거거든? 그리고······.”

잠깐 망설이던 박은진이 이내 뭔가 결심한 것처럼 입을 열었다.

설마 또 고백인가?

“너 미국 간다는 소문이 있던데 그거 진짠가 궁금해서.”

하지만 다행히도 고백은 아니었다.

“뭐야, 무슨 스포츠 기자도 아니고. 갑자기 내 미국행은 왜?”

“그게 그러니까······. 그, 그래!! 우리 팀에 세희라고 마린스 팬이 있는데 걔가 그 마린스 우승을 꼭 보고 싶어 하는데. 네가 미국 가면 그게 힘들 수도 있으니까. 그래서 궁금해서 좀 알아봐 달라고 간곡하게 부탁을 하길래. 그래서 물어보는 거야.”

“그래? 넌 뭐 내가 미국 간다면 섭섭하지 않고?”

“나? 섭섭하지 않냐고? 그게 무슨 소리야. 나야 너 미국 가면 엄청 좋지. 아니, 너를 못 봐서 좋다는 게 아니고. 그냥 우리 피닉스도 올해 성적 한참 좋아서 슬슬 우승에 시동 걸고 있으니까. 솔직히 수원이 네가 너무 잘해서 그렇지 우리 신인 정병철도 솔직히 너 아니면 신인왕 무조건 타는 건데. 근데 수원이 너 진짜 미국 가는 거야?”

딱딱하게 굳은 얼굴로 거의 숨도 쉬지 않은 채 순식간에 몰아치듯 이야기를 쏟아내는 모습이 거의 무슨 래퍼였다. 순간 나도 모르게 너 혹시 팀에서 랩을 담당하냐고 물어볼 뻔했다.

“글쎄다. 자세한 건 나도 계약이 걸려 있어서 이야기하긴 힘들고. 근데 그 뭐 세희라고 그랬나? 그 친구한테는 걱정 안 해도 될 거라고 전해줘도 될 거야.”

순간 박은진의 딱딱하게 굳어있던 얼굴이 활짝 펴졌다.

참, 알기 쉬운 녀석이다. 이런 녀석이 TV에서는 냉미녀 컨셉이라니.

“역시, 미국 가는 건 아니었구나.”

“아니, 그 말이 아니라 우승이 꼭 보고 싶은 거라며. 어차피 우리 우승은 올해 할 거니까.”

이 녀석 또다시 표정이 딱딱하게 굳는다.

포커페이스에 재능 없는 건 마운드에 선 조창혁급이다.

“미국······. 갈 수도 있다는 거네.”

“뭐, 모른다는 거지. 근데 가긴 가야지. 너도 뉴스 봤으면 알잖아. 이번 올스타전에서 나 4홈런 친 거. 어쩌겠냐. 내가 KBO에서 놀기에는 너무 큰 인물인데.”

“그래······. 아, 아니!! 그래가 아니라. 너 너무 자만하다가 큰일난다. 미국에서 야구하는 게 어디 쉬운 줄 알아? 거기 땅이 얼마나 넓은데. 게다가 경기 숫자도 많고. 아직 몸도 다 완성이 안 됐는데 부상 입으면 어쩌려고. 그리고 너 거기 가면 말도 안 통할 텐데, 한국에서 준비 철저하게 하려면 1, 2년으로는 부족할 걸?”

“응, 나 영어 100점. 스페인어도 100점.”

“어디 고등학교 시험이랑 실전에서 대화가 똑같은 줄 알아?”

“응, 팀에 용병들이랑 자유롭게 대화 가능.”

시시껄렁한 대화가 이어졌다.

“진짜? 그 프로그램까지 섭외요청이 들어왔다고?”

“어.”

“그래서 약속은 잡았어?”

“아니, 시즌 중에 한참 바쁜데 방송을 어떻게 나가냐.”

“왜? 다른 선수들 보면 월요일 활용해서 잘 출연하던데.”

“그거야 슬슬 은퇴 다가온 선배들이 은퇴 이후 생각한다고 가끔 하는 거고. 난 시즌 중에는 힘들지.”

“그러면 시즌 끝나면? 나갈 거야?”

“상황 봐서. 왜? 너도 출연하고 싶어서?”

“어, 뭐 동창 찬스. 이런 걸로 나도 좀 꽂아줘봐.”

“은진이 너 연예계 일하더니 많이 뻔뻔해졌다? 그러다가 스캔들이라도 나면 어쩌려고?”

“어쩔 수 없지. 한참 일해야 하는 여자 아이돌이 스캔들 났으면 아이돌 은퇴하고 결혼 하는 거지. 그래도 뭐 너도 유명인이라서 부부예능 이런 거 출연하면 되니까 나쁘지는 않겠네.”

“응, 거절.”

그것은 분명 이성과 즐기는 데이트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보다는 예쁜 조카가 있다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싶은 시간에 더 가까웠을 것이다. 하지만 분명한 것은 박은진과 보낸 시간이 나쁘지 않은 시간······. 아니, 꽤 즐거운 시간이었다는 점이었다.

***

시간은 빠르게 흘러 어느새 7월 말.

마침내 한반도에서 계절적으로 가장 더운 시기가 찾아왔다.

“와, 날씨 진짜 미쳤네. 쪼유 오늘 몇 도래냐?”

“낮 최고 기온이 39.8도라는데요. 올해 가장 높은 기온이랍니다.”

“하하······. 하하하······.”

올해 들어 가장 더운 날씨.

그리고 대한민국에서 가장 더운 도시.

우리의 시즌 96번째 경기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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