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93화 (193/305)

193화. 올스타전(3)

마운드의 임광형이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저것 봐라?

그는 메이저리그에서도 놀라운 활약을 보이고 돌아온 진짜배기 에이스였다. 물론 이제 서른여섯의 나이가 나이인 만큼 전성기의 한창때의 기량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지만 재작년 토미존을 받았고 작년 성공적인 재활기간을 거쳤으며 그래도 현재는 전성기의 끄트머리, 팔꿈치의 통증을 참으며 던지던 시절보다는 오히려 더 괜찮은 컨디션이라고 자부했다.

물론 최수원은 쉬운 상대가 아니다.

아니, 그 정도를 넘어서 매우 어려운 상대다.

‘브라이스 하퍼. 아니, 전성기의 마이크 트라웃.’

임광형이 메이저에 도전했던 당시 마이크 트라웃은 이미 4번의 MVP 2위와 2번의 MVP를 달성한 메이저리그 최고의 타자였다. 그리고 마이크 트라웃은 마침내 2019년 커리어 세 번째 MVP를 수상하며 푸홀스의 아름다운 10년에 필적하는 위대한 커리어를 완성했다.

그리고 임광형은 그런 마이크 트라웃의 전성기를 직접 경험해봤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지금 타석에 들어오는 저 타자가 그 위대한 마이크 트라웃에 필적할만한 ‘가능성’이 있다는 것을.

사실 터무니 없는 일이다.

아직 메이저라고는 경험조차 해보지 못한 19살의 애송이가 27살 전성기의 마이크 트라웃을 연상케 하다니.

하지만 설혹 그렇다고 할지라도 그는 임광형이었다.

전성기의 마이크 트라웃과 13번을 상대하여 무려 4개의 삼진을 뽑아냈다. 만약 지금 저 타석에 선 것이 마이크 트라웃이라고 할지라도 예고 홈런과 같은 터무니 없는 짓거리는 불가능했으리라.

임광형이 와인드업했다.

호쾌한 폼.

그리고 그 폼에 어울리지 않는 구속.

121.5km/h의 체인지업이었다.

-딱!!

3루 내야 관중석 깊숙한 곳을 직격 하는 제법 큼지막한 파울.

놀랍게도 이게 타이밍을 완벽하게 뺏은 결과물이다. 방금도 배트를 휘두르는 시작 타이밍을 완벽하게 가져왔는데 중간에 무슨 마법을 부린 것인지 보통이라면 땅볼이나 내야 뜬공으로 이어졌을 공을 내야 관중석까지 날려버렸다. 기본적으로 힘도 좋고 배트를 돌리는 스킬 자체가 탁월한 덕분이다.

메이저 정상급 타자를 상대하는 마음으로.

입술이 바짝 말라왔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표정을 보이는 것은 하수다. 마운드의 투수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게 하는 것이야말로 피칭의 기본이다.

오늘 체인지업이 아주 좋았다. 공이 손끝에 쫙쫙 달라붙는 느낌이다. 변화도 좋고 제구는 더 좋다.

그리고 임광형은 알고 있었다.

좋은 공을 많이 던지는 것이 호투의 비결이라는 것을.

그렇기에 두 번째 공 역시 한 번 더 체인지업이었다.

단, 이번에는 아슬아슬하게 존 바깥 라인에 걸치게.

설사 구심이 스트라이크를 안 잡아준다고 해도 상관없는 수준으로.

최수원의 방망이가 멈춰섰다.

-뻐엉!!

“스트라잌!!”

볼카운트 0-2.

예고 홈런 퍼포먼스 직후에 삼진으로 물러나는 것만큼 부끄러운 것이 또 있을까? 모르겠다. 나중에 최수원에게 직접 물어보면 알 수 있겠지. 다만 확실한 것은 그렇기에 이제 최수원의 방망이는 적극적이 될 수밖에 없으리라는 점이었다.

세 번째.

유인구.

최수원의 방망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럴 수 있다. 방망이가 매우 적극적일 것이라는 생각에 조금 안일하게 들어간 공이었다.

네 번째.

또 유인구.

이번에는 거의 존에 털끝 하나 걸치는 수준의 공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최수원의 방망이가 또 움직이지 않았다.

다섯 번째.

또다시 유인구.

-뻐엉!!

0-2의 볼카운트가 순식간에 3-2 풀카운트까지 차올랐다.

임광형의 입술이 또다시 바싹 말랐다.

하지만 시간을 끌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 그대로 여섯 번째 공을 준비했다.

바깥 코스.

존에서 살짝 빠지는 체인지업.

그 역시 올스타전에서 첫 타자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지금 상황은 홈런을 예고한 타자와 볼넷을 피하고 싶은 투수의 배짱 싸움이다. 열아홉 애송이가 과연 지금 상황에서 방망이 한 번 휘두르지 않고 볼넷으로 출루하고 싶을까?

-딱!!!

최수원의 방망이가 그의 123.7km/h 체인지업을 두들겼다.

높게 뜬 타구가 날았다.

‘됐다.’

이건 먹힌 타구다.

임광형이 타구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쭉쭉 날아가는 타구를 향해 엘리츠의 라찬명이 이미 달리고 있었다. 앞선 타석에서는 비록 내야 뜬공 아웃으로 물러나긴 했지만, 타구를 판단하는 능력 하나 만큼은 한국 최고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중견수다.

평소 워낙에 탁월하게 타구를 판단했던 터라 수비를 설렁설렁하는 것처럼 보였던 그가 어울리지 않게 맹렬한 속도로 달렸다.

그래도 올스타전이라고 최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주려는 것일까?

담장까지 세 걸음.

그가 걸음을 멈췄다.

임광형이 봤을 때 그렇게까지 뻗을 것 같지 않았는데 이거 생각보다 멀리 나가는 타구였을까?

라찬명이 미간을 찌푸렸다.

“역시 이제는 대승적 결단밖에 답이 없나?”

그가 가진 대한민국 최고의 타구 판단 능력이 확신을 주었다.

여기서 굳이 더 뛰어갈 필요가 없겠노라고.

아직 떨어지지 않은 저 공은 이대로 잠실의 좌중간 깊숙한 담장을 슬쩍 넘어갈 테니까.

[너, 넘어갔습니다!!]

1:0

매우 깔끔한 선제 홈런포였다.

***

오늘 경기는 여러모로 매우 마음에 들었다.

일단 덕아웃에서 자동고의사구가 없다는 점은 물론이거니와 오타니룰이 적용됐다는 점이 특히 그랬다.

지금까지 시즌 경기였다면 내가 강판당하는 순간 우리 투수가 타석에 들어와야 하는 패널티가 생겼었다.

게다가 멀쩡한 야수가 하나 빠지고 내가 그 자리로 들어가던지, 아니면 내가 더이상 타자로 뛸 수 없었다. 하지만 오타니룰이 적용된 이번 올스타전에서는 내가 투수에서는 물러났지만, 지명타자 롤은 그대로 수행할 수 있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2회 말.

두 번째 이닝까지 마운드에 올라온 임광형이 깔끔하게 삼진으로 마지막 8번 타자를 잡아내며 2회 말 우리의 공격을 마무리 지었다.

“어휴, 광형 선배. 오늘 너무 힘주는데?”

“저 녀석이 예고 홈런 때렸잖아. 그 정도면 빡쳐서 힘줄 만하지.”

드림 올스타에 감독 추천으로 추가된 내야수.

돌핀스의 전직 홈런왕 박주원이 살짝 인상을 찌푸리고 나를 바라봤다. 인성 좋기로 유명한 선수이기는 했지만, 그래서 더 나의 예고 홈런이 마음에 안 들었을 것이다. 상대 선수에 대한 존중이 없었다. 뭐 그런 의미겠지.

이규만이 나 대신 박주원에게 답해주었다.

“주원아. 수원이한테 너무 뭐라 그러지 마라. 승진이가 올스타전은 원래 그런 화끈한 퍼포먼스 하는 거라고 하라고 했다잖냐.”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하여간 김승진 그 녀석도 사고를 치려면 혼자 칠 것이지. 괜히 신인한테 바람이나 불어 넣어서는.”

게다가 지금 덕아웃에 있는 내 편은 이규만뿐만이 아니었다. 이번 올스타전에 우리 마린스에서 무려 여덟명이나 출장한 상황.

이정훈이 은근슬쩍 끼어들었다.

“에이, 주원 선배님. 올스타전이잖습니까. 정규시즌 경기도 아니고. 광형 선배도 이 정도 퍼포먼스는 다 이해할 겁니다. 그 선배 메이저에서는 더한 놈들이랑도 게임 했잖습니까. 그것도 정규시즌 경기로.”

“그야 그렇지만······. 아무튼 수원이 너는 경기 끝나고 광형 선배랑 따로 이야기 잘 해라. 괜히 이런 거 감정 남으면 안 좋아.”

“네, 알겠습니다.”

“그리고 다음 타석부터는 어지간하면 그런 거 하지 말고.”

이정훈이 또 한 번 끼어들었다.

“근데 그러면 광형 선배가 오히려 더 짜증 나지 않을까요?”

“어?”

“그렇잖아요. 자기 차례에는 예고 홈런 하더니 다음 투수부터는 얌전하게 플레이하면 좀 자기만 무시 받는 느낌 아닐까요? 차라리 그냥 전 타석 다 홈런 예고하면 보는 관객들도 재밌고 광형 선배도 이 미친놈이 그냥 미친 퍼포먼스 준비했구나. 뭐 그렇게 넘어갈 것 같은데요.”

좀 미친 소리 같았는데, 이상하게 설득력이 있었다.

그리고 그 설득력을 느낀 것은 아무래도 나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강라온이 이정훈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하긴, 저기 광형 선배님이 최고참이잖아요. 최고참한테만 홈런 예고하고 그 뒤에는 안 하면 오히려 더 무시 받는 느낌일 것 같은데요.”

“그니까. 투수가 나한테는 예고 삼진 해놓고 수원이한테는 안하면 난 그게 더 기분 나쁠 것 같은데.”

“그런가?”

“그렇죠. 아무튼 오늘 올스타전 아닙니까. 그 정도 퍼포먼스는 다들 익스큐즈 할 겁니다.”

3회 초.

드림 올스타팀의 세 번째 투수. 그리핀즈의 에이스인 제프 캐일런이 2점짜리 홈런을 한 방 허용하며 점수는 다시 2:1.

[자, 3회 말. 2이닝을 소화한 임광형의 뒤를 이어 나눔 올스타의 마운드에 조창혁 선수가 올라옵니다.]

[참, 조창혁 선수도 실력에 비해서 올스타 투표 운이 따라주지를 않는 투수죠.]

학폭이는 그 학폭이라는 명성에 걸맞게 올스타전에 투표로 단 한 번도 뽑히지 못했다. 뭐 올해는 메이저 진출을 앞두고 예년에 비해서 투표수가 좀 많이 올라오긴 했는데 그러면 뭐하겠는가. 이미 메이저에서 혁혁한 성과를 거두고 돌아온 임광형이 앞에 떡 하니 버티고 서있는 것을. 아무튼 녀석은 벌써 감독 투표로만 네 번째 올스타전에 출장이다.

“스읍······. 아, 나 창혁 선배님 공은 좀 껄끄러운데.”

“쪼유, 아무리 입은 삐뚤어졌어도 말은 똑바로 해야지. 누가 들으면 창혁 선배 공만 껄끄러운 줄 알겠다.”

“아, 왜!! 나 광형 선배님 상대로는 안타도 두 개나 쳤다고.”

“내야 땅볼과 피닉스 환장의 수비 콜라보레이션을 안타라고 주장하는 너의 뻔뻔함을 보고 있자니 2할 4푼에 올스타 출장이 아주 잘 이해가 되는구나.”

쪼유가 입이 댓발 나온 채로 타석에 들어갔다.

올스타전 일주일 전부터 뭐, 그럴싸한 퍼포먼스라도 준비해야 하는 것 아니냐고 설레발을 치길래 넌 경기 중에 안타라도 하나 치는 게 최고의 퍼포먼스라고 해줬는데도 불구하고 가슴에 무슨 이상한 성벽 모양의 스티로폼을 붙인 것이 참 꼴보기 싫었다.

The Wall?

대체 누가 그딴 별명을 지어줬는지는 모르겠는데 아무튼 무슨 유명 드라마에 나오는 거대한 성벽처럼 든든한 수비를 보여준다나?

근데 웃긴 건 내가 인터넷을 찾아보니까 그 성벽 결국 작중에서 결정적인 순간에 뚫렸다. 나라면 불길해서 안 써먹을 별명인데 좋다고 쓰는 것이 참 쪼유답다.

-딱!!!

초구 타격.

그리고 자연스러운 내야 땅볼.

1루를 향해 달리던 녀석이 그대로 턴을 해서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아, 까비······. 뭐, 그래도 이벤트 전이니까. 차라리 이번에 세이브해놨다가 정규 경기에서 터트려야지.”

“멍청한 건 알았지만 역시 독립시행이 뭔지 모르는 구나.”

“어? 독립 뭐라고?”

“아니, 아니다. 어차피 저축하는 거. 정규시즌까지도 꾸준히 저축해서 이왕이면 포시 때 한 번 터트려보라고.”

“그럴까?”

한심하기 짝이 없는 멍청한 대화를 짧게 끝내고 타석으로 들어갔다.

묘하게 자주 만나서 그런가? 학폭이 녀석의 얼굴이 이제는 좀 정겹다.

익숙한 루틴대로 타석에 서서 오른손으로 방망이를 쥔 채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배트를 두 번 강하게 꾹 움켜 쥐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 잡았다. 물론 오늘 루틴은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아, 최수원 선수!! 또 다시!! 방망이로 전광판을 가리킵니다.]

예고 홈런.

학폭이 녀석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안그래도 정겹던 녀석의 얼굴이 한층 더 정겨워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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