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화. 올스타전(2)
채광민은 유쾌한 남자였다.
오랜 기간 동갑내기인 이규만에 가려 만년 2인자 소리를 듣고 있었지만, 사실 이 긴 시간 동안 2인자의 자리를 유지한다는 것도 충분히 대단한 일이었다. 조 디마지오가 같은 시기의 테드 윌리엄스를 넘어서지 못했다고 그 누가 조 디마지오를 위대하지 않다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채광민은 그 사실을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고 그렇기에 그는 유쾌한 남자였다.
그가 타석에서 진지하게 자세를 잡았다.
그리고 그 모습에 조유진이 울상을 지었으며 마운드 위에서 피칭을 준비하던 최수원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 선배님······.”
[하하, 매번 올스타전마다 다른 컨셉을 보여줬던 채광민 선수. 올해는 별거 없이 넘어가나 싶었는데 맙소사. 이런 걸 준비했네요. 최근 여기저기서 회자되고 있는 조유진 선수의 타격폼입니다.]
[어쩐지 유니폼에 등번호가 22번이라 조금 이상했는데 조유진 선수의 등번호였어요.]
심지어 조유진의 그것과는 완전히 같지도 않았다. 한층 더 과장되어 우스꽝스럽기 짝이 없다. 도저히 방망이를 휘두를 각이 나오지 않게 잔뜩 수그린 허리와 뒤로 쭉 빠진 엉덩이.
“아, 요즘 어떤 선수가 이걸로 성적이 워낙 괜찮길래 이번 기회에 나도 좀 배워보려고. 어때? 멋지지 않아?”
채광민이 능글맞게 웃었다.
“선배님, 저 아무리 그래도 그 정도로 숙이지는 않는데요······.”
“그거야 사람이 어? 오리지널이 있으면 그걸 그대로 받아오면 안 되지. 더 발전할 생각을 해야지. 안 그래?”
마운드의 최수원이 가볍게 호흡했다.
MLB의 올스타전이 다큐멘터리라면 KBO의 올스타전은 예능이다. 어쩔 수 없다.
MLB 역시 온라인 팬 투표를 통한 인기 투표의 경향이 강해지고 있긴 하다지만 거긴 올스타 자체가 거의 한국의 골든글러브급 명예다. 선수들 사이에도 정말 올해 성적이 좋은 선수가 나가야한다는 분위기가 팽배하다.
하지만 그 어쩔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는 이 예능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팬들이 보고 즐기는 축제라는 것에는 공감한다. 하지만 그는 최고의 선수들이 모인 축제의 장이 코스프레를 하고, 어설픈 플레이를 보여줘야만 팬들을 즐겁게 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평소에 한 팀에 모일 수 없는 최고의 선수들이 한 팀에 모였고, 그 상대들 역시 그러하다면 굳이 그런 우스꽝스러운 플레이가 아니더라도 얼마든지 야구를 즐기는 이들을 즐겁게 해줄 수 있지 않겠는가.
오직 1이닝.
오늘 최수원은 자신이 담당하기로 약속된 그 1이닝을 위하여 그는 경기 전 무려 60개에 가까운 공을 던졌다. 평소 선발로 설 때보다 1.5배 정도 많은 공이었다. 그리고 그렇기에 그의 몸은 충분 이상으로 풀린 상태였다.
-뻐엉!!!
그것은 채광민의 우스꽝스럽게 뒤로 쭉 뻗어있던 엉덩이가 바닥을 찧게 만들기 충분한 공이었다.
163.1km/h
워낙에 상체를 낮추고 있었기에 거의 코앞을 스쳐 지나가는 것 같은 공이었다.
[맙소사!! 초구 163.1km/h!! 최수원 선수!! 올스타전에서 초구로 본인의 최고 구속을 또 갱신합니다!!]
[그러니까 최수원 선수의 종전 기록이 162.9km/h였죠?]
[네, 맞습니다. 과거 두 차례 162.9km/h의 공을 던진 바가 있었습니다만 163을 넘긴 적은 없었는데. 오늘 올스타전에서 마침내 163의 벽을 깨트리네요. 올해 열아홉. 아직 성장도 끝나지 않은 어린 선수가 과연 어디까지 더 발전할 수 있을지. 너무 기대가 됩니다.]
“워워······. 야, 니 친구 화 났어? 뭐 이리 진지해?”
“그게 제 폼이 저 녀석이 잡아준 폼이거든요. 선배님이 그걸 조롱하시니까 화난 거 아닐까요?”
“그래? 친구라고 대신 화내주는거라 뭐 그거네? 귀엽네.”
채광민이 다시 자세를 잡았다.
조금 전과 거의 비슷했다. 하지만 조금 전의 그것이 조유진의 폼을 희화화 하기 위한 과장된 그것이었다면 이번에는 정말 조유진의 그것과 매우 흡사한 자세였다.
“선배님, 아무리 봐도 우리 수원이는 엄청 진지한데요.”
“나도 진지해.”
마운드의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뒤를 생각하지 않는 부드럽게 풀어진 어깨가 매우 탄력적으로 움직인다.
163km/h의 강속구.
채광민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딱!!
마운드의 최수원이 KBO 역사에 없던 천재라면 채광민 역시 천재 소리는 귀에 못이 박히게 들어가며 무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경험을 쌓아온 KBO의 레전드다.
동갑내기인 이규만이 이번 시즌 은퇴를 앞두고 노쇠화가 역력한 것에 비해 아직 자신의 기량을 상당 부분 유지 중인 그는 조유진의 그 우스꽝스러운 자세가 무슨 목적을 갖고 어떠한 원리로 움직이는지를 완벽하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것은 사실 공을 치자마자 1루로 무턱대고 달리려는 조유진의 본능을 억제하려는 자세임과 동시에 그럼에도 1루까지 매우 빠르게 달려나갈 수 있는 효율성을 챙긴 자세였다.
그런데 여기서 작은 문제는 조유진은 좌타자인데 반면해서 채광민은 우타자라는 점이었다. 타격의 순간 그의 머리가 3루 쪽으로 빠르게 돌아갔다.
‘큭.’
몇 번 연습할 때는 제대로 됐었다.
하지만 163짜리 강속구는 과연 다르기는 달랐다. 타고난 재능으로 공에 방망이를 가져다 대는 데까지는 성공했지만, 이 미친 자세. 방망이에 힘이 실리지 않는다. 대체 조유진 저 녀석은 어떻게 이런 자세로 끝까지 방망이를 잡아당긴 것일까?
타구가 힘없이 굴렀다.
삼루 쪽으로 억지로 돌아간 몸을 되돌려 1루를 향해 달려보려 했지만, 터무니없이 늦다. 오늘 드림 올스타팀의 1루수로 출장한 이규만이 느리게 달려 나와 타구를 잡아냈다. 그리고 1루 커버를 나온 최수원에게 송구.
-뻐엉!!
“아웃!!”
깔끔한 내야 땅볼아웃.
“규만아 니네 신입. 올스타전인데 너무 힘주는 거 아니냐?”
“힘준 게 아니라 그냥 평소처럼 했는데 네가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나간 거겠지.”
“추풍 뭐?”
“어휴, 됐다. 가서 수비나 준비해라. 오늘 수원이 하는 거 보니까 1회 초에 타자 출루 시킬 생각 없어 보인다.”
“아······. 이벤트 전인데 재미가 없네. 재미가.”
채광민이 투덜거리며 덕아웃으로 물러났다.
그리고 2번 타자 엘리츠의 라찬명이 타석에 올라왔다. 올해 나이 35세에 커리어 평균 wRC+가 137. 작년 FA를 앞두고 153의 wRC+를 찍었고 올해 지금까지 무려 147의 wRC+를 유지 중인 중견수다. 중견수의 평균 wRC+를 100으로 본다는 점에서 리그 평균 중견수보다 47%의 득점생산성을 갖는 괴물이다. 물론 마운드에 선 투수가 wRC+가 301인 괴물이라는 점에서는 147의 wRC+도 ‘고작’이라는 말이 어울리는 상황이 되버린다.
“니 친구 오늘 어지간히 기합이 빡 들어갔네?”
“네.”
“그래, 뭐 올스타전이라고 다들 대충 하라는 법은 없지. 신인이 너무 풀어져 있어도 보기 안 좋고. 게다가 오늘 여기 모인 사람 절반 이상이 네 친구가 진짜 메이저리거 감인지 보러 온 거니까. 제대로 한 번 보여줘야지.”
“하하······.”
“근데 말이다.”
라찬명이 마운드의 최수원을 한 번 강하게 노려봤다.
“내가 메이저 한 번 가봤는데 그게 쉬운 게 아니더라고.”
KBO에서 데뷔 이후 9년 평균 wRC+ 131이 넘어가던 라찬명은 메이저에서 3시즌 평균 wRC+ 87을 기록했다. 심지어 3년 차에는 시즌의 절반을 마이너에서 보내기까지 했다.
메이저?
그래, 뭐 빠따는 인정한다. 하지만 메이저에서 성공하는 투수가 되기에 단순히 163짜리 공을 던지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라찬명은 오늘 그것을 똑똑히 알려줄 생각이었다.
뭐, KBO 올스타전 앞두고 스포츠 섹션은 물론이거니와 포털 메인페이지까지 온통 최수원의 MLB 도전에 관한 글들이 가득한 것도 좀 배알이 꿇리긴 했으니까.
“남의 잔치 음식에 모래 뿌리는 것도 아니고 말이야.”
초구.
162.8km/h의 강속구가 몸쪽 깊숙한 코스를 꿰뚫었다.
-부웅!!
“스트라잌!!”
그가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물러났다.
‘뭐지?’
그가 최수원을 마지막으로 상대한 것은 두 달 전. 이후로는 대진운이 맞지 않았다. 구속이 좀 올라간 것까지는 알겠다. 근데 이거 구위가 그가 기억하던 구위가 아니다.
생각할 수 있는 시간은 짧았다.
그가 다시 타석에 섰다.
두 번째.
-딱!!!
많은 사람이 라찬명을 게으른 천재라 부른다. 물론 그는 게으른 천재가 아니었다. 프로에서 이만한 성적을 기록하는데 ‘노력’이 포함되지 않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그 노력과 별개로 그는 ‘천재’의 범주에 속하는 이가 맞다.
최수원과 똑같은 것은 아니었지만 그 역시 본능적으로 공의 궤적을 추적하는 능력이 출중했다. 그렇기에 고작 하나의 공을 타석에서 직접 보는 것만으로 최수원이 던지는 속구의 궤적을 머릿속에서 수정할 수 있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방망이가 터무니없이 밀렸다.
높게 떠오른 타구가 힘없이 의 글러브에 쏙 들어갔다.
내야 뜬공 아웃.
그 타구를 잠깐 바라보던 그가 조유진을 돌아보며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마린스의 대승적 결단을 기대하마.”
“네?”
수원이 이어지는 3번 타자를 상대로 5구째 떨어지는 공으로 삼진을 잡아냈다.
삼자 범퇴.
잠실을 가득 메운 관중들의 아낌없는 박수 속에서 드림 올스타의 공격 차례가 돌아왔다.
***
[자, 1회 말 드림 올스타의 공격. 선두 타자로는 바로 직전까지 마운드에 섰던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마운드에서 163킬로짜리 공을 뻥뻥 던지던 투수가 곧바로 타석에 들어온다. 진짜 투타겸업. 야구의 로망이 아닐 수가 없네요.]
[맞습니다. 아마 오늘 드림 올스타팀의 감독인 강상구 감독도 그걸 생각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1회 말 우리의 첫 번째 공격.
나눔 올스타의 포수인 블레이즈의 김승진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야, 좀 살살 하자. 이벤트 전이잖냐. 너 그러다가 다치면 너만 손해야.”
“규만 선배님이 아무리 이벤트 전이라고 그래도 신인이 설렁설렁 뛰면 욕먹는다고 하셔서요. 그래서 이왕 할 거면 이 악물고 자동차 타보려고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어? 이벤트 전인데 팬서비스도 좀 하고 그래야지. 오늘 경기 결과가 뭐 등수에 영향 주는 것도 아니고. 경기 보러 온 사람들도 웃고 즐기게 해줘야지. 안 그래?”
“그런가요? 그러면 저도 퍼포먼스 좀 해도 괜찮겠습니까?”
“당연하지. 올스타전은 원래 그러라고 있는 건데.”
그가 흔쾌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너무 건방지다고 그러지 않을까요?”
“야, 건방지긴 뭐가 건방지냐. 올스타전에서. 다들 뭘 해도 그냥 웃고 넘기는 경기인데. 혹시 누가 뭐라고 하면 어? 내가 하라고 했다고 그래. 알겠어?”
“네, 감사합니다. 선배님.”
솔직히 그냥 최선을 다해서 최고의 성적을 낼 생각이었다.
오늘 올스타전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할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이렇게 김승진이 나를 밀어주는데 또 응답하지 않으면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타석에서 내 루틴을 그대로 실행한 다음 방망이를 들어 저 외야의 중앙 한복판에 있는 거대한 전광판을 가리켰다.
[······. 지금 최수원 선수 저거 설마?]
[하하······. 올스타전. 올스타전 아닙니까. 하여간 젊은 선수다운 아주 힘찬 패기로군요.]
올스타전.
아무도 고의 사구를 하지 않을 이벤트 경기.
나는 오늘 올스타전 최초 4연타석 홈런을 쳐보기로 결정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