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화. 선두(13)
[아, 브레이브스의 덕아웃 움직이지 않습니다.]
[사실 여기서 자동 고의 사구는 쉽게 하기 힘든 선택이긴 합니다.]
[맞습니다. 6회 말. 5:5 동점 상황에서 밀어내기 고의 사구는 아무리 타석에 선 타자가 최수원이라고 해도······. 아니, 사실 타자가 최수원 정도 되니까 이게 선택이라는 단어가 사용될 수 있는 영역이긴 하네요.]
오래간만의 기회였다.
솔직히 야구라는 것이 좀 그렇다.
축구나 농구 미식축구 같은 종목들은 내가 월등하게 잘하면 서너명이 들러붙더라도 가끔 그걸 뚫고 압도적인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가 있다. 설사 그게 아니더라도 나한테 서너 명이 붙는 것 자체로 전력의 균형이 완벽히 무너지면서 매우 수월한 승리를 가져올 수 있게 된다.
반면 야구는 그런 타자가 있으면 매우 간단한 해결 방법이 있다. 그냥 볼넷을 내주면 된다. 물론 무조건적인 출루라는 것은 승부에 매우 지대한 영향을 끼치기는 하겠지만, 그래도 다른 종목들처럼 그 정도 영향력을 끼칠 수는 없다.
하지만 그럼에도 야구 역시 피할 수 없는 순간이라는 것은 존재할 수밖에 없었으니 지금이 바로 거기에 가장 가까운 순간일 것이다.
타석에 서서 익숙한 루틴대로 왼손으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탁탁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오른손으로 배트를 두 번 강하게 꾹 쥐고 홈플레이트를 한번 톡 두들긴 뒤 자세를 바로 잡았다.
마운드에 선 조창혁의 얼굴에 약간의 똘끼가 느껴졌다. 다시 봐도 성격 진짜 더럽게 생겼다.
초구.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뻐엉!!!
158.7km/h의 빠른 공이 과장 아주 조금 보태서 눈앞을 스쳐갔다.
마운드의 녀석이 재수 없게 웃는다. 그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나도 모르게 어느 만화의 명대사가 튀어나왔다.
‘멍게 선배님 보고 계십니까? 여기 당신을 능가하는 뛰어난 인재가 여기 있습니다.’
저 새끼 최근 인터뷰는 물론이거니와 미래에 미국으로 건너가서도 하는 인터뷰마다 학창 시절에 후배 빠따로 친 거 오해라고 우기는데 장담한다. 무조건 쳤다. 그것도 한두 번 치고 끝낸 게 아니라 주기적으로 꾸준히 쳤다.
당연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0.
“어차피 밀어내기 볼넷 할 거면 자동으로 하시지. 뭣하러 경기 루즈해지게 공을 네 개나 던지신담······.”
약간의 도발.
물론 당연히 학폭이가 독순술이라도 익혀서 내 입술 모양을 읽으라는 의미는 아니었고 뒤에서 공을 받는 포수를 향한 도발이었다.
“왜? 너는 몸쪽 높은 코스 빵빵 던져도 괜찮고, 그런 공 직접 상대하니까 기분 엿 같아?”
쉽다.
너무 쉽게 도발에 넘어온다.
“에이, 저랑 창혁 선배랑 어디 같나요. 전 삼진 잡으려고 좀 적극적으로 승부하는 거고, 창혁 선배님은 나한테 두들겨 맞을까봐 여기저기 존에서 빠지는 공만 던지시는 거잖아요. 그럴 거면 차라리 바깥쪽으로 안전하게 던지셔야지 혹시라도 이런 공 던지다가 삐끗해서 제 몸에 공 맞으면 정말 위험하니까요.”
“그건 뭔 내로남불이냐? 너도 우리 희성 선배 몸에 공 맞출 뻔 한 거 벌써 잊었냐? 네 몸에 공 맞는 건 위험한 일이고, 희성 선배가 맞는 건 괜찮다는 거야? 네 몸은 무슨 금테라도 둘렀냐?”
“아니, 금테 두른 건 아니고요. 아직 시즌 경기 많이 남았고 브레이브스랑 우리랑 맞대결도 많은데 제가 각 잡고 던지면 163까지 던지 거든요. 그러니까 아주 위험하잖아요.”
“······.”
가벼운 트래쉬 토크로 멘탈을 다스리고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몸쪽 깊숙한 코스 직후 이어지는 바깥쪽 코스.
-뻐엉!!!
역시 바깥으로 빠지는 슬라이더다.
앞서 나에게 삼진을 끌어낸 공이었는데 슬슬 좀 눈에 들어온다. 물론 여전히 다른 선수들이 던지는 슬라이더처럼 딱 보는 순간 슬라이더라는 것을 알아채긴 힘들다.
터널링이 길고 구속이 전체적으로 좀 빨라서 그런 것 같기는 한데, 아무튼 학폭이가 던지는 느낌이 뭔가 슈웅하는 느낌이면 속구고 부웅 하는 느낌이면 슬라이더다.
세 번째.
이번에도 역시 부웅 하는 느낌이다.
방망이를 멈췄다.
-뻐엉!!
“스트라잌!!”
[158.1km/h의 속구!! 최수원 선수가 방망이를 멈춰 세웠습니다만 존 안에 들어오는 공이었습니다.]
스읍······.
분명 부웅 하는 느낌이었는데 속구다. 하지만 그렇다고 내 감각을 의심하거나 되짚어보지는 않았다. 원숭이도 나무에서 떨어질 때가 있는 법이고 나도 그냥 틀릴 때가 있는 법이다.
[자, 이걸로 이제 볼카운트는 2-1. 조창혁 선수 입장에서 최고의 결과는 역시 병살을 끌어내는 걸 텐데요. 하지만 놀랍게도 이번 시즌 최수원 선수 병살이 지금까지 0개입니다.]
[아, 그러고 보니 그렇네요. 워낙에 다른 기록들이 인상적이라서 상대적으로 눈에 띄지 않았는데 이 선수 병살이 하나도 없네요.]
[네, 보통 병살은 안타가 많은 선수에게는 일종의 숙명과도 같은 부분입니다. 열심히 치다 보면 나올 수밖에 없어요. 근데 최수원 선수는 지금까지 무려 58개의 안타를 치는 동안 병살이 0개입니다. 사실 그도 그럴 것이 이 선수 안타 58개 중에서 홈런이 27개. 2루타랑 3루타가 14개입니다. 단타가 17개 밖에 안 되는 선수예요. 게다가 타구질도 정말 미쳤습니다. GD/FB가 0.48에 LD%가 26.7%. 심지어 본인 발도 빠르고, 선행주자도 이정훈 아니면 강라온. 혹은 조유진으로 굉장히 빠른 주자들이거든요. 이래서야 어지간하면 병살이 나오기 힘들죠.]
[하하, 우리 박동식 위원님이 살짝 텐션이 올라가셨는데요. 쉽게 풀어 말하자면 뜬공에 비해 땅볼이 절반이 채 안 되고, 직선타가 전체의 1/4이다. 뭐 그런 이야기입니다. 자, 아무튼 과연 조창혁 선수는 오늘 그런 최수원 선수에게 첫 병살타를 뽑아낼 수 있을지. 기대가 되는 순간입니다. 자 말씀 드리는 순간 제 4구!!]
네 번째.
이번에는 몸쪽 깊숙한 코스.
빠지는 공이다.
-뻐엉!!!
“스트라잌!!!”
158.3km/h의 속구.
심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볼카운트 2-2.
아니, 근데 이걸 잡아준다고?
마운드의 조창혁이 비릿하게 웃었다.
“뭐야? 공 구경하다 들어갈 거면서 그렇게 입 털어 댔던 거야? 왜? 공이 너무 빨라서 어려워? 변화구 하나 줄까? 변화구?”
조금 짜증이 났다.
다시 헬멧을 고쳐 쓰고 머리를 두 번 두들겼다. 그리고 방망이를 두 번 세게 쥐었다.
“변화구 좋죠. 변화구 주시면 보답으로 제가 장외홈런 보여 드리겠습니다.”
“지랄.”
“에이, 기분이다. 속구 주셔도 보답으로 장외홈런 보여 드릴게요.”
“개소리한다. 어디 해볼 수 있으면 해보던가.”
문득 좋은 생각이 하나 났다.
그대로 방망이를 쥐고 마치 준비 자세에 이어지는 것처럼 그 끝을 저 담장 너머로 내밀었다.
예고 홈런.
투수를 상대로 할 수 있는 세상 모든 도발 가운데 가장 강력한 도발이었다.
[어? 최수원 선수 루틴에 약간 변화가 있는 것 같은데요?]
“뭐지? 이 새끼 이거 완전 미친 놈인가?”
“아뇨, 타석에서 방망이 너무 안 휘둘렀더니 몸이 좀 뻐근해서요.”
다만 조창혁은 그 표정에 변함이 없었다.
이거 아무래도 나의 예고홈런을 알아먹지 못한 것 같았다.
다섯 번째.
분명 KBO를 기준으로 학폭이는 대범한 투수다.
0-2에서도 종종 유인구 대신 복판에다가 공을 찔러 넣는다.
-뻐엉!!
근데 그거야 KBO의 이야기고.
MLB에서 뛰던 조창혁은 그렇게 대범한 투수가 아니었다. 녀석이 여기서 그런 배짱 투구를 할 수 있었던 건 마음이 단단해서라기보다는 그냥 그래도 통하니까 그랬던 거다. 그러니까 던지면 쳐맞을 것 같은 상황에서까지 그렇게 단단한 마음으로 공을 던질 수는 없다.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3-2
풀카운트.
“제가 특별히 장외홈런 보여드리려고 했는데, 이건 너무 빠지는 공인데요?”
“지랄.”
“아까도 그러시더니. 욕이 같네요. 어휘력이 너무 빈약하신 거 아닙니까?”
어깨를 한번 으쓱하고 헬멧을 다시 고쳐 썼다.
그리고 조금 전 그대로 다시 담장을 향해 방망이를 치켜 들었다.
“너 이 새끼가 진짜?”
“뻐근해서요. 뻐근해서.”
마침내 그 의미를 알아 들은 것일까?
마운드에 선 조창혁의 입가가 부르르 떨리는 것이 느껴졌다.
여섯 번째.
살짝 빠지는 공.
-딱!!
타구가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3-2.
집중했다.
오늘 컨디션이 썩 좋지 않았고 그건 등판이 하루 뒤로 밀린 탓에 몸의 리듬이 깨진 탓이니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야구란 본래 그런 스포츠다.
사나흘에 한 번 올라와서 모든 것을 쏟아붓는 농구, 축구, 미식축구 같은 스포츠와는 다르다. 매일매일 항상성을 유지하고 좋을 때는 좋은 대로, 나쁠 때는 나쁜 대로 성적을 만드는 것이 에브리데이 스포츠인 야구의 본질이다.
일곱 번째.
이번에도 나의 준비 자세는 변하지 않았다.
등 뒤의 포수가 뭐라뭐라 떠들었다.
이쯤되니까 관중들 역시 무언가를 느낀 것일까?
격렬하게 나를 응원하던 응원석이 술렁였다. 힘있게 움직이는 치어리더들의 동작은 여전히 절도 있었지만 경기장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얼굴은 알 수 없는 딱딱함이 감돌았다.
그리고 마운드의 조창혁이 크게 와인드업했다.
집중했다.
더욱 더 집중했다.
솔직히 여기서 이렇게까지 하고 삼진으로 물러나면 개쪽도 그런 개쪽이 없다.
내 눈에 그의 동작들이 똑똑히 들어왔다.
머리 뒤로 빠져있던 손이 한순간에 튀어나왔다.
박자가 느껴졌다.
공이 날아들었다.
존의 복판이었다.
하지만 알 수 있었다. 이건 -부우웅이다.
그러니 공이 향할 최종적인 궤적은 존의 복판이 아니었다.
그래, 스트라이크인 척하는 변화구.
슬라이더였다.
다만 그 목적지가 조금 달랐다.
지금까지는 꾸준히 존의 바깥쪽 공인 척 나를 속이던 슬라이더가 복판에서 존 바깥으로 살짝 빠져나가는 궤적을 그렸다.
방심일까? 아니면 내 예고 홈런에 빡쳐서 손에서 공이 조금 빠진 것일까?
상관없었다.
긴 터널링.
그리고 변화가 시작된 슬라이더가 바깥쪽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방망이를 휘둘렀다.
공이 더 멀리 달아나기 전에.
내가 치기 아직 좋은 위치에 있을 때.
그리하여 작은 테이크백 이후 내려친 방망이가 나의 몸보다 한참 앞선 곳에서 야구공을 두들겼다.
-딱!!!!
강력한 반발력.
하지만 그 이상으로 강력하게 전진하는 나의 몸은 그 공을 끝까지 잡아당겼다.
좌중간.
내가 방망이를 내밀었던 그 위치 그대로.
아주 잘 맞은 타구가 아주 적절한 각도로 솟구쳤다.
잠깐의 정적.
팔로 스윙 자세 그대로 방망이를 툭 내던졌다.
그리고 천천히 1루를 향해 달렸다.
-우아아아아아아아아!!!
담장을 향해 달리던 외야수들이 걸음을 멈췄다.
등을 돌려 타구를 바라보는 조창혁의 고개가 떨어지지 않았다.
[최수원 쳤습니다!! 하늘 높게!! 왼쪽!! 넘어갑니다!! 만루 홈런!! 최수원의 만루 홈런입니다!! 최수원 선수가 시즌 28호 홈런포를 쏘아 올렸습니다.]
[와, 이건 뭐 맞는 순간 바로 알 수밖에 없었어요. 대형홈런입니다. 아, 잠깐만요. 이거 설마 장외로 넘어간 건가요?]
[네, 그런 것 같은데요? 아, 맞네요. 장외로 넘어갔습니다. 최수원의 만루 장외홈런!! 그러니까 사직구장 역대······ 다섯 번째, 다섯 번째 장외홈런입니다!!]
[6회 말. 점수는 이제 9:5. 최수원이 무려 넉 점을 추가하며 마린스가 경기를 크게 앞서 나갑니다!!]
“이 미친 새끼!!”
내야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는데 나보다 한 발 먼저 홈플레이트를 밟았던 이정훈이 나의 헬멧을 강하게 두들겼다.
“아, 선배. 머리 울려요.”
“새끼. 진짜 돌았네. 너 방금 그거 였지.”
“뭐가요?”
“아, 방금 그거 너 예고홈런이었잖아.”
“들켰습니까?”
“이 미친 새끼. 야, 너 ‘들켰습니까?’가 아니라 끝까지 부인해라. 한 10년, 아니 20년 뒤에 토크쇼에서 충격 고백용으로 써먹고. 지금은 끝까지 아니라고 하라고. 알겠냐?”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뭐, 나도 솔직히 그럴 생각이었다. 아무리 그래도 1년차가 예고홈런까지 갈기는 건 선을 넘어도 너무 쎄게 넘는 거였으니까.
“아, 맞다. 근데 수원이 너 그거 아냐?”
“뭐가요?”
“너 이전에 사직 구장에서 장외 홈런 쳤던 거 규만 선배인 거.”
저 멀리 대기타석으로 걸어 올라오는 규만 선배의 얼굴이 참으로 복잡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 복잡한 감정 가운데 가장 큰 지분은 기쁨이라는 점이었다.
[마린스 선두 탈환!!]
15년 만의 일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