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88화 (188/305)

188화. 선두(11)

슬라이드 스텝.

그러니까 사실 이 퀵모션이라는 거 직접 공을 던지는 입장에서 상당히 어렵다.

‘공짜 점심은 없다.’

누구 한 말인지는 사실 잘 모르겠지만 아무튼 유명한 말이다. 모든 일에는 댓가가 따른다는 뜻이다.

퀵모션 역시 마찬가지다.

투수가 주자의 박자를 뺏는다는 것은 곧 자신이 본래 가져가던 박자 그대로 던지지 못한다는 말과도 일치한다.

피칭은 마치 작은 톱니바퀴들이 섬세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것처럼 매우 정교한 작업이다. 그리고 퀵모션으로 공을 뿌리는 것은 어딘가에서 그것을 강제로 생략, 혹은 빠르게 돌려버리는 일이나 다름없다.

슬라이드 스텝은 리프팅 동작을 간략화하고 바로 스트라이드를 가져간다. 당연히 하체와 상체의 타이밍은 어긋나고 리프팅 동작이 제대로 이뤄졌다면 앞에 나와 있어야 할 팔이 아직 뒤에 남아있게 된다. 때문에 상체가 서둘러 전방으로 나가게 되는 러싱 현상이 발생하는데 이 과정에서 평소보다 늦은 타이밍에 낮은 각도로 위치에 도달하게 된다.

당연히 구위, 제구, 구속 등에 영향을 준다.

그것도 매우 부정적인 방향으로.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창혁의 공은 통했다. 그 이유는 크게 세 가지로 볼 수 있었는데 그렇게 부정적인 영향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던지는 공들은 여전히 KBO를 기준으로는 최고 수준의 구위와 구속이라는 점. 그리고 조창혁이 그 러싱 현상을 상당히 잘 제어하고 있다는 점.  마지막으로 슬라이드 스텝에서 나오는 공의 타이밍이 상당히 까다롭다는 점 때문일 것이다.

특히 마지막 부분은 확실히 보고 배울만했다.

투수는 단순히 빠르고 강한 공을 정확하게 던지는 직업이 아니다. 타격은 타이밍이며, 피칭은 그 타이밍을 뺏는 작업이다. 그런 의미에서 봤을 때, 조금 더 느리고 부정확하며 약한 공일지라도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뺏을 수 있다면 그것으로 충분하다.

그리고 분명 노형욱은 퀵모션으로 바뀐 조창혁의 타이밍에 쉽게 적응하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다섯 번째.

-딱!!!

1루 내야 관중석 깊숙한 곳을 때려내는 거대한 파울. 노형욱의 배트가 조창혁의 공을 점점 따라잡는다.

그는 분명 타격에 재능이 있는 타자였다.

몇 차례 슬라이드 스텝이 이어지는 동안 그 타이밍을 몸으로 익혀나간다.

그리고 여섯 번째.

퀵모션으로 던진 공이 항상 좋을 수는 없었고 슬라이더가 조금 밋밋하게 형성됐다. 안그래도 슬슬 퀵모션의 타이밍에 적응하고 있던 노형욱에게는 너무 반가운 일이었다.

-딱!!

그리고 노형욱의 방망이는 그런 밋밋한 변화구를 놓치지 않았다. 그의 방망이가 그대로 조창혁의 공을 잡아당겼다.

높게 뜬 타구가 내야를 크게 벗어났다. 거의 워닝 트랙에 가까운 곳까지 날아가는 타구였다. 중견수인 강호창이 공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저건 진짜 이주혁 정도 되는 발이 아니면 애초에 따라잡을 수 없는 타구였다. 타구가 담장의 하단을 직격했다.

이미 나는 2루를 지나 3루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등 뒤의 상황은 보이지 않았다.

[강호창 몹시 깔끔한 커버!! 튕겨 나온 공을 정확하게 잡아냈습니다.]

하나, 둘, 셋.

슬라이딩.

만약 타구 커버가 조금 미숙하거나 에러가 나왔다면 홈까지도 갈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코치의 반응을 보니 그건 이미 물 건너간 상황.

깔끔하게 3루 베이스를 밟았다.

-뻐엉!!

“세이프!!”

그리고 약 1초 정도의 시간을 두고 들어오는 긴 송구.

확실히 특출나지는 않지만 깔끔하고 탄탄했다. 시즌 초반에 이주혁이 에러를 할 때마다 욕을 바가지로 먹은 것이 이해되는 수비다. 물론 그렇다고 이게 KBO 정상급을 노릴만한 수비인가를 묻는다면 또 그건 아니다. 아마 이주혁 코인이 맥시멈으로 터졌다면 방금과 같은 상황에서 미친 질주로 그냥 외야 플라이를 만들지 않았을까?

노아웃에 주자 1, 3루.

이규만이 타석에 들어왔다.

-딱!!

초구 타격.

타구가 1, 2루 간으로 뻗어나간다. 타구의 속도는 그리 빠르지 않았다.

홈까지 그리 멀지 않은 거리.

내가 그대로 홈을 향해 내달렸다.

만약 우리 강라온이었다면 아마 대쉬로 공을 받아 홈으로 공을 던지는 과감한 수비를 보여줬을지 모른다. 하지만 오늘 브레이브스의 2루수인 신희성은 내외야를 모두 안정적으로 볼 수 있는 견실한 수비수였지만 미친듯한 파인플레이가 가능한 수비수는 아니었다.

신희성이 느리게 날아오는 타구를 글러브로 받아냈을 때, 이미 나의 몸은 거의 홈에 근접해 있었다. 그 상황에서 신희성이 선택한 것은 안전한 2루 송구.

브레이브스의 유격수인 찬민이형이 그 공을 받아 1루에 다시 송구했다.

더블 아웃.

하지만 그 대신 우리는 1점을 추가하는 데 성공했다.

[3회 말 마린스가 1점을 추가하며 다시 5:4로 브레이브스를 앞서 나가기 시작합니다.]

[깔끔한 더블 플레이기는 했습니다만, 아 조금 아쉽네요. 오늘 경기 상당히 박빙으로 흘러가고 있는데 여기서는 조금 더 적극적으로 점수를 내주지 않는 시도를 해봤으면 어땠을까 싶습니다. 사실 이규만 선수의 느린 발을 생각하면 4-2-3도 충분히 노려볼 만했거든요.]

[글쎄요, 그렇다기에는 최수원 선수의 스타트도 너무 훌륭했고 속도도 굉장히 빨랐거든요. 아무튼지간에 최수원 선수 이번 시리즈에서 자신의 발이 매우 강력한 무기라는 것을 아주 강하게 어필하고 있습니다.]

[네, 아무래도 이렇게 되면 앞에 선행 주자가 없는 상황에서 최수원 선수에게 볼넷을 주는 것이 점점 더 부담될 수밖에 없긴 하죠.]

***

이번 시즌 여러 선수들. 특히 최수원에게 매우 강력하게 묻히는 감이 있었지만 백하민은 자신의 몫을 기대 그 이상으로 톡톡히 해내고 있었다.

아무리 8억 5천만원짜리 계약금의 대형 신인이라고 해도 그는 올해로 고작 2년 차. 작년에는 선발이 아닌 불펜으로 뛰었던 유망주에 불과했다. 그런 그가 팀의 안정적인 4선발 역할을 해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 대단한 일이었다.

그리고 또 한 가지.

구단 프런트 입장에서는 백하민이 너무나도 예뻐 보일 수밖에 없는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하민이 유니폼 또 다 나갔답니다.”

최수원이야 워낙에 센세이셔널한 활약을 보였으니 그 유니폼이 미친 듯이 팔려 나가는 것은 당연했다. 심지어 다른 구단의 팬들조차도 얘는 어차피 나중에 메이저 나갈 꺼고 거기서도 성공할 거니까 데뷔 년 데뷔 팀 저지 사두는 건 나름 의미있는 일이라고까지 이야기 하곤 했다.

반면 백하민은 좋은 성적을 거두고 있기는 했지만 딱히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4선발이라기에는 확실히 쏠쏠했지만 그렇다고 탑급 토종 선발이라고 할 수 있느냐면 거기까진 아직 좀 먼 것 같은 그런 성적이다.

그럼에도 그의 유니폼 판매량은 현재 팀에서 2위.

심지어 올해로 은퇴하는 미스터 마린스 이규만보다 근소하게 앞서고 있었으니 그 이유가 저 빛나는 외모 덕분이라는 것을 부정할 수 있는 이는 없었다.

실제로 최근 사직구장에는 여성 관객이 상당히 늘었는데 특히 백하민이 등판하는 날에는 유의미할 정도로 성비에서 차이를 보였고 인터넷 기사의 댓글 역시 그러했다.

7월의 더운 날씨.

바로 어제 비가 왔고 오늘도 구름이 잔뜩 끼었음에도 선선하기는커녕 습기를 한껏 머금은 꿉꿉한 기온 속에서 백하민이 마운드 위에 올라왔다.

학창 시절 백하민은 주인공이었다.

천남고라는 적당한 지역 강팀 에이스로써 경하고라는 압도적인 ‘악의 축’을 상대로 고군분투하는 스토리는 분명 매력적인 스토리였다.

말년에 최수원이라는 괴물이 나타나긴 했지만 그럼에도 마지막 전국대회인 청룡기에서 우승을 차지한 것은 백하민이었다.

드래프트 전체 1번.

그리고 1년 차에 프로 1군 데뷔.

매우 순조로운 출발이었다.

하지만 작년 한 해 동안 경기를 치르면서 알게 됐다.

이 프로판에서 뛰는 선수들이라면 누구나 자신이 주인공이 스토리 하나 둘 정도씩은 가지고 있는 선수들이라는 것을.

백하민은 유일한 주인공이 아니었다.

그보다 몇 년 앞선 세대에 그보다 더 한 드라마를 찍었던 주인공도 있었고, 심지어 그런 주인공들이 모인 세계에서 주인공이 됐던 진짜배기도 있었으며 그런 이들조차 제치고 저 큰 미국 땅에서 자신의 이름을 새기고 돌아온 인물도 있었다.

그렇기에 그가 지난 1년 동안 배운 것은 현실이라는 이름의 겸손이었다.

그리고 올해.

최수원이 나타났다.

20억짜리 유망주라는 터무니없는 이름을 등에 업고.

한때 자신을 주인공으로 했던 스토리에서 그저 마지막 난관 정도로 등장했던 악역이라 생각했던 최수원은 백하민이 지난 1년 동안 배웠던 현실이라는 이름의 겸손을 매우 비현실적인 방법으로 파괴했다.

그것은 마치 폭풍과도 같았다. 그리고 백하민은 그 폭풍 속에 표류하는 하나의 작은 돗단배에 불과했다. 그저 휩쓸려가지 않기 위해 애쓰는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놀랍게도 단지 그것만으로도 그는 매우 준수하게 차곡차곡 성장하는 8억 5천에 어울리는 유망주 소리를 들을 수 있었다.

마운드를 내려가던 최수원의 표정을 봤다.

그리고 베이스 사이를 힘껏 달리던 그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바로 이틀 전.

그의 적으로 마운드에 섰던 최민혁은 이렇게 말했다.

“그거 완전 미친놈이야.”

그 표정은 빈말로도 좋지 못했다. 하지만 분명 살아 있는 표정이었다. 그래, 어쩌면 그것은 고등학교 시절 침대에서 분함을 참지 못하고 엉엉 울었던 백하민 자신의 표정과 비슷했을지도 몰랐다.

백하민이 생각했다.

어쩌면 폭풍 속에서 표류하는 하나의 돗단배라고 생각했던 자신의 지난 몇 달은 사실 폭풍의 눈 속에서 그저 안전하게 항해했던 시간들이 아니었을까라고.

그리고 자신이 작년 한 해 동안 배웠던 것은 현실이라는 이름의 겸손이 아닌 그것을 가장한 포기가 아니었을까라고.

백하민이 모자를 고쳐 썼다.

꿉꿉하게 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땀에 젖지 않은 그의 곱슬곱슬한 머리카락이 찰랑였다. 혼자 순정만화그림체를 닮은 눈동자에는 굳은 의지가 그득 담겼다.

7번부터 시작되는 브레이브스의 타선.

지난 십여 년간 꾸준히 가을 야구에 진출했던 팀답게 하위 타순이라고 방심할 수는 없었다.

잘 제구된 149.7km/h의 속구로 몸쪽을 공략하려 했다.

근데 좀 빠졌다.

-딱!!!

프로의 타자라도 150쯤 되면 복판에 들어오는 속구를 놓치기도 하고 그러는 법인데, 아쉽게도 오늘 브레이브스의 6번 타자는 그럴 생각이 없었던 것 같았다.

그의 스윙이 큼지막한 타구를 만들었다.

아, 뭔가 영화나 만화주인공들은 이쯤에서 강한 결심을 하는 것만으로 각성해서 상대를 막 이기고 그러는데······.

그리고 이주혁이 달렸다.

부정확하긴 했지만, 아무튼 맥시멈으로 따지면 리그 평균보다 20%는 넓은 수비 범위를 자랑하는 그의 발이 이번에 정확하게 방향을 잡아냈다.

“아웃!!”

가볍게 숨을 돌렸다.

그래도 구위는 괜찮았다. 복판에 완전히 몰린 공이었는데 타구가 살짝 먹혔다.

이어지는 8번 타자.

파울과 볼 두 개.

그리고 또 파울.

볼카운트 2-2에서 다섯 번째 공을 뿌렸다.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부웅!!!

타자의 방망이가 허공을 휘저었다.

“스트라잌!! 아웃!!”

오늘 경기 두 번째 삼진.

조유진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3루의 이규만부터 시작해서 유격수를 보는 노형욱, 2루수를 보는 강라온. 그리고 1루의 최수원까지.

상당히 이색적인 조합의 내야수들의 손을 거친 공이 백하민에게 돌아왔다.

삼진을 잡아낸 기운에 내야수들의 응원이 더해진 공이었다.

특히 마지막 그에게 공을 던지던 최수원의 눈빛은 매우 인상적이었다.

‘형, 브레이브스 얘들 별 거 아니니까 후딱 끝내고 마무리 운동이나 조집시다.’

***

말로만 듣던 하민이 형이 특유의 그윽한 눈빛을 드디어 직접 목격했다.

솔직히 나는 그 표정이라는 것을 제대로 접할 일이 없었기에 잘 몰랐다. 4선발인 하민이형이 선발로 나서는 날에는 내가 선발로 등판한 다음 날이었으니 항상 휴식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뭐랄까? 막 자기 잘생긴 거 알고 멋있는 척하는 그런 표정? 겁나 재수 없어.”

그리고 조유진의 그 평가는 매우 정확했다.

마운드에 선 하민이 형은 평소보다 상당히 재수가 없었다.

‘아, 형. 별로 중요한 순간도 아닌 데 그냥 진도 좀 빨리빨리 뺍시다. 이러다 날 새겠네.’

그리고 타석에 9번 타자 장진규가 들어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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