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화. 선두(10)
“······.”
최수원은 답하지 않았다.
물론 표정 역시 그리 좋지 않았다. 당연한 일이다. 설사 백하민 자신이라도 지금 상황에서는 굳이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았을 테니까.
물론 최수원이 마운드를 내려갔다고 그가 다른 투수들처럼 경기에서 완전히 빠진다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최수원 선수, 1루로 이동합니다. 이규만 선수가 빠지나 보네요. 아무래도 남은 이닝 숫자가 숫자인 만큼 외야를 보기에는 조금 부담스러운······. 아, 잠시만요. 이규만 선수가 3루로 이동합니다. 설마 노형욱 선수가 빠질 리는 만무하고. 아, 노형욱 선수가 유격수 자리로 이동, 그리고 강라온 선수가 2루수 자리로 가고, 2루수인 정지운 선수가 덕아웃으로 돌아갑니다.]
[마린스의 수비 포지션이 상당히 다이나믹 하게 바뀌는군요. 박동식 해설위원님은 어떻게 보십니까?]
[음, 일단 이규만 선수의 경우 최근 1루수나 지명 타자 위주로 뛰고 있긴 합니다만 전성기에는 3루수로 주로 뛰던 선수이긴 합니다. 노형욱 선수도 유격수와 3루를 번갈아 보다가 최근에 와서 3루수 자리 붙박이가 됐고요. 유격수인 강라온 선수야 뭐 2루수도 당연히 능숙하게 볼 수 있는 선수고요.]
[그렇다면 아무 문제가 없을 것이다?]
[글쎄요. 그렇다고 또 아무 문제가 없다고 보긴 힘든 것이, 사실 3루를 뛰다가 1루로 이동하는 것도 그렇고, 유격수를 보다가 3루로 이동하는 것도 그렇고 다 이유가 있는 거거든요. 게다가 그 이후로 적응의 문제도 있었을 것이고요. 다만 이게 아예 이해할 수 없는 배치는 아니다. 뭐 그 정도의 이야기가 되겠네요.]
아예 이해할 수 없는 배치는 아니다.
그래, 딱 거기까지였다.
박동식은 지금 이 상황이 결국 최수원의 기용에서 오는 부작용이라는 것을 굳이 이야기하지 않았다.
지명타자의 소멸.
이미 경기 시작 투타겸업을 하는 최수원이 타석에 서는 순간 마린스의 지명타자는 사라졌다. 최수원이 선발의 자리에서는 내려가고 지명타자의 자리는 유지하는 방법은 오타니룰이 없는 KBO에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결국 선발의 자리를 대신하는 백하민 역시 타석을 소화해야만 한다는 뜻이다.
지금까지는 크게 문제가 없었다.
최수원이 최소 5.1이닝 이상. 경기당 평균 6.1이닝 가까운 이닝을 소화했으니까. 남은 투수 타석 1, 2타석은 대타를 활용하면 그만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그럴 수 없다. 백하민이라는 선발 카드는 그렇게 짧은 이닝을 막아내겠다고 사용할만한 카드가 아니었으니까.
게다가 지금 이 변화에 선수들이 보인 반응은 전혀 뜻밖의 것으로 보이지 않았다. 나름대로 어느 정도 훈련을 해본 경험이 있다는 의미다.
‘어쩌면 이게 김대철 감독 나름대로 준비해둔 포시에서 최수원이 말렸을 경우를 대비한 플랜일지도······.’
공격력에 있어서는 분명 최상의 수.
하지만 수비는 과연 어떨까?
경기가 계속됐다.
***
짜증이 났다.
아니, 야구를 하루이틀 하는 것도 아니고. 선발이 공 던지다 보면 뭐 점수를 좀 내줄 수도 있지. 경기에서 아직 역전 당한 것도 아닌데 고작 2.1 이닝 만에 강판이라니.
선발의 운용이라는 게 이런식으로 주먹구구식으로 하면 안된다. 어? 좀 진득하니 기회를 줄 줄도 알아야지.
마운드 올라 왔을 때, 강력하게 더 던질 수 있다고 그렇게까지 어필했는데 들어먹지를 않는다.
솔직히 지난 경기까지 기준으로 14경기에 6승 1패. ERA 2.55를 기록 중인 특급의 선발에게 너무한 거 아닌가 깊다. 오늘 이렇게 점수를 내줬어도 아마 아직도 평자책 3점도 안될 텐데 말이다.
마운드에서 공을 건네 받을 때는 좀 미안한 표정을 보이던 하민이 형이 날카로운 모습으로 타자를 바라본다.
그러고보면 사실 저 형도 나한테 미안할 건 없긴 했다. 굳이 따지자면 다음 경기 선발 등판해야 하는 양반이 내 땜빵으로 올라왔는데 기분 좋을 수가 없다. 게다가 오늘 경기에 타석까지 소화해야 할 판국 아니던가.
역시 이 모든 문제의 원흉은 학폭 저 녀석이다.
저 녀석이 앞서 나를 거르지만 않았어도 점수가 더 뻥뻥 났을 거고 그랬으면 4점 정도에 강판당할 일도 없었다.
“진짜 다음 타석 넌 뒤졌다.”
최소 7이닝, 최대 완투를 각오하고 모아둔 체력.
고작 2.1이닝 던지는 바람에 불연소 돼버린 이 근질근질한 무언가를 오늘 타석에서 아주 제대로 보여줘야겠다.
3회 초.
글러브 대신 미트를 끼고 1루에서 그렇게 결심했다.
-뻐엉!!!
그리고 그 사이 7구째 볼넷
백하민이 타자를 1루로 내보냈다.
“오늘은 좀 일찍 내려왔네?”
“그러게요.”
괜히 1루로 걸어 나온 브레이브스의 5번 타자 명진수가 입을 털었다.
올해 37세. 끝물 타자인데 본래 역사대로라면 내년에 나한테 1루수 자리 털리는 홍준이형한테 지명타자 자리 털리고 은퇴할 양반이다.
안그래도 이거 지금 강판 당해서 기분도 꿀꿀한데, 울고 싶은데 뺨 때려주는 격이다.
“마린스도 요즘 내 빠따가 좀 무섭기는 했나봐? 딱 내 차례에 그렇게 마운드 내려 보낸 거 보면?”
“설마 그랬겠습니까? 그냥 제가 좀 흔들리니까 강판 당한거죠.”
“뭐 인마?”
“아니, 그렇잖아요. 솔직히 제가 컨디션 좀 제대로면 빠른 공 두 개 던지고 느린 커브 던지면 그대로 삼구삼진인데요.”
“와, 이 새끼 말 하는 싸가지 봐라? 그래 어디 한 번 더 씨부려봐.”
“물론 어쩌다 보면 치실 수도 있겠죠. 근데 선배 제 공 외야로 보낸 적 없잖아요. 그러면 뭐 그대로 선배 발 생각하면 내야 땅볼 아니면, 주자가 1루면 병살이죠.”
명진수의 얼굴이 좀 붉게 달아올랐다.
근데 솔직히 이 정도로는 좀 부족하다.
“그래도 한 가지는 축하드립니다.”
“뭐가.”
“선배 야구 하면서 뭐 1위 해보신 적 없잖아요. 근데 올해 우리 규만선배 은퇴하시면 발 느린 걸로는 KBO 1위 하실 거 아닙니까.”
“뭐라고?”
-뻐엉!!!
“아웃!!!”
적절한 타이밍.
하민이형의 경제구가 내 미트에 정확하게 틀어박혔다.
그러게 왜 발도 느린 녀석이 세 걸음이나 나가서는. 쯧쯧. 심지어 1루수랑 노가리 깐다고 투수 동작 체크도 제대로 못 하지를 않나.
1루를 향해 몸을 던졌던 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어휴, 선배님. 혹시 제 말이 너무 싸가지 없었다면 죄송합니다. 덕아웃에서 견제 시도 할테니까 도발하라고 지시가 내려와서요. 제가 그렇게까지 위아래가 없는 스타일이 아닌데. 죄송합니다.”
“······. 그래. 근데 적당히 해라. 너 요즘 이 바닥 소문 안 좋다. 야구 하루 이틀 할 것도 아니고 다 너 생각해서 해주는 말이다.”
“네. 명심하겠습니다.”
“······.”
녀석이 자신의 앞섶을 털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이걸로 투아웃에 주자 2루.
견제에 성공한 덕분일까?
아니면 앞서는 급하게 나오느라 몸이 좀 덜 풀렸던 것뿐일까?
하민이 형이 이어지는 타자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점수는 4:4. 브레이브스가 마린스를 따라잡으며 3회 초 브레이브스의 공격이 끝이 납니다.]
[자 이어지는 3회 말 마린스의 공격. 선두 타자는 최수원. 최수원입니다.]
[앞선 타석에서는 자동 고의사구로 출루. 노형욱 선수의 만루 홈런으로 홈에 들어왔습니다. 하지만 오늘 마운드에서 보여준 모습을 생각하면 컨디션이 그리 좋아 보이지는 않았는데요. 최수원 선수가 3회에 강판된 건 데뷔 이후 처음이죠? 과연 브레이브스의 덕아웃은 컨디션이 좋지 않은 타자 최수원과 승부를 벌여볼 생각이 있을지 궁금해지는 순간입니다.]
방망이를 쥐고 타석을 향해 걸어갔다.
‘승부해라. 제발 승부해라.’
4:4.
오늘 내가 마운드에서 좀 별로였고 주자 없는 상황이다.
그리고 지금 브레이브스의 마운드에는 거기의 에이스 투수인 학폭 조창혁이 공을 던지고 있다. 게다가 직전 타석에서 괜히 나 걸렀다가 형욱 선배가 만루 홈런까지 쳐내지 않았던가. 솔직히 이건 한 번 승부해볼 만한 상황이다.
[아!! 브레이브스의 덕아웃. 한 치의 망설임 없이 자동고의사구 사인을 보냅니다.]
[현명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사실 여기서 브레이브스가 굳이 모험을 시도할 이유가 없죠. 지금 타출장이 0.443/0.657/1.191인 타자예요. 이건 쉽게 한국말로 이야기하자면 그냥 이 선수는 볼넷으로 꾸준히 출루시키는 게 굳이 승부하는 것보다 이득입니다. 라는 의미거든요.]
[최수원 선수의 스탯은 가끔 보고 있으면 제가 헷갈려요. 아니 장타율이 1.191이라니. OPS가 1.191만 되도 그게 리그 MVP급 타자잖아요. 안 그렇습니까?]
[맞습니다. 사실 우리가 편의상 장타율을 몇 할이다. 뭐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지만, 장타율은 사실 10할이 넘을 수 있는 수치거든요. 물론 잠깐 단기적으로는 그게 되도 막 50경기 넘게 했는데 그게 되는 선수는 없는 게 보통이긴 합니다만······. 우리 최수원 선수가 여러모로 보통은 아니니까요.]
하지만 한 치의 망설임도 없는 깔끔한 고의 사구.
내가 1루에서 세 걸음의 리드폭을 가져갔다.
도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리드폭의 크기가 아니다.
뛸 것인가 말 것인가.
신체의 무게가 어느 쪽으로 쏠리는가 하는 아주 약간의 차이가 리드폭 반 걸음보다 훨씬 중요하다.
-뻐엉!!!
조창혁이 매우 빠르게 1루에 공을 던졌다.
“세이프!!”
그리고 나의 귀루는 그보다 조금 더 빨랐다.
조창혁이 나를 강하게 바라봤다.
진짜 학교 다닐 때 애들 어지간히 두들겨 팼을 것 같은 살벌한 눈빛이다.
물론 저 눈빛이 무섭지는 않았다.
무서운 것은 견제로 이어졌던 저 스무스한 동작이었다. 구속도 빠른 놈이 퀵모션이 굉장히 좋았다.
하긴 KBO가 전통적으로 퀵모션에 특히 신경 많이 쓰는 리그이긴 했다.
세 걸음.
-뻐엉!!
“세이프!!”
[아, 조창혁 선수. 두 번째 견제입니다. 아무래도 오늘 최수원 선수의 발을 조금 경계를 하는 모양새네요.]
[아무래도 지난 경기에서 최수원 선수가 연속으로 도루를 성공시키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았겠습니까? 투수 입장에서는 경계를 할 수밖에 없죠. 고의사구로 나간 주자가 도루로 2루에 나가서 안타 하나에 홈까지 들어온다? 이건 당하는 투수 입장에서는 보통 기분 나쁜 일이 아니거든요.]
빅리그였으면 견제구는 여기서 끝이다.
더 못 던진다.
-뻐엉!!
“세이프!!”
근데 여긴 KBO였다.
견제구에 제한이 없는 리그.
와, 무슨 제한 없는 견제구의 무서움을 보여 주마도 아니고.
앞섶에 묻은 흙을 툭툭 털어내고 다시 세 걸음을 걸어 나갔다. 어디 니가 이기나 내가 이기나 한 번 해보자.
-부웅!!
“스트라잌!!”
아······.
근데 못 뛰었다.
씨익 쪼개는 조창혁의 얼굴이 매우 재수 없었다.
아니, 진짜 모션이 좋다.
내가 칭찬하기가 싫은데 칭찬을 할 수밖에 없다.
“무슨 밥 먹고 견제구 연습만 한 건가? 모션이 뭐 저리 좋아요?”
“맞아. 창혁이 밥 먹고 견제구 연습만 한 거.”
“네?”
“쟤 내년에 메이저 가잖아. 요즘 메이저는 도루가 대세고. 그래서 지난 겨울에 밥 먹고 견제구 연습만 하더라. 독한 새끼. 너도 어차피 메이저 갈 거잖아. 그러니까 잘 보고 배워둬. 우리 팀에 메이저 간 애 중에서 저렇게 연습 안 한 놈 없으니까.”
할 말이 없었다.
그래. 학폭 저 녀석이 비호감이기는 했지만 뭐 메이저에서 나름대로 몇 년 정도 선발로 살아남았다는 것 자체가 인성과 무관하게 그만한 노력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었겠지.
그래. 좋다.
어디 그 밥 먹고 연습만 했다는 견제구 일등석에서 제대로 관찰해주마.
-뻐엉!!
“세이프!!”
아니, 근데 인간적으로 공 하나 던지고 또 견제구 던지는 건 좀 아니지 않냐?
사직구장에 –우우우 하는 야유가 몹시 크게 울려 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