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6화. 선두(9)
사람이 일 년 내내 컨디션이 좋을 수는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는 신 혹은 약마일 것이다.
사람이 일 년 내내 컨디션이 나쁠 수도 없다.
만약 그렇다면 그것은 부산 마린스 혹은 대전 호크스일 것이다.
사람은 이렇듯 컨디션을 타기 마련이고 특히 에브리데이 스포츠인 야구에서 선수가 일 년 내내 좋은 모습을 보일 수는 없다. 심지어 그 약마도 가끔 약해지는 기간이 있었으니까.
그렇기에 승리하는 팀은 누군가가 약해질 때 누군가가 강해지는 그 싸이클이 실로 절묘하여 팀의 전력이 항상 꾸준하게 승리의 가능성보다 높은 곳에 위치한다.
이번 시즌 마린스가 그러했다.
아, 물론 그 마린스의 싸이클이라는 녀석은 꾸준히 평소 마린스와 비슷했다. 절묘할 것도 없이 승리의 가능성보다 아득히 낮은 곳에서 오락가락했다.
하지만 최수원이라는 존재가 그것을 강제로 멱살 잡고 끌어 올렸다.
오늘로 시즌 73번째 경기.
어제까지 성적을 기준으로 보자면 54경기에 출장하여 232타석 131타수 58안타(2루타 11개, 3루타 3개) 27홈런 3도루 1도루 실패 92볼넷.
0.443/0.655/1.191
그리고 14경기 14선발 86.1이닝 74피안타 34실점 23자책 5피홈런 106삼진 27볼넷 3사구.
ERA 2.55, ERA+ 156, FIP 2.34.
현재 WAR이 무려 9.31이다.
사실 이 정도면 팀원들이 이기기 싫다고 발버둥을 쳐도 강제로 멱살 잡고 승리로 끌어가는 수준의 성적이다. 이건 산술적으로 말하자면 거의 모든 경기마다 승률을 강제로 1할씩은 끌어 올렸다는 의미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마린스는 1위에 도달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리고 최수원의 피칭이 가장 크게 흔들리는 오늘. 그 역시 야구의 신은 아니라는 것이 증명 됐기에, 부산 마린스 역시도 승리하기 위해서는 자신들이 항상 마린스 같은 플레이만 하는 게 아니라는 것을 증명해야만 했다.
-딱!!!
강라온의 방망이가 조창혁의 공을 밀어쳤다.
내야의 키를 살짝 넘기는 타구.
그가 머릿속으로 이미지했던 것처럼 담장을 넘어가는 결정적인 홈런포는 아니었지만 아무튼 노아웃에 주자 1, 2루.
최수원의 차례가 돌아왔다.
앞서 수비 이닝 때 마운드에서 속구가 좀 제멋대로 날뛰며 1점을 내주는 모습을 보여주긴 했다. 하지만 고작 그 정도로 그의 컨디션이 엉망일 것이라 예측하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자기애로 똘똘 뭉친 조창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1회 말, 고작 1점의 리드 상황에서 현재 시즌 16개의 홈런을 기록 중인 타자를 두고 고의 사구로 만루를 만든다는 것은 사실 쉽지 않은 선택이었다.
하지만 그 거르는 대상이 0.443/0.655/1.191이라는 정신 나간 성적을 기록 중인 타자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아, 자동 고의 사구. 브레이브스의 덕아웃에서 자동 고의 사구 사인을 내리네요. 이걸로 이제 노아웃에 만루. 브레이브스 위기입니다.]
[이게 참, 이번 시즌 마린스를 상대하는 팀들은 항상 어려울 수밖에 없는 것이 저 최수원이라는 타자가 너무 규격 외입니다. 출루율이 지금 6할 5푼을 넘어간다는 말은 거의 경기에 2, 3번씩은 꼬박꼬박 나간다는 소리예요. 그렇다고 또 볼넷을 안 내주자니, 타율이 4할 4푼에 장타율이 1.191. 쳤다 하면 장타거든요.]
[자, 하지만 마운드에 선 투수는 조창혁. 내년 메이저리그 진출이 유력한 KBO 최고의 투수입니다. 타석에 노형욱이 올라옵니다.]
만루
최거노.
이미 시즌 내내 봐왔던 장면이었다.
그렇기에 노형욱은 더이상 흥분하지 않았다. 그저 하던 대로 평범하게 타석에 들어와 하던 대로 평범하게 방망이를 들었다.
4번 타자 노형욱은 그것으로 충분했다.
매서운 집중력.
그 앞에서 마운드에 선 조창혁이 웃었다. 이미 오래 전 일련의 사태들을 통하여 그는 확실하게 경험했다.
세상은 엘라 휠러 윌콕스의 오랜 시와 같다는 것을.
낡고 슬픈 이 땅에서 환희는 빌려야 하지만, 고통은 이미 가득하기에
웃고 기뻐하는 순간에는 모두가 찾아올지나
울고 슬퍼하는 순간에는 모두가 고개를 돌려 외면 할 것이니.
그러니 웃어라. 세상이 나와 함께 웃을 것이다.
공을 단단히 쥐고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그리고 깊게 호흡하고 강하게 공을 뿌렸다.
-뻐엉!!!
“스트라잌!!!”
절묘한 코스.
노형욱이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다.
“마!! 니 도랐나. 대놓고 직구가 오는데 안 쌔리고 뭐하는데!! 맨날 쓰잘때기 영양가라고는 한 개도 없는 홈런이나 쳐싸코. 니가 그러고도 4번이가. 어?”
사직구장의 관중석에서는 평소와 크게 다르지 않은 응원이 울렸다.
조창혁의 미소가 한층 진해졌다. 모든 투수는 포커페이스를 배운다. 피칭이란 어떤 부분에서는 도박과도 같아서 그 패를 들키지 않는 것이 매우 중요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때론 어떤 투수는 그 패가 들킨다고 해도 괜찮았다.
노형욱은 조창혁의 저 미소에서 협곡의 끝에 선 남자의 절박함. 그리고 그 협곡을 한 달음에 뛰어넘고자 하는 광기를 느꼈다.
속구.
159.4km/h
1회 말이라고 믿기 힘든 강력한 구속.
하지만 그보다 대단한 것은 조금 전 바깥쪽 꽉찬 코스에 이어 들어오는 몸쪽 꽉찬 코스의 제구였다.
-뻐엉!!
“스트라잌!!”
노형욱이 반 걸음 뒤로 물러났다.
분명 스트라이크였지만 노형욱 스스로가 만들어둔 가상의 존은 벗어나는 매우 훌륭한 공이었다.
그것도 2구 연속.
“김대철이!! 니 마, 노형욱이한테 뭐 좋은 거라도 얻어 묵읏나. 뭔데 저런 새끼를 4번에 박아두고 쓰는 긴데? 앞에 최수원이가 맨날 천날 나가는데 타점이 저따위구인 놈이 4번인 게 말이가 방구가? 마, 대따. 노형욱이 니 다 치아뿌고 삼진으로 조용히 꺼지라. 몰맀다고 암꺼나 휘둘러서 병살타 치믄 니 진짜 오늘 직이뿐다. 아나?”
그를 응원하는 관중석의 열기가 점점 더 커진다.
노형욱은 시간을 끌지 않았다.
분명 승부의 흐름은 조창혁 쪽으로 흐르고 있었으나 노형욱은 지금 자신 역시 그 집중력이 절정에 다다랐음을 느꼈다.
볼카운트 0-2.
조창혁은 리그 최고의 파워피처였다. 그리고 그것은 단순히 그가 160에 달하는 공을 던질 수 있기 때문이 아니었다.
‘파워피처는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그것은 피네스 피처와 파이어볼러 가운데 누구의 마음이 더 단단한가를 묻는 질문과 흡사했다.
노 볼 투 스트라이크 카운트에서 스트라이크를 잡으러 들어올 수 있는 마음.
그것이야말로 파워피처를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일 것이다.
그리고 노형욱은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가 진정한 의미의 파워피처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노형욱의 방망이가 번개처럼 뽑혀 나왔다.
-딱!!!
묵직했다.
조창혁이라는 투수가 가진 재능의 힘에 브레이브스라는 시스템이 키워낸 기량의 힘이 더해졌다. 그리고 거기에 마린스라는 시스템이 쌓아 올린 역사의 힘까지 슬쩍 한 손을 보탰다.
사직 구장을 가득 메운 수많은 팬이 숨을 죽였다.
노형욱은 방망이를 놓지 않았다.
오직 가장 잘 맞은 타구만을 담장 밖으로 날려 보낼 수 있다면 지난 5년 동안 10kg이나 늘어난 근육은 아무런 가치가 없었을 것이며, 그 사이 줄어든 그의 수비 범위와 주력 역시 그저 멍청한 헛짓거리에 불과했을 것이다.
타구가 쭉쭉 뻗어나갔다.
각은 살짝 높았다. 타구 속도는 만족스럽지 못했다.
브레이브스의 중견수 강호창이 여전히 브레이브스의 홈구장보다 익숙한 사직구장을 달렸다. 그리고 그가 수없이 등을 부딪혔던 외야 펜스 앞에서 높게 팔을 뻗은 채 크게 점프를 뛰었다.
하지만 닿지 않았다.
아쉬워하기에도 참으로 큰 차이를 두고 야구공이 담장을 넘어갔다.
[홈런!! 홈런입니다!! 1회 말!! 노형욱의 만루 홈런포!! 마린스가!! 한 번에 4점을 추가하며 1:4로 역전에 성공합니다!!]
[노형욱!! 노형욱이 어제에 이어 2경기 연속 홈런!! 시즌 17호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사직구장이 각종 괴성들로 가득 찼다.
“노형욱!! 인마!! 니 내가 머라켓노!! 으이? 밥 잘 묵고, 배에 힘 마 딱 주고!! 방망이 마 쌔라뿌믄 넘어간다 켔제!! 내 인마, 진즉에 니 억수로 잘할 줄 알았다.”
노형욱이 자신에게 환호하는 관중을 향해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가 조금 전까지 자신에게 욕을 퍼붓던 사람이라는 건 별 의미가 없었다. 어차피 저러다가 또 다음 타석에 삼진이나 내땅, 병살 같은 거 치면 고래고래 욕을 퍼부을 것이고, 그렇게 욕을 퍼부어놓고도 또 그 다음 타석이면 다시 자신의 응원가를 목청껏 소리 높여 부를 테니까.
1:4.
경기가 계속됐다.
***
백하민이 가볍게 호흡했다.
본래 일정대로라면 오늘 등판했어야 했다. 어제의 우천 취소로 인하여 하루씩 등판이 밀린 탓에 그 역시 오늘 가볍게 등판 하루 전 루틴을 다시 수행했었다.
그리고 1회 초 마린스의 수비 이닝이 끝나갈 무렵.
“하민아, 불펜으로. 피칭 준비하자.”
“네?”
모레 있을 다음 경기 선발이기에 덕아웃에서 대기하던 그에게 수석코치가 뜻밖의 지시를 내렸다.
물론 수원이가 1점을 내준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그에게 등판 준비까지 시킬 정도라고?
무엇보다 만약의 사태가 터진다고 해도 마린스의 불펜은 최근 상당히 단단했다. 굳이 4선발인 그를 지금 상황에서 롱릴리프로 쓸 이유가······.
“감독님 지시다. 오늘 중요한 경기잖냐. 혹시 안 올라가더라도 내일 하루 더 휴식일이 있고.”
의아한 눈빛의 그에게 수석코치가 한 마디를 덧붙였다. 그의 등을 툭툭 두들기는 손에 기분 상하지 말라는 따듯함이 담겨 있다.
“아, 네. 바로 가서 준비하겠습니다.”
물론 항명을 하거나 할 의사는 전혀 없었다는 것 정도는 수석코치도 알고 있었다. 최수원이라면 몰라도 백하민은 그럴 녀석이 아니었으니까.
그리고 1회 말.
노형욱의 만루포.
백하민은 그 홈런포를 보는 순간 자신의 차례가 오지 않으리라 생각했다. 당연했다. 그가 아는 최수원은 득점지원을 등에 업었을 때 그들을 실망시키는 법이 없는 초인이었으니까.
-딱!!
2회 초. 그리고 3회 초.
-딱!!!
1:4의 점수는 어느새 4:4의 팽팽한 점수로 바뀌었다.
원아웃에 주자 2루.
-따르릉
불펜의 전화기가 울렸다.
전화를 받아든 불펜 코치가 몇 차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 마운드에는 이미 조유진과 투수코치가 올라가 뭐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뻔한 상황이었다.
“하민아.”
“네.”
일반적인 불펜 투수들의 등판과는 조금 다른 상황.
본래 오늘 선발로 출장했어야 하는 마린스의 네 번째 선발은 매우 충분하게 몸을 풀어두었다.
[아, 마린스!! 투수 교체입니다. 3회. 원아웃에 주자 2루 상황. 마린스의 덕아웃이 매우 빠른 타이밍에 투수 교체를 가져갑니다.]
[그만큼 오늘 경기가 중요하다는 뜻이겠죠. 사실 이게 시즌을 치르다 보면 고비를 앞두고 그 앞에 왔다갔다 왔다갔다 변죽만 울리다가 결국 그대로 미끄러지는 일이 참 많거든요. 그러니까 넘어갈 수 있을 때 무리를 해서라도 확 넘어가고 기세를 타고 쭉쭉 나가야 하는 타이밍이 있어요. 아무래도 김대철 감독이 지금이 그런 타이밍이라고 판단한 것 같습니다.]
[자, 마운드에 백하민, 백하민 선수가 올라옵니다.]
어색한 느낌이었다.
경기 중간에 마운드에 올라가는 것이.
그 마운드에 서 있는 투수에게 공을 넘겨받는 것이.
그리고 무엇보다 그 투수가 최수원이라는 것이.
“수고했어. 수원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