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5화. 선두(8)
와······.
크다.
타구를 처음 보는 순간 느낀 감정이었다.
그리고 그다음 든 생각은 내가 너무 안일했구나. 하는 생각이었다.
이전 경기에서 찬민이형에게 속구와 체인지업으로 재미를 좀 봤다. 저 형 약점은 체인지업을 겸비한 강속구 투수였으니까.
근데 그건 어디까지나 속구와 체인지업이 모두 일정 수준 이상일 때 이야기다. 뭔지는 모르겠지만 저 양반, 내 체인지업을 정확하게 캐치했고, 애초에 체인지업을 노리고 있었다.
달려가던 이주혁이 걸음을 멈췄다.
외야 매우 깊숙한 곳을 때리는 거대한 홈런.
[정찬민!! 홈런!! 홈런입니다!! 담장을 훌쩍 넘기는 대형 홈런!! 1회 초. 원아웃. 브레이브스가 먼저 점수를 따냅니다.]
[방금 체인지업이 조금 밋밋했어요. 최수원 선수의 원래 피칭 레퍼토리는 기본적으로 대부분 속구와 커브인데 이렇게 가끔 체인지업이나 슬라이더를 섞는 걸로 재미를 좀 보는 편이었거든요. 평소에는 잘 통했는데 오늘은 운이 좀 없었습니다.]
[사실 말이 체인지업이지 이 선수 체인지업이 평균 140km/h대라서 보통 선수의 속구 정도 되거든요. 이게 밋밋하게 들어오면 딱 치기 좋은 공이라는 뜻입니다.]
[자, 마린스는 15년 만의 리그 1위 탈환을 앞두고 1회 초부터 살짝 삐걱대는 출발을 보여줍니다. 하지만 아직 실망하기에는 이릅니다. 이제 고작 1회 초거든요. 아직 마린스의 공격은 시작도 하지 않았어요.]
기운이 좀 빠지기는 했다.
1회 초부터 퍼펙트도 노히트도 완봉도 다 날아가 버렸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아직 중요한 게 남아있긴 했다.
승리.
쪼유가 건넨 공을 몇 차례 매만졌다.
쓸데없이 느긋하게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도는 것으로 내 신경을 살짝 긁어준 찬민이형이 덕아웃에 돌아가고 타석에 브레이브스의 3번이 올라왔다.
얼굴에 자신감이 엿보이는 것이 퍽이나 재수가 없었다.
초구.
바깥쪽.
-부웅!!
“스트라잌!!”
커맨드가 흔들렸다.
덕분에 중앙으로 공이 좀 많이 몰렸다. 이거 왠지 오늘은 전체적으로 우타석 쪽으로 공이 좀 몰리는 느낌이다. 그렇다면 바깥쪽으로 공을 빼려면 그보다 조금 더 바깥으로 뺀다는 느낌으로······.
두 번째.
아······.
한순간 마지막 공을 낚아채는데 손에서 공이 빠졌다.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빠지는 공.
폭투인가?
-뻐엉
조유진이 팔을 쭉 뻗어 그 공을 받아냈다. 그야말로 미친 순발력.
나도 모르게 엄지를 치켜들었다.
“자자, 심호흡 한번 크게 하고 침착하게 가자. 수원아.”
게다가 조유진 주제에 나에게 충고까지 하는데, 뭐지?
이상하게 든든했다.
세 번째.
쪼유가 뚝 떨어지는 커브를 주문했다.
‘싫어.’
지금 속구 커맨드가 좀 안 좋은 것 같으니 복판에 커브를 집어 넣어보자는 건데 싫었다. 괜히 도망가는 느낌이다.
이럴 때일수록 속구로 승부를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의 고갯짓에 쪼유가 새로운 사인을 보내왔다.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역시 찰떡이다. 내 생각을 아주 제대로 읽는다.
고개를 한 번 끄덕이고 곧바로 피칭에 들어갔다.
몸에 이상은 없었다.
경기 전에 던졌던 공에도 아무런 이상은 없었다.
그러니까 지금 중요한 것은 믿음.
내 공의 위력에 대한 강력한 믿음뿐이다.
와인드업에서 스트라이드로. 그리고 이어지는 부드러운 코킹.
나의 손끝이 공을 강하게 챘다.
-뻐엉!!!
몸쪽 깊숙한 코스를 노리던 160.1km/h의 강속구가 훌륭하게 존 바깥 아슬아슬한 코스를 스치고 지나갔다.
“스트라잌!!”
쪼유는 또 이걸 용케 잘 잡는다.
[매우 절묘한 코스로 공이 잘 들어갔습니다. 볼카운트 1-2. 홈런을 두들겨 맞았지만 최수원 선수 크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지 않습니다.]
[최수원 선수에게서는 종종 신인 선수라고 믿기 힘든 노련함이 보이는데, 이런 위기에서의 대응도 그 중 하나라고 볼 수 있습니다.]
와, 이거 큰일이다.
컨디션 문제인가? 아니면 피칭폼이 어디가 좀 무너진건가?
연습 때 잘 들어가던 공이 갑자기 엉망이다.
네 번째.
쪼유가 또 다시 커브를 요구했다. 원바운드가 되더라도 상관없으니 최대한 떨어지는 커브를 던지라는 신호다.
볼카운트 1-2.
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떨공삼은 원래 야구의 정석이다.
이건 도망가는 게 아니다. 진짜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다행스럽게도 커브는 비교적 원하는 대로 훌륭하게 들어갔다.
***
“오늘 하민이는 몸 풀었나?”
“네, 원래 일정이라면 선발이었으니까 아예 쉬게 하는 것보다 하던 대로 루틴 돌리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내일 등판에 무리 없게 선발 등판 전날 루틴으로 가볍게 돌렸습니다.”
“몸이 굳지는 않았다는 소리네. 그러면 지금 불펜으로 보내.”
“네? 하지만 하민이는 다음 경기가······.”
수석코치의 반문을 김대철 감독이 짤라냈다.
“어차피 불펜에서 몸 좀 더 푼다고 해도 내일 월요일이라 경기 없으니까 하루 쉬고 등판해도 괜찮을 거고, 만약 오늘 마운드에 올린다고 해도 원래 화요일은 일정상으로는 명훈이 등판이었잖아. 그런데 지금 내가 자네한테 이런 걸 다 설명을 해야 하나?”
“아, 아닙니다!!”
원래 뭔가 큰 일을 앞두고는 항상 큰 고비가 있기 마련이다.
이번 시즌 꾸준하게 잘해왔던 투수가 갑자기 제구가 흔들리는 것도 충분히 있을 수 있는 일이다. 게다가 본래 어제 등판했어야 하는 투수가 하루 더 몸이 풀리면서 루틴이 깨진 상황이 아니던가. 메이저의 노련한 선발들 가운데서도 휴식일을 하루 더 주면 오히려 성적이 부진한 경우가 종종 있는데 하물며 최수원은 기껏해야 열아홉살에 불과했다.
그러니 흔들리지 않았다.
이런 위기를 넘길 때마다 팀은 강해진다.
게다가 지금 마운드에 있는 저 녀석은 사실 마운드에서 글러브를 낀 순간보다 손에 방망이를 쥐었을 때 더 믿음직한 녀석이 아니던가.
-딱!!!
[빠른 타구!! 하지만 강라온 부드럽게 잡아내서 2루에!! 2루에서!!]
“아웃!!!!”
[아웃!! 아웃입니다!! 1회 초 1:0. 2아웃 주자 1루 상황에서 주자를 잡아내며 이닝 종료. 경기는 1회 말. 마린스의 공격으로 이어집니다.]
***
“수원아, 오늘은 커브가 괜찮으니까 그거 위주로 가자.”
“어.”
최수원의 표정이 좀 부루퉁했다.
조유진이 자신도 모르게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하여간 성격 하나는 진짜 애새끼다. 좋게 말하자면 기분을 속이지 않는 솔직한 성격이라는 뜻이다. 뻔했다. 지금 상황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것이겠지.
사람들은 160짜리 공을 던지는 최수원의 터무니 없는 구속에 열광했지만, 조유진은 최수원의 진짜 대단한 점을 그 기복 없는 컨트롤이라고 봤다. 10개를 던지면 적어도 8, 9개는 존 안에 꽂아 넣는 컨트롤은 사실 매우 훌륭한 수준의 컨트롤이다. 물론 가끔 존 자체를 구분해서 쓰는 투수들도 있긴 하지만 160을 던지는 투수가 거기까지 하기를 바라는 건 너무 양심 없는 일이다.
게다가 거기에 기복이 거의 없다는 점을 더하면 이건 훌륭한 수준을 넘어 사기적인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아니, 엄밀히 말하자면 기복(起伏)이 없는 수준이 아니었지. 기(起)만 있고 복(伏)은 없는 수준이었으니까 더 사기적이었지.’
컨디션이 좋은 날은 더 잘 던지는데 컨디션이 나쁜 날에도 10개 중에서 8개는 존 안에 집어넣는다? 이건 사기적인 수준을 떠나서 인간이 맞긴 한 건지 물어봐야 한다. 근데 다행히 오늘 하는 걸 보니까 인간이 맞긴 한 것 같았다.
서너 개의 구종을 가진 투수들도 날에 따라서 어떤 공은 좋고 어떤 공은 나쁘다. 그렇기에 피칭 레퍼토리가 바뀌고 긁히는 날이 생기고 망하는 날이 생긴다.
그러니까 그냥 오늘은 다른 투수로 치면 좀 안 긁히는 날. 그리고 커브 위주로 피칭을 가져가야 하는 날인 셈이다.
오늘 브레이브스의 선발 투수인 조창혁이 그라운드로 걸어 나왔다.
마운드 위에서 보여주는 오만한 모습과, 솔직하게 드러나는 표정들이 묘하게 최수원이랑 닮은 투수다.
“야, 수원아. 울지마. 뚝!! 1점 내줬다고 그렇게 울려고 하면 어쩌냐. 형이 잃은 점수 다 따줄테니까 여기서 잘 기다리고 있어.”
“아, 울긴 누가 울었다고 그럽니까. 그리고 정훈 선배는 앞으로 타석 나갈 때 저한테 말 걸지 마세요.”
“어, 뭐야? 지금 나랑 선 긋는 거야? 우리 사이에? 이 형 상처받는다?”
“아니, 그게 아니라 선배 말없이 조용히 가면 그래도 종종 치는데 이렇게 거창한 말하고 나가면 항상 삼진 아니면 병살이잖아요. 솔직히 이 정도면 이것도 루틴 아닙니까?”
“야, 루틴은 그런 게 아니라 어? 인마. 아무튼 다른 거고. 그런 불길한 미신 같은 소리하면 부정 타니까 얼른 침 세 번 뱉고. 잘 봐라. 내가 이번에 너의 그 말도 안되는 불길한 미신 완전히 박살 내줄 테니까.”
원래는 잘 노는 쾌활한 형 같은 이미지였는데 술을 끊은 이후로는 어느새 좀 잘생긴 뺀질거리는 동네 바보 형 느낌이 되어 버린 이정훈이 최수원과 잠깐 티격태격하고는 자신의 방망이를 챙겨 타석으로 걸어 나갔다.
‘오늘 경기에서 승리하면 15년 만의 선두 탈환.’
마린스는 이틀 전 경기에서 승리했지만 돌핀스도 의외의 역전승을 하는 바람에 1위에 오르지 못했다. 그리고 그날 경기가 끝나고 최수원이 빠진 회식 자리에서 규만 선배가 말했던 그 15년이라는 묵직한 단어는 어제 우천 취소를 지나 오늘에 이르기까지 선수들의 가슴 한 복판에 묵직하게 자리 잡고 있었다.
그리고 1회 초에 선취점을 내줬다.
이번 시즌 내내 한 번도 ‘크게’ 흔들리지 않았던 최수원의 피칭이 ‘크게’ 삐거덕거리는 것을 모두가 느꼈다. 그리고 그 묵직함은 조금 더 커졌다.
하지만 지금 조유진은 저 둘의 대화를 지켜보면서 어째서인지 그 커졌던 묵직함이 조금은 줄어드는 느낌을 받았다.
그리고 대기 타석.
강라온은 그 모든 대화를 차단한 채 전광판을 노려봤다.
그가 바라보는 것은 지금 전광판에 크게 쓰인 1:0이라는 숫자일까?
아니, 아니다.
강라온이 바라보는 것은 그 1:0 너머에 있었다.
홈 경기.
사직구장을 가득 메운 팬들.
15년 만의 1위 탈환.
하늘을 수놓을 폭죽들.
그리고 그 모든 것을 결정지은 누군가의 역전포.
좋은 수비 뒤에는 좋은 공격이 따라오기 마련이다.
그의 눈에는 그 가능성이 보였다.
타석의 이정훈이 조창혁의 초구를 기다렸다.
토종 투수 가운데 최강.
아니, 솔직히 1년에 180이닝을 넘게 꾸준히 먹어주는 내구성과 시즌 평속이 157.1km/h가 찍히는 구속은 외인 투수까지 다 하더라도 최강을 다툴 만하다.
괜히 메이저에서 데려가려는 투수가 아니다.
근데 그게 뭐 어떻다고.
조창혁보다 더 빠른 공을 던지는 최수원이도 오늘 1회에 안타만 두 개에 그중 하나는 홈런으로 두들겨 맞고 저렇게 인상을 찌푸리고 있다.
초구.
156.9km/h의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깔끔한 헛스윙.
“내가 저 선배 저럴 줄 알았어.”
아, 그게 뭐 어떻다는 말은 취소.
확실히 157짜리 공은 좀 어떻다.
이정훈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크게 심호흡했다.
하지만 그래서 이게 영 못 칠 공인가.
‘그럴 리가.’
본인피셜 팀에서 두 번째로 잘생긴 남자 이정훈이 다시 타석에 우뚝 섰다.
조금 전보다는 살짝 작은 자세로.
-딱!!
그리고 끈질기게.
-딱!!!
그렇게 자신이 가장 잘하는 방식으로.
-뻐엉!!
조창혁이 던진 아홉 번째 공이 포수 미트를 꿰뚫었을 때,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마린스의 선두타자 이정훈이 체인지업을 잘 골라내며 결국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합니다!!]
강라온의 차례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