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4화. 선두(7)
비는 그쳤지만, 날씨는 여전히 우중충했다.
그리고 그 우중충한 날씨 속에서 나는 오늘 또 충실하게 몸을 풀었다.
“장마 기간이라 그런가? 날씨가 영 구질구질하네. 이러다 오늘 또 비 오는 거 아니야?”
“야, 한국에 장마 없어진 지가 언젠데. 일기예보에 오늘 흐리지만 비는 안 올 거라잖아.”
“일기예보는 어제도 틀렸었잖아. 강수확률 40%라고 하더니 아주 폭우가 쏟아졌잖아.”
“그건 그렇지······.”
그저께 브레이브스와의 1차전에서 승리한 날.
비록 돌핀스도 승리를 하는 바람에 15년 만의 1위 등극은 실패했지만 규만 선배는 약속처럼 팀원들에게 양곱창을 시원하게 쐈다.
아끼는 맛집을 갔다고 했는데 다들 사양하지 않고 먹는 바람에 고깃값만 거의 400만 원이 나왔다고 들었다. 나도 양곱창 좋아하는데······. 꾹 참고 돌아가 루틴에 맞춰서 몸을 만들었건만 우천 취소라니.
하루를 더 쉬는 거긴 했지만 몸이 특별히 더 좋아졌다는 느낌은 없었다.
오히려 박자가 한 박자 밀리는 바람에 뭔가 미묘한 느낌이다.
다만 언론쪽은 지금 상황을 상당히 좋아하고 있었는데 우천 취소로 경기가 한 경기 밀리는 바람에 브레이브스에서 선발을 하나 건너뛰고 에이스인 조창혁을 투입하기로 결정한 덕분이었다.
[마린스, 15년 만의 1위 등극을 건 토종 에이스 맞대결!!]
[160을 던지는 토종 선발간의 맞대결!!]
사실 학폭이의 이미지는 그리 좋지 못했다.
전통적으로 우리나라는 야구 잘하면 다 용서해주고 그런 아름다운 문화가 좀 있는 편이었는데 최근 들어 그런 전통문화가 좀 사그라들었다.
게다가 그 학교폭력이라는 것이 또 워낙에 예민한 문제인데다가 보통 문제 일으키고 그런 애들은 국가대표 경기 같은 거에서 태극마크 달고 활약하는 걸로 좀 물 타고 그랬었는데 얜 아예 국가대표 경기 출장 자체가 안되다 보니 그것도 불가능했다.
게다가 브레이브스가 또 인기팀이 아닌 점 역시 크게 한몫했다. 아마 엘리츠나 마린스, 호크스, 그리핀즈와 같은 인기 팀 소속이었다면 언론이나 여론도 조금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덕분에 기사의 제목을 저렇게 무슨 토종 맞대결 같은 느낌으로 뽑혔지만, 그 내용을 잘 살펴보면 브레이브스는 마린스의 1위 등극을 위한 제물. 그리고 학폭이는 나의 7승 달성을 위한 제물 같은 느낌으로 서술이 되어 있었다.
딴생각을 너무 하면서 공을 던진 탓일까?
손에서 공이 좀 많이 빠졌다.
-뻐엉!!
“와우, 굿 캐치.”
“이 정도야 뭐, 기본이지.”
정말이지 동물적인 반사신경이었다.
이걸 몸으로 막아내는 것도 아니고 미트로 받아내다니.
잠깐의 몸풀기 훈련이 끝났다.
“쪼유, 근데 내가 진지하게 궁금한 게 있거든.”
“뭔데?”
“너 대체 야구를 왜 하는 거냐?”
나의 질문에 쪼유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답했다.
“뭐래, 야구를 왜 하냐니. 그야 당연히 잘하니까 하는 거지.”
“아니, 그래, 프로가 될 정도면 잘하는 건 맞긴 하지. 근데 내가 볼 때 너의 그 짐승 같은 반응속도면 차라리 저기 축구 골키퍼 같은 거 했으면 잘하지 않았을까 싶어서.”
진심이었다.
내가 볼 때 쪼유는 그냥 이 짐승같은 순발력을 최대한 발휘할 수 있는 축구 골키퍼 같은 걸 했으면 진짜 국가대표를 넘어 유럽 진출도 꿈은 아니지 않았을까? 마치 이주혁이 야구 대신 육상을 골랐으면 한국 육상에 큰 별이 될 수도 있었던 것처럼 말이다.
“스읍······. 그런가? 근데 축구는 어지간히 잘하지 않아서는 먹고 살기 힘들잖냐. 솔직히 축구에서 나 정도 위치면 프로도 좀 애매하지. 안 그래?”
“뭐 그건 또 그렇지. 근데 너 초딩 때부터 야구 하지 않았냐? 어린 나이부터 그런 생각을 하고 야구 시작한 거면 꽤 현실적이었네?”
“아니, 야구 시작한 건 그냥 아빠가 야구 팬이라서 야구하면 용돈 많이 준다 길래 한 건데.”
아, 아버님······.
***
-뻐엉!!!
“굿볼. 선배님 공 아주 좋습니다.”
“그러냐?”
최진웅이 조창혁을 향해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 최수원 그 새끼랑 비교하면 좀 어떻냐?”
“어휴, 비교할거리나 되겠습니까? 최수원이야 아직 한참 풋내기죠. 걔 던질 줄 아는 거라고는 속구랑 커브밖에 없습니다. 슬라이더랑 체인지업은 진짜 흉내만 내는 수준이고요. 그날 경기는 사람들이 다 속았던 겁니다.”
“새끼 야부리 털기는. 근데 네 말대로면 별로 다를 것도 없네. 나도 굳이 따지자면 속구랑 슬라이더만 좀 제대로지 스플리터는 흉내만 내는 수준이잖냐.”
“다르죠. 완전 다르죠. 선배님 스플리터랑 걔 슬라이더, 체인지업은 비교할 수준이 못 됩니다. 이거 야부리가 아니라 진짜 제가 다 받아본 입장에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그래?”
조창혁이 입꼬리를 쓱 들어 올렸다.
그 표정에 최진웅이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 마린스의 차기 안방마님 자리가 예약돼있던 자신이 어쩌다가 여기까지 흘러와서 저딴 놈 비위나 맞추고 있어야 하는지에 대한 자괴감이 물밀듯이 밀려온다.
“야, 너 부산 오래 있었으니까 여기 잘 알지?”
“네, 당연하죠.”
“오늘 끝나고 승리 기념으로 내가 한턱 쏠 테니까, 제일 화끈하고, 제일 비싼 곳으로 예약해놔라. 어차피 내일 쉬는 날이니까 아주 제대로 놀아보자.”
“술도 파는 곳으로 예약합니까?”
“새끼가, 지금 장난하나. 물 좋은 곳으로 예약해둬라. 알아들었냐?”
“네!! 알겠습니다!!”
물밀듯 밀려오던 자괴감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순간이었다.
***
[자, 오늘 마린스와 브레이브스의 경기. 이번 시즌 최수원 선수와 조창혁 선수의 두 번째 맞대결입니다.]
[지난 맞대결은 신인 최수원 선수의 압승으로 끝이 났었죠?]
[네, 맞습니다. 그 경기에서 최수원 선수가 KBO 역대 16번째 노히트를 기록했었습니다.]
[심지어 그게 다가 아니었죠. 그날 조창혁 선수를 상대로 홈런까지 뽑아냈었습니다.]
[하지만 그날 경기 이후로 조창혁 선수도 정말 각성을 한 것처럼 대단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조창혁 선수의 최근을 보면 약간 매너리즘이라는 게 보이긴 했거든요.]
[맞습니다. 많은 사람이 조창혁 선수를 보고 상위리그로 하루라도 빨리 보내야 하는 선수가 여기서 너무 오래 재능 낭비를 하고 있다. 뭐 그런 이야기를 했었죠.]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최수원 선수가 조창혁 선수의 승부욕에 불을 당겼다. 뭐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캐스터 이주형과 해설위원 박동식.
두 사람은 정해진 대로 이야기를 주고받으면서도 참 이것도 곤욕이라고 느꼈다. 경기의 흥행을 위해서 조창혁과 최수원의 라이벌 구도를 만들고 있었지만, 솔직히 두 선수는 이번 시즌 보여준 것만 비교하자면 감히 비교할 거리도 되지 못하는 선수였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박동식은 또 한 번 최수원의 재능이 얼마나 경이로운 것인지를 실감했다.
최수원과 비교할 거리도 되지 못하는 조창혁조차도 KBO에서는 압도적인 재능으로 매너리즘을 느낀다고 평가 받는다. 그렇다면 최수원에게 이 KBO는 과연 어떻게 느껴질까? 어쩌면 지금 이 녀석이 여기 KBO에서 뛰는 것은 단순한 시간 낭비인 게 아닐까? 하루라도 빨리 빅리그로 건너 가서 불멸의 기록을 세워야 하는 것이 아닐까?
‘아니, 아직 그 정도는 아니야. 타자로서의 완성도는 물론 나무랄 것이 없지만 투수로는 성장세가 뚜렷해. 아마 그대로 빅리그에 갔더라면 오히려 투수로의 성장은 지금보다 더뎠을 거야.’
하지만 다음 시즌은?
그리고 그 다음 시즌은?
과연 최수원에게 KBO에서 몇 년이라는 시간을 보낼 필요가 있는 것일까?
자타가 공인하는 흑화해버린 마린스 팬 박동식 해설위원.
그의 머릿속에 자신도 모르게 요즘 인터넷을 떠도는 이야기처럼 이건 마린스가 ‘대승적’으로 최수원을 놔줘야 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스쳤다.
“아니지, 아니야. 왕조 건설이 달렸는데. 그게 무슨 말도 안 되는······.”
“박동식 위원님?”
“아, 죄송합니다. 제가 잠깐 딴 생각을 했네요.”
광고가 끝나기까지 10초.
그의 시선이 다시 경기장으로 향했다.
사직구장.
다른 곳보다 10인치 높게 솟은 마운드라는 이름의 작은 언덕.
그 꼭대기에 서 있는 남자가 자신의 모자를 고쳐 썼다.
경기가 시작됐다.
***
오늘 브레이브스의 1번 타자는 지난 경기에서 시즌 1호 홈런을 기록했던 강호창이었다.
경기장의 엄청난 야유가 강호창에게 쏟아졌다.
-우우우
오늘 사직 야구장은 만원. 경기 결과에 따라서 15년 만에 리그 1위에 오르냐 마냐 하는 상황이었으니 너무나도 당연한 일이었다.
지난 경기와 마찬가지로 그 야유 속에서도 강호창은 상당히 침착해보였다.
4년 50억을 차버리고 4년 45억에 브레이브스로 갔다고?
마린스 팬들은 돈이 아닌 다른 이유때문에 서울로 떠난 그에게 더 큰 배신감을 느꼈다지만 솔직히 같은 선수로 이해 못 할 결정은 아니었다.
기분 좋게 일하고, 사회적으로도 칭찬을 받는 직장.
사내 분위기도 영 별로인데, 온통 비난만 해대는 직장.
이건 연봉 차이가 좀 나도 전자를 택하는 사람은 존재할 수밖에 없다.
심지어 포스트시즌을 나가고, 만약 우승까지 한다면 더해지는 보너스 금액은 그 연봉 차이마저도 좁혀준다.
하지만 강호창도 이번만큼은 그 선택이 잘못된 선택이었음을 실감하고 있을 것이다.
10년 가까운 세월을 열심히 버티다가 마침내 이직에 성공했는데, 이직하자마자 원래 있던 회사가 대박을 내는 격이었으니까.
그러니 아마 더 이를 악물고 뛰는 것이겠지.
저 야유가 틀렸음을 증명하기 위해서.
물론 내가 이렇게 강호창의 마음을 다 이해한다고 해서 그를 봐주고 어쩌고 할 생각은 없었다.
초구.
가장 빠른 공.
!?
-딱!!
아차 했는데, 역시였다.
손에서 좀 빠졌는데 커맨드가 완벽하게 흔들렸다. 복판으로 향한 속구를 강호창이 제대로 두들겼다.
높게 뜬 타구.
배럴타구라고 하기에는 각도가 너무 높았다. 보통의 팀이라면 외야에서 가볍게 처리할만한 공이었다.
그래, 보통의 프로팀이라면 말이다.
물론 우리는 마린스이기는 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지금 나는 그리 불안하지 않았다.
분명 시즌 초였다면 이루타. 운 없으면 삼루타. 개그감이 물오른 날이면 인사이드 파크 홈런도 생각할만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지난 몇 달.
투수로서 내가 성장했던 것처럼 우리 외야의 가장 넓은 범위를 커버하는 이주혁 역시 성장했다. 이제 그는 단순한 달리기 선수가 아니었다. 강호창의 빈자리를 훌륭하게 메워주는 나쁘지 않은 중견수였다.
-탁
아주 가벼운 캐치.
“아웃!!!”
보통 내가 이런 기대를 하면 항상 같은 패턴으로 멍청한 짓을 하는 것이 마린스였다. 하지만 더 이상 그런 마린스는 없었다.
시즌 중반.
우리는 분명 성장했다.
그리하여 드디어 보통의 프로팀처럼 야구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두 번째.
타석에 찬민이 형이 올라왔다.
햄스트링이 나가지만 않았더라면 메이저리그까지도 노려볼 수 있었던 유격수.
하지만 이제는 뚜렷한 약점이 생겨버린 전형적인 AAAA급 선수.
시작은 속구였다.
-뻐엉!!!
존 깊숙한 코스 완벽한 로케이션.
노린 것보다 살짝 더 깊숙하게 들어간 속구.
찬민이 형의 방망이가 나오지 못했다.
“스트라잌!!!”
영리한 선택이었다.
이건 건드려봤자 어지간하면 그대로 내야 땅볼이 될 만큼 좋은 공이었다.
그리고 두 번째.
찬민이형의 약점은 뻔했다.
빠른 공 뒤에 오는 체인지업.
설사 체인지업의 구위가 좀 약해도 통한다.
바깥 코스 낮은 곳을 향하여
139.4km/h의 체인지업이 날았다.
-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