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3화. 선두(6)
사실 공이 좀 높게 들어오는 것을 인지했다고 그걸 바로바로 쳐낼 수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건 야구를 너무 쉽게 보는 것이다. 야구는, 타격은 그렇게 쉬운 게 절대 아니다.
근데 여기 야구를 좀 쉽게 하는 남자가 타석에서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강라온!! 초구 타격!! 1, 2루 간을 꿰뚫는 빠른 타구가 내야를 벗어납니다!!]
우리 팀에는 피지컬적으로 매우 훌륭한 녀석들이 많았다.
쪼유나 이주혁 같은 애들을 보면 진짜 저런 피지컬로 저렇게 야구 하기도 쉽지 않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 정도다. 최신형 컴퓨터에 윈도우 xp가 깔려있는 걸 보는 느낌이랄까? 반면 강라온은 그 밸런스가 아주 훌륭하다.
피지컬도 그 녀석들만큼은 아니지만, 상당히 훌륭하고 그걸 뒷받침해주는 기술적인 완성도도 제법 높다. 쉽게 이야기하자면 쪼유나 이주혁은 거의 메이저를 노릴만한 포텐셜, 아니 어쩌면 메이저에서도 올스타를 노릴 만한 육체적 잠재력이 있지만 그게 개화할 가능성이 0.1% 미만이라면 강라온은 메이저를 노릴만한 포텐셜까지는 아니지만 안정적으로 AAAA급, 혹은 메이저 내야 백업을 노릴만한 선수랄까?
강라온이 1루에서 씨익 웃어보인다.
요즘 타격감이나 전체적인 컨디션이 좀 별로였는데 방금 이 타석을 기점으로 컨디션이 살아난다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타석에 3번 타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앞선 타석에서는 모두 홈을 밟았죠?]
[네, 오늘 경기 마린스의 2득점은 모두 최수원 선수가 만들어낸 득점입니다. 1회 말에 솔로 홈런포, 그리고 4회 말에 볼넷으로 출루 후 연달아 도루에 성공하며 노형욱 선수의 희생 플라이에 홈을 밟았습니다.]
[과연 이번 타석은 어떤 모습을 또 보여줄 수 있을지. 아, 지금 브레이브스의 박유성 감독이 마운드에 직접 올라갑니다. 투수 교체를 생각하는 걸까요?]
[글쎄요, 오늘 최민혁 선수 공 상당히 좋았거든요. 투구 수도 아직 여유가 좀 있고, 개인적으로는 조금 이른 타이밍이 아닌가 싶은데요.]
브레이브스의 감독이 마운드에 올랐다.
글러브로 입을 가렸음에도 또렷하게 보이는 최민혁의 표정은 당연히 좋지 않았다. 제법 길게 느껴지는 대화가 오고 갔다.
[아, 박유성 감독 그대로 마운드를 내려옵니다.]
대체 무슨 대화가 오고 갔던 것일까?
놀랍게도 브레이브스는 나에게 자동 고의 사구를 사용하지 않았다.
최민혁의 초구.
바깥쪽 완전히 빠지는 코스.
솔직히 나는 저들이 말하던 보이는 것보다 높게 들어온다는 말을 잘 이해할 수 없었다. 왜냐하면 내 눈에는 그냥 딱 이 높이로 들어오는 게 보였으니까.
-뻐엉!!
155.3km/h
당연히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0.
타자가 공을 보는 매커니즘은 간단하다. 처음 출발하는 공의 위치와 중간 즈음에 도달했을 때 공의 위치를 확인하는 것으로 최종적으로 도달할 공의 궤적을 유추한다.
물론 여기에는 매우 많은 경험이 필요하다. 공이 저기서 시작해서 저쯤 오면 마지막에는 이쯤 오겠구나하는 것은 결국 경험이기 때문이다.
이래서 투수들의 경우 변화구의 터널링이 길면 길수록 좋다는 거다. 변화의 시작 지점이 늦어지면 늦어질수록 타자의 예측이 틀릴 확률이 높아지는 거니까.
그리고 모든 돈 되는 스포츠가 그렇듯 이에 관련된 연구들은 매우 많이 존재한다. 그 가운데는 사람의 선천적인 재능에 관한 부분이 있었는데 내가 관련 연구에 참여를 했던 적이 있어서 잘 기억하고 있다.
“중측두피질, 그러니까 대뇌의 두정엽 하부부분, 측두엽과의 경계지점 즈음에 물체의 이동경로를 파악하는 기능이 있다는 건 이미 20년도 전에 밝혀진 사실입니다. 저희는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가······(중략)······. 결론적으로 말해서 최수원 선수의 이 부분 기능은 정말 압도적입니다. 저희는 최수원 선수의 불가사의할 정도로 정확한 타격이 바로 이 부분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네.”
아무튼 뭐 훈련을 통해서 더 나아질 수 있다고 하길래 훈련법을 받아오긴 했었는데 생리학자라느니 책상물림 과학자 놈들이 준 방법들이 다 그렇듯 딱히 효과를 보진 못했다. 그래도 한 가지 확실하게 알 수 있었던 것은 내가 다른 사람들보다 공의 궤적을 잘 볼 수 있는 것은 바로 그런 이유 때문이라는 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도 최민혁의 공이 그리는 궤적은 내 눈에는 매우 선명하게 보였다.
지금처럼.
-부웅!!!
“스트라잌!!”
아, 물론 슬라이더는 좀 예외다.
얘 오늘 슬라이더가 진짜 미쳤다. 이게 특히 복판으로 던져서 유혹하는 것도 아니고 아슬아슬하게 바깥쪽 경계로 던져 버리니까 더 헷갈린다. 게다가 내가 심리적으로 좀 치고 싶은 마음이 커서 그런지 방망이가 자주 나가게 되는 것도 있다.
확실히 매일 볼넷만 당하다 보니 나도 좀 쌓인게 있긴 있는 것 같다.
-뻐엉!!
세 번째 또 슬라이더.
이번에는 방망이가 나가지 않았다.
이걸로 볼카운트는 2-1.
최민혁이 1루로 견제구를 뿌렸다.
-뻐엉!!
강라온이 자신의 앞섶을 툭툭 털어낸다.
내가 못 본 사이에 뭔가 둘 사이에 약간의 신경전이 오고 간 듯싶었다. 하긴, 앞선 이닝에서 내가 도루를 두 번 연속으로 했으니 최민혁도 신경을 안쓸 수가 없겠지.
하지만 지금 주자에게 신경을 분산할 때가 아닐 텐데?
지금 네가 상대하는 타자는 야구의 역사를 통틀었을 때 겸손하게 말해서 다섯 손가락, 객관적으로 말하면 세 손가락, 약간의 현역 프리미엄을 섞어서 말하면 GOAT라고 할만한 타자다.
-뻐엉!!
아, 물론 그런 타자도 방망이가 닿지 않는 곳으로 들어가는 공은 못 친다.
존에서 완벽하게 빠지는 슬라이더.
이걸로 볼카운트는 3-1.
마운드에서 감독이랑 무슨 이야기를 주고 받았는지 조금 알 것 같았다. 어쨌든 승부를 해보고 싶다. 그러면 존 안쪽으로 공은 절대 주지 말아라. 대충 그런 내용을 주고받았겠지.
그리고 네 번째.
이번에는 살짝 존 안쪽으로 몰리는 공.
근데 이거 슬라이더다.
잠깐의 망설임.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뻐엉!!
존 밖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볼넷이다.
[아, 최수원 선수가 침착하게 공을 골라내며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합니다.]
살짝 무리했으면 어떻게든 칠 수는 있었을 것 같은데, 이건 아무리 나라도 도저히 좋은 타구로 만드는 게 무리였다. 아마 나 이전에 가장 위대한 타자로 불렸던 테드 윌리엄스 양반도 이런 공은 절대 치는 게 아니라고 이야기했을 게 분명하다.
원 아웃에 주자 1, 2루.
타석에 노형욱이 올라왔다.
묵직했다.
그래, 그래도 그나마 몇 번이나 최거노를 보여준 노형욱이 있어서 내가 방망이를 휘둘러라도 볼 수 있었다.
그래도 오늘 앞선 두 타석 모두 워닝트랙까지 날아가는 타구를 보여줬던 노형욱이라면 지금 상황에서 뭔가 한 건 정도는 보여주지 않을까?
내가 너무 초인적인 성적을 거두고 있는지라 종종 묻히는 경향이 있었지만, 노형욱 정도면 그래도 충분히 리그 최고 수준의 타자다. 내가 슈퍼맨이라면 노형욱은 물고기와 대화하는 아쿠아맨 정도는 된달까?
최민혁이 공을 뿌렸다.
-뻐엉!!
존을 빠져나가는 슬라이더.
노형욱이 속지 않았다.
볼카운트 1-0.
잠시 호흡을 고른 노형욱이 다시 타격 자세에 들어갔다. 마치 얼른 던지라고 재촉이라도 하는 것 같은 압박이다.
최민혁의 얼굴은 그리 좋지 못했다.
그 와중에 강라온은 또 세 걸음의 리드폭을 가져가면서 최민혁을 압박했다. 그렇다면 나도······.
[아, 주자들의 리드폭이 조금씩 커지고 있습니다. 이거 여차하면 더블스틸이라도 하겠다는 표현 같은데요. 앞서 연속으로 도루를 허용했던 최민혁 선수 입장에서는 상당히 부담감이 크게 다가올 것 같습니다.]
“야, 너희 얼마 전까지 같은 팀이던 애한테 너무 악랄한 거 아니냐? 이 정도면 트라우마 남겠다.”
“민혁 선배가 저보다 두 살이나 많은데 애는 아니죠. 그리고 전 선배의 단단한 마음을 믿습니다.”
“내가 볼 때 민혁이는 그런 믿음 필요 없을 거 같은데?”
두 번째.
바깥 코스 속구.
하지만 많이 빠졌다.
볼카운트 2-0.
그리고 노형욱은 지금 이순간 정답이 무엇인지를 아는 것처럼 행동했다. 타석에서 물러나지 않고 그대로 잠깐 풀었던 자세를 다시 잡으며 세 번째 공을 재촉했다.
최민혁이 잠깐 뒤로 물러나 로진백을 두들기며 나와 강라온을 한 번씩 바라봤다.
점수는 2:2.
타석에는 이번 시즌 열다섯 개의 홈런을 기록 중인 노형욱.
과연 최민혁은 이런 순간에도 자신의 공을 믿고 던질 수 있을까?
세 번째.
-부웅!!!
“스트라잌!!!”
존 복판으로 향하는 것 같았던 공이 바깥으로 절묘하게 빠져나갔다.
슬라이더.
볼카운트 2-1.
드디어 첫 번째 스트라이크였다.
하지만 노형욱은 조금도 흔들리지 않았다. 처음 타석에 올라왔던 모습 그대로 네 번째 공을 재촉했다.
내가 만약 저 상황이었다면 어땠을까?
아, 물론 노형욱의 상황 말고, 최민혁의 상황을 말하는 거다.
솔직히 지금 내가 노형욱의 상황이라면 당연히 그냥 땡큐다. 볼카운트 0-2에서도 투수가 도망만 가는데 스트라이크 하나 내줬다고 심적으로 불편해질 이유가 없다. 믿을 건 구위밖에 없는 투수가 쫄았다면 그건 다 끝난 게임이니까.
근데 그렇게까지 생각해보니까 내가 최민혁의 상황이라면 어떤 선택을 해야 했는지가 조금 더 명확해졌다.
가진 게 구위밖에 없는 투수라면 저기서는 그냥 배짱 싸움으로 가야 한다. 어려운 타자를 상대로 볼넷을 줘도 상관없는 피칭으로 장작을 쌓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건 볼넷을 줘도 상관없다는 담대한 마음의 결과물이지 쫄아서 도망가는 마음의 결과물이면 안 된다.
그것은 같은 볼넷이지만 명백히 다르다.
-뻐엉!!
흔들리는 컨트롤.
최민혁의 공이 존 밖으로 빠져나갔다.
볼카운트 3-1
포수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무슨 말이 오고 갔을지는 조금 뻔했다.
대충 뭐 힘내라. 오늘 너 공 진짜 좋다. 맞아도 안 넘어가고 외야 플라이면 최악의 결과라고 해봐야 투아웃에 2, 3루다. 수비 믿고 네 공을 던져라. 뭐 그런 이야기겠지.
나와 강라온이 세 걸음의 리드폭을 유지했다.
그리고 다섯 번째.
최민혁이 그런 상황에서 투수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선택이자, 최악의 실수를 저질렀다.
복판에 내지르는 156.1km/h의 빠른 속구.
그것은 도망가지 않는 공이 아니었다.
쌓을 만큼 쌓은 카운트 앞에서 볼넷을 줘도 상관없다는 담대한 마음 대신 볼넷보다는 그냥 수비를 믿고 던지는 게 낫겠지 하는 안일한 마음의 표출이었다.
물론 오늘 최민혁의 속구는 매우 훌륭했다.
아마 타석에 선 타자가 이규만 정도였다면 그런 안일한 마음의 표출로도 충분했을 것이다. 내가 슈퍼맨이라면 이규만은 기껏해야 팝콘 먹는 배트맨 정도에 불과했으니까.
-딱!!!
노형욱의 방망이가 최민혁의 다섯 번째 공을 두들겼다.
***
“아······. 저 멍청한 새끼.”
조창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아니, 도망갈 거면 끝까지 도망가던지.
이제 고작 6회 말.
하지만 그는 노형욱의 큼지막한 타구를 보는 순간 오늘 경기가 끝났음을 직감했다. 그리고 그 직감은 그대로 현실로 이어졌다.
[마린스, 브레이브스와의 1차전 6:2 압도적 승리!!]
[돌핀스의 극적 역전승!! KBO리그, 한층 더 치열해지는 선두 경쟁!!]
[마린스와 브레이브스 2차전 경기 우천 취소!!]
그리고 7월 1일.
마린스와 브레이브스의 경기.
조창혁과 최수원의 두 번째 맞대결이 성사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