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선두(4)
“아니, 자꾸 묵직하긴 뭐가 묵직하다고······. 하다 못해서 쪼유도 안타를 치는 마당에.”
“야, 잠깐만. 하다 못해라니. 말이 좀 이상한데? 나 지금 100타석 이상 소화한 포수들 가운데 타율 4위거든?”
“그래, 최수원. 너 가만 보면 쪼유를 좀 무시하는 못된 버릇이 있어. 포수 타율 4위면 어? 엄청 잘하고 있구만.”
“2할 3푼······. 아니, 아니다. 방금 안타 쳤으니 2할 4푼인가?”
나의 말에 이정훈이 눈을 끔뻑끔뻑 두 번 감았다가 떴다.
“엥? 포수 타율 4위가 2할 4푼이야? 포수들 요즘 엄청 잘하지 않나? 블레이즈에 그 김승진이도 그렇고 피닉스 간 진웅이도 제법 잘 치잖아. 그리고 그 누구냐 피닉스에 신인 걔도 엄청 잘 치는 걸로 기억하는데?”
“진웅 선배는 아직 100타석 못 채웠고요. 그리고 4위는 4위인데 3위랑 7푼, 아니 이제 6푼 차이 나는 4위요.”
“야!! 쪼유, 너 인마!! 사람이 양심이 있으면 그건 4위라고 하면 안 되지.”
쪼유와 이정훈이 티격태격하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야, 근데 진짜 묵직하지 않았냐?”
“글쎄요. 전 잘 모르겠던데. 평소랑 별 다를 게 없어서요.”
“한 놈은 너무 괴물이라서 모르고, 또 한 놈은 4푼이라서 모르고. 어휴, 나처럼 센스티브한 사람은 도무지 버틸 수가 없네.”
“아니, 4푼이라니. 선배 말씀이 좀 심하시네요. 물론 사실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사실적시 명예 훼손은 중범죄라고 생각합니다.”
“뭐라는 거야. 멍청이가.”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그리고 그사이 강라온이 또 시원한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확실히 저 슬라이더는 매우 까다롭다. 좌타자인 쪼유조차도 종무브먼트 때문에 방망이가 헛돌 정도였으니까.
그렇게 대기 타석에서 기다린 보람도 없이 우리의 3회 말 공격이 끝났다.
디에고의 커터가 브레이브스의 타선을 억제했다.
-딱!!!
타석에서는 2타석 연속 헛스윙 삼진으로 오늘 영 좋지 못한 모습을 보여주던 강라온이었지만 수비는 여전히 훌륭했다. 물론 이전에 날아다닐 때만큼 여유 넘치는 모습은 아니었지만 컨디션이 내려왔는데 이만한 모습을 보여준다면 7월 올스타 브레이크 때 좀 쉬고 오면 금방 다시 좋은 모습을 보여줄 수 있지 않을까 싶다.
2사에 주자 1루.
타석에 브레이브스의 2번 타자 강호창이 올라왔다.
-우우우우
32세.
중견수.
지난겨울 마린스에서 브레이브스로 이적한 그에게 사직 구장에 모인 마린스의 팬들이 아낌없는 야유를 보내주었다. 앞선 타석에서도 그랬지만 이번 타석 역시 강호창은 그들을 바라보지 않았다.
앞서 최민혁에게 보내던 반응과 지금 강호창에게 보내는 반응이 다른 이유는 너무나도 명확했다. 팀이 트레이드로 내보낸 선수와 자신의 의지로 팀을 나간 선수가 같을 수는 없었다.
게다가 강호창이면 프랜차이즈라는 이름을 붙일 정도는 아니지만 준수한 수비와 타격으로 마린스에서 나름 팬들도 탄탄하던 선수였다.
“때론 삶에는 돈보다 중요한 것들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번 제 선택은 그런 중요한 것들 가운데 하나입니다.”
강호창이 FA로 팀을 옮기며 했던 인터뷰의 한 대목이다. 개인적으로 생각할 때 그리 좋지 못한 인터뷰라고 느꼈다.
아까 조유진이 그러지 않았던가.
사실적시 명예 훼손은 중범죄라고.
원래 누군가를 놀릴 때도 그 사람의 진짜 약점으로 놀리면 안 되는 법이다. 팩트로 때리는 건 그만큼 아픈 법이니까.
강호창이 지난 겨울 마린스에게 제시 받았던 금액은 옵션 포함 4년 50억. 그리고 브레이브스가 제시한 금액은 옵션 포함 4년 45억이었다. 5억이나 더 작은 금액. 심지어 옵션의 달성 조건 역시 마린스 쪽이 더 쉽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었으니 확실히 돈 때문에 팀을 옮긴 건 아닌 셈이다.
문제는 그게 마린스 팬들에게 더 아프게 다가왔다는 점이었을 것이다.
결국 그들이 생각할 때 강호창은 ‘야 나 돈 아무리 줘도 꼴찌팀 뛰기 싫으니까 간다. 잘 있어라 꼴린스.’를 돌려 말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우우우우우
저 거대한 야유는 그에 대한 마린스 팬들의 응답이었다.
강호창이 담담한 표정으로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공을 기다렸다.
나도 야유를 받으면서 타석에 서본 적이 있긴 했다.
라이벌 팀의 야유라서 정신적 피해가 좀 덜하기는 했는데 제법 신경이 쓰이는 일이었다. 하물며 강호창은 얼마 전까지 자신이 뛰던 홈에서 자신을 응원하던 팬들이 보내는 야유다. 이게 신경이 안 쓰일 수가 없다.
아마도 이대로 이닝이 무난하게 종료되고 나의 타석에서 우리 공격이 시작이 될 테니 노형욱 돌아오면 잠깐 내가 떠올린 거 이야기나 해줘야겠다.
-딱!!
‘어?’
[강호창!! 살짝 몰린 공을 그대로 잡아 당겼습니다!! 높게 뜬 타구!! 쭉쭉 뻗어 나갑니다!!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 갔습니다!! 강호창!! 시즌 1호 홈런!! 4회 초. 이걸로 점수는 다시 1:1. 브레이브스의 강호창 선수가 경기를 원점에 돌려놓습니다!!]
[정말 침착하게 기다렸다는 것처럼 제대로 받아 쳤습니다. 강호창 선수, 그래도 시즌 10개 내외의 홈런을 쳐낼 만큼 파워가 있는 선수인데 이번 시즌 통 홈런 소식이 없었거든요. 마수걸이 홈런을 바로 작년까지 뛰던 이곳 사직구장에서 기록 합니다!!]
강호창이 오른손을 높게 치켜들고 1루를 향해 달렸다.
관중석의 반응은 당연히 매우 좋지 못했다. 저 새끼 저거 진짜 미친 건가? 아니, 싸움은 경기하는 상대 팀 선수랑 해야지. 왜 관중이랑 싸움을 하는 거지?
디에고가 미간을 찌푸렸다.
홈런 치고 세러머니 하는 놈들 대가리에 속구 꽂아 주고 싶은 건 투수에게는 어쩔 수 없는 본능이니 그것을 억누르기 힘들겠지.
아, 근데 그러고 보니 디에고 저 녀석 분명 작년에는 엘리트 소속으로 마린스 타자들을 상대로는 정말 극강의 포스를 자랑했었는데 왜 전직 마린스 타자한테는 홈런을 처맞는 거지?
뭐랄까······.
뭔가 소설이나 만화 게임 등에서 잉여하던 우리 편이 적이 되면 매우 강력한 적이 되어 나타나고, 강력한 포스를 뽐내던 적이 우리 편이 되면 잉여가 되는 법칙이 매우 충실하게 구현되는 느낌이다. 요즘에는 게임도 그딴 클리셰 쓰면 욕을 오지게 먹는데 현실이 무슨 게임보다 더 개똥 같은지.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그나마 이어지는 후속 타자를 깔끔하게 내야 땅볼로 돌려 세우며 추가점 없이 이닝을 마무리 지었다.
수비 이닝을 끝낸 야수들이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자자, 수고들 하셨습니다. 파이팅해서 다시 역전들 가시죠.”
가장 먼저 덕아웃에 돌아온 쪼유가 포수 장비들을 벗으며 크게 소리쳤다.
“형욱 선배?”
“어? 왜? 뭐 할 말 있어?”
“네, 그 제가 좀 생각을 해봤는데요. 그 저희가 아무래도 민혁이 형 피칭 폼 바뀐 것 때문에 좀 고생을 하는 느낌이에요.”
우린 최민혁의 공에 상당히 익숙하다.
근데 이게 브레이브스로 옮기고 피칭폼이 살짝 바뀌면서 익스텐션이 상당히 길어지고 그 길어진 익스텐션 만큼 릴리스 포인트가 좀 미묘하게 낮아졌다.
그러니까 다들 그 낮아진 포인트만큼 공이 출발하는 위치가 낮아졌고 따라서 공이 좀 낮게 깔릴 거라고 무의식 중에 판단을 하게 된다.
“근데 의외로 공이 좀 높게 뜨는 거죠. 아마 회전수에 변화가 생긴 게 아닐까 싶은데요. 결국 스윗스팟에서 아주 미묘하게 벗어나고 결과적으로 공이 묵직하다고 느끼는 게 아닐까요?”
“역시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구나.”
“아, 그러면 형욱 선배도?”
“아니, 난 내 생각은 아니었고······.”
형욱 선배가 힐끔 뒤를 바라봤다.
그곳에는 미트를 내려놓고 잠시 자리에 앉아 쉬고 있는 규만 선배가 보였다.
“뭐야? 언제부터 이야기 한 거에요?”
“2회 말에 규만 선배 타석 끝나고.”
“근데 왜 저한테는 아무 말도 안한거에요? 설마 이게 말로만 듣던 직장 내 따돌림?”
“따돌림은 무슨. 그냥 나는 너한테도 말해줘야 하는 거 아닌가 싶었는데 규만 선배가 알아서 잘하는 애한테 굳이 쓸데없는 말 해서 신경 쓰게 하지 말라고 하더라. 괜히 그거 알아보겠다고 신경 쓰다 자기 페이스 흐트러진다고. 못 하는 사람들끼리 해결책 찾아보자고 하시더라고.”
“에이, 페이스가 흐트러지긴 왜 흐트러집니까. 고작 이런 걸로. 아무튼 그러면 저도 나가서 한 번 체크 해볼게요. 제 생각이 맞으면 1루 나가서 엄지 치켜들던지, 아니면 깔끔하게 홈런 치고 돌아와서 말씀드릴게요.”
배트를 챙겨 타석으로 걸어갔다.
예전부터 느끼지만 규만 선배는 주장이라고 하기에는 모두와 묘한 벽이 있는 느낌이긴 했지만 그거랑 또 별개로 묘하게 나를 좀 어려워하는 느낌이 있다.
[4회 말. 타석에 앞선 1회 말 첫 번째 타석에서 선제 솔로 홈런포를 기록했던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브레이브스의 덕아웃. 역시 자동 고의 사구를 선택합니다.]
[현명한 선택이죠. 아직 전반기도 다 끝나지 않은 시점에 51경기에 출장하여 홈런만 27개. 4할 4푼 5리의 타율에 OPS가 1.869. 그야말로 KBO 역사상 최강의 타자입니다.]
[하, 이게 참 전반기도 다 끝나지 않은 시점에 27홈런도 놀랍지만, 7월을 코앞에 뒀는데 여전히 4할 중반의 타율이라는 건 더 어처구니가 없습니다. KBO에 물론 4할 타자가 없었던 건 아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KBO 원년인 1982년. 아직 선수들 간의 수준 차이가 심각하고 경기 숫자도 80경기밖에 안 되던 시절 이야기거든요.]
음, 체크 해보겠다는 말이 무색하게 깔끔한 자동고의사구.
최민혁이 나를 바라보며 어깨를 한 번 으쓱했다. 하지만 그 능청스러운 태도로도 눈동자에 뚝뚝 떨어지는 감정을 숨길 수는 없었다.
저것은 투쟁심이었다.
그래, 마린스에 있을 때는 점점 애가 맛이 가는 것 같더니, 확실히 브레이브스가 유망주를 잘 키우긴 잘 키우는구나 싶다. 게다가 학폭이도 인격적으로는 절대 닮아서는 안 되겠지만 선발의 마음가짐 같은 건 제법 배울만한 점이 있을 테니까.
[자, 타석에는 4번 타자인 노형욱 선수가 올라옵니다. 앞선 타석 아쉬운 담장 앞 외야 플라이로 물러났었죠?]
[네, 그렇습니다. 아마 백투백 홈런이 아닐까, 최민혁 선수도 심장이 덜컥 했을 거에요. 그도 그럴 것이 노형욱 선수 역시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타자거든요. 현재까지 홈런 수는 15개. 리그에서 여섯 번째로 많은 홈런을 기록 중입니다.]
노형욱이 1루에 선 나를 한 번 바라보고 마운드의 최민혁을 바라봤다.
침착한 자세로 타격 준비 자세에 들어간 그를 향해 최민혁이 세트 포지션에 들어갔다.
하나, 둘.
지금이었다.
[어? 1루에 최수원 달립니다!!]
익스텐션은 더 길어졌다.
하지만 피칭을 준비하는 자세의 타이밍 자체는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지난 스프링 트레이닝 때부터 나와 최민혁과 백하민은 꾸준히 함께 훈련해왔다. 그렇기에 그 타이밍을 파악하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았다.
최민혁이 흔들렸다.
-뻐엉!!!
존 밖으로 빠져나간 공.
서둘러 공을 받아낸 포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2루를 향해 공을 던지려 했지만 늦었다. 이미 2루가 코 앞이었다.
“세이프!!”
투수의 타이밍을 완벽하게 뺏어낸 도루.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의 먼지를 탁탁 털어냈다.
[4회 말 노아웃!! 최수원이 멋지게 도루를 성공시킵니다. 시즌 두 번째 도루입니다.]
[와, 잘 치고, 잘 던지는데 달리기까지 잘해버리다니. 최수원 선수 이건 진짜 뭐라 표현해야 할까요. 아, 그래. 야구선수. 야구선수 그 자체입니다.]
[이제 노아웃에 주자 2루. 득점권에 역전 주자가 올라왔습니다. 안타 하나면 다시 역전이 가능한 상황!! 노형욱 선수가 다시 타석에 섭니다.]
4회 말
1:1
노아웃에 주자 2루.
볼카운트는 1-0.
최민혁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