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8화. 선두(1)
“수원아, 오늘도 또 운동하는 거야?”
“네, 조금만 더 하고 가려고요.”
“시즌 중에 너무 그렇게 무게 치면 퍼질 텐데.”
“데이터 센터에서 조금 더 해도 괜찮다고 그러더라고요.”
“그래?”
옆에 서 있던 이정훈이 정지운의 목에 자신의 팔을 감았다.
“야야, 정지운이. 너나 잘 해 인마. 우리 수원이는 유전자 자체가 다른데. 게다가 아직 십대 아니냐 십대. 하루에 열 번도 치는 십대.”
“아니, 선배 여기서 갑자기 섹드립을 훅 들어오면 어쩝니까. 선배 말처럼 아직 십대도 있는데.”
“섹드립은 무슨 섹드립이야. 웨이트 하루에 열 번도 친다는 말인데.”
“아니······. 누가 웨이트를 열 번도 친다고 그럽니까.”
“새끼, 이거 요즘 좀 풀어줬더니 기강이 많이 헤이해졌다? 선배가 말하는데 토도 달고.”
“선배, 애초에 조인 적이 없는데 어떻게 풉니까.”
“아, 그건 그렇지. 암튼 수원아 적당히 쳐라. 그러다 뼈 삭는다.”
“섹드립 맞네!!”
시즌 중 웨이트 훈련에 관해서는 여러 가지 의견들이 많았다.
예전에는 시즌 중에는 아예 안한다는 게 대세이던 시절도 있었다는데 최근에는 주 2회 30분 정도씩은 바짝 해주는게 좋다는 게 또 대세이긴 했다. 물론 나이 많은 선수들의 경우는 회복력에 문제가 생기는 관계로 시즌 막판에 가면 점점 더 웨이트를 좀 거르는 경우도 많다.
다만 나의 경우는 돌아오기 직전 시즌까지도 루틴에서 주 2회 웨이트를 뺀 적이 없었다. 물론 지금 내가 하는 웨이트는 그때와는 많이 달랐다.
“왔어?”
“네, 코치님 어떻게 제가 드린 자료는 좀 어떠셨어요?”
“괜찮더라. 갑자기 시즌 중에 메뉴를 바꾼다고 해서 좀 당황은 했는데······.”
“하하, 죄송해요. 잭이 새로운 데이터를 좀 구했다고 해서요.”
“아니, 죄송할 건 없지. 나도 새로 공부도 되고 좋지.”
우선 트레이너의 꼼꼼한 마사지로 시작하여 근막을 충분히 풀어주고 짧은 시간 슈퍼세트로 구성된 웨이트를 수행했다. 한순간에 몸에 쌓인 에너지를 다 소비해버릴 것 같은 어마어마한 운동량.
그렇게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쥐어 짜낸 몸을 간신히 일으켜 스트레칭을 한다. 타자로 뛰던 시절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넓은 범위의 운동이었다.
“아아······. 코치님 좀 살살.”
“엄살은.”
스트레칭을 도와주고 곧바로 이어서 꼼꼼한 마사지까지.
확실히 고등학생 때와는 비교하기 힘든 서포트다. 사실 이런 지원도 KBO를 선택한 요소 중 하나였다. 물론 미국에 가도 이런 서비스를 받을 수는 있다. 빅리그에 콜업이 된다면 말이다.
하위 리그에서 뛸 때는 이 모든 것을 내 사비로 고용해야 한다.
가격도 가격인데 이 정도 수준의 서비스를 기대하기도 힘들다. 당장 마사지만 해도 이정도 수준의 마사지사를 전속으로 구하려면 년에 최소 10만 달러는 써야 한다. 심지어 인체에 대한 지식까지 제대로 대학에서 공부했다? 20만 달러에서 시작이다.
“자, 끝났다.”
“수고하셨습니다.”
“수고는 무슨. 다 돈 받고 하는 건데.”
“나중에 성공하면 자서전에 코치님 성함 꼭 넣겠습니다.”
“자서전에 안 넣어도 괜찮으니까 나중에 내가 창업하면 잊지 말고 와서 사진이나 한 방 박아주라.”
“당연하죠. 사진 박고, 제 홍보 채널 통해서 홍보도 널리 해드리겠습니다.”
이 양반 연봉이 4,600이라고 그랬나?
“코치님. 근데 여자친구는 아직 없으시죠?”
“왜? 소개팅이라도 해주게? 근처에 좋은 누나라도 있어?”
“아뇨, 없을 것 같긴 한데, 혹시라도 있나 싶어서요.”
그래, 가정도 없고 혈혈단신이다. 나중에 미국 진출할 때 스카웃 제의나 한 번 해봐야겠다.
시즌이 매우 빠르게 지나갔다.
***
3번 싸우면 1번은 이기고 1번은 지고 나머지 1번은 이기거나 지는 것이 정상적인 야구였다면 지난 십수 년 마린스는 꾸준히 야구를 하지 못했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27년 6월.
놀랍게도 마린스는 야구를 하고 있었다.
그것도 심지어 ‘이기는’ 야구를.
71경기.
47승 22패 2무.
시즌 단독 2위.
그야말로 무서운 기세였다.
특히 그 가운데 가장 무서웠던 것은 역시 최수원이었다.
타격은 사이클이다.
잘 치는 시점이 있으면 못 치는 시점이 있다. 미친 타격감을 보여주는 타자는 꾸준히 거르다 보면 언젠가 타격감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대부분 구단은 최수원을 거르고 또 걸렀다.
그가 타자로 출장한 50경기 동안 볼넷만 무려 91개. 그의 타석수가 227타석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볼넷이 타석의 4할에 달하는 터무니 없는 기록이었다.
그리고 최수원은 ‘그래, 솔직히 이쯤 되면 좀 타격감이 떨어졌겠지.’ 할 때마다 불방망이를 휘둘렀다.
127타수 56안타(2루타 11개, 3루타 3개). 그리고 26홈런.
0.441/0.656/1.189
“아니, 난 지금이라도 타자 전업 해야 한다고 본다.”
“뭔 헛소리야. 토종 선발 중에서 최수원보다 잘 던지는 투수가 몇이나 된다고. 아니 용병 다 포함해도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간다고 본다.”
“그래, 투수 잘 던지지. 나도 다섯 손가락은 모르겠고 열 손가락은 충분하다고 보는데 타격은 부정할 수 없는 역대 No.1이잖냐. 내가 아쉬워서 그런다. 아쉬워서. 전경기 출장하면 진짜 다시는 없을 기록 나올 것 같은데.”
“지금도 이미 그 다시는 없을 기록 페이스잖아.”
“아니, 비율은 그런데 누적이 문제지. 경기 수가 너무 부족해. 지금 시즌 67경기 했는데 타자로 50경기밖에 출장을 못했잖아. 전 경기 출장했으면 60홈런 무조건 깨는 건데 지금 56홈런 페이스야. 이대로는 한국 신기록도 장담 못 한다고.”
팬이고 전문가고 할 거 없이 최수원이 지금 당장 시즌 아웃 되지 않는 이상 무조건 MVP라는 것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이미 그의 비교 대상은 현재 같이 뛰고 있는 선수들이 아닌 KBO 역사상 가장 대단한 시즌을 치렀던 전설적인 선수들의 그것‘들’이었다.
타율은 KBO의 유일한 4할 타자.
홈런은 KBO의 단일 시즌 최다 홈런인 56홈런.
볼넷은 이제 시즌이 반도 지나지 않은 시점에서 이미 역대 최대치와 36개밖에 차이가 안 나는 상황이다. 사람들은 어쩌면 전반기를 끝내기 전에 역대 최대치를 갱신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할 정도였다.
게다가 출루율과 장타율은 KBO의 역대 최고 기록과 너무 크게 차이가 나서 비교 대상조차 없는 수준이었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야구가 개인전도 아니고 우승하려면 수원이가 공 계속 던져야지.”
“그건 그런데······. 아쉬워서 그렇지. 아쉬워서. 최민혁이만 브레이브스 안 보냈으면······.”
“그랬으면 박재혁, 고설민, 태지완 없어서 우리 지금 1위 싸움 못하고 있었겠지.”
“망할 마린스. 우리 팀이지만 무슨 저런 선수 데리고 압도적 1위도 아니고 1위 싸움을 하고있냐. 진짜 빡치네.”
***
─백강호: 야, 너희 오늘 졌다며? 우리는 또 이겼다.
─최수원: 그래서 홈런은 좀 치셨습니까?
─백강호: 이게 뭘 모르네? 야구는 원래 팀 게임이야. 홈런이라는 건 승리를 위한 도구지 목적이 될 수 없다고. 중요한 건 팀의 승리다.
─최수원: 그래서 홈런은?
─백강호: 너, 두고 보자. 다음 시리즈 안 봐준다.
─최수원: ㅇㅇ
스마트폰을 접었다.
최근 백강호의 연락이 부쩍 잦았다.
“누구야?”
“그냥 종종 근황 보고 하는 사람.”
다만 내용은 조금 달랐는데 그래도 홈런 개수로 좀 비빌 수 있을 때는 홈런 이야기를 주로 하더니 요즘은 팀 성적 이야기밖에 안 한다. 그걸로 봤을 때 이 연락을 안 받을 수 있는 방법은 팀 성적도 얼른 역전하는 것 뿐이다.
“아, 맞다. 이번에 애들이 단체로 우리 경기 관전 온다던데 내일 저녁에 시간 되지?”
“내일? 별 건 없는데. 애들이 갑자기 부산은 왜? 슬슬 후반기 리그 끝나고 이제 청룡기 준비할 시기 아니야?”
“걔들 전반기 리그 2위 해서 청룡기 못 나가잖아.”
“아······. 맞다. 그랬지.”
“드래프트 앞두고 지난 번 전체 1번의 기운 좀 받고 싶은 거 같더라고.”
“기운은 무슨······. 그리고 나중에 우리 서울 갔을 때 보면 되지 뭣하러 부산까지 온데?”
“너 그래놓고 서울 갔을 때 한 번을 안 나왔잖냐. 지들 딴에는 부산까지 오면 그래도 내려 온 성의가 있으니 너 나올 거라고 생각하나 보지.”
그러고 보니 요즘 야구만 한다고 다른 건 거의 신경을 못 썼던 것 같았다. 오는 연락도 거의 단답형으로 대답했더니 슬슬 연락이 좀 뜸해지기도 했고.
물론 그런 와중에 꾸준히 연락해오는 백강호 같은 케이스도 있긴 했지만······.
“알았어. 내일 시합 끝나고 보지 뭐. 애들 경기 표는 구했데?”
“그거야 내가 알아서 구해줬지.”
“나 등판하는 경기라서 표 구하기 어려웠을텐데 용케 구했네?”
“운영팀에 선영 누나한테 부탁했더니 구해주더라. 내가 볼 땐 나한테 관심 좀 있는 듯.”
“일단 그럴 리도 절대 없지만. 만약 그렇다고 해도 지금 네가 여자 신경 쓸 때냐?”
“어, 나 포수 전체 타율 4위.”
“네가 양심이 있으면 3위랑 7푼 차이 나는 걸 4위라고 하면 안 되지.”
쪼유와 쓸데없는 잡담을 나누는 사이 어느새 경기 시간이 성큼 다가왔다.
바로 지난 경기 목에 담이 오는 바람에 1.2이닝 던지고 강판당했던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마운드로 올라갔다.
확실히 성적 자체는 꽤 괜찮지만, 선발 당기기 없이 로테이션을 철저하게 지켜주는데도 불구하고 시즌이 진행될수록 이닝을 소화하는 데 좀 버거워하는 모습이 눈에 띄었다.
-뻐엉!!
“스트라잌!!!”
153.1km/h의 커터.
하지만 공 자체는 여전히 괜찮은 것이 올스타 브레이크 때 좀 푹 쉬고 하면 조금은 회복되지 않을까 싶다.
오늘 상대는 브레이브스.
지난 세월 매우 꾸준하게 가을 야구에 진출했던 그들은 이번 시즌 그리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고 있었다.
토종 에이스인 학폭 조창혁 선생은 여전히 쌩쌩하게 공을 잘 던졌지만 우리와의 트레이드로 불펜에 커다란 빵꾸가 난 것이 그 원인이었다.
박재혁에 고설민에 태지완.
리그 탑급 마무리에 최상급 불펜 둘이 빠져나왔는데 팀 성적이 유지될 리 만무했다.
다만 그럼에도 브레이브스 팬들의 반응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딱!!!
[강라온!! 가볍게 타구를 받아 2루에!! 그리고 다시 1루로!!]
“아웃!!”
[마린스의 깔끔한 더블 플레이. 마린스가 1회 초, 1사 주자 1, 2루의 위기를 무사히 넘겼습니다.]
[자, 마운드에는 최민혁. 최민혁 선수가 올라옵니다.]
[이 선수, 브레이브스로 트레이드 된 이후 사직에 첫 등판이죠?]
탈마린스 효과.
보통 성적이 개똥같은 구단이라면 어디나 있는 탈x 효과 중 하나다.
그리고 이번 시즌. 10억 5천만의 유망주 최민혁은 그 탈마린스 효과를 아주 완벽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트레이드 이전 0승 3패 평자책 4.61
트레이드 이후 4승 1패 평자책 2.83
마운드 위에 올라온 최민혁이 사람들이 가득한 사직구장을 크게 둘러봤다.
그 표정이 사뭇 씁쓸해 보였다.
“이거 좀 찝찝하네.”
“뭐가요?”
“아니, 그래도 귀엽게 생각하던 후배인데 두들길 생각 하니까······.”
“아!! 저 이런 경우에 쓰는 말 알아요.”
“뭔데?”
“그러니까 떡 줄 사람은 생각도 안 하는데 김칫국부터 마신다?”
“뭐 인마?”
이정훈이 피식 웃으며 내 헬멧을 툭 두들기고 타석으로 걸어갔다.
그를 바라보는 최민혁의 표정이 매섭게 변했다.
오랜 시간 함께 뛰어온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컨디션이 올라온 이정훈이 얼마나 귀찮은 타자인지.
타격은 사이클이다.
강라온이 한참 물이 올랐을 때 2번으로 타순이 내려갔던 그가 어느새 슬금슬금 다시 1번 타순을 차지했다.
마운드의 최민혁이 공을 뿌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