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77화 (177/305)

177화. 그에게 필요한 것(4)

짧은 시간.

각자의 자리로 흩어졌던 부부가 종합운동장역에서 다시 만났다. 하지만 단축경기 탓에 3시간이 지나지 않아서일까? 경기의 여운이 흩어지지 않은 그들은 아직 부부라기 보다는 마린스와 엘리츠를 응원하는 한 명의 팬에 더 가까웠다.

“오늘 진짜 쫄깃했네. 조금만 늦었어도 무효게임 될 뻔.”

“아니, 엘리츠 덕아웃은 대체 무슨 생각이래? 볼넷이라도 계속 던지면서 투수도 좀 교체하고 그렇게 시간이라도 끌었어야지. 어차피 점수를 몇 점을 내주건 무효게임 되면 아무 의미 없는 거잖아.”

“결과론으로 보면 그렇지만 그렇게 노골적으로 굴기는 힘들지. 게다가 그런 식으로 굴다가 비라도 멎으면. 진짜 대참사 나는 건데? 막 30점 차이 경기 나오고 이러면 1년 농사 통으로 망가지는 수가 있어. 아무리 그래도 지금 가을야구는 가는 페이스인데. 시즌 길게 봐야지.”

“아오, 얄미워. 자기 응원하는 팀 이겼다고.”

“그러길래 당신도 진작에 우리 무적 마린스로 갈아탔어야지. 간다. 우승!!”

“두 달 전까지 꼴린스라고 그렇게 욕하던 양반이.”

“그거야 원래 프로야구 팬이라면 조석변개, 일희일비하는 삶이 필수 아니겠어?”

비록 내리는 비 때문에 좀 꿉꿉하긴 했지만 마린스 팬들 입장에서는 실로 신나는 경기 결과였다. 특히 마지막 최수원의 미친 한복판 속구 쇼는 그야말로 오늘 경기의 백미라고 할 수 있었다.

“근데 진짜 올해는 우리 뭔가 할 것 같아.”

“하긴······. 작년까지였으면 마린스도 이런 상황에서 우물쭈물하다가 무효게임 됐을 확률이 크긴 했지.”

어떻게든 경기만 빨리 끝내면 그만이다. 그러니까 칠테면 쳐봐라라는 기세의 한복판 속구들이었다. 심지어 실제로 안타도 하나 나왔음에도 그 배짱은 전혀 사그라들지 않았다.

당연히 그 경기에 깊은 인상을 받은 것은 비를 맞으며 경기를 지켜봤던 팬들만이 아니었다.

“에릭에게서 연락이 왔습니다. 성공이랍니다.”

“좋았어. 최수원쪽이랑 접촉할 방법은?”

“아무래도 단장님께서 한국에 온 건 모두가 알고 있을 테니 직접 하시는 건 불가능하겠습니다만 제 개인적인 인맥으로 최수원 선수의 에이전시 쪽이랑은 접촉 해볼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에릭에게 자료 받고 그걸 기반으로 일단 반응을 좀 살펴봐. 나는 돌아가서 구단주님께 보고 드리고 곧바로 마이크 프로스태드와 이야기를 나눠볼테니까.”

“네, 알겠습니다.”

***

“네? 뉴욕 메츠요?”

“네.”

흐음······.

어메이징 메츠라······.

솔직히 끌리지는 않는다.

메츠가 2년 전에 지불했던 사치세가 8천만 달러였던가?

참고로 그해 메츠는 꼴찌를 했다.

오해할지 몰라서 한 번 더 강조하겠다.

팀 페이롤이 8천만 달러가 아니다.

사치세만 8천만 달러다. 그리고 꼴찌를 했다.

물론 그 덕분에 알렉산더 맥도웰을 데리고 올 수 있었지만, 아무튼 메츠가 어메이징이라는 수식어가 어울리게 비효율적인 운영을 했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일의 배후에는 한 남자가 있었다.

스티브 코헨.

그는 2020년에 메츠의 주식 90% 정도를 추가로 사들이면서 메츠의 구단주 자리에 등극했다. 타고난 금수저는 아니고 그렇다고 흙수저라고 하기 힘든 적당한 은수저로 이 시대 가장 높은 수익률을 얻어낸 헤지펀드 매니저 중 하나다.

메이저리그에서 가장 부유한 구단주로 그가 구단주에 부임한 이후 메츠는 정말 공격적으로 돈을 사용했다. 만약 그가 구매한 구단이 메이저리그 구단이아닌 축구 구단이었다면 지금쯤 리그 우승을 밥 먹듯이 노리는 구단 정도로 성장할 수 있지 않았을까?

하지만 아쉽게도 야구는 축구와 달랐다.

돈이 많으면 물론 좋다. 하지만 그 많은 돈은 우승을 담보할 수 없다.

물론 이런 말이 있다.

돈으로 뭔가를 할 수 없다면 돈이 모자란 것은 아닌지 확인해봐라.

하지만 메츠는 메이저 30개 팀 가운데 하위 3개 팀 ‘페이롤’을 합친 것보다 높은 사치세를 내고도 우승을 하지 못했으며, 심지어 재작년의 경우 하위 2개 팀 ‘페이롤’을 합친 것보다 높은 사치세를 내고 그 팀들보다 낮은 성적을 기록했던 것을 고려해보면 여기저기 샐러리캡이 잔뜩 씌워진 메이저리그에서 ‘돈’은 우승과 직결되는 조건이 아님은 확실했다.

덕분에 몇몇 메츠 팬들은 구단주가 팬심으로 필요없는 선수들까지 중복으로 사 모은다. 현실에서 OOTP를 하고 있는데 하필 그 플레이어가 게임을 정말 못하는 얼간이다. 같은 이야기를 하곤 했다.

“뭐, 좋습니다. 한 번 이야기나 해보죠.”

하지만 끌리지 않는다고 해서 이야기까지 차단할 이유는 없었다.

애당초 내가 아무리 비밀스럽게 대화를 나눈다고 해도 결국 주변에 알려질 수밖에 없고 다른 구단들 귀에 다 들어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이런 것 하나하나가 그들을 자극하는 이슈가 될 수밖에 없다.

그래, 분명 그런 가벼운 마음이었다.

***

“필요하신 데이터를 준비했습니다.”

“제가 필요한 데이터라구요? 그게 무슨······?”

“오타니 쇼헤이 선수의 데이터입니다.”

에?

여기서 갑자기 오타니 쇼헤이의 데이터는 무슨 말이지?

“잠깐만요. 뭔가 오해가 있으신 것 같은데. 물론 제가 투타겸업이긴 하지만 오타니 쇼헤이 선수와는 그 매커니즘이 좀 다르다고 해야 하나? 타격도 그렇고 피칭도 그렇고······.”

“아, 그쪽 데이터가 아닙니다. 그리고 고작 그런 데이터를 가지고 이렇게 굳이 따로 뵙자는 이야기를 하지는 않았을 겁니다.”

김진규라고 했던가?

메츠에서 일하는 한국인 스카우트.

사실 메이저리그에서 일본에서 일하는 구단 직원이 일본인이고, 한국에서 일하는 직원이 한국인인 건 드문 일은 아니었다.

왜, 그런 말도 있지 않던가.

미국인들이 아시아인을 구분할 때, 일본인, 한국인. 그리고 아시아인으로 구분한다고. 아무튼 그 드물지 않은 한국인 스카우트는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USB-C 하나를 내밀었다.

“오타니 쇼헤이 선수의 피지컬 트레이닝 데이터입니다.”

“네? 오타니 선수의 피지컬 트레이닝 데이터라구요?”

와, 솔직히 놀랐다.

아니, 물론 얘들이 일 잘하는 건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내가 딱 필요한 자료를 갑자기 들이밀 줄은 상상도 못 했다.

피지컬 트레이닝.

그러니까 몸을 만드는 일은 사실 크게 고민했던 부분은 아니었다. 이미 한 번 해봤던 일이고 요령도 알고 있으니 그냥 잘 먹고 열심히 운동하면 되는 일이라고 생각했으니까.

하지만 이게 미국에서 트레이너들이랑 대화를 좀 나눠보고 마린스에서도 피지컬 트레이너들과 이야기를 나눠본 결과 생각만큼 쉬운 일이 아니란 것을 알게 됐다.

이유는 간단하다.

투수랑 타자가 사실 야구라는 같은 종목으로 묶여있지만 요구하는 피지컬이라는 것이 좀 상이하다는 점 때문이다.

마치 장거리 달리기 선수와 단거리 달리기 선수가 달리기라는 같은 종목으로 묶여있지만, 그 필요하는 피지컬이 다른 것과 비슷하다.

타격을 위해서 전체적인 볼륨을 키우면 유연성 때문에 피칭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

피칭 때문에 특정 부위의 근력을 강화하면 타격 밸런스가 흐트러질 수 있고.

이건 사실 답이 없는 문제다.

그저 조금씩 점진적으로 더듬어가면서 앞으로 나아갈 수밖에 없다.

그래.

오타니 쇼헤이라는 선구자가 없었다면 말이다.

다행스럽게도 현재 메이저리그에는 이미 나보다 앞서 그렇게 더듬어가면서 저 멀리 나간 사람이 있는 상황이었다. 물론 타고난 재능이 다르고 몸의 크기가 다르고 근육의 질도 다르다. 하지만 참고할 수 있는 자료가 있는 것과 없는 것은 그야말로 천지 차이다.

그리고 그것은 오타니 쇼헤이도, 그와 관계된 관계자들도 모두 알고 있는 사실이다. 그러니까 이런 자료를 구할 수 있는 시점은 앞으로 몇 년 지나서, 그러니까 오타니 쇼헤이가 슬슬 은퇴 생각할 시점 정도는 된 이후일 거로 생각했다.

어쩔 수 없이 슬쩍 흥분됐다.

아, 근데 잠깐만.

근데 에인절스도 아니고 메츠가 이런 자료를 가지고 왔다고?

“에인절스 시절 자료인가요?”

“아뇨. 이건 NPB 시절 자료입니다.”

“흐음······.”

역시.

흥분이 빨랐던 만큼 식어내리는 속도 역시 빨랐다.

아니, 물론 NPB 시절 자료도 없는 것보다는 나았다.

하지만 이건 뭐랄까······. 오타니 쇼헤이가 지금의 진짜배기가 되기 이전. 그러니까 대폭발 하기 이전 기초를 다질 때 자료 정도에 불과하다.

아니, 물론 오타니는 닛폰햄에 있을 때도 일본 선수치고는 몸의 벌크가 좋긴 했다.

그러니까 딱 지금 나 정도?

나의 표정이 싸하게 식은 것을 그도 느낀 것일까?

김진규가 빠르게 말을 이어갔다.

“아, 물론 에인절스 시절의 자료도 현재 협상하고 있습니다. 그러니까 이건 그냥 저희의 첫 만남을 기념하는 선물 정도로 봐주시면 됩니다.”

“그렇군요.”

“그냥 오늘 만남은 저희가 최수원 선수에게 이 정도로 진심이라는 표시 정도로 봐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진심이라······. 뭐 프로에서 진심은 좀 다른 거라고 배우긴 했습니다만. 일단 잘 알겠습니다.”

나의 가치가 나의 포부가 아닌 내 성적인 것처럼 프로에서 진심은 당연히 숫자일 수밖에 없다. 김진규가 어색하게 웃으며 나의 말에 답했다.

“하하하. 이것 참······. 물론 저희가 팀 사정상 당장은 최대의 진심을 보일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현재 메이저리그에서 저희보다 자금 사정이 좋은 팀도 없습니다.”

“글쎄요······. 메츠라면 남들 2천만 쓸 때 같은 돈 주려면 3천만 줘야 하는 팀 아닌가요?”

“지금이야 그렇겠죠. 하지만 3년 후라면 좀 달라지지 않겠습니까?”

“거기 구단주 하는 거 봐서는 그럴 것 같지는 않습니다만······. 아무튼 선물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김진규가 내민 USB-C를 챙겼다.

그렇게까지 도움이 될까 싶긴 했지만 그래도 일단 성공한 선구자가 걸었던 발자취였으니 방향성 정도는 참고가 될 수도 있었다.

“다만 저를 진짜 설득하고 싶으시면 협상 중이라는 이야기보다는 조금 더 강력한 게 필요하지 않을까 싶네요.”

“물론입니다. 조만간 모든 일을 끝내고 다시 연락드리도록 하겠습니다.”

***

“그래? 그 정도로 강력하게 표현을 했단 말이지.”

최수원이 꼭 질러야 하는 선수라는 사실은 명확했다.

그렇기에 조슈아 파그노만에게 필요했던 확신은 최수원이라는 선수에 대한 확신이 아닌 과연 천만 달러짜리 떡밥이 최수원이 정말로 혹할만한 떡밥인가에 대한 확신이었다.

“구단주님과 미팅을 좀 잡아줘. 어, 지금 당장. 될 수 있으면 가장 빠른 시간으로.”

천만 달러.

조슈아 파그노만의 연봉의 다섯 배를 넘어가는 큰돈으로 절대 작지 않은 돈이다.

선수 영입도 아니고 그 영입이 확실치도 않을 재료를 구매하는데 사용하겠다는 결정을 마음대로 내리기에는 너무나도 거대한 금액이다.

“뭡니까? 고작 천만 달러 때문에 이렇게 찾아온 겁니까? 제가 몇 번을 말합니까. 꼭 필요한거라면 일단 움직이고 보시라고. 단장님 눈에 좋은 매물이면 남들 눈에도 좋은 매물이니까요. 당장 움직이세요! 빨리!!”

그리고 작년 20억 달러의 ‘개인 소득’을 올린 스티브 코헨에게는 딱 일당 정도 되는 금액이기도 했다.

***

“어, 보내준 자료는 잘 받았어. 근데 이거 뭐야? 어디서 구한 거야?”

“그냥 잘 구했어요. 그래서 어때요. 좀 쓸만해요?”

“어, 조금 더 살펴봐야 알겠지만 확실히 도움은 될 것 같아.”

지난 가을 나의 피칭을 다듬어주었던 뉴욕의 NBM 센터.

거기서도 피지컬 트레이닝을 담당하던 동생인 잭 워싱턴이 좋은 소식을 알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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