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그에게 필요한 것(3)
110마일. 그러니까 177km/h를 던진 투수가 있을까?
있다.
물론 실제 경기에서는 아니고 연습경기, 그것도 존에 들어가는 공도 아니고 그냥 저 뒤로 날려보낸 공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사람이 런닝쓰로우가 아니라 제 자리에서 공을 던져서 110마일을 던지는 것도 가능은 하다.
그렇다면 그 선수가 제대로 피칭을 한다면 결과는 어떨까?
내가 상대해본 적이 있다.
나도 메이저 간지 얼마 안 됐던 시기고 110마일 던지는 투수의 메이저 선발 데뷔라고 해서 좀 쫄았었는데 그 날 최고 구속이 103마일이었나? 물론 166km/h에 가까운 속도니까 빠른 공은 빠른 공인데 솔직히 177km/h랑 비교하면 많이 인간적이다.
그래서 내가 지금 이렇게 장황한 이야기를 굳이 늘어놓는 이유가 무엇이냐.
내가 제구에 좀 신경을 덜 쓰고 진짜 최선을 다해서 빡세게 공을 던지면 어떻게 될까? 하는 생각 때문이다.
뭔가 지금 이렇게 마음먹은 대로 제구가 잘 되는 상황이라면 좀 그렇게 던져도 괜찮을 것 같은 느낌이 든다.
타석에 선 오형원이 나를 노려봤다.
눈매 한번 살벌하다. 그러고보니 멍게 녀석이 나를 바라보던 눈빛이랑 매우 비슷하다. 그러고 보니 최근에 조금 바빠서 진우 선배랑 연락도 제대로 못했다. 멍게는 잘 살고 있겠지? 지금 대학 2학년이니까 잘하면 다음 달에 있을 드래프트에 또 도전해볼 수도 있을 텐데. 혹시라도 프로 무대건 어디건 만나게 된다면 소소하게나마 4연타석 홈런 같은 거라도 꼭 한번 선물해주고 싶은 마음이다.
멍게와 비슷한 점을 발견했기 때문일까?
괜히 오형원의 사나운 눈빛이 가소롭게 느껴졌다.
그 가소로운 마음을 가득 담아서.
초구.
어떻게든 공을 존 안에 집어 넣어야한다는 강박을 아주 살짝 풀고 정말 있는 힘껏. 단순히 빠르게 던진다는 것에 더 집중을 해서!!
-뻐엉!!!
이번 공은 뭐라고 해야할까?
광속구.
그래, 광속구라는 표현이 어울렸다.
타석에 서 있던 오형원이 엉덩방아를 찧었다.
아, 물론 스트라이크는 아니다. 안쪽으로 조금 깊었다. 헤드샷까지 약 20센티 정도. 하지만 그럼에도 오형원의 얼굴에 드러난 감정은 분노가 아니었다.
당혹감.
전광판에 숫자가 표기됐다.
162.9km/h
101마일을 살짝 넘어가는 구속이었다.
진짜 이를 악물고 최대치로 던졌는데 결국 163까지는 나오지 않았다.
뭐, 컨디션 좋았던 그 날에 꾸준히 161 정도 찍히던 것에 비해 오늘은 159 후반에서 160 초반 정도가 한계였으니 나쁜 구속은 아니지만, 자세가 좀 무너지는 걸 감수하고 최대치로 던졌는데 이 정도인 건 좀 아쉽기는 했다.
[몸쪽 높은 공!! 오형원 선수가 뒤로 넘어졌습니다.]
[아, 방금 저 공은 상당히 위험했어요. 그러고보니 이전에도 마린스와 엘리츠. 한차례 충돌이 있었죠?]
[맞습니다. 당시에는 데뷔전에서 최수원 선수가 초구로 실투를 던져서 벤치 클리어링이 있었습니다.]
[사실 투수가 공을 던지다보면 실투를 아예 안 할 수는 없거든요. 지금은 비도 오고 뭐 그럴 수가 있죠. 다만 이게 160이 넘는 공은 정말 위험하거든요.]
[맞습니다. 그래서 투수가 더 어려운 거죠. 160짜리 공을 기다리는 타자들도 위험을 감수한다지만 공을 던지는 투수들도 잘못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면서 공을 던지는 거거든요.]
오형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엉덩이를 툭툭 털었다.
빗물로 촉촉해진 흙이 쉽게 털리지 않는다.
내 실투를 보자마자 딜튼이 덕아웃 펜스를 뛰어넘을 준비를 하고 있었던 덕분일까? 몸쪽 실투 하나 던졌다고 오형원이 마운드로 달려나오는 일은 없었다.
이래서 야구도 팀에 벤치클리어링 전문 요원 하나 정도는 있어야 한다. 괜히 NFL에 파이팅 전문 포지션인 인포서가 있는 게 아니다. 아, 참고로 말하자면 여기서 파이팅은 한국식 힘내자의 파이팅이 아니라 진짜 주먹질이다.
MLB의 벤치클리어링이 빠따 들고나오면 불법이지만 맨손으로 나와서 발차기 없이 싸우면 합법인 것처럼 NFL도 하키채 내려놓고 맨손으로 맞짱뜨는 건 합법이다. 내가 기억하기로는 캐나다의 어떤 선수는 그거 하다가 종합격투기 프로모터한테 스카웃되서 UFC까지 진출했다.
아무튼 우리의 벤치클리어링 전문 요원 딜튼이 눈을 부라리고 있는 사이 오형원이 타석에서 나의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부웅!!!
“스트라잌!!!”
159.9km/h의 몸쪽 높은 코스.
이번에는 존 안으로 정확하게 들어가는 공이었다.
그리고 세 번째.
-뻐엉!!!
“스트라잌!! 아웃!!!”
높은 곳에서 뚝 떨어지는 커브.
오형원이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심판을 바라봤다. 존에서 빠지는 공이었다는 표정이다. 솔직히 좀 애매하긴 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스트라이크, 볼 판정에는 비디오 판독이 없는 것을.
그리고 이어지는 제이콥 윌슨의 타석
-딱!!
녀석이 초구를 두들겼다.
확실히 얜 내 속구에 제법 방망이가 따라 나온다. 하지만 공을 쳤다고 그게 꼭 안타로 연결된다는 건 아니다. 애초에 타자가 친 공이 안타가 될 확률은 3할 내외다. 그리고 이번 제이콥 윌슨의 타구는 그 3할에 포함되지 못했다. 힘 없이 높게 뜬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는 못했다.
투아웃.
빗물이 조금 거세지기 시작했다.
오늘 예상 강수량이 시간당 10mm정도였는데 내리는 빗줄기가 그 정도가 아닌 것 같았다. 이거 아무래도 재수 없으면 우천 취소가 나올지도 모르는 빗줄기다.
이어지는 타자는 4번 타자인 라찬명.
오형원이 아직도 엘리츠를 대표하는 선수가 될 수 없는 이유다.
리그 최강의 배드볼히터.
이 공 저 공 안 가리고 다 치는데 통산 wrc+가 130이 넘고 작년 34세 시즌에는 무려 153을 기록했다.
참고로 오늘 엘리츠에서 유일하게 출루한 타자가 바로 이 라찬명이다. 2회에 선두 타자로 나와서는 초구에 바깥으로 상당히 빠지는 공을 두들겨서 결국 안타를 만들어냈다.
워낙에 아무 공에나 방망이를 휘두르는 타자라서 빗맞은 타구 만들거나 헛스윙 하라고 던진 공인데 그걸 안타로 만드는 모습을 보고 과연 라찬명은 라찬명이구나 하고 생각했었다.
-저벅저벅.
35세.
미스터 엘리츠.
앞선 타석에서 유일하게 안타를 기록했던 그의 무게감 있는 등장에 잠잠하던 잠실이 다시금 소란스러워졌다.
그리고 그 소란스러움은 곧 엘리츠의 기대감일 것이다.
그리고 그때였다.
“아, 잠시만요.”
타석에 걸어오던 그가 갑자기 심판에게 손을 들어 자신의 신발 끈을 묶겠다고 이야기했다. 뭐지? 왜 대기 타석에 지금까지 서 있다가 여기까지 굳이 와서 신발끈을 묶겠다는 거지? 그리고 왜 신발끈 하나 다시 묶는데 굳이 옆구리에 방망이를 끼고 마치 슬로우 모션처럼 자리에 쪼그려 앉는 거지?
***
라찬명이 생각했다.
하늘이 돕는구나.
빗줄기가 거세지고 있었다.
솔직히 지금 마운드에 선 투수는 미친놈이다. 애초에 자기 투수 데뷔전에서 초구로 빈볼을 던지는 것부터 비범하긴 했다. 언젠가 인터뷰에서 긴장해서 손에서 공이 미끄러졌다고 말하는 걸 본 적이 있는데 라찬명은 확신한다.
완전 개뻥이다.
한국 야구계의 정서 상 실수를 한 놈이 마운드에서 그렇게 당당하게 서 있을 수가 없다. 게다가 방금 봐라. 몸쪽 높은 코스로 162짜리 빈볼 꽂아 넣는 거. 진짜 형원이가 공을 잘 봐서 망정이지 자칫 잘못했으면 대가리 깨져서 골로 갈 공이었다.
게다가 그냥 미치기만 했으면 뭐 그럴 수도 있는데 하필 그 미친 성격만큼이나 실력도 미쳤다. 아니 이렇게 비가 오는 날에 162짜리 공을 던진다고?
이전의 마린스면 그래도 선발 내려가고 불펜 두들겨서 역전 노려볼 수 있었겠지만 이번에 트레이드 이후로는 그것도 힘들다.
박재혁에 고설민에 태지완이라니.
저 정도면 브레이브스가 작정하고 마린스 우승 한 번 하라고 퍼준 수준이다.
게다가 지금 비 내리는 꼴 보니까 우천취소는 거의 확실하다.
남은 건 5회 이전에 끝나서 무효 경기가 되느냐, 6회 이후에 끝나서 콜드게임이 되느냐다.
저 괴물 상대로 운 좋게 안타 하나 기록한 게 사라지는 건 아쉽지만 그래도 오늘 경기는 어떻게든 무효 경기 처리되고 하반기로 경기가 밀리는 게 낫다.
어쨌거나 저 괴물은 ‘신인’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그게 아니더라도 저 체구를 보면 저건 투타겸업까지 하면서 절대 시즌 막판까지 저런 퍼포먼스를 보여줄 수 없는 몸이다.
야구가 1년에 한 30경기 하는 종목이라면 저 괴물은 거의 무적이겠지만 야구는 1년에 144경기를 치르는 장기전이다. 장담하는데 저 몸으로는 장마 지날 때쯤 되면 알아서 퍼진다.
오른쪽 신발끈 다 묶고 왼쪽 신발끈도 다시 묶었다.
타석에서 루틴을 수행했다. 경기촉진룰 덕분에 예전처럼 길게 수행할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다행히 라찬명의 루틴은 그 긴 연차만큼이나 제법 복잡한 편이었다.
마운드의 투수가 조금도 지체하지 않고 초구를 뿌렸다.
-뻐엉!!!
“스트라잌!!!”
솔직히 평소라면 일단 냅다 방망이를 휘둘러봤을 것같은 공이었다. 하지만 참았다. 오늘은 최대한 풀카운트를 노린다.
예상컨대 20분.
아무리 무리를 해도 이런 환경에서 20분 이상 경기가 지속될 수는 없다. 무조건 우천취소다. 공수교대에 각 2분 30초씩이니까 5분.
4회 말 남은 아웃카운트 한 개와 5회 초, 5회 말.
총 열 개의 카운트에 15분만 끌 수 있으면 무효게임이 가능하다.
프로 16년차의 베테랑.
라찬명의 시간 끌기가 시작됐다.
“아, 잠깐만요. 방망이에 실금 간 것 같습니다.”
***
설마했다.
하지만 이후로 보여주는 모습을 보니 너무 확실하다.
저 새끼 저거 무효게임 노리고 시간 끄는 거다.
빗물은 점점 거세지고 있었다.
아마 사직이었으면 야유가 미친 듯이 쏫아지고 심판도 그 야유에 부담을 좀 느꼈을 텐데 엘리츠 팬이 대부분인 잠실의 분위기는 좀 달랐다.
어지간한 경기면 우리 팬들도 제법 많이 찾아오는데 솔직히 엘리츠나 호크스의 홈 경기까지는 무리다. 괜히 프로야구 팬들이 엘마호 엘마호 거리는 게 아니다.
괜히 자기 방망이 가지고 어쩌고저쩌고하던 녀석이 결국 방망이까지 교체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아마 진짜 신인 투수였다면 심리적으로 좀 말릴 수 있는 행동들이었다. 당장 비가 거세지고 있는데 무실점으로 이기고 있던 경기가 무효가 될지도 모른다는 압박감은 무시할 만한 것이 아니었으니까.
아, 나는 어땠느냐고?
-뻐엉!!!
“스트라잌!!!”
[아, 최수원 선수. 완전 한복판에 속구를 꽂아버립니다. 오늘 경기, 그 엄청난 구속에도 불구하고 좌우를 기가 막히게 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라찬명 선수의 흔들기가 조금은 통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내리는 빗물이 모자챙을 타고 뚝뚝 떨어졌다.
유니폼은 몸에 들러붙고 그 와중에 라찬명 쟤는 또 한 발을 타석 밖으로 빼서 이상한 짓을 한다. 솔직히 심판이 제지할 법도 한데 아무래도 이름값부터 홈어드밴티지 게다가 짬밥까지 다 고려해서 그런지 너무 많이 봐주는 느낌이다.
세 번째.
계획대로라면 이건 아마 건드릴 것이다.
어지간하면 파울로 만들겠다는 속셈일 터.
그딴 거 못하게 만들어주겠다.
제 3구.
높은 코스.
라찬명의 눈이 빛났다.
160의 강속구에 맞춘 타이밍으로 힘차게 튀어나오는 방망이.
방망이가 1/5 정도 움직였을 때 그의 동작이 브레이크라도 걸린 것처럼 느려졌다. 조금 늦었지만, 눈치를 챈 것이다.
내가 지금 던진 공이 속구가 아니라는 것을.
라찬명이 배드볼히터라고 선구안이 부족한 것이 아니다.
그렇다면 그의 그 높은 컨택률은 설명할 수 없다.
그냥 라찬명은 어디로 오는 공이건 다 안타로 만들 자신이 있어서 존보다 넓은 범위의 공을 다 두들기는 것에 가깝다고 봐야했다. 그만큼 타격 스킬이 좋다는 의미다.
하지만 커브는 야구의 모든 구종 가운데 가장 알고도 치기 힘든 구종이다.
아, 물론 너클볼은 빼고.
심지어 내 커브볼은 라찬명의 타이밍까지 완벽하게 뺏었다.
-딱!!!
그 와중에 어떻게든 야구공에 방망이를 가져다 댄 것은 과연 한국 최고의 배드볼히터라는 명성에 걸맞은 움직임이었지만 거기까지였다.
힘없이 굴러오는 타구를 이루수인 김훈이 가볍게 잡아 1루에 송구했다.
“아웃!!!”
4회 말 삼자 범퇴.
그리고 6회 말은 돌아오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