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75화 (175/305)

175화. 그에게 필요한 것(2)

오형원은 똑똑히 기억하고 있었다.

마운드 위에서 초구로 빈볼을 던졌던, 그리고 그런 주제에 미안하다고 사과 하기는커녕 턱을 들이밀던 건방진 신인 놈의 모습을 말이다.

물론 동시에 또 한 가지를 더 기억하고 있었다.

누구보다 빠르게 마운드로 달려가던 자신을 저 높은 하늘로 집어 던졌던 거구의 외국인이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방망이를 꾹 쥐고 녀석을 사나운 눈매로 노려봤다.

평소 어디를 가도 인상으로는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오형원이다. 어설픈 애송이 정도는 눈빛만으로도 제압한다.

물론 마운드의 저 녀석은 제압당하기는커녕 입가에 은은한 미소를 띄웠다.

‘쪼개?’

오형원이 인상을 찌푸렸다.

그는 눈이 좋은 타자였다. 동시에 컨텍은 매우 부족한 타자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건 그의 스윙이 장타를 노리는 이상 어쩔 수 없는 부분이었다.

많은 삼진을 당하더라도 질 나쁜 타구로 어떻게든 출루를 노리는 것보다 존 안에 들어오는 공에는 적극적으로 강한 스윙을 하고 존 밖으로 나가는 공은 거르는 접근은 분명 매우 좋은 접근법이다.

덕분에 그는 존 밖으로 나가는 공에 대한 스윙 빈도인 O-swing%은 극단적으로 낮고 존 안에 들어오는 공에 대한 스윙인 Z-swing%는 극단적으로 높았는데, 동시에 존 안에 들어오는 공에 대한 컨택률인 Z-contact%이 터무니없이 낮은 한국에서는 좀 보기 힘든 이상한 스탯을 보여주고 있었다.

볼넷도 많고 삼진은 그보다 더 많은데 안타의 4할 이상이 장타인 정말 기묘한 타자인 셈이다. MLB에서는 애덤 던이 이런 유형으로 아주 유명한 타자였는데 오형원과의 차이는 애덤 던의 파워가 조금 더 강했다는 점, 그렇기에 장타의 6할가량이 홈런인 반면, 오형원은 잠실이라는 넓은 구장을 홈으로 사용한 덕분에 홈런보다 2루타와 3루타가 훨씬 많다는 점이었다.

그의 좋은 눈이 최수원의 초구를 포착했다.

오늘 그의 컨디션은 그야말로 최상.

과장을 조금 보태 지금 마운드의 투수가 던지는 손의 그립까지 들어올 정도다.

속구

존 안으로 들어오는 공이다.

-부웅!!!

“스트라잌!!!”

159.7km/h의 속구였다.

생각보다 높게 들어온다.

구위가 좋긴 좋다. 게다가 타이밍도 좀 밀렸고 아무래도 반 호흡 정도 더 빠르게 휘둘러야 할 것 같았다.

그런데 어떻게?

대충 코스를 짐작하자마자 바로 방망이를 휘두른 건데 타이밍이 늦는 건데 이거보다 더 빠르게 휘둘러야 한다면 그게 가능한 일인가?

생각을 추스를 여유따윈 없었다.

피칭 타이밍이 매우 빠르다.

두 번째.

이번에도 똑똑히 보였다.

속구다.

존 안으로 온다.

-부웅!!!

“스트라잌!!!”

“와, 이 ㅆ······.”

오형원이 턱 끝까지 올라온 욕설을 눌러 삼키고 손을 들어 잠시 타석에서 벗어났다.

무슨 공이 오는지도 알겠고, 존 안에 들어오는 공도 확실하다. 물론 존 안에 들어온 공도 종종 못 치기는 하지만 이렇게 컨디션이 좋은 날에는 그래도 제법 잘 쳐낸다. 심지어 지금 최수원이 던지는 공은 변화구도 아니고 그냥 대놓고 들어오는 속구들이다.

커다란 심호흡.

그리고 오형원이 다시 타석에 들어왔다.

‘오늘 내 컨디션 완전 빨딱 섰다. 칠 수 있어. 무조건 친다.’

세 번째.

볼카운트 0-2.

마운드의 최수원이 공을 뿌렸다.

설마 했는데.

‘이 새끼가 또 속구?’

심지어 이번에도 존 안으로 당당하게 들어오는 속구다. 그것도 이전 공보다 한층 더 복판에 가깝게.

-부웅!!!

“스트라잌!! 아웃!!!”

순간적인 분노로 방망이를 집어 던질 뻔 했다.

공을 던진 녀석에 대한 분노가 아니었다. 뻔히 보이는 공을 세 번 연속으로 못친 자신에 대한 분노다.

씩씩대며 돌아가는 그를 대기 타석에 있던 제이콥 윌슨이 감히 부르지 못했다. 하긴 뭐, 딱히 물어볼 것도 없었다. 그냥 속구 세 개에 스트레이트로 삼진을 당했으니.

확실히 KBO의 타자들은 일정 이상의 빠른 공에 약한 경우가 많다.

게다가 100마일을 던지는 투수가 많아졌다고는 하지만 저렇게 존 안에 제대로 집어 넣을 수 있는 투수는 흔치 않다. 아마 저 공만으로도 저 녀석은 드래프트 1라운드, 적어도 샌드위치픽 정도는 받을만한 투수다.

‘저런 미친 공을 던지는 투수가 공 던지는 것보다 빠따 돌리는 거에 더 재능이 있다는 게 참······.’

신은 불공평하다.

적어도 제이콥 윌슨은 KBO에서 뛰는 선수들보다 그 사실을 더 잘 알고 있었다.

터무니 없는 규격의 괴물들.

그 역시 드래프트 3라운드 전체 87번이었지만 1라운드에 지목되어 2년, 3년 안에 메이저로 직행한 괴물들의 재능이 얼마나 규격 외의 것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심지어 그렇게 규격 외의 재능을 지닌 괴물들조차도 ‘평범’하게 만드는 진짜배기 괴물도 세상에는 존재한다는 것 역시 잘 알고 있었다.

지금 마운드 위에 선 괴물은 그런 진짜배기 괴물 중 하나다.

뭐, 타격까지 더한다면 단순히 진짜배기 괴물 중 하나 정도를 넘어선 정말 역사에 이름을 새길 괴물 중 하나일지도 모르겠지만 두 가지로 나뉜 재능 가운데 피칭 하나만 놓고 본다면 그 정도는 아닐 것이다.

게다가 이제 고작 열아홉.

가능성은 존재한다.

그는 이미 AA에서 100마일이 넘는 공을 몇 번이나 공략해왔다. 여기 팀의 다른 선수들과는 강속구에 대한 적응의 정도가 다르다.

초구.

99.8마일의 강속구가 존을 스쳤다.

-뻐엉!!!

몸쪽 높은 코스.

살짝 존을 벗어난 공이다.

“스트라잌!!!”

“What?”

미친?

심판이 드디어 돌은건가?

이런 공을 스트라이크콜을 해준다고? 조금만 더 들어왔으면 과장 조금 보태서 어깨에 직격할 것 같은 공인데?

하지만 구심의 표정은 단호했다.

볼카운트 0-1.

두 번째.

이번에도 조금 높은 코스.

방망이를 빠르게 돌렸다.

-부웅!!!

“스트라잌!!!”

공중에서 뚝 떨어지는 커브.

낙폭이 터무니 없었다.

[순식간에 볼카운트는 0-2. 와, 지난 퍼펙트 이후로 최수원 선수 피칭이 한층 더 발전한 것 같습니다. 지금까지 그야말로 언터쳐블!! 아무도 최수원 선수의 공을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최수원 선수, 이제 고작 열아홉 살이거든요. 그런 경험 하나하나가 선수를 쭉쭉 성장시킬 수 있습니다.]

[와, 열아홉. 항상 느끼는 거지만 정말 터무니가 없습니다. KBO 역사상, 아니 세계 야구의 역사상 이런 선수가 있었습니까? 최수원 선수. 커리어 세 번째 무결점 이닝까지 이제 공 하나를 남겨둔 상황!!]

마운드의 그가 와인드업했다.

속구다.

아니, 설사 속구가 아니라도 상관없다. 그렇다면 타이밍을 어떻게든 늦춰서 커트를 해내면 된다. 뭐가 됐건 타이밍은 속구의 타이밍에 맞춰 가져간다.

-딱!!!

드디어 오늘 경기 첫 컨택.

타구가 파울라인을 벗어났다.

방망이는 밀렸다.

전광판에 적힌 숫자는 159.1km/h

얼추 99마일 정도다.

AA에서 뛰던 당시에는 분명 100마일짜리 공도 담장 밖으로 넘겨본 적이 있었다.

물론 녀석의 공은 지금처럼 터무니없는 코스로 들어오는 공이 아니었다. 지금처럼 커맨드를 논할 게 아니라 컨트롤부터 잡아야 하는 유망주였으니까.

네 번째.

피칭 템포가 미친 듯이 빠르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물이 입술을 적셨다. 한순간 맞바람이 불어왔다. 부릅뜬 눈에 얇은 빗물이 부딪힌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빠른 공을 노려봤다.

하지만 들어온 것은 그것보다 더 빠른 공.

161.1km/h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100마일짜리 속구가 존을 꿰뚫었다.

삼자범퇴.

1회 말 엘리츠의 공격이 끝났다.

경기가 계속됐다.

***

1루에서 2루로.

그리고 다시 3루까지.

길쭉한 몸이 쭉쭉 달려 나갔다.

겅중겅중 뛴다는 느낌인데 속도는 확실히 빨랐다. 결과적으로 타자가 1루에 도착하는 속도와 거의 비슷하게 3루에 도착을 했다.

“주루도 상당히 괜찮군. 속도가 어떻게 되지?”

“타격 이후 1루까지 보통 4.4초대 정도 나옵니다.”

“뛰는 속도에 비하면 그리 빠른 것 같진 않은데?”

“네, 스윙이 워낙에 강렬한지라. 그런데 1루에서 3루까지 도착하는 속도가 약 7.2초 정도로 주루 센스도 매우 훌륭하고 발도 굉장히 빠른 편입니다.”

작년 메이저 평균이 우타자 기준 1루까지 4.59초.

그리고 1루에서 3루까지 평균이 7.87초였음을 고려한다면 확실히 주루 센스와 발은 훌륭했다.

하지만 어디 지금 그가 달리는 모습이나 보자고 한국을 찾았을까.

“그렇군, 근데 이대로면 오늘 스완이 타석에서 방망이를 휘두르는 모습은 볼 수 없는 건가? 두 타석 연속 고의 사구라니······. 영상도 영상이지만 좀 직접 보고 싶은데 말이야.”

“아무래도 최수원 선수 타격이 보통 좋은 게 아니라서요. 마린스가 큰 점수 차이로 이기는 상황이 오거나 만루 정도가 되면 가능성은 있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어렵지 않을까 싶습니다. 요즘 경기당 타수가 평균적으로 2타수가 안 돼서요.”

“2타수라······. 그런 상황에서 그만한 타격을 유지 중이라니······. 여러모로 괴물은 괴물이로군.”

타격을 제대로 볼 수 없다는 점은 아쉬웠다.

하지만 그의 두 날개 중 하나인 피칭만으로도 조슈아 파그노만은 크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타격에 비해서는 아직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는 피칭.

하지만 조슈아가 보기에 빅리그의 5선발이 장차 에이스로 성장할 것이 기대되는 유망주들에게 종종 준다는 점을 고려하면 수원은 지금 당장 빅리그에 올려 5선발 자리 정도는 충분히 맡겨볼 만했다.

물론 속구와 커브의 단조로운 피칭 레파토리는 좀 아쉽기는 했다.

“기록에는 슬라이더랑 체인지업도 던진다고 되있던데.”

“완성도는 상당히 부족하지만, 가끔 깜짝 이벤트로 던지는 수준입니다.”

“그런데 KBO라면 슬라이더를 연마하기 더 좋았을 텐데 속구와 커브라니. 좀 특이하군.”

“박광식이라고 예전에 AAA까지 뛰었던 투수가 있는데 그 사람에게 트레이닝을 받았다고 알고있습니다.”

누구에게 트레이닝 받았는가는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그러니까 약 3개월 정도 집중적으로 트레이닝을 받았네요.”

“3개월?”

하지만 구종을 습득하는데 사용한 기간은 매우 중요했다.

물론 슬라이더나 체인지업을 제대로 던지지 못하는 걸 보면 커브와 유독 궁합이 잘 맞는 것일 확률이 높다. 하지만 아무리 그래도 고작 3개월만에 저만한 커브를 연마했다? 물론 그게 아니라 이전에 던지던 커브를 교정 받은 기간이 3개월이라고 쳐도 구종 습득 능력이 상당하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에릭 연락은?”

“아직입니다.”

“미팅 들어간 지 1시간 정도 됐나?”

“현재 1시간 20분째입니다.”

사실 일본 쪽 데이터는 그리 유효하지 않을 확률이 높다.

하지만 지금은 지푸라기라도 하나 더 모아야 할 상황이었다. 그리고 그것은 저 최수원이라는 괴물을 직접 지켜보면 지켜볼수록 더 강력한 확신으로 다가온다.

최수원이 이어지는 희생 플라이에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

4회 말.

이미 3이닝 동안 공을 던지는 과정에서 나는 많은 것을 느낄 수 있었다.

파인타르는 기본적으로 부정 투구다.

근데 그 파인타르라는 게 결국 로진처럼 소나무 추출물인데 로진백은 가루 형태고 이건 애초에 액체 형태인 것 정도의 차이밖에 없긴 하다.

근데 그걸 왜 쓰냐? 당연히 이게 더 끈적거리니까 쓰는 거다. 그래서 투수가 손가락에 침 바르는 것도 바른 이후에 옷에 문대야 부정투구가 아니게 되는 거고.

근데 이게 비가 오니까 자연스럽게 손에 물이 맺히고 로진이랑 섞이면서 끈적임이 좀 극대화된다. 덕분에 중간에 마운드에 로진백도 두 번이나 교체되긴 했는데 아무튼 이게 공을 던지는 입장에서 상당히 좋긴 좋았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회전수 치팅 같은 건 지금은 잘 모르겠고 나중에 수치를 확인해봐야 알겠지만 그거랑 별개로 뭐랄까? 손에 공이 좀 착 달라붙는 느낌이라서 컨트롤이 좀 더 안정된다는 느낌?

보통이라면 그러면 더 정교한 커맨드가 가능하겠다 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건 보통 사람들의 생각이다.

나같이 비범한 사람들은 거기서 한 걸음을 더 나아간다.

‘어? 그러면 컨트롤에 신경을 좀 덜 써도 되는 거 아니야?’

타석에 선두타자 오형원이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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