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그에게 필요한 것(1)
[자, 엘리츠와 마린스. 마린스와 엘리츠의 시리즈 2차전. 앞선 1차전은 정말 팽팽한 투수전이었죠?]
[네, 작년 팀 동료였던 제이크 보어와 디에고 로드리게스의 맞대결!! 두 선수 모두 초반에 조금 흔들렸습니다만 이내 그 흔들림을 수습했고 결국 어제 경기는 2:3으로 엘리츠가 가져갔습니다.]
[자, 과연 오늘 경기는 어떤 모습일지. 마운드에 데이비드 코헨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그를 상대할 마린스의 선발은 최수원, 최수원 선수입니다.]
[이렇게 보니까 마린스도 참 대단합니다. 벌써 시즌 38번째 경기인데 정말 철저하게 선발 로테이션을 지켜주고 있어요.]
[뭐, 결국 그것도 마린스의 선발진이 그만큼 탄탄하기에 가능한 일이겠죠. 준수한 용병 선발 둘에 최수원, 백하민. 그리고 최근 최민혁 선수의 트레이드 이후 그 자리를 이어받은 한명훈 선수까지. 선발진만큼은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리그 최강 아니겠습니까?]
사이 영.
행크 애런.
메이저리그에서 뛰었던 전설적인 선수라는 공통점 말고는 뛰었던 시기도, 포지션도 완전히 다른 두 선수.
행크 애런이야 그래도 한 70년 전 선수였던데다가 타자로 전설적인 기록을 남긴 타자였던 만큼 뭔가 신기록 나올 때마다 한 번씩 소환돼서 이름도 좀 익숙하고 기록도 그럭저럭 기억이 난다지만 사이 영은 글쎄······.
솔직히 사이 영이라는 투수보다 사이 영상이라는 최고 투수에게 주는 상이 더 유명하지 않을까?
거기까지 생각이 미쳤을 때 황급히 고개를 휘휘 저었다.
지금 그런 거 신경 쓸 때가 아니다.
오늘 등판일이고 경기 시작이 코 앞······.
-뻐엉!!!
“스트라잌!!”
아, 이미 시작 했구나.
볼카운트는 2-1.
지금까지는 강라온이 제법 승부를 잘 가져가고 있었다.
오늘 엘리츠의 선발인 데이비드 코헨은 성과 이름을 보면 알 수 있듯이 유대인이다. 디에고 로드리게스 대신에 팀에 합류한 왼손 투수로 엘리츠가 노리는 투수가 어떤 투수인지를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유형의 투수였다.
땅볼 투수.
그것도 MLB에서는 좀 통하기 어정쩡한데 KBO에서는 확실하게 땅볼을 유도해낼 수 있는 능력을 지닌 투수다.
다만 제이크 보어나 디에고 로드리게스와는 조금 다른 유형이었는데 그들이 커터라는 무빙패스트볼로 땅볼을 유도하는 타입이라면 얘는 철저하게 바깥쪽 낮은 코스 승부에 집중하는 타입인데 우타자에게는 포심과 변화가 큰 투심으로 좌타자에게는 포심과 슬라이더를 주로 사용한다.
물론 세상에 항상 코너에 절묘하게 공을 넣을 수 있는 투수는 없다.
기본적으로 투수가 가장 많이 던지는 공은 한가운데다. 커맨드가 좋다는 투수는 그 비율이 좀 줄어드는데 그래도 보통 10개 던지면 1, 2개는 복판으로 들어가기 마련이다.
물론 톰 글래빈 같은 양반들은 그 와중에 변태같이 바깥쪽만 죽어라 파긴 했다지만 그 양반은 세이버 매트릭스 하는 애들도 인정하는 아웃 라이너고 오늘 마운드에 선 데이비드 코헨은 그 정도 투수는 절대 아니다.
그래서 데이비드 코헨은 탄착군 자체를 존의 복판이 아닌 바깥쪽으로 옮겼다.
그리고 그 말인즉 저렇게
-뻐엉!!!
바깥으로 빠지는 공의 비율이 굉장히 높아지고, 따라서 선구안이 괜찮은 타자는 바깥으로 나가는 공을 잘 골라낼 수 있다는 뜻이다.
볼카운트 3-1.
다섯 번째.
이번에도 지치지 않는 바깥 코스.
하지만 존에 걸치는 공이었다.
-딱!!!
강라온이 방망이를 내던지고 달렸다.
하지만 소용 없었다. 완전하게 먹힌 타구가 이루수의 글러브를 벗어나지 못했다.
“아웃!!!”
체인지업.
좌타와 우타를 가리지 않는 데이비드 코헨의 결정구였다.
아마 저 공이 없었더라면 평균 구속이 90마일 남짓한 데이비드 코헨이 AA에서 그렇게 괜찮은 성적을 거둘 일도, KBO에 용병으로 올 일도 없었을 것이다.
“수원아. 나 오늘 무릎이 좀 별로인 것 같다. 비가 올라고 그러는 건가?”
“네?”
대기 타석.
이정훈의 뜬금없는 이야기에 조금 놀랐다.
“뭘 그리 놀래. 그냥 오늘처럼 날씨가 좀 궂은날에는 이전에 다쳤던 곳이 쑤시고 그런 거야. 너도 선수 생활을 하다 보면 다 그렇게······. 아니, 아니다. 넌 절대 어디 다치지 마라. 이 바닥 오래 있어 보니까 결국 안 다치는 놈이 최고더라. 뭐 투수는 그러기도 힘들긴 하다지만.”
“······.”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오늘은 영 뛰어다니기 싫으니까 큰 걸로 그냥 들어오게 좀 해줘봐. 그리고 외야로 공 좀 보내지 말고. 하필이면 왜 오늘같이 날도 궂은 날에 잠실이냐. 바로 옆에 고척 경기였으면 좀 좋아?”
“선배······.”
“야, 뭘 그리 비장한 표정으로 부르고 그래. 그냥 프로 11년차 쯤 되면 이 정도는 다들 한 두 개씩은 가지고 있는 거야.”
“아니, 그게 아니라. 그냥 걸어 들어오시려면 일단 1루에는 나가 주셔야······. 어제도 거의 못 나가셨잖아요.”
“아니, 그건 어제 제이크 보어가 워낙에······. 크흠, 아무튼 오늘은 나갈 거니까 꼭 걸어 들어오게 크게 한 방 날려라.”
뭐랄까?
지금까지 정훈 선배가 이렇게 거창하게 이야기하고 가면 그건 일종의 사망 플래그였다. 적어도 홈런 정도는 이야기를 해줘야 간신히 안타나 볼넷인 거고 보통 이 경우는 깔끔한 헛스윙 삼진이었다.
하지만 오늘.
-뻐엉!!!
볼카운트 2-3.
파울만 세 개.
무려 공 7개를 지켜본 이정훈이 마침내 데이비드 코헨의 여덟 번째 공을 골라내며 볼넷으로 출루에 성공했다.
1사 주자 1루.
방망이를 쥐고 타석으로 걸어갔다.
-툭
그리고 그때, 꾸물꾸물하던 하늘에서 한 방울 빗물이 떨어져 뺨을 스쳤다. 하지만 잠실의 2만 3천여 관객들은 한두 방울씩 떨어지는 빗물에도 불구하고 조용했다.
그저 뚫어져라 나를 바라볼 뿐이다.
그 압도적인 집중 속에서 마침내 내가 타석에 섰다.
[원아웃 주자 1루 상황!! 엘리츠의 덕아웃이 빠르게 고의 사구를 신청합니다.]
[너무 당연한 일입니다. 사실 최근 마린스의 타선이 전체적으로 훌륭하긴 합니다만 그래도 29경기 만에 홈런을 16개 치는 타자에 비할 바는 아니거든요. 어제도 2타수 1안타 2볼넷. 지금까지 성적이 무려 0.486/0.669/1.300입니다. 이런 타자를 이런 상황에서 상대하라고 하는 건 그게 오히려 문제라고 봐야죠.]
그리고 너무 당연하게 1루로 걸어 나갔다.
“비도 오는데 몸은 좀 어떠십니까?”
“······. 너 내가 말 걸지 말라고 그런 거 기억 안 나냐?”
“아, 그게 오늘까지였나요? 전 어제 경기에만 기분이 별로라서 그러신 줄 알고······. 주의하겠습니다.”
“아니!! 오늘 까지가 아니라!! 하······. 아니다. 됐다.”
1루에 선 강소구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뭐, 조금 연민의 감정은 든다. 물론 나한테 먼저 시비를 걸긴 했지만 빈볼을 맞은 것 자체가 순수하게 강소구 잘못이라기보다는 제이크 보어가 겁도 없이 나한테 빈볼 날린 것에 대해 엘리츠에게 경고를 하기 위함이 더 컸기 때문이다.
게다가 빈볼에 맞은 것만해도 억울한데 거기에다 흥분해서 달려나오는 바람에 딜튼한테 뽑혀 날아갔고, 그렇게 처맞기만 했는데 무려 벌금 200에 3경기 출장정지까지 때려 맞았으니까.
하지만 연민은 연민이고 승부는 승부다.
오늘 나는 단순히 타자 주자로 여기에 선 게 아니다. 앞으로 몇 분 후 이 녀석은 나와 승부를 벌여야 하는 타자가 된다. 이런 사소한 기싸움이 오늘 승부에 영향을 끼칠 수도 있다.
물론 그보다는 그냥 놀리는 게 제법 재밌다는 점이 더 컸지만.
-딱!!!
노형욱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바깥으로 빠지는 낮은 코스.
하지만 제법 정확한 스윙이 그 공을 잡아 당겼다.
좌중간.
잠실의 넓은 외야를 라찬명이 달렸다.
어지간하면 안타가 될 법도 한 타구였지만 라찬명은 역시 라찬명이었다. 타구 판단이 워낙 좋은 덕분에 설렁설렁 수비한다는 오명까지 쓸 만큼 뛰어난 재능.
그의 글러브가 타구를 아슬아슬하게 잡아냈다.
2사 주자 1, 2루.
-딱!!!
이어지는 5번 타자 이규만이 우리를 모두 덕아웃으로 불러들였다.
내야 뜬공이었다.
0:0.
“그래도 뛸 일은 없으셨네요.”
“그건 그런데 이 정도면 차라리 한 번 정도는 뛰는 게 좋지 않았을까 싶다.”
이정훈과 실없는 소리를 잠깐 나누고 글러브를 낀 채 마운드에 올라왔다.
부슬부슬 얇은 빗물이 나의 옷을 서서히 적셔나갔다.
언더웨어 일곱벌 챙겨왔는데 아무래도 이거 오늘 그거 다 쓰게 생겼다.
조유진이 포수의 장비들을 착용하고 걸어 나오는 동안 괜히 또 오늘 낮에 있었던 그 백동휘와의 만남이 떠올랐다.
하여간 이 인간도 참 인생에 도움이 안된다.
아니, 갑자기 모습을 드러낼거면 야구 끝난 겨울에 나오던지, 그것도 아니면 최소한 휴식일에라도 나와야지 하필이면 제일 바쁜 등판하는 날에 나타나서 사람을 신경 쓰이게 만들다니.
타석에 강소구가 들어왔다.
무뚝뚝한 표정.
내가 반가운 얼굴로 눈인사를 건넸다.
녀석의 미간이 꿈틀대는 것이 눈에 확실하게 들어왔다.
야구공을 손에 쥐었다.
로진을 제대로 묻힌 덕분에 빗물이 적당히 묻어난 야구공이 손에 착 달라붙는다. 아니, 그걸 넘어서 오히려 좀 끈적거릴 정도로 손에 잘 들러붙는다.
평소와는 약간 다른 감각.
하지만 아까 공을 던져본 결과 딱히 나쁠 것은 없었다.
초구.
과감하게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그것은 강소구의 악몽을 자극할만한 공이었다.
-뻐엉!!!
“스트라잌!!”
정말이지 기분이 좋을 만큼 내가 딱 원하는 코스로 제대로 공이 들어갔다. 그리고 역시나 강소구의 방망이는 제대로 반응하지 못했다.
조유진이 같은 코스로 또 하나를 요구했다.
-뻐엉!!!
“스트라잌!!”
강소구가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물러났다.
내 공이 두 개 연속으로 너무 잘 들어와서 잠시 타이밍을 끊어가고자 하는 것인 듯싶었다. 그도 그럴 것이 두 번째 공도 정말 내가 원하던 곳에 완벽하게 들어갔다.
설마 사이 영 카드 받았다고 막 야구 게임처럼 사이 영의 컨트롤 같은 능력치라도 생긴 걸까?
그럴 리가.
그냥 로진과 물이 잘 섞여서 공이 손에 착 잘 달라붙는 덕분일 것이다. 아마 손에 침을 뱉어서 이 정도 끈적임을 유지했다면 스핏볼 판정을 받지 않았을까?
바닥의 로진백을 들어 손바닥에 몇 차례 툭툭 털었다.
부슬부슬 내리는 빗물 때문인지 로진백 자체가 살짝 끈적한 느낌이다.
세 번째.
조유진이 바깥쪽 높은 코스를 요구했다.
고개를 저었다. 지금 뭔가 안쪽 높은 코스가 느낌이 좋다. 이번에 던지면 또 거기로 정확하게 들어갈 것 같은 느낌이다.
강소구가 방망이를 꾹 쥐었다.
모자를 한 번 고쳐쓰고 그대로 세 번째 공을 뿌렸다.
159.7km/h
몸쪽 높은 코스.
앞서 던진 공에서 약 반개 정도 가운데로 몰린 공. 앞선 두 개의 공만큼은 아니지만 이것만 하더라도 매우 훌륭한 공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강소구가 허망하게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나기에는 충분할 만큼 말이다.
선두 타자 삼구삼진.
타석에 KBO 최고의 유격수.
2번 타자인 오형원이 들어왔다.
***
“피칭이 굉장히 공격적이군.”
“네, 배짱이 아주 두둑한 친구입니다. 사실 지난 번에 무결점 이닝을 2이닝 연속했을 때도 0-2에서 유인구를 던진 건 딱 한 번뿐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존에 공을 집어 넣었습니다.”
“아무래도 여기 리그 레벨을 확실히 뛰어넘은 탓이겠지.”
“그러니 하루라도 빨리 빅리그 진출을 해야 할 겁니다. 격외의 재능이 하위 리그에 머무르면 얻는 것은 경험이 아니라 잘못된 버릇이 될테니까요. 투수로는 담금질이 좀 필요하다고 봤는데 KBO는 전체적으로 구속이 좀 느려서요.”
“비슷한 수준으로 평가받더라도 AA에서 뛰게 하는 게 더 이득이었을거다. 뭐 그런 이야기로군.”
“네, 시즌을 치르는 요령이나 기타등등은 여기가 더 나을지 몰라도 적어도 빠른 공만으로 저렇게 윽박지르는 버릇이 생기면 오히려 더 안좋지 않을까. 뭐 그렇습니다.”
김진규의 말에 조슈아 파그노만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오형원이네요.”
“좋은 타자인가?”
“네, 현재 KBO에서 가장 뛰어난 유격수로 파이어리츠에 진출했던 강이랑 파드리스에 진출했던 김과 경쟁했던 유격수입니다. 전체적으로 실링은 그보다 한 수 아래지만 그래도 그 바로 밑 정도는 될 겁니다.”
“호오······. 저 선수에 대한 보고서도 올렸던가?”
“네, 하지만 수비는 MLB에서 통할만 하다고 판단되지만 타격이 좀 어려울 겁니다. 게다가 그냥 긁어보기에는 엘리츠의 프랜차이즈로 몸값도 너무 높습니다. 5년 850만 달러거든요.”
마운드의 최수원이 크게 와인드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