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73화 (173/305)

173화. 시계의 전설(3)

원래 소문은 빠른 법이다.

심지어 그들은 단순히 소문에 의지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의 동정까지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그런 만큼 정보의 전달은 거의 실시간에 가까웠다.

“파그노만이?”

양키스의 부단장 조쉬 해럴드가 미간을 찌푸렸다.

“메츠도 제법 적극적이군. 그런데 우리가 그쪽 동향도 살피고 있었나?”

“아뇨, 그건 아닌데. 에인절스 쪽에 접촉을 해와서 잠깐 알아봤는데 지금 공항으로 가고 있다고 합니다.”

“그쪽도 아주 바보는 아니네. 그러면 마이크 프로스태드랑도 혹시 접촉 한 건가?”

“그건 조금 더 알아봐야 할 것 같습니다만 하지만 십중팔구 그럴 겁니다. 아무래도 에인절스 쪽에서는 어떻게든 사수하려고 할만한 정보니까요.”

“혹시 한국에 가는 척하면서 일본 쪽 데이터를 가지러 가는 건 아니겠지?”

“차라리 그거라면 더 나을지도요. 이전에도 말씀드린 것처럼 일본 쪽 데이터는 거의 의미가 없습니다. 물론 물론 나이대로는 일본 시절 데이터도 의미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만 실질적으로 지금과 같은 형태가 된 데이터는······.”

메츠의 움직임 자체는 문제가 아니었다.

조쉬 해럴드가 생각할 때 실질적으로 메츠는 그들에게 위협이 될 수 없었다.

물론 요즘 언론에서 한참 떠드는 것처럼 알렉산더 맥도웰과 수원의 돈독한 관계는 조금 위협적이다.

저 나이대의 어린아이들은 공과 사를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 경향이 있었고 때로 그 친분이라는 것은 어지간한 금액을 뛰어넘는 요소다. 게다가 자기들의 힘으로 하위권 구단을 우승시킨다는 스토리는 누구나 매혹될 수밖에 없는 스토리였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그들은 양키스였다.

“일단 파그노만이 움직인 이상 다른 팀들도 조급해질거야. 게다가 데이터에 관한 소문이 퍼지는 건 순식간이겠지.”

“어떻게 할까요?”

“어떻게 하기는. 저쪽에서 망설일 때 우리는 움직여야지.”

한국행.

뭐, 나쁘지는 않다. 비싼 물건을 직접 보고 구매하는 것은 양식이 있는 구매자라면 당연히 거쳐야 할 일이니까.

하지만 그러한 양식이라는 것이 통용되는 것도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상황에서의 이야기다. 가끔은 물건을 보지도 않고 사야 할 때가 있다.

“비탄력적인 재화는 일단 지르고 봐야 하는 법이지.”

한정판은 일단 무지성으로 지르고 보는 게 예의다.

그것이 시장 가격이건, 혹은 그것을 아득히 상회하는 가격이건.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들은 뉴욕 양키스.

야구의 신이 탄생했던 세계 최고의 야구팀이었다.

***

사실 엘리츠와 마린스의 인연은 가볍지 않다.

물론 엘리츠는 중간에 모그룹이 한 번 바뀌기는 했지만 같은 프로야구 원년 팀으로 치열하게 기록 다툼을 하곤 했다.

KBO는 모든 구단의 절반이 포스트시즌에 참가하는 형태인지라 장기간 포스트시즌에 진출하지 못하는 것도 제법 힘든 일인데 마린스가 먼저 8888577로 7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자 엘리츠 역시 질 수 없다는 듯 6668587667이라는 대기록을 수립하며 10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에 실패하는 기염을 토했었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마린스가 진퉁이지. 엘리츠는 4년 연속 꼴찌 같은 대기록은 달성해본 적 없잖아. 게다가 엘리츠는 비밀번호 끊자마자 14년 동안 가을 야구만 10번 했으니까.”

“10번 하면 뭐해. 우승은 영영 답이 없어 보이는데. 솔직히 나 요즘 느낌만 보면 마린스는 그래도 1, 2년 이내로 뭔가 큰일 낼 것 같아. 그러면 이제 얄짤 없이 최장기간 우승 못 한 팀은 우리 팀이 되는 거야. 라찬명은 이제 30대 후반 코앞이고 오형원도 이제 30대 중반. 얘들까지 노쇠화하면 우리 엘리츠 진짜 답 없는 거 알지?”

“에이, 요즘 야구 선수들 40까지 뛰는 거 일도 아니지. 봐봐. 우리 규만이도 작년까지 제법 뛰었고 올해도 이 정도면 준수하잖아.”

“그거야 이규만이야 전성기가 워낙 터무니없는 타자였으니까 그렇지. 거의 최수원급······까지는 아니어도 아무튼 포스가 미쳤었잖아. 이규만도 월간 OPS 2.0 찍어본 적 있지 않아?”

“아니, 월간으로는 2.0까지는 아니고. 주간은 몇 번 찍어봤지. 근데 그때 그러고도 우승은커녕 포스트 시즌 진출도 못 했었잖아.”

“아무튼 진짜 올해는 딱 우리한테 양보하고, 자기 팀은 그냥 내년부터 하자. 수원이 그래봐야 스무 살이야. 진짜 마린스가 돈만 좀 써서 지금 전력만 유지하면 걔 있는 동안은 그대로 왕조야. 왕조.”

“아니, 문제는 수원이가 언제까지 있을지 모르는 거니까. 작년에 우리나라랑 메이저 포스팅 규칙 개정돼서 포스팅은 1년 차부터 갈 수 있잖아. 젠장. 하여간 KBO 일 더럽게 못 한다니까.”

본래는 엘꼴라시코로 시작된 친분.

하지만 그 엘꼴라시코라는 말도 2010년대 중반, 엘리츠가 재도약을 시작한 이후 언론에서 차츰 사라졌다.

심지어 최근에는 3위 다툼. 그것도 2위와 1경기 차이 나는 3위 다툼을 하는 사이가 됐으니 그야말로 상전벽해. 언론에서는 엘마리스코라는 터무니없는 말까지 만들어낼 정도다.

물론 그사이에 두 사람의 사이도 상전벽해로 바뀌기는 했다.

“자기야, 근데 오늘 날씨가 좀 꿀꿀한 게, 이러다 우취 되면 어쩌지?”

“아니야, 내가 일기예보 봤는데 시간당 최대 10mm 온다더라.”

“그래? 최대가 10mm면 우취는 안하겠네. 그러면 오래간만에 수중전인가?”

“어, 그래서 안 그래도 내가 우비 챙겨왔어.”

종합운동장역 5번 출구.

한 사람은 1-2번 게이트를 향하여.

또 한 사람은 1-5번 게이트를 향하여.

1년에 16번.

약 50시간.

한 쌍의 부부가 적으로 돌아서는 시간이 다시 찾아왔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두 사람이 1년에 적으로 돌아서는 것은 언제나 16번뿐이었다는 것이다. 엘리츠와 마린스 두 팀이 포스트시즌에서 맞붙은 마지막 해는 무려 1995년. 그들이 태어나기 전 이야기였으니까.

***

어제 저녁에 아버지 얼굴을 봤다.

본래라면 숙소에 머물러야 했지만, 오늘 내가 등판이기도 했고 솔직히 요즘 내 성적을 고려하면 마린스는 부산에 아파트 하나 사서 우리 아버지를 모셔도 모자랄 판국이니 특별히 대단한 일은 아니었다.

아무튼, 아버지 얼굴을 보고 같이 밥을 먹는데, 어째 같이 살면서 학교 다닐 때보다 프로에 온 이후로 더 자주 보는 느낌이 들었다. 아버지도 슬슬 그걸 느꼈는지 뭔가 이전처럼 오글거리는 대화를 시도하시지는 않았다.

그냥 평범한 가정처럼 같이 밥을 먹고, 잠깐 근황을 나누고 각자 방으로 들어갔다. 아침에 일어났을 때 아버지는 내 아침을 차려놓고 이미 출근하신 이후였다.

미리 루틴을 말해둔 덕분에 준비돼있던 음식은 갈비찜과 밥 그리고 두 개의 밑반찬이 전부였다. 그러고보니 미국에 가면 이 루틴 지키기도 좀 힘들어질텐데 루틴을 바꿔야 하나?

아니, 아니다. 거기 가서도 지금처럼 하면 갈비찜이 아니라 갈비찜 만드는 요리사도 공수해올 수 있을 것이다.

아침을 먹고 간략하게 뉴스를 몇 가지 훑어보면서 택시를 잡아탔다.

“잠실 야구장 부탁드립니다.”

“네.”

음······.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는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써도 기사님들이 나를 알아봐서 곤란했는데 지금은 대놓고 맨얼굴로 타서 잠실 야구장으로 가는데도 못 알아본다.

요즘 제법 활약을 하긴 했는데 역시 광고나 예능 같은 거 출연 없이는 인지도에 한계가 있다. 물론 저 기사님도 내 얼굴은 아직 몰라도 최수원이라는 이름 석 자는 알고 계실 확률이 높다.

“운동하나 봐?”

“네.”

“역시 몸을 보니까 확실히 훤칠 하더라. 농구? 배구?”

“아뇨, 야구 합니다.”

“오, 야구? 그러면 좀 많이 먹어야겠어. 야구 선수는 좀 두툼 해야지. 아직 학생인가?”

“아뇨, 작년에 졸업했어요.”

“대학생? 아니면 설마 프로?”

“네, 프로로 뛰고 있습니다.”

“와, 이거 영광이네. 내 차에 프로선수를 다 태우고. 자네, 내가 보기엔 잘 될 거야. 내가 사람 보는 눈도 좋고, 이 차가 기운도 좋거든. 예전에 내가 수능 때 말이야······.”

길어지는 택시 기사의 말에 적당히 맞장구를 쳤다.

기사님이 언변이 괜찮아서 그런지 지루하지는 않았다. 목소리도 상당히 괜찮았는데 뭔가 어디서 들어본 것 같은 목소리였다.

그렇게 약 20분 정도.

출퇴근 시간이 아닌데도 역시 서울은 제법 차가 막혔다.

“자, 다 도착했습니다. 택시비는 자동 결제예요.”

“네, 수고하셨습니다.”

“아, 잠깐만. 괜찮으면 여기 사인 좀 하나 해줘. 나중에 자네 유명해지면 내가 차에 태웠다고 자랑이나 좀 하게.”

“아, 죄송합니다. 제가 종이에는 사인을 안 해서요. 평소에는 공을 좀 들고 다니는데······. 오늘은 집에서 나오는 거라 그것도 없고······.”

“아, 그래? 젊은 친구가 그 원칙이 좀 있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있는데 자네는 진짜 크게 될 것 같아. 그러면 여기 이 글러브박스에 사인 좀 해줘. 야구 글러브는 아니지만, 이것도 글러브는 글러브니까.”

“괜찮으세요?”

“어이쿠, 당연히 괜찮지. 내가 말했잖아. 자네는 유명해질거라니까.”

밝은 빛깔의 조수석 글러브박스에 택시기사가 내민 매직으로 사인을 했다.

“최수원? 스읍······. 뭔가 이름이 익숙한데. 자네 혹시 뉴스 타고 막 그랬던 거 아니야?”

“하하, 네. 뭐 가끔이요.”

“역시 내가 사람 보는 눈이 좋다니까. 아, 맞다. 이렇게 사인해줘서 고마운데, 내가 뭐 줄 건 없고······. 이거 예전에 내가 어떤 야구선수 태우고 받았던 물건인데 받으라고. 이것도 기운이 아주 좋아요.”

그가 무슨 일본 신사에서 파는 부적을 닮은 주머니 하나를 나에게 내밀었다. 보통 그런 곳에서 파는 것보다는 조금 커다란 비단 주머니였다.

“아, 부적인가요?”

“그래요. 그러면 최수원 선수. 내가 항상 응원하고 있으니까. 오늘 경기 잘하고. 파이팅!!”

거절할 타이밍조차 주지 않은 채 나에게 그것을 내밀고 사라져 버린 택시 기사. 아니, 조금 전까지 그렇게 막히던 서울 길이 순식간에 뻥 뚫린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졌다.

뭐랄까? 마치 귀신에 홀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아니, 잠깐만······.

손에 쥔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묘한 기시감.

주머니를 묶고 있던 줄의 매듭을 풀었다.

그리고 그 안에는 작고 단단한 종이 한 장이 들어있었다.

그것은 C라고 쓰인 모자를 삐뚫어지게 쓴 한 촌스러운 백인 남자의 사진이 그려진 카드였다.

그리고 그 사진 아래는 매우 조악한 필체로 이렇게 적혀 있었다.

cy young.

“이런 미친?”

***

두 장의 카드.

행크 애런.

그리고 사이 영.

인생을 진짜 열심히 살다 보니 내가 이 시대로 오게 된 이유라던지 뭐 기타 등등은 다 잊고 있었다.

뭐, 이게 우연인지, 아니면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신적 존재나 외계인 등의 장난질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무튼 지금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 바로 그것이었기에

백동휘.

그러고 보니 그 택시 기사.

목소리가 백동휘였다. 물론 생긴 건 좀 달랐지만······. 그러니까 백동휘가 한 20년 정도 더 늙고 방송용 메이크업을 안 한다면 얼추 비슷하지 않았을까?

“아, 왜 그걸 눈치를 못 챘지?”

그나저나 갑자기 왜 이 시점에서 백동휘가 다시 나타난 것일까?

그리고 이 사이 영 사인 카드는 대체 무슨 의미고.

괜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아, 모르겠다.”

그래서 잠시 생각을 멈추기로 했다.

어차피 머리 굴려봐야 뭐 답이 나올 것도 아니고, 당장 내가 뛰어야 하는 경기는 코앞에 있었으니까.

엘리츠와의 2차전.

엘꼴라시코.

아니, 최근 언론의 보도에 따르자면 엘마리스코가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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