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1화. 시계의 전설(1)
엘리츠에는 전설이 있다.
구단 사무실 금고에 있는 30년 된 시계의 전설이다.
지난 1998년.
지금은 작고한 전대 엘리츠 구단주께서는 해외 출장 도중 야구단의 동기 부여를 위해 당시 시가 8,000만원. 그러니까 현재 약 25억을 하는 아파트의 가격이 1억 3천만원이던 당시 무려 시가 8,000만원에 달하던 명품 시계를 구입하여 한국에 가져왔었다.
“시계? 그야 당연히 다음번에 우리 엘리츠가 우승하면 한국시리즈 우승 MVP 선물이지.”
아마 당시 50대 초반이었던 엘리츠의 구단주는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자신이 고작 70대 초반에 이 세상을 떠날 것이며 그렇게 죽는 그 순간까지도 엘리츠가 우승하는 것을 다시 보지 못하게 될 것이라는 것을. 심지어 그 우승이라는 게 1, 2년 더 산다고 볼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는 것을 말이다.
구단주 사후 10년이 흘렀다.
엘리츠의 구단주가 해외에서 사온 명품 시계는 여전히 구단 사무실 금고에서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33년.
마린스의 35년 무관에 이어 두 번째로 긴 시간 우승을 하지 못하고 있는 엘리츠의 33년 무관.
물론 그 느낌은 조금 달랐다. 그래도 지난 2019년 이후 엘리츠는 한동안 정말 꾸준하게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다. 그리고 그 가운데는 정말 아쉽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 해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느낌이 어떻게 다르건 우승이 없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그렇기에 그들은 달렸다.
올해도.
그리고 작년에도.
“여긴 언제 봐도 진짜 광활하다니까.”
잠실.
한국에서 가장 거대한 야구장.
저기서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가 귀를 스쳤다.
바로 작년까지 이 구장을 홈으로 사용했던 우리의 용병 2선발이다.
“멕시코에는 이만한 구장이 없는 거야?”
“스완? 언제 온 거야?”
“방금?”
디에고가 피식 웃으며 나의 질문에 답했다.
“뭐, 에스타디오 데 베이스볼 몬테레이면 그래도 여기랑 얼추 비슷은 한데, 그래도 여기가 좀 더 크지. 특히 여기 외야에 좌중간이랑 우중간은 진짜 좀 변태 같잖아.”
확실히 잠실이 구장의 넓이도 넓이지만 외야의 라인이 좀 변태 같은 면이 있긴 하다. 그나저나 에스타디오 데 베이스볼 몬테레이라······. 직역하자면 그냥 몬테레이 야구장이다.
사직 구장이 사직동에 있어서 사직 구장이고 잠실 구장이 잠실동에 있어서 잠실 구장인 것처럼 저기도 그냥 몬테레이에 있어서 몬테레이 야구장이라는 단순한 이름인 듯싶다.
그리고 이름을 듣고 보니 기억이 난다. 내가 한 번 뛰어 본 적 있는 야구장이다. 물론 멕시코 리그에서 뛴 건 아니고, 격년에 한 번 정도. 메이저 팀들이 돌아가면서 해외에서 개막전을 하는데 맥시코에서는 항상 그 야구장을 사용 했었다.
“몬테레이 야구장이면 그 다저스랑 에인절스가 해외 개막전 치렀던 곳이잖아. 확실히 거기도 크긴 엄청 컸었지.”
“뭐야? 가본 적 있는 거야?”
“어? 아니. 그냥 영상. 영상으로 본 적이 있어서.”
“그래? 아무튼 이런 커다란 야구장을 보고 있으면 참 마음이 든든해지기는 해. 어지간해서는 넘어갈 일은 없을 테니까 말이야. 아, 근데 그러고 보니 스완 너는 좀 다르겠구나. 투수만 하는 게 아니라 타자도 해야 하니까 말이야. 넌 이런 광활한 구장을 보면 기분이 좀 어때?”
“글쎄······. 나야 뭐, 투수로 등판할 때는 투수 친화적인 구장이 좋고, 타자로 설 때는 타자 친화적인 구장이 아무래도 편해서. 근데 굳이 하나만 꼽자면 나도 이렇게 넓은 쪽이 더 좋긴 하지.”
“오, 역시 요즘 퍼펙트도 하고. 투수 쪽에 조금 더 재미를 붙인 거야?”
“아니, 그런 건 아니고. 구장이 얼마나 넓건 간에 내가 못 넘길 이유가 없으니까.”
나의 말에 디에고가 크게 웃었다.
“하하하, 그래, 그렇지. 구장이 얼마나 넓건 간에 네가 담장을 못 넘길 이유는 없지.”
살짝 태클 걸어주길 바라면서 그냥 던진 잘난 척이었는데 담담하게 맞장구를 쳐버리니 오히려 좀 민망했다.
그의 시선이 또 다시 잠실 구장으로 향했다.
“솔직히 엘리츠와 재계약을 실패했을 때 엘리츠가 좀 원망스러웠었어. 단순히 나와 계약을 맺지 않겠다는 이야기 때문이 아니야. 그들은 나에 대한 존중이 부족했거든.”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KBO에 와서 갑자기 선발로 전환하기는 했지만 빅리그에서는 꾸준히 불펜으로만 뛰었던 선수였다.
“적응할 시간이 필요했어. 그 와중에 솔직히 그 정도 성적이면 충분히 나왔다고 생각했고, 하반기에는 로테이션 도는 것에도 어느 정도 적응했으니 내년에는 더 잘할 수 있을 거라고 확신했지. 그런데 내 말을 전혀 믿지 않더군. 그들은 그저 나의 141.2이닝에만 집중했어.”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협상 과정에서 금액을 조율하기 위해서는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지만 아무래도 디에고는 그 과정이 굉장히 마음에 안 들었던 모양이다. 하여간 이래서 에이전시가 중요하다. 괜히 선수랑 구단이 마음 상할 일 없이 업무는 업무로 끝내는 게 깔끔하거늘.
“마린스에 남게 됐을 때 생각했지. 적어도 엘리츠한테는 지지 않겠노라고.”
구릿빛 피부의 히스패닉 남자가 이글거리는 눈빛으로 말하는 것은 제법 멋이 있긴 했는데 어······.
“근데 너 지난 엘리츠랑 경기 지지 않았어?”
“······. 그래서 그 경기에 지고 생각했어. 적어도 엘리츠의 홈에서는 엘리츠에게 지지 않겠노라고.”
목표가 상당히 유동적인 것이 뭔가 얘도 좀 정상은 아니다 싶다.
하여간 투수 놈들 가운데서 정상 찾는 건 진짜 하늘의 별 따기라더니.
“그런 의미에서 스완 오늘 잘 부탁한다. 아니, 아니지. 뭐 특별히 더 잘할 필요는 없어. 사실 더 잘할 수도 없지. 그냥 하던 대로만 부탁한다.”
“점수 지원은 걱정하지 마. 안 그래도 나도 제이크 보어 그 자식한테는 감정이 영 안좋으니까.”
군자의 복수는 십 년도 이르다.
나는 잊지 않았다.
개막전에서 내 몸에 빈볼을 던졌던 제이크 보어 그 개자식을. 물론 응징의 의미로 강소구에게 나도 빈볼을 꽂아 넣긴 했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과연 지난 몇 년간 KBO 최고의 투수로 군림했던 외국인 투수 제이크 보어는 이 넓은 잠실의 담장을 두고 어떤 선택을 할까?
1차전 경기가 시작됐다.
***
올해로 KBO 4년 차.
제이크 보어는 작년 겨울 KBO의 사이영상이라고 볼 수 있는 최동원 상을 타던 순간, 그때 메이저 다른 팀에서 새로운 도전을 택하는 대신 한국행을 택했던 것이 인생에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음을 확신했었다.
91마일 내외의 낮게 깔리는 커터는 메이저에서는 통하지 않는 공이었지만 이곳 KBO에서는 그야말로 마구 그 자체였다.
게다가 KBO에 자리 잡은 이후로 연마한 슬라이더는 적어도 우타자를 상대로는 삼진을 잡아낼 수 있는 결정구가 되어 주었다.
물론 그렇다고해서 감히 다시 메이저에 진출하겠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거긴 그야말로 괴물들의 집합소다. 낮게 깔리는 커터의 목적은 결국 빗맞은 타구를 통한 땅볼의 양산이다. 하지만 90마일 초반대의 커터 정도는 대충 빗맞더라도 외야, 심지어 그 너머 담장까지도 날려 보내는 것이 메이저의 괴물들이다.
고작 슬라이더 하나 추가했다고 그가 던지는 레퍼토리의 기본이 되는 커터가 통하지 않던 동네에서 다시 공을 던질 수 있을리 만무하다.
그렇기에 그가 바라는 것은 그저 이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충분히 돈을 벌고 거기서 더 나아가 엘리츠의 프랜차이즈로 이름을 새겨 넣는 일이었다. 엘리츠와 같은 구장을 공유하는 재규어스에 일찍이 그와 비슷한 용병 투수가 있었음을 생각한다면 그의 상상은 불가능한 일은 아닐 것이다.
“어, 좋은 아침. 오늘도 다들 파이팅 있게 해보자.”
사실 파이팅이라는 말을 처음 들었을 때는 그냥 Go on!!의 한국어라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그게 fighting이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정말 깜짝 놀랐다. 그의 귀에 들렸던 파이팅은 fighting이 아닌 paiting에 더 가까웠었으니까. 물론 지금도 대체 왜 격투가 힘내라가 된 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그 단어를 누구보다 한국인스럽게 사용할 만큼 이곳 문화에 적응을 했다.
어렵지 않았다. 유럽이나 남미쪽의 되바라진 놈들과 다르게, 이곳 한국은 그가 자란 미국 남부 텍사스처럼 예의와 범절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곳이었으니까. 어쩌면 선비라는 것은 총을 들지 않은 카우보이와 같은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저기 저 마린스라는 팀의 최수원.
저 녀석은 저기 서부의 약이나 빨아대는 부랑자놈들과 크게 다를 바가 없는 되바라진 녀석이었다. 전통, 그리고 선배를 존중할 줄 모르고 그저 자기 잘난 맛에 사는 개자식이다.
그래, 제이크 보어 자신이 저 녀석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되바라짐 때문이었다.
절대 녀석이 지금까지 61개로 커리어 하이 페이스로 달리고 있는 자신의 삼진 기록과 같은 개수의 삼진을 기록하고 있다든지, 자신이 갖지 못한 95마일 이상, 아니 그걸 넘어서는 101마일의 공을 뻥뻥 던질 수 있어서라든지 하는 사소한 질투심이 아니었다.
1회 초.
마린스의 선두 타자는 강라온.
나쁘지 않은 타자였다. 하지만 딱 그 정도다. 오전에 있었던 회의에서 이야기하기로는 요즘 타격 페이스가 좀 매섭다고 했지만, 작년 그를 상대로는 내야 안타 두 개밖에 기록하지 못했던 타자다.
초구.
타자를 유혹하는 143.4km/h의 커터.
메이저를 기준으로는 90마일도 되지 못하는 느린 공이었지만 KBO에서는 리그 속구 평속보다 빠른 변화구였다.
-뻐엉!!
“스트라잌!!”
강라온이 초구를 골라냈다.
어차피 쳐봤자 제대로 된 타구가 못 될 만큼 좋은 공이었기 때문이다.
두 번째.
-뻐엉!!
“스트라잌!!”
강라온이 슬쩍 인상을 찌푸렸다.
기본적으로 KBO에는 외국인 용병에 대한 판정 차별이 존재한다.
하지만 방금은 용병 투수고 어쩌고를 제쳐 두고서라도 분명 빠지는 공이었다. 소문에는 제이크 보어가 거의 무슨 진짜 한국인 선수들처럼 심판들도 선배 취급 해줬다는 이야기가 있던데 지금 하는 꼴을 보면 그게 사실인 것 같기도 했다.
세 번째.
-딱!!
어쩔 수 없이 나간 방망이.
커터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원 아웃.
2번 타자 이정훈이 타석에 들어왔다.
제이크 보어가 커터를 적극 활용해서 카운트를 적립했다. 이정훈은 제이크 보어에게는 강라온보다 더 까다로웠다. 녀석의 배트 스킬은 묘한 구석이 있어서 정말 많은 숫자의 파울을 만들어내며 정말 집요하게 실투를 노려댔다.
하지만
-부웅!!
좌타자를 상대로는 이번 시즌 단 한 번도 던지지 않았던 슬라이더가 이정훈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헛스윙 삼진.
이걸로 투아웃.
타석에 최수원이 올라왔다.
경기 직전에 브리핑에서 타자 스탯들을 주르륵 본다고 해서 딱히 기억하는 편은 아니었지만 저 녀석은 워낙에 인상적이라 기억을 할 수밖에 없었다.
69타수 34안타 15홈런 48볼넷.
0.493/0.669/1.275.
아니, 무슨 볼넷 개수가 총 타수의 7할에 육박한다.
게다가 시즌이 두 달이 넘어가는 상황에서 심지어 최근에 매일 고의사구에 볼넷이라 타격감이 좀 떨어졌는데 지지난 경기에서 또 홈런을 하나 추가하며 현재 15홈런. 안타의 절반에 가까운 숫자가 홈런이고 단타가 홈런보다 더 적다.
그리고 저 홈런 가운데 두 개가 바로 제이크 보어가 내준 홈런들이었다.
제이크 보어의 시선이 그리 두껍지 않은 최수원의 몸통을 스쳤다. 그리고 등 뒤로 펼쳐진 광활한 잠실의 외야가 그의 머릿속에 오버랩 됐다.
그래, 지난 경기는 여기에 비할 바 없이 좁은 사직구장이었다. 만약 여기 잠실이었다면 그 타구들은 홈런이 아닌 외야 플라이에 그쳤으리라.
무엇보다 오늘 그의 공은 매우 훌륭했다. 낮게 제구된 그의 커터라면 아무리 저 애송이가 KBO에서 본즈 놀이를 하고 있는 괴물이라고 해도 막아낼 수 있으리라.
그는 무려 작년 최동원상에 빛나는 KBO 최고의 투수가 아니던가.
선배에 대한 예의를 모르는 애송이에게 예의와 존중을.
제이크 보어가 공을 쥔 손에 힘을 더했다.
146.7km/h
91.1마일의 커터.
그가 보여줄 수 있는 가장 강력한 공이 완벽하게 낮게 제구된 상태로 날았다. 거의 무릎에 가까운 높이. 아니 어쩌면 그보다 살짝 낮은 곳. 스트라이크 판정이 안나와도 이상할 게 없는 코스로 날아오는 그 커터를 향해 최수원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일말의 주저함도 보이지 않는 시원한 스윙.
-딱!!
0.5초의 관찰.
‘저 @!#$가?’
방망이를 우아하게 내던진 최수원이 1루를 향해 달렸다.
예의와 존중이 조금도 보이지 않는 가벼운 발걸음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