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0화. 기세(4)
KBO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
메이저리그 구단들의 셈이 조금 더 바빠지기 시작했다. 사실 메이저 구단 입장에서는 AA급 리그의 퍼펙트에 그렇게 호들갑을 떨 이유가 없긴 했다.
“그래, 그게 열아홉살짜리 애새끼가 아니었다면 말이지. 심지어 리그에서 배리본즈 하고 있는 홈런왕만 아니었다면 더더욱!!”
“지금 그게 중요한 게 아닙니다. 투구 내용을 좀 보세요. 구속이 최고 101.2마일까지 나왔습니다. 게다가 커브까지 상당한 수준입니다. 자세한 건 세부 데이터를 받아봐야 알겠습니다만 피칭 레퍼토리를 보면 이 녀석 커브를 스트라이크와 볼로 의도적으로 구분해서 던질 줄 아는 녀석이에요.”
커브를 실전에서 쓸 수 있느냐 없느냐를 가르는 가장 기본적인 조건은 역시 컨트롤. 그러니까 스트라이크와 볼을 의도적으로 구분해서 던질 줄 아느냐에 있다.
사실 다른 변화구의 경우 속구와 헷갈리게 만드는 용도만으로도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저 조건은 너무 가혹했다.
하지만 그것도 어쩔 수 없는 것이 커브가 사실상 유일한 탑스핀 구질로 다른 변화구들과 달리 던지는 순간 커브라는 것을 확실히 알 수 있을 만큼 이질성을 갖기 때문이다. 물론 그런 이질성 역시 부단한 훈련을 통해 어느 정도 극복할 수 있기는 하다지만 그래봐야 커브는 커브다. 태생적인 한계를 완전히 극복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이러한 문제에도 불구하고 커브는 매우 강력한 변화구다. 제대로 던질 줄만 안다면 커브라는 것을 알고도 치기 힘든 변화구이기 때문이다.
“에이, 이제 고작 열아홉인데 그건 좀······. 고등학교 때까지 기록 보면 커브 비중이 그렇게 높았던 것도 아니고 말이야.”
“고등학교 레벨에서는 굳이 사용할 필요가 없었을지도 모르죠. 게다가 백번 양보해서 그렇다고 하더라도 스트라이크 존에 꼬박꼬박 집어넣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저 나이에는 정말 대단한 거죠. 심지어 101마일짜리 속구도 컨트롤이 미쳤어요. 얘 이거 보이죠? 중앙에 몰린 공이 전체의 3할이 조금 넘는 수준이에요. 좌우 스프레드가 와······. 이 정도면 파이어볼러가 아니라 피네스피처인데요? 101마일을 던지는 피네스 피처. 체인지업이랑 슬라이더만 섞어주면 101마일을 던지는 09년 잭 그레인키의 재림이겠네.”
이야기를 진행하면 진행할수록 감탄밖에 나오지 않았다.
평소 그가 완성형 선발 투수의 대명사로 언급하던 것이 09년 잭 그레인키임을 고려한다면, 그리고 09년 잭 그레인키가 당시 95마일을 던지는 매덕스라는 이름으로 불렸다는 점을 고려하면 101마일을 던지는 09 잭 그레인키라는 말은 그가 해줄 수 있는 최고의 칭찬일 것이다.
“칭찬이 조금 과한 거 아니야?”
“KBO를 AA로 바꾸고 한 경기에서 삼진을 열다섯 개. 2이닝, 그러니까 여섯 타자 연속 삼구 삼진 같은 미친 짓거리를 하는 투수가 있다고 가정을 해보세요. 심지어 중간에 한두 명 메이저 40인 언저리쯤 되는 베테랑들도 셋 정도 껴있는 상황에서요.”
“어······.”
과장이 아니었다.
적어도 잭 해밀턴, 백강호, 박주원은 분명 메이저 40인에는 충분히 이름을 올릴만한 자원들이었으니까.
“명전 직행이 확실시되는 유망주?”
“저라면 바로 다음 날에 메이저 콜업해서 써먹어 볼 겁니다. 물론 이닝 제한은 좀 빡세게 걸어야죠. 23세 이전까진 연간 150이닝 정도?”
“그건 너무 적지 않아?”
“180걸었다가 망한 경우도 많고, 얜 투타 겸업이잖아요. 이 정도면 6년 써먹을 애가 아니라 프랜차이즈 만들고 나중에 저기 동판 걸어줘야 할 녀석이에요.”
“하긴.”
돈을 걱정하지는 않았다.
그런 것은 저기 스파이더맨네 동네에 사는 서민들이나 신경 쓰는 부분이다.
가장 좋은 선수는 언제나 가장 좋은 대우를 받아야 하고, 그렇기에 그들은 언제나 핀 스트라이프를 입어야 한다. 그것은 지난 1920년 야구의 신이 핀 스트라이프를 입은 이후 그렇게 정해진 일이었으니까.
브라이언 캐시먼.
서른 살의 나이에 세계 최고의 구단 단장 자리에 올라 올해로 무려 29년째 그 자리를 지키고 있는 제국의 재상.
“우리 국제 유망주 계약금 얼마나 되지?”
“도밍고 포기하면 5.07mil이요.”
“그거야 당연히 포기해야 하는 거고. 근데 그것밖에 안되는 거야?”
“네, 저희 지난 겨울에 로버트 잡았잖습니까.”
“아, 걔가 QO였지······.”“그나마 걔 하나만 잡아서 5.07이지 원래 계획대로였으면 4.57이었을겁니다.”
“지금 스완? 그 녀석 노리는 팀이······.”
“전부 다죠. 아마 이번 겨울에 걔 때문에 QO 거절한 애들 안 잡은 팀도 있었을 겁니다.”
“근데 우린 왜 잡았지?”
“그야 이 정도로 잘할 줄은 몰랐으니까요. 게다가 우리 이제 센터 라인 빵꾸 났잖습니까.”
“아······.”
지난 2022년 겨울 양키스와 9년짜리 대형 계약을 맺었던 애런 저지는 그 거대한 덩치에도 불구하고 재작년까지 매우 훌륭하게 중견수 역할을 수행해냈다. 아마 그 불행한 무릎부상이 없었더라면 작년에도 계속 훌륭하게 중견수 역할을 해냈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그러면 답 없는 거 아닌가?”
“그때도 말씀 드렸지만 그 정도 되는 선수가 고작 몇십만 달러 때문에 움직이진 않겠죠. 오타니 쇼헤이처럼 뭔가 특별한 포인트가 필요할 거라고 봅니다. 그러니까 저희는 그 쪽을 공략해봐야죠. 에인절스가 오타니에게 그랬던 것처럼요.”
“아, 기억 났다. 근데 그때는 분명 우린 양키스라서 괜찮을 거라며?”
“그건 스완이 101마일 공을 던진 것도 아니고, 지금처럼 환상적으로 커브까지 던져가면서 투타 겸업을 성공하기 전 아닙니까. 게다가 우리 오타니 때도 우리 양키스라고 그러면서 뻗대다가 결국 단장님이 건물 레펠 하면서 ‘오타니 뉴욕 와라!!’ 외친 게 전부였잖습니까. 이번에는 뭐 스카이 다이빙이라도 하면서 하시려고요?”
“크흠······.”
‘오타니 뉴욕 와라.’ 퍼포먼스와 스카이 다이빙 하다가 발목 부러졌던 일은 캐시먼에게도 제법 거대한 흑역사였다. 이번에 부단장으로 승진한 전 경영팀장 조쉬 해럴드의 핀잔에 캐시먼이 민망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날렸다.
“아무튼 한 번 최대한 스완이 끌릴 만한 조건을 찾아보겠습니다. 오타니 쇼헤이가 투타 겸업을 전적으로 지지해줄 구단을 우선적으로 찾았던 것처럼, 스완 역시 그런 뭔가가 분명 존재할 겁니다.”
“만약 우리보다 더 많은 돈을 줄 수 있는 다른 구단도 그런 조건을 찾는다면?”
“그렇다면 단장님이 스카이 다이빙하면서 우리 양키스의 장점을 어필하시면 되지 않을까요?”
“해럴드 자네 본래 있던 경영팀장 자리가 좀 그리운건가?”
“농담입니다. 농담. 뭐, 다른 구단과 조건만 비슷하다면 100만 달러 정도는 괜찮을 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도 말씀드렸지만 우리는 뉴욕 양키스잖습니까.”
“그래, 우리는 뉴욕 양키스지.”
브라이언 캐시먼이 고개를 끄덕였다.
***
한명훈이 덕아웃 구석에서 눈을 감은 채 크게 심호흡했다.
시즌 초반만 하더라도 꼼짝없이 불펜으로 시즌을 치러야 하나 생각했건만 정말 뜻밖의 행운이었다.
작년 그는 마린스의 토종 최다승 투수였다.
성적은 6승 11패.
그렇기에 그에게 붙은 토종 최다승 투수라는 말은 분명 사실이었지만 절반쯤은 조롱이 섞인 말이기도 했다. 그것은 고작 6승 11패로 토종 최다승을 할 만큼 엉망진창인 팀이라는 뜻이었으니까.
이틀 전.
그는 최수원이 여덟 명의 선수에게 시계를 나눠주는 것을 부러운 눈으로 바라봤었다.
아무리 야구에 퍼펙트를 하면 포수에게 명품 시계를 사주는 전통이 있다고는 하지만 고작 경기 하나 뛴 결과물이라고 하기에는 위화감을 느낄 만큼 압도적인 돈지랄이었다. 심지어 공을 받은 포수에게만 준 것도 아니고 야수 전원에게 시계를 선물하다니 말이다.
대체 얼마인가 궁금해서 몰래 검색까지 해봤다. 정가를 기준으로 해도 선수 하나하나가 받은 시계의 가격은 그가 올해 수령하는 연봉의 50%에 달했으며 그날 공을 받았던 조유진이 받은 시계는 나머지 선수들의 시계값을 다 합친 것에 육박했다.
심지어 리셀 가격만 따지면 야수들이 받았던 시계는 거기서 또 1.2배쯤 더 비싸졌다. 조유진이 받았던 시계는 아예 리셀하는 물건 자체가 보이지 않았다.
과연 계약금 20억짜리 투수.
아니, 계약금 20억을 넘어 자신이 그런 돈 따위는 껌값으로 보일 만큼 벌어들일 자신이 있기에 나올 수 있는 배포일 것이다.
부러웠다.
시계를 받는 야수들이? 제일 비싼 시계를 받은 조유진이?
아니, 아니다.
그렇게 아무렇지 않게 시계를 건낼 수 있는 최수원의 배포가. 자신의 미래에 대해 확신하는 그의 자신감이. 그리고 그렇게 시계를 나눠줄 수 있는 퍼펙트라는 기록이 부러웠다.
백하민이 어제 창원 블레이즈와의 1차전에서 7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며 시즌, 네 번째 승리를 가져갔다. 그걸로 백하민의 자신의 평자책을 2.71까지 낮췄다. 도저히 4선발이라고 믿기 힘든 성적이었다.
“선배.”
“······. 가자.”
조유진의 목소리에 그가 눈을 떴다.
시계를 받을 때만 하더라도 애플 워치 프로 맥스 같은 멍청한 소리를 하던 녀석이 이정훈에게 슬쩍 시계 가격을 듣더니 그 뒤로 시계를 다시 상자에 고이 넣어 집안에 모셔두고 있다고한다.
조금 얼빠진 것 같지만 그래도 공 받는 실력 하나만큼은 발군이다.
2회 초.
사직 구장.
전광판에 적힌 숫자가 익숙하지 않았다.
본래 사직 구장에서 2회 초에 마운드에 오를 때는 아랫줄에 0 말고 다른 숫자가 없는 것이 정상이지만 오늘은 저기 아랫줄 첫 번째 칸에 무슨 일인지 3이라는 숫자가 떡 하니 적혀 있다.
아니, 아니다.
돌이켜 생각해보니 올해는 0이 아닌 다른 숫자가 적혀있는 경우가 더 많았던 것 같기도 하다.
KBO의 10개 구단 가운데서 돌핀스가 5월에 최다득점을 달리지 못한 것이 무려 3년 만이라고 했던가? 참고로 마린스가 5월 말까지 팀별 최다 득점을 유지한 것은 2011년 이후 무려 16년 만이라고 들었다.
0:3.
결코 익숙치 않은 득점 지원 속에서 한명훈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딱!!
올해 23세,
최고 146km/h의 속구.
그것은 상대 타자들을 윽박지를 수 있는 속구는 절대 아니었다.
하지만 139km/h 전후로 형성되는 각이 큰 슬라이더와 그리 대단하진 않았던 143km/h의 낮게 제구되는 투심은 분명 위력적이었다. 종종 정타가 나오긴 했지만 중간중간 땅볼이나 외야 플라이가 블레이즈 공격에 찬물을 끼얹었다.
물론 작년까지의 마린스였다면 그 땅볼이 내야 안타로 연결되는 어처구니 없는 수비들이 종종 나왔을 것이다.
사람은 크게 다르지 않았다.
“마이 볼!!”
하지만 이 커다랗고 적극적인 외침 한 번이 마치 버뮤다 삼각지대처럼 세 사람의 내야수가 삼각형으로 모인 곳에 툭 떨어지던 내야 뜬공을 아웃으로 둔갑시켰다.
그것은 프로팀이라면 너무나도 당연한 수비.
하지만 한명훈은 그 수비에 감동을 느꼈다.
5.2이닝 4실점.
그것은 작년이었다면 너무나도 당연한 패배였으리라.
하지만 그가 마운드를 내려가던 시점에서 마린스의 전광판에는 무려 8이라는 숫자가 쓰여있었다.
누군가에게는 이제 아무런 가치도 없는 선발 투수의 승리. 그리고 또 누군가는 그를 조롱하기 위해 사용하던 그 토종 최다승이라는 칭호.
하지만 그럼에도 한명훈은 그 5.2이닝 4실점의 승리 투수 요건이 참으로 기꺼웠다.
비록 사흘 전의 그 괴물처럼 9이닝을 완벽하게 막아내는 부럽기 짝이 없는 피칭은 아니었으나 이것은 적어도 오늘 그가 마린스에 꼭 필요한 선수였다는 증거였으니까.
[마린스, 블레이즈와의 2차전 9:5 승리!!]
[부산 마린스 파죽의 5연승!! 리그 3위 탈환!!]
[8회 말, 1점을 추가하는 최수원의 시즌 14호 홈런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