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69화 (169/305)

169화. 기세(3)

돌핀스의 덕아웃은 움직이지 않았다.

앞서 7번과 8번 타순에서 대타를 썼던 돌핀스였지만 9번 타자인 장진규 차례에서는 대타를 사용하지 않았다.

그는 KBO의 덕아웃이 좋아할 만한 타자였다. 투쟁심이 있었고 성실했으며 무엇보다 자기들 현역 시절과 닮아 있었으니까.

앞선 두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타석에 선 장진규의 자세는 달라지지 않았다. 그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아니, 그가 더 잘 알고 있을 것이다. 타자는 10번을 싸워 7번을 패배하는 것을 목표로 해도 부끄럽지 않다는 것을.

그래, 분명 타자는 7번의 패배를 승리라고 말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그렇기에 그는 두 번의 실패를 괘념하지 않고 변함없이 배터 박스의 가장 깊숙한 곳에서 방망이를 짧게 쥐고 나를 바라보았다.

그 오래된 KBO식 스타일은 참으로 촌스럽기 짝이 없었다. 하지만 내가 이전 타석에서 10년 전에나 유행할 법한 투수에게 배트가 밀렸던 탓일까? 느낌이 영 좋지 못했다.

아니다.

이것은 단지 마지막 한 땀을 남겨 둔 장인의 불안감 같은 것이다. 지금 떠올려야 하는 이미지는 피칭을 끝낸 이후 마운드 위에서 취할 가자 멋진 포즈다.

마운드에서 마지막 첫 번째 공을 준비했다.

선택지는 뻔했다. 앞선 두 번의 실패에도 불구하고 저 시대에 뒤떨어진 촌스러운 타자가 자신의 스타일을 고수하는 것처럼, 나 역시 그에게 해줄 수 있는 것은 똑같았기 때문이다.

배터 박스 깊숙한 곳에 선 타자가 자신의 머리통이 터질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참아내고 서는 것처럼, 투수 역시 그런 타자의 머리통을 터트릴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이겨내는 사자의 심장으로.

몸쪽 높은 코스 가장 빠른 공.

커다란 와인드업.

팽팽하게 당겼던 활시위를 한순간에 풀어놓았다.

그리고 그 마지막을 결정짓는 것은 공을 쥔 손가락 끝.

강력하게 챈 공이 공기의 저항을 뚫고 발사됐다.

마지막 타자였다.

분명 지쳤지만 지친 것을 잠시 잊어버린 몸으로 던진 공이 존을 통과했다.

-뻥!!!

“스트라잌!!”

159.8km/h

[초구 빠른 공 스트라잌!! 타자의 방망이가 나오질 못했습니다. 최수원!! 9회 말 투아웃. 118구째에도 159.8km/h의 강속구는 여전합니다!!]

[와, 정말 이 선수가 바로 몇 달 전까지 고등학생이었다는 것이 믿겨지지가 않습니다.]

장진규는 나의 공에도 조금도 물러나지 않았다.

하지만 야구에서 타자가 해야 할 일은 단순히 배터박스에서 물러나지 않는 일이 아니었다. 그것은 방망이를 휘둘러 날아드는 공을 저 멀리 날려 보내는 일이었다.

그렇기에 두 번째.

이번에야말로 장진규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현실에서 재능의 벽이란 야구만화에 나오는 것처럼 근성으로 뛰어넘을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그의 짧은 방망이와 형편없는 배트 스피드. 그리고 그 배트에 실린 힘은 나의 161.1km/h 속구를 저 먼 곳으로 날려 보내기에는 어림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장진규는 달렸다.

내야 땅볼을 내야 안타로 만들겠다는 강력한 집념을 담고서.

그리고 그 시도는 어쩌면 그 날 갈비를 굽기 전의 마린스였다면, 컨디션이 절정에 올라오기 전의 강라온이었다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분명 장진규의 배트는 내 속구를 이겨내기에 터무니 없이 부족했고, 그 덕분의 타구의 속도는 정말 형편없이 느렸으니까.

강라온이 움직였다.

빠른 대쉬.

그는 글러브를 들이대지 않았다. 마치 묘기라도 부리는 것처럼 글러브를 끼지 않은 오른손으로 야구공을 잡았다. 누군가는 그 모습을 보고 충분한 시간이 있음에도 겉멋이 들어 묘기를 부린다고 이야기할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후 이어진 동작은 그 과감한 맨손 캐치와 어울리지 않는 매우 안정적인 송구였으니 일루에 선 이규만의 미트로 매우 안전하게 공이 안착했다. 그것은 그가 미트를 거의 움직일 필요가 없을 정도로 완벽한 송구였다.

-뻐엉!!

“아웃!!!”

일루까지 한 걸음을 앞두고 이견의 여지가 없는 깔끔한 아웃.

강라온이 엄지를 치켜들었다.

“으아아아아!!!”

마운드 위에서 양 손을 불끈 쥐고 하늘을 향해 포효했다.

예전에 디비전 시리즈에서 어떤 미친놈이 9이닝 완봉하고 보여준 모습인데 아마 당시 ESPN 월간 가장 멋진 순간에 선정됐던 것 같다. 나중에 메이저 가서 써먹으려고 연습을 해뒀었는데 덕분에 자세가 몸에 익어서 그런지 나도 모르게 튀어나왔다.

조유진이 누구보다 빠르게 포수 마스크를 집어 던진 채 튀어나왔다. 엄지를 치켜들고 있던 강라온 역시 아차차 하는 표정으로 달려왔다. 이주혁 역시 9회까지 뛰었지만 여전히 체력이 넘친다는 듯, 수비할 때 보여주던 미친 속도로 마운드를 향해 달렸다.

오늘 특별한 활약은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하는 정지운도, 꾸역꾸역 버텨냈던 이규만도 환호성을 지르며 마운드로 뛰어 들었다.

은근히 쏠쏠한 활약을 했지만 원래 잘해서 딱히 조명받지 못한 노형욱과 이정훈.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이상하게 눈에 띄지 않았던 서경준 역시 마운드에서 함께 환호했다.

“다들 좀 비켜봐!! 으하하하하, 퍼펙트라니!! 이 꼬맹이가. 프로 10년 차인 나도 못 해본 걸 대뜸!!”

그리고 덕아웃에서 경기를 지켜보던 선수들.

특히 딜튼 도일리가 전차처럼 달려와 나의 몸통을 덮썩 쥐었다.

와, 100kg에 가까운 사람 몸이라는 것이 이렇게 쉽게 들리는 거였구나.

무슨 포스트 시즌에서 승리한 것도 아닌데 어느새 자연스럽게 들린 내 몸을 다른 선수들이 함께 들더니 행가레가 시작됐다.

“아니, 잠깐!! 잠깐만요!! 아, 무슨 행가레야!! 아니이!!”

엄청 쪽팔렸다.

퍼펙트가 대단한 기록인 건 맞는데 아무리 그래도 마운드에서 행가레라니. 이런 건 우승 같은 거라도 하고 하는 거지. 우리 꼴랑 스윕승이잖아. 이 인간들아.

[신인 투수 최수원!! KBO 역사상 최초 퍼펙트 게임 달성!!]

[괴물!! 그저 괴물!!! 최고 162.9km/h의 강속구!! 타자의 방망이를 돌려 세우는 압도적인 피칭!!]

[마린스 돌핀스 상대로 4년 1개월만의 스윕!!]

[투타 모두 완벽 그 자체!! 프로 1년차 괴물 신인 최수원!!]

“섭외는 역시 안 되겠지?”

“네, 아무래도 시즌 중에는 좀 어려울 것 같습니다.”

“그래도 전화 인터뷰 정도는 가능하지?”

“그게 내일 8시에 이미 종편 쪽 뉴스랑 비디오 인터뷰 잡혀 있다고······.”

“뭐? 종편? 야. 우리 MBS 이브닝 뉴스야. 공중파. 근데 고작 종편한테 밀렸다고?”

“아니, 그게 그 최수원이 예전부터 고려일보랑 좀 친해서······.”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인마. 당장 최수원이랑 다시 접촉해봐. 아니, 아니다. 어차피 1년 차 애송이잖아. 마린스 홍보팀이 걔 담당하고 있지? 스포츠국에 이야기해서 그쪽 팀장급이랑 이야기해보라고 해. 우리가 아예 한꼭지 통으로 내보내준다고.”

“선배님. 그게······.”

“아, 뭐.”

“제가 이미 홍보팀에 연락을 해봤었는데요. 최수원 선수 에이전시가 이미 따로 있다고······.”

“뭐?”

***

“시즌 이후 예능부터 각종 프로그램 섭외가 엄청납니다. 광고도 마찬가지고요.”

“전부 일단 보류해주세요. 아, 광고는 이전에 말씀 드린 것처럼 경기 영상이나 기존 이미지 활용해서 사용하는 건 저한테 따로 올려주시면 보고 결정할게요. 딥페이크도 마찬가지고요.”

“예능이나 방송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광고는 금액 단위가 큰데 휴식일 하루 사용하는 일정이면 해보는 것도 괜찮지 않을까요? 이번에 사용하신 금액도 만만치 않은데요.”

“아뇨, 지금은 그런 거 신경 쓸 겨를이 없어요. 최대한 시즌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어차피 돈이야 지금도 부족하지 않고, 지금 광고 찍어서 버는 것보다 성적 근사하게 내고 미국 가서 버는 게 비교도 안되게 많을 거니까요.”

“그렇군요.”

“아, 혹시 뭐 제가 한국에 있는 동안 버는 게 변호사님에게 좀 더 이득이 되는 건가요?”

김태근이 살짝 표정을 굳히고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럴리가요. 그리고 방금 그 말씀은 조금 무례했습니다. 이전에도 말씀 드렸듯이 전 능력 있는 변호사입니다. 저도 돈만 생각하면 여기에 신경 쓸 거 제 일에 신경 쓰는 쪽이 훨씬 좋습니다.”

“아, 죄송합니다. 경기 끝내고 조금 예민해진 상태라서 저도 모르게.”

“아닙니다. 훌륭하네요.”

“네? 뭐가요?”

“바로 사과하시는 거요. 생각보다 중요한 일인데 그거 똑바로 하는 게 참 힘들거든요. 아마 그것만 지금처럼 하셔도 선수 생활하시는데 정말 크게 도움이 될 겁니다.”

“그런가요?”

내가 좀 어려서 그런가?

김태근 변호사가 나의 반문에 무언가를 깨달은 듯 곧바로 나에게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이번에는 제가 선을 넘었군요.”

“아뇨, 괜찮습니다. 변호사님께서 직접 시범도 보여주셔서 그런가 말씀해주신 조언이 확실히 머릿속에 새겨진 것 같네요.”

수원에서의 경기를 일요일에 끝내고 구단 버스는 바로 부산으로 향했다.

하지만 감독님께서 나에게는 특별히 하루 휴가를 주셨는데 사실 이건 신인은 받기 힘든 특혜였다.

물론 어차피 일요일 등판이었으니 월요일 훈련이야 없었지만 그래도 연차가 안되는 선수면 경기장에 나오는 것이 관례였기 때문이다.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아버님도 뵙고 인사드리고 그러고 돌아와라.”

아마도 이건 내가 기록한 퍼펙트에 대한 상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난 당연히 그 상을 사양하지 않았다. 안 그래도 퍼펙트도 했으니 처리해야 할 일도 좀 많았다.

“제가 부탁드렸던 건 어떻게?”

“아, 다행히 그쪽으로 이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이 있어서 쉽게 해결됐습니다. 조건은 앞으로 KBO에서 뛰는 동안 언론에 나올 때는 항상 제공한 시계를 착용하는 조건입니다.”

“이거 야료를 좀 부리신 것 같은데요?”

“그쪽 조건이 너무 형편없어서 조금 수를 쓴 것 뿐입니다.”

명품 시계의 인기 모델은 돈이 있어도 구하기 어렵다.

물론 가성비가 안 맞는 모델이라면 언제든지 구할 수 있었지만, 그건 지금 내 재산 상태로는 조금 힘든 일이기도 했고.

그래서 변호사님께 슬쩍 물어봤는데 하루도 채 되지 않아서 이렇게 결과물을 가져와주셨다.

“다행히 어제 들어온 물건이 각 매장으로 분배되지 않았던 상황이라서 빼 올 수 있었습니다. 아, 광고는 미리 말씀하신 대로 경기 사진을 활용한 건 허락을 했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원래 퍼펙트를 했을 때 포수에게 명품시계 하나 정도 주는 게 전통이었으니까. 하지만 이번 경기는 조유진뿐만이 아니라 정말로 이주혁이나 강라온이 없었다면 퍼펙트는 절대 무리였을 것이다.

아홉 개의 시계.

그 가운데 하나는 계약에 따라서 앞으로 인터뷰등을 할 때 항상 차야 하는 협찬품. 그리고 또 하나는 그것과 같은 제품으로 조유진에게 주는 나의 선물이다. 그리고 나머지 일곱 개는 같은 브랜드의 스틸 재질의 인기 모델로 조금 저렴했지만 그만큼 인기가 높아서 금통 모델을 몇억씩 구입한 VIP가 아니면 구하기 힘든 모델들이다.

내가 광고 모델이 되는 조건으로 좀 할인을 받긴 했는데, 그래도 여전히 말도 안 되게 비싸서 이거 시계 여덟 개 사는데 내 계약금의 20%쯤이 사라졌다. 하지만 조금도 아깝지 않았다.

KBO 최초의 퍼펙트.

여기에는 분명 그만한 가치가 있었으니까.

***

“수원아 이게 뭐야? 어? 금시계네? 아, 그 퍼펙트······. 고맙긴 한데······. 내 나이에 금시계는 좀······. 이왕 사줄 거면 역시 애플 워치 프로 맥스가······. 어? 근데 뭐야? 선배들 거는 더 예쁜데?”

하······.

누가 쪼유 얘한테 명품이 뭔지 좀 알려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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