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기세(2)
돌핀즈의 투수 김조경이 한숨을 내쉬었다.
운이 없었다. 이렇게 펑펑 터지는 날에 하필이면 장작을 이렇게 쌓아둔 상태에서 최수원이라니. 1년에 60이닝 남짓 뛰는 불펜이 만루에 홈런을 허용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악몽이다.
만루 홈런 한 방에 시즌 평자책이 무려 0.6점이 올라간다.
대체 고과점수가 몇 점이 감점이 될까?
프로야구의 인사고과라는 것이 상황별, 상대별로 워낙에 세밀하게 들어가는 점수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대충 어림잡아도 연봉 오백만 원은 각오해야 한다.
맙소사.
홈런 한 방 맞았다고 오백 만원이 날아간다고?
전성기를 지나 연봉 역시 1억선이 깨질 상황에 직면한 김조경 입장에서는 한숨밖에 나오지 않는 상황이다.
분유며 기저귀며 앞으로 들어갈 교육비에 다달이 돌아오는 주택담보대출은 또 어떤가.
김조경이 가장의 무게를 가득 담아 공을 뿌렸다.
묵직했다.
비록 구속은 139km/h에 불과했지만 그래도 코스는 훌륭했다.
과거 최수원은 어느 유명한 선수의 말을 빌린 적이 있었다.
90, 91마일짜리 공을 못 치면 돈 받고 야구 하는 게 미안해진다고.
가장의 무게가 듬뿍 담긴 86마일짜리 바깥쪽 보더라인을 살짝 넘어가는 속구.
최수원의 방망이가 그 공을 정확하게 후려갈겼다.
-딱!!
그리하여 그 순간 김조경의 눈앞에 인자하게 웃는 신사임당이 산산이 분해되어 사라지는 환영이 스쳐지나갔다. 그것도 한 분이 아니라 무려 백 분이 단체로······.
***
공을 치는 순간 예감했다.
아, 이거 돈 받고 야구하는 게 좀 미안하겠는데?
높게 뜬 타구가 쭉쭉 뻗어는 나갔다. 하지만 손맛이 영 좋지 못했다. 보더라인에 살짝 걸치는 공 같았는데 미묘하게 테일링이 걸리면서 빠졌다.
그야말로 10년 전 유행하던 투수의 전형적인 형태다.
낮게, 더 낮게 투심이나 싱커로.
하지만 그 오래된 투수의 수법이 통했다.
지금 몸 상태는 뭐랄까?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시즌 막판에 지쳤던 몸보다 상태가 더 안 좋았다.
당시 내가 경험했던 야구는 시즌 내내 휴식일 없이 뛰어야 하는 점에서 힘들지 경기지 한 경기 한 경기에 체력소모는 그렇게까지 심하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타자 입장에서 본 야구였다.
투수로서의 야구는 완전히 달랐다. 체력 소모가 보통 심한 것이 아니다. 특히 피로가 누적되는 것은 하체였다. 그리고 알다시피 타격에서도 하체는 정말 중요하다.
좌중간
타구가 결국 담장을 넘어가지 못했다.
마운드의 늙어가는 투수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환호성을 내질렀다. 승패와 상관도 없는 일인데도 불구하고 이게 저렇게 좋아할 만한 일인가 싶었는데, 내 타격 성적을 생각해보니까 저렇게 좋아할 만한 일이 맞는 것 같긴 했다.
조금 쓰게 웃으며 덕아웃으로 돌아갔다.
피곤이다.
사실 피곤이라는 놈은 단숨에 사람을 넘어뜨리지 않는다. 조금 전에 컨디션이 100% 였다면 아슬아슬하게 담장을 넘길 법한 타구를 워닝 트랙 앞에서 잡히는 외야 플라이로 만드는 것처럼 서서히 사람을 수렁으로 끌어 당긴다.
회복까지 시간이 길어지고, 회복한다고 해도 낼 수 있는 최대치의 힘이 감소한다.
7회 말.
또다시 우리의 수비 이닝.
마운드 위에서 가볍게 목과 어깨를 풀고 주먹을 몇 차례 움켜쥐었다.
1번 타자에서 시작하는 세 번째 타순.
강일진이 타석에 들어왔다.
익숙해지면 불리한 것은 투수다.
그것은 야구에서 상식과도 같은 말이다.
그렇기에 선발이 불펜보다 어려운 것은 좌우를 가리지 않고 타자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것과 같은 타자를 여러 번 상대해야 한다는 점이다.
실제로 대부분 경우 세 번째 타순쯤 되면 타자들의 스탯이 유의미하게 올라간다. 그걸 극복하는 투수 대부분은 그즈음에서 볼 배합에 변화를 주는 형태다. 혹은······.
초구.
낮게 깔리는 빠른 공.
-뻐엉!!
“스트라잌!!!”
다양한 레퍼토리를 지닌 투수들처럼 투구 패턴에 변화를 주는 것으로 타자를 헷갈리게 만들 능력은 없었다.
슬라이더랑 체인지업을 던질 수는 있지만, 솔직히 그건 상대 타자를 깜짝 놀래키는 용도로나 써먹을까. 아직 프로에 통할만 한 위력이 아니다.
사실상 속구와 커브 투 피치.
하지만 그 두 가지 공이 모두 리그 최정상급이라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알고도 칠 수 없는 공.
나는 확신한다.
오늘 내가 던지는 공들은 분명 그런 공에 속한다.
두 번째.
160.7km/h의 강속구!!!
-부웅!!!
“스트라잌!!”
절묘하게 바깥 코스로 흘러나가는 공이 타자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순식간에 볼카운트 0-2.
앞서 있었던 수많은 삼구삼진들이 머릿속을 스쳤다. 그 승리의 이미지가 내 몸을 이끈다. 오늘 나에게 패배는 없다.
세 번째.
162.1km/h
아······. 근데 이건 쫌······.
-딱!!!
정확하게, 그리고 매우 정직하게 존의 한복판으로 들어가는 공이었다.
3할 타자 강일진의 방망이가 나의 속구를 두들겼다.
아마 내 공이 162km/h짜리 속구가 아니었다면 진짜 아찔했을지도 모르겠다. 아니, 지금 타석에 들어온 타자가 백강호 저 자식이었다면 진짜 넘어갔을 지도 모른다.
타구는 제법 컸다.
하지만 오늘 외야를 지키는 남자는 이주혁 mk.2
새롭게 태어난 지구 616의 이주혁이다. 분명 그라면 아무렇지 않게 달려가 이 공을 잡아내겠지.
이주혁이 달렸다.
오른쪽으로. 쭈욱. 빠르게.
그리고 잠깐 멈췄다.
어······.
보이지 않지만 알 수 있었다.
그의 불안한 눈빛과 흔들리는 시선.
이주혁이 방향을 바꿔 다시 왼쪽으로 좀 달리기 시작했다.
아, 그래, V자 까진 괜찮다. 특유의 갈지자 수비는 아니다. 솔직히 V자 반등 정도는 이해해줄 수 있다. 저 인간이 워낙에 빨라서 직선으로 달리면 수비를 너무 설렁설렁하는 느낌을 주니까 최선을 다한 수비 느낌을 주려고 그럴 수 있다.
아!!!
망했다.
갈지자다.
한 번 더 틀었다.
지난 노히트 당시 정지운이 가져갔던 경기의 지배자라는 칭호가 그토록 탐이 났던 것일까?
이주혁이 마침내 자기 손으로 만들어낸 퍼펙트를 결국 자기 손으로 끝을 내려했다.
정지운이야 그때 에러 후에 호수비라서 욕을 좀 덜 먹었는데 내가 볼 때 이대로라면 쟨 진짜 대역죄인 확정이다.
······?
그런데 그 순간이었다.
그러니까 사람이라는 게 원래 방향을 틀고 이러면 속도도 좀 떨어지고 다시 속도가 붙으려면 시간도 걸리고 그런 법이다. 이 지구라는 곳의 물리 엔진은 원래 그렇게 설계가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근데 쟨 뭐지?
그 장면은 마치 무슨 레이싱 게임에 부스터라도 켠 것 같은 장면이었다.
사람이 가속해선 안 되는 순간에 가속을 했다.
그리하여 그의 쭉 뻗은 팔이 야구공을 쫓았다.
[이주혁!! 이주혁!! 이주혁이 타구를 무사히 잡아냈습니다!!]
······.
할 말을 잃게 만드는 수비.
아니, 호수프레도 정도가 있는 법인데. 이건 호수프레라고 하기도 좀 그랬다. 물론 굳이 따지자면 호수프레가 맞긴 맞는데 그게 좀 인간의 한계를 벗어났다.
경기장의 관중들도 나와 비슷한 느낌을 받아서일까?
돌핀스의 형편없는 패전에도 불구하고 아직 경기장에 남아있던 사람들 손에서 박수가 나왔다.
이주혁이 그 박수 속에서 머쓱하게 일어났다.
아무튼 원 아웃.
타석에 잭 해밀턴이 들어왔다.
나쁘지 않은 타자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오늘 나는 나쁘지 않은 타자 정도로는 막아낼 수 없을 만큼 강력했다.
-딱!!!
3루 파울라인을 넘어가는 높게 뜬 파울 플라이.
노형욱이 여유롭게 달려가 공을 잡아냈다.
뭐, 저런 공을 유도하는 것도 아무튼 투수의 능력이니까······.
그리고 타석에 백강호가 들어왔다.
오늘 경기 퍼펙트를 달성하기까지 최대의 고비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었다.
나의 공을 기다리는 그의 자세에서 설사 경기는 패배하더라도 퍼펙트는 내주지 않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졌다. 어떻게든 한 방 시원하게 두들기겠다는 자세.
그런 자세의 타자에게 내가 해줄 수 있는 것은 한 가지뿐이다.
-부웅!!
“스트라잌!!”
원 바운드 되는 각이 큰 커브가 녀석의 방망이를 끌어냈다.
백강호가 미간을 찌푸렸다.
두 번째.
또 슬로우 커브를 가볼까?
아니, 아니다.
백강호에게 느껴지는 기세는 심상치 않았다. 이번 시리즈, 그리고 오늘 경기에서 백강호가 보여준 모습을 생각해보면 분명 녀석의 폼은 절정이다.
바깥쪽 높은 코스
하나 정도 빠져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속구를. 160.3km/h의 속구가 내가 원하던 것보다 공 반 개 정도 더 빠지는 곳을 지났다.
-뻐엉!!
조유진이 미트를 슬쩍 밀어 넣는다.
어림없는 시도였다.
볼카운트 1-1
백강호가 타석에 선 채 세 번째 공을 재촉했다.
지금의 감각을 이어 가겠다는 뜻이겠지. 느긋하게 로진백을 한 번 만지고 12초를 최대한 꽉 채웠다.
세 번째.
몸쪽 높은 코스.
-뻐엉!!
이번에도 백강호의 방망이는 나오지 않았다. 이번에도 생각했던 것보다 조금 더 빠지기는 했는데 그래도 이 정도면 지금 대기록 작성 중인 걸 고려해서 스트라이크 줄 법도 한데 좀 아쉬웠다.
1-2
네 번째.
낮게 깔리는 속구.
-딱!!
폴대를 넘어가는 거대한 파울 홈런.
간담이 서늘해지는 타구였다.
하지만 어쨌거나 스트라이크 하나를 추가하여 이제 볼카운트는 2-2.
다섯 번째.
복판
백강호의 방망이가 번개처럼 튀어나왔다.
그리고 0.1초.
그의 몸에 거대한 부하가 걸렸다.
눈치를 챈 것이다.
지금 내가 던진 공이 슬라이더라는 것을.
속구나 커브에 비해 완성도가 한없이 떨어지는 148km/h의 슬라이더.
그의 방망이가 그것을 완벽하게 골라냈다.
-뻐엉!!
그가 타석에서 의기양양한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마치 고작 이런 공으로 나를 낚을 생각이었냐? 라고 묻는 것 같은 표정이다.
그리고 심판이 손을 불끈 쥐었다.
“스트라잌!! 아웃!!”
[삼진!! 삼진입니다!! 최수원 선수가 7회 말 백강호 선수를 삼진으로 잡아내며 돌핀스의 타선을 다시 한번 꽁꽁 묶어버렸습니다.]
[아, 지금 백강호 선수가 심판에게 뭐라고 항의를 하는 것 같은데요?]
[배트를 돌리지 않았다는 이야기 같은데요. 아. 하지만 체크스윙은 비디오 판정 대상이 아니죠.]
운이 좋군.
평소에는 절대 내 편이 아니었던 심판이 나를 도왔다. 그동안 쌓아놨던 불합리한 판정 카운트를 절반 정도 소멸시켜줄 만큼 훌륭한 오심이었다.
김광섭.
오늘 구심의 이름이었다. 잘 기억해놨다가 MLB 진출 기념 자서전을 쓸 때 꼭 넣어줘야겠다.
경기가 계속됐다.
나는 실시간으로 약해졌고 따라서 아슬아슬하고 위태위태한 순간들이 계속 발생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마린스의 야수들이 야구는 투수 혼자 하는 것이 아니라 아홉 명이서 함께 하는 경기라는 것을 몇 번이나 보여주었다.
평범한 내야 땅볼.
평범한 내야 뜬공.
평범한 외야 외야 플라이.
분명 하나하나는 평범한 타구들이었지만 그 평범한 타구들에서 실수가 한 번도 나오지 않는 다는 것은 굳이 마린스가 아니라도 칭찬해줄 만한 일이었다.
특히나 지금처럼 기록이 실시간으로 진행중이라 야수들 역시 긴장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는 더더욱.
그 와중에 강라온이 평범하지 않은 땅볼을 맨손으로 받아내더니 그대로 일루의 이규만에게 여유롭게 던졌다.
자석이라도 달린 것처럼 정확하게 가서 꽂히는 송구.
아웃 카운트 하나가 추가됐다.
나를 향해 엄지를 치켜드는 강라온.
와, 쟤 진짜 뭐지?
이정훈도 그렇고 강라온도 그렇고 마린스는 야구를 좀 하려면 죄다 멘탈에 뭔가 문제가 있어야 하는 건가? 아니면 마린스에서 야구를 잘하게 되면 멘탈에 문제가 생기는 건가? 규만 선배가 나에게 다시 공을 던져주고는 자신의 미트를 팡팡 두들기며 기합을 내질렀다.
음······.
근데 문득 앞선 마린스 멘탈 이론이 규만 선배의 얼굴과 합쳐지면서 묘한 생각이 뇌리를 스친다.
그 원인이 뭐건 마린스에서 야구를 잘 하는 애들은 멘탈에 문제가 좀 있다.
그리고 규만 선배는 마린스인데 거의 KBO 레전드 소리 들을 만큼 야구를 잘했다.
‘에이,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아니지. 솔직히 저건 그냥 노화지.’
하지만 이내 그 생각이 너무 어처구니가 없어 그냥 실소가 나왔다.
8회가 지나고 9회.
그리고 두 개의 아웃 카운트가 더해진 9회 말, 투 아웃.
타석에 9번 타자가 올라왔다.
여전히 나의 등 뒤에 펼쳐진 전광판에 찍힌 숫자는 오직 0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