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7화. 기세(1)
솔직히 KBO의 어지간한 투수라면 백강호의 저러한 등장에 기가 죽을 만했다. 백강호라는 이름 세 글자는 적어도 KBO에서는 분명 그러한 힘을 갖고 있었으니까. 마치 MLB의 투수들이 최수원이라는 이름에 위압감을 느꼈던 것처럼.
하지만 MLB에서도 나를 겁내지 않던 투수들은 많았다.
그중에는 정말 내가 상대하기 껄끄러운 녀석들도 있었고, 그냥 단순히 제정신이 아니라서 두들겨 맞더라도 끝까지 이를 드러내는 타입도 있었다.
그리고 내가 그런 놈들을 끝까지 두들겨 본 바로는 두들겨 맞다가 결국 꼬리를 내리는 쪽보다는 마지막까지 이를 드러내는 쪽이 성공할 확률이 조금은 더 높았다. 스카우트 놈들이 말하기로는 그것이 선발이 가져야 할 강한 투쟁심. 그러니까 강력한 에고라고 했다.
솔직히 당시에는 난 그걸 호랑이를 보고도 짖어대는 하룻강아지의 멍청함이 좋은 선발의 필요 조건이라니. 하여간 투수라는 놈들은 죄다 머저리구나. 라고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지금.
나는 백강호의 저 웅장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위축되는 마음이 조금도 들지 않았다.
이게 스카우트 놈들이 말하던 강력한 에고인지, 아니면 정말 호랑이를 보고도 짖어대는 하룻강아지의 멍청함인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그보다 중요한 것은 앞서 홈런성 타구를 하나 얻어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왠지 오늘 나의 이 강력한 속구라면 녀석을 틀어막을 수 있을 것 같다는 강렬한 예감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다는 사실이었다.
깨끗하게 얻어맞는 장면은 도저히 그려지지 않는 상황.
쪼유가 바깥쪽 높은 코스 빠른 속구를 제안했다.
KBO는 MLB보다 몇 년 늦다. 수준뿐 아니라 그 유행 역시 마찬가지다. 메이저리그에 플라이볼 혁명이 시작되고, 그게 효과적인게 증명이 되고, 이후로 거기에 영향을 받은 한국의 지도자들이 아이들을 가르쳐서 리그에 내놓기까지의 시차 때문이다.
그렇기에 백강호의 타격은 KBO를 기준으로는 확실히 효율적인 타격이지만 MLB에서는 이미 10년 전쯤에 유행이 시작되어 7, 8년 전쯤에 정점을 찍었던 타격이다.
더 낮게, 더 빠르게, 투심과 싱커를 던져라.
라는 투수들의 메타에 대응하기 위한 타격이라는 뜻이다.
사실 그렇기에 공략법도 간단했다.
과감하게 높은 코스로 속구를 찔러 넣어라.
그리고 답이 있다면 당연히 그걸 선택하는 것이 정상이다.
바깥 코스 빠른 공.
타자 몸에 맞을 위험도 없었고 빠지면 그냥 바깥으로 빠진 볼 하나로 끝날 공이었기에 부담도 없었다.
공을 던졌다.
그리고 던지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이 부담없이 던진 공이 오늘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이라는 것을.
162.9km/h의 속구.
코스는 조금 아쉬웠다.
노렸던 것보다는 살짝 중앙으로 몰린 공.
그리고 백강호의 배트가 움직였다.
-딱!!!
그것은 높은 코스라는 명백한 약점이 있음에도 어째서 백강호는 KBO 최고의 타자 중 하나로 군림할 수 있었는가를 보여주는 타격이었다.
타격 매커니즘적인 문제를 어느 정도 본인이 가진 기량만으로 커버할 수 있을 정도의 압도적인 재능. 만약 지금이 2010년대 중반 즈음이었다면 백강호는 빅리그를 기준으로도 연간 1,000만 달러쯤 받고 빅리그에서 뛰는 지명타자급 실력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2027년이었고 마운드에서 공을 던진 나는 2010년대를 기준으로는 메이저에서도 흔치 않았던 100마일 이상의 속구를 뻥뻥 던져대는 선발 투수였다.
높게 뜬 타구가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
‘어?’
훌륭한 야수는 타구음만 듣고도 낙구지점을 ‘예측’한다.
물론 과장이다. 하지만 타고난 재능과 긴 경험이 어우러저 만들어내는 그 감각은 분명 그러한 과장이 진짜라고 느껴질 만큼 대단했다.
다만 그 낙구지점을 ‘예측’하는 그 능력은 보통 외야수들의 몫이었다. 내야수의 몫은 강습 타구를 처리하는 순발력과 빠른 발이다.
그리고 강라온이 움직였다.
내야 뜬공을 바라본 채 움직이는 것이 아닌 등을 돌린 채 남들보다 조금 더 빠르게 내야의 흙 너머 외야 잔디 쪽을 향하여.
살짝 어중간한 위치.
그러니까 텍사스 안타가 될 수도 있을 것 같은 묘한 곳.
강라온이 팔을 뻗어 날아온 공을 잡아냈다.
“아웃!!!”
사실 보는 사람 입장에서는 별 긴장감 없는 수비였을 것이다.
만약 이걸 놓쳤다면 욕 먹기 딱 좋은 타구였다. 하지만 내야수를 뛰어 본 내입장에서 방금 강라온의 수비는 상당히, 아니 아주 후한 점수를 주고 싶은 수비였다. 솔직히 그 낙구지점에 강라온이 와있는 것에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을 정도다.
아마 며칠 전에 한우갈비 먹기 전에 딱 자기 할 몫에서 아주 조금만 더 해내던 강라온이었다면 저건 삼루수나 좌익수가 처리해야지 하고 방관하지 않았을까?
삼자범퇴.
백강호가 분한 표정으로 괜한 흙바닥을 걷어찼다. 씩씩거리고 덕아웃으로 들어가는 폼이 가서 뭔가 우당탕 깨부술 것 같은 기세였다. 부디 카메라에 안 잡히는 곳에서 적당히 깨부수기를 속으로 빌어줬다.
경기가 계속됐다.
나의 예상처럼 돌핀스의 불펜이 지난 1차전 이후 부하가 걸렸기 때문일 수도 있었고, 아니면 한 번 타기 시작한 기세라는 것이 불처럼 일어났기 때문일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 두가지 모두가 적당히 섞인 결과일 수도 있었고.
아무튼 결과적으로 우리 팀의 방망이는 정말 신나게 돌핀스를 두들겼다.
마린스의 역사 가운데 한 경기 최다 득점 경기는 2014년에 있었던 재규어스와의 23:1. 22점 차이로 승리했던 경기였다. 역대 최다 점수 차이 경기가 23점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마린스에 흔치 않은 영광의 기록이라고 볼 수 있다.
물론 23점 차이로 패배한 기록 역시 마린스가 호크스에게 당했던 23:0 패배라는 점은 참으로 마린스 다운 점이었지만.
아무튼 지난 4년 1개월 동안 단 한 번도 스윕을 하지 못했던 팀을 상대로 마린스는 정말 일방적인 맹공을 퍼부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최수원!! 삼진!! 또 삼진입니다!! 맙소사. 이 선수 오늘 정말······. 와······. 6회까지 삼진만 무려 12개. 무결점 이닝 두 개를 제외하고도 벌써 여섯 개를 추가했습니다. 산술적으로 9회까지 뛴다면 삼진만 18개라는 소리인데요. 그렇게 되면 그게 그러니까······.]
[현재 61개로 리그 삼진 1위를 달리고 있는 제이크 보어 선수를 2개 차이로 제치고 리그 삼진 1위에 올라가게 되겠네요.]
[투타 양쪽에서 타이틀을 가져가는 KBO 최초의 선수가 되겠군요.]
[사실 KBO에서는 투타 겸업 자체가 초창기를 제외하면 거의 없었다고 봐도 무방하니까요.]
[아무튼 최수원 선수 참으로 대단합니다.]
[오늘 경기, 돌핀스가 필사적으로 3연패 만큼은 저지할 거라고 예측되던 것과는 달리 상당히 일방적으로 흘러가고 있습니다. 현재 점수는 14:0. 마린스의 최수원을 상대로 돌핀스의 타선은 두 바퀴 동안 단 하나의 출루도 성공시키지 못했습니다.]
[이제 다시 7회 초. 마린스의 공격. 돌핀스에서는 불펜인 김조경 선수를 올려 보냅니다.]
타자 입장에서는 오늘 같은 날이 정말 타격 스탯 세탁하기 딱 좋은 날이다.
게다가 이게 또 좋은 점이 그 세탁이 단순히 세탁만으로 안 끝나는 경우가 종종 생긴다는 점이다.
타격은 사이클이라고 그러고 스포츠는 기세라고 그런다.
이런 날에 확 기세를 올리고 타격을 끌어올려 두면 그게 또 신기하게 제법 오래 가는 경우가 많다. 그리하여 결과적으로 잘 나가는 팀이 막 10연승 15연승 이런 거 하는 경기가 나오는 것도 바로 오늘 같은 경기가 시발점이 되는 경우가 왕왕 있는 것이다.
실제로 우리 마린스 타자들도 오늘 제법 신이 나서 방망이를 휘둘러댔다.
-딱!!!
[선두 타자 조유진 선수!! 쳤습니다!! 오늘 경기 벌써 세 번째 안타!! 그간 타석에서의 활약이 살짝 아쉬웠는데 오늘은 공수 양면에서 정말 빼어난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특히 쪼유 같은 경우 앞서 타석에서 좀 감을 잡은 것을 제대로 체화시키려는 것인지 4번의 타석에서 무려 3개의 안타를 기록하며 4타수 3안타.
아직 총 타석 수가 60타석도 채 되지 않는 상황에서 0.189 하던 타율이 순식간에 3푼9리가 올라 0.228이 됐으니 제대로 스탯을 세탁한 셈이다.
[최근 마린스는 트레이드를 통해 주전 포수였던 최진웅 선수를 브레이브스로 보냈는데요. 조유진 선수가 이렇게 활약해주면 트레이드된 선수들 간의 성적과는 또 별개로 마린스 입장에서는 정말 최고의 트레이드를 성사시켰다. 뭐 그렇게 판단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그렇죠. 저렇게 재능 넘치는 어린 선수에게는 1군 경험 자체가 성장을 위해 정말 필요한 요소일 수 있는데 이게 사실 쉬운 일은 아니거든요. 특히 포수 유망주가 1년 차부터 주전으로 뛴다는 것은 더더욱요. 마린스 전상익 단장의 선택이 빛나는 순간입니다.]
[타석에는 다시 1번 타자 이정훈. 오늘 경기 벌써 다섯 번째 타석입니다.]
아직 7회 초 노아웃.
우리 팀의 타순이 벌써 네 바퀴를 완주했다.
이번에도 내 타석이 돌아올 것 같은데······. 와, 이거 슬슬 좀 힘든데?
***
메츠의 스카우트 김진규는 오늘도 최수원의 경기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루에 다섯 경기.
서로 다른 야구장에서 열리는 KBO의 경기들의 숫자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활동하는 메이저 스카우트들이 모두 같은 경기장에 모이는 일은 자주 있는 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최근 마린스의 경기.
특히 최수원의 선발 등판 경기만큼은 한국에서 활동하는 메이저 스카우트들은 물론이거니와 종종 NPB에 파견된 시니어급 스카우트들까지 비행기를 타고 잠깐 입국하는 일이 늘고 있었다.
“미친 것 같군. 선발로 등판한 경기에서 2타수 1안타 1홈런. 2볼넷이라니 말이야.”
“더 미친 건 그럼에도 불구하고 타율은 떨어졌다는 점이겠죠.”
그리고 그것은 메츠의 스카우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NPB를 살펴보는 일을 담당하는 동아시아 총책임자인 에릭 기무라 역시 한국에 입국했는데 나름대로 이 바닥에 잔뼈가 굵은 그 역시 최수원이 보여주는 퍼포먼스에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리그 간의 수준 차를 고려하더라도 이건 무조건 명예의 전당은 예약한 유망주라고 봐야겠군.”
물론 명전이 예약된 유망주라는 말을 들었던 선수들이 다들 진짜 명전에 들어갈만한 성적을 쌓았던 것은 아니다. 하지만 적어도 그런 소리를 들었던 유망주들 가운데 올스타급 이상의 활약을 한 번도 보여주지 못한 선수는 없었으며 그런 선수들의 발목을 잡았던 것은 보통 기량이 아닌 ‘부상’이었다.
“제 생각도 그렇습니다. 불운한 일만 없다면 말이죠.”
“끄응······. 불운한 일이라······. 당연히 없어야지.”
야구의 흥행 자체를 바꿔 놓을 포텐셜을 지닌 선수.
에릭 기무라는 현장에서 최수원을 직접 보고 그렇게 판단을 내렸다. 단순한 스탯을 넘어 최수원이 보여주는 야구에는 분명 그러한 부분이 있었다.
강속구.
강력한 에고.
홈런 타자.
스타성.
에릭이 보기에 최수원은 야구의 신이 사람들이 야구에서 열광할만한 모든 요소들을 한 사람에게 욱여 넣은 것 같은 그런 존재였다.
그렇기에 놀라운 기량이 역사상 없던 기록으로 연결되고 그것이 알게 모르게 혹사로 연결된다.
투수로서 터무니없는 기록을 세워 나가고 있는 경기. 다섯 번째 타석에 들어서는 최수원을 바라보며 에릭 기무라는 확신했다.
“저 친구는 단 하루라도 빨리 메이저로 데려 가야 할 인재야.”
KBO 역사상 최초의 퍼펙트까지 이제 3이닝.
여전히 마린스의 공격은 끝나지 않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