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6화. 무결점 이닝(4)
-뻐엉!!!
“스트라잌!! 아웃!!!!”
이거 뭐지?
아니, 이해를 못 하겠네?
욕심을 버리고 무념무상으로 던지면 뭐 자연체라도 돼서 구속이 막 늘어나고 그러는 건가? 3회 말, 초구로 162.7을 찍은 이후로 또 귀신처럼 161에서 구속이 왔다 갔다 한다.
물론 그 1km/h 정도가 그렇게 엄청나게 중요한 요소인가 하면 딱히 그런 건 아니다. 어차피 피칭의 목적은 타자가 공을 치지 못하게 하는 데 있고 구속은 그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일 뿐이니까.
하지만 이 숫자라는 것이 주는 마력이라는 것은 좀 묘하다.
솔직히 메이저에서 뛰는 애들도 괜히 161에 목을 매고 또 177을 꿈의 숫자로 여긴 게 아니다. 100마일 110마일. 뭐 176이나 177이 얼마나 차이가 있겠냐만은 아무튼 109마일이랑 110마일은 느낌이 좀 다르다.
돌핀스의 8번 타자가 타석에 올라왔다.
초구.
뚝 떨어지는 커브.
-부웅!!!
“스트라잌!!!”
솔직히 좀 너무 빤했다.
대기 타석에서 앞선 타자를 돌려세웠던 내 속구에 맞춰서 어찌나 열심히 방망이를 휘두르던지. 아마 코스고 뭐고 무조건 일단 속구 타이밍에 맞춰 방망이를 돌리겠다는 각오였겠지.
그리고 그런 타자는
-부웅!!
“스트라잌!!!”
커브 하나 봤다고 그 마음을 쉽게 돌리지 않는다.
녀석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자신의 신발끈을 다시 맸다. 아니, 근데 굳이 신발끈을 다시 맬 필요는 없을 텐데······.
세 번째.
얼마 전에 1차전 이기고 갈비를 먹을 때 규만 선배가 콩이랑 돌핀스는 두 번 까야 제맛이라는 알 수 없는 말을 했었는데, 옆에 있던 서경준은 거기에 더해서 이왕이면 삼연벙으로 가죠. 하면서 이해할 수 없는 아재개그를 날리고 자기들끼리 웃었다.
나의 영민한 머리로 그 삼연벙의 뜻을 추측해볼 때 두들겨 팰 때 확실히 두들겨 패라. 대충 그런 의미인 것 같았다.
삼연벙.
아니, 그러니까 3구 연속 뚝 떨어지는 커브볼.
-부웅!!!
“스트라잌!! 아웃!!!”
나의 속구만을 바라보던 돌핀스의 8번 타자가 허망한 눈빛으로 물러났다. 왜 자기한테는 속구를 안 던져주냐 뭐 그런 의미겠지.
하지만 어쩌겠나. 속구를 던지고 싶어 근질거리는 마음보다 타자가 원하는 공을 주기 싫은 마음이 더 컸던 것을.
이어지는 9번 장진규.
돌핀스는 강한 2번을 쓰는 것도 아닌 주제에 9번에 이상할 정도로 좋은 타자를 활용한다.
[타석에 9번 타자 장진규 선수가 올라옵니다. 작년 슬래시 라인이 0.274/0.361/0.354. 올해도 지금까지 0.264/0.358/0.361로 상당히 훌륭한 성적을 기록 중인 선수입니다.]
[사실 저 장진규 선수야말로 돌핀스의 두터운 타선을 증명한다고 봐도 과언이 아닐 겁니다. 돌핀스가 아닌 다른 팀이라면 무조건 테이블 세터의 한 자리 정도는 충분히 차지할만한 타자예요.]
장진규가 배트를 짧게 쥐고 홈플레이트에 가장 가까운 곳에 바짝 서서 나를 바라봤다. 뭐랄까? 한 10년 전쯤으로 보면 가장 한국적인 타자인데 사실 지금은 KBO도 플라이볼 혁명 이후의 MLB적인 마인드를 받아들인 지도자들이 늘어났다. 게다가 장진규의 나이가 고작 스물둘이라는 점을 생각해보면 이제는 오히려 좀 비주류에 가까운 느낌이다.
몸쪽 공을 던지면 맞아서라도 나가겠다는 단단한 각오.
그러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KBO에 저런 유형의 타자들이 좀 많고 MLB에는 어지간하면 찾아보기 힘든 건 선수들의 몸값 차이도 있겠지만 그보다는 그냥 공이 맞을만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아, 이 공은 맞으면 정말 뒤지겠다. 싶은 그런 공을 보기 힘들기 때문이란 소리다.
-뻐엉!!!
“스트라잌!!!”
몸쪽 높은 코스
162.1km/h의 강속구.
장진규가 자신도 모르게 뒤로 주춤 물러났다.
잔뜩 찡그린 표정이 사뭇 험악했다.
아마 자신이 쫄았다는 것을 인정하기 힘들겠지. 심지어 정상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을 통과하는 공에 말이다. 하지만 와, 이건 진짜 맞으면 뒤지겠다 싶은 공에 몸이 움찔하는 건 사람이라면 당연히 가져야 할 본능이다.
장진규가 조금 전과 다르지 배터박스에 섰다.
그래서 나도 조금 전과 다르지 않게 공을 던졌다.
-부웅!!!
“스트라잌!!!”
헛스윙 스트라이크.
타이밍도 늦고, 배트에 힘도 제대로 실리지 않은 정말 별 의미 없는 스윙이었다. 맞더라도 절대 내야를 벗어날 수 없었을······. 아, 근데 우리는 마린스니까 그러면 3할 정도 확률로 내야 안타는 가능했을 수도 있겠구나.
볼카운트 0-2.
세 번째 공을 준비했다.
[최수원!! 2회에 이어 3회!! 이미큘레이트 이닝. 그러니까 무결점 이닝까지 공 하나를 남겨두고 있는 상황입니다.]
[와, 정말 무시무시합니다. 아무리 하위타선이라고는 하지만 무려 돌핀스의 타선이 전혀 손을 쓰지 못하고 있어요.]
[전 개인적으로 160짜리 강속구로 연달아 윽박지르는 모습도 대단했지만, 속구를 노리는 상대에게 커브 3개로 헛스윙 삼진을 끌어내는 모습이 정말 인상이 깊었습니다. 올드스쿨피처의 정석을 보는 느낌이었달까요?]
[아, 하긴 최수원 선수의 피칭을 보면 우완 정통파 올드스쿨의 로망 같은 것이 조금 엿보이긴 하죠. 군더더기 없이 깔끔하 폼에 강속구. 그리고 커브까지.]
[네, 정말 저기에 수준급의 체인지업만 더해지면······. 아, 이건 좀 너무 설레발 같아서 그만 이야기해야 할 것 같네요.]
[하하, 사실 뒷이야기는 굳이 더 하지 않으시더라도 다들 비슷한 생각일 겁니다.]
장진규의 눈에는 여전히 투쟁심이 이글이글거렸다.
존중한다.
저 타석에 바짝 다가와 방망이를 짧게 쥐고 서서 다운 스윙을 하는 것은 장진규라는 사람이 프로에서 생존하기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프로로 뛸 수 있는 것은 KBO가 싱글 A부터 메이저리거급까지 다양한 레벨의 선수가 혼재하는 리그이기 때문이다.
나는 알고 있다. AA까지가 노력의 영역으로 닿을 수 있는 곳이라면 내가 디뎌야 하는 그곳은 노력이라는 말랑한 것만으로는 절대 다다를 수 없는 곳에 있다.
치열한 노력과 그 노력에 부응해줄 수 있는 재능.
나의 162.4km/h 속구가 장진규의 반응을 훌쩍 뛰어넘은 영역을 스쳐 지나갔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6연속 삼진.
3이닝 연속 삼자범퇴.
[최수원!! 최수원이 결국 해냈습니다. 야구 역사상 최초!! 2이닝 연속 무결점 이닝!! 6연속 3구 삼진!! KBO 최초가 아닙니다!! MLB, NPB를 통틀어 야구의 역사에 처음 있는 일입니다.]
[이건 그야말로 역사의 한 장면이라고 볼 수 있겠네요. 참 대단한 선수입니다.]
등을 돌려 바라본 전광판에는 0이라는 숫자가 가득했다.
마치 어제 내가 홀로 이미지 했던 그 광경처럼.
물론 아직 전광판의 2/3은 텅 비어 있었고 이곳은 양키 스타디움이 아닌 수원 돌핀즈 파크이긴 했지만.
왠지 도저히 상상되지 않던 마린스의 유니폼을 입고 0으로 가득찬 전광판을 바라보는 나의 모습이 희미하게 그려지기 시작했다.
4회.
8번 타자인 이주혁이 타석에 올라갔다.
정말 놀라울 정도로 믿음이 갔다. 그리고 이주혁은 그런 나의 믿음에 매우 훌륭하게 부응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시원한 헛스윙 삼진.
기대가 크면 실망도 큰 법. 애초에 삼진을 당할 것이라 생각했더니 실망도 전혀 되지 않았다.
그리고 내가 신뢰하는 두 번째 타자 쪼유가 타석에 올라갔다.
아니, 아니다.
두 번째라니. 그건 쪼유에 대한 실례다. 정정하겠다. 내가 가장 신뢰하는 타자 쪼유가 타석에 올라갔다.
사실상 이번 이닝은 투 아웃에 이정훈에서 시작하는 공격이닝이라고 봐도 무방했다. 그렇다면 나한테까지 타순이 돌아올까? 만약 그렇다면 상대 선발을 4이닝 만에 내려버릴 기회이긴 했다.
-딱!!!
완벽하게 숙인 상체.
그 결과 최선을 다하여 1루를 바라보고 싶지만, 인체 구조상 방망이를 끝까지 돌리지 않고는 그것이 불가능했기에 자연스럽게 방망이에 실리는 힘.
그리고 그런 멍청한 자세에서도 타격을 수행할 수 있는 감각과 신체 밸런스.
그 모든 것들이 조화를 이루는 장면이 나의 눈에 들어왔다.
물론 누군가의 눈에는 저만한 재능을 왜 저따위로 낭비하는가. 팀에 최수원을 보라. 얼마나 아름다운 폼인가. 조유진은 저런 폼을 배워야한다. 라고 비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아무리 날카로운 칼이라도 휘두를 수 없는 칼은 의미가 없다. 쪼유의 재능이 그와 같다. 바로 저 멍청하기 짝이 없는 낭비야말로 지금 쪼유에게 꼭 필요한 낭비였다.
타구가 내야를 아득히 넘어 외야 오른쪽 파울 라인 가까이로 떨어졌다.
살짝 전진 수비하고 있던 우익수가 서둘러 달려가 공을 주워들었다. 아마 이규만이었다면 아슬아슬하게 세이프, 혹은 우익수 앞 땅볼의 가능성조차 있었을 타구. 7초 초반의 짧은 시간.
쪼유의 왼손이 2루 베이스를 터치했다.
-뻐엉!!!
“세이프!!”
2루에 선 쪼유가 나를 바라봤다.
그 모습이 뭐랄까? 마치 언젠가 도착할 거라는 믿음 아래 앞이 보이지 않는 길을 걷던 나그네 앞에 나타난 이정표와 같달까?
그래, 역시 나의 갈굼은 틀리지 않았다.
쟨 기본적으로 갈구면 할 수 있는 놈이구나. 적어도 이전에 FA 한 번 못하고 은퇴해서 막창집 하던 시절과 다르게 FA 한 번 정도는 하고 은퇴해서 막창집을 할 수 있겠구나.
4회 초.
우리는 3점을 추가했고 돌핀스의 선발 지대열은 결국 4회를 채우지 못하고 마운드를 양보했다. 게다가 심지어 돌핀스와 우리 팀은 이미 1차전에서 터무니없는 타격전을 벌인 주제에 연장전까지 가면서 불펜을 상당히 소모한 이후였다. 올라오는 불펜들의 상태는 당연히 그리 좋지 못했다.
사실상 우리의 승리가 확정이 되는 순간이었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사실상’이라는 점. 그리고 우리가 ‘마린스’라는 점은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요소였다.
무엇보다 ‘우리’의 승리는 사실상 확실이었지만 이번 경기 ‘나’의 개인적인 목표는 아직 2/3나 남아있는 상황이기도 했다.
물론 ‘나’의 개인적인 목표가 결국 우리의 ‘확실한’ 승리로 직결된다는 점은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었다. 사실 오늘과 같이 조금 이상한 마린스가 아닌 평소의 마린스에게 선발투수으 무실점 노디시전은 결코 특별한 일이 아니었으니까.
4회 초.
다시 마운드에 내가 섰다.
두 번째 타순.
달라질 것은 없었다.
-딱!!!
3구째 바깥쪽 속구.
강일진이 휘두른 방망이가 빗맞은 땅볼 타구로 연결됐다.
강라온이 산책하듯 달려 부드럽게 공을 잡아 1루에 송구했다.
-뻐엉!!!
절묘하게 미트에 틀어박히는 송구.
“아웃!!!”
깔끔한 원아웃.
확실히 열심히 하는 강라온은 정말 괜찮은 유격수다. 다른 사람들 열심히 안 한다고 꽁해서 평균치만 하는 멘탈은 프로선수라고 하기엔 좀 구데기 같지만 뭐, 지금까지 마린스의 환경에서 몇 년을 뛰었다면 또 이해 못할 건 아닌 것 같고······.
두 번째 타자인 잭 해밀턴에게 루킹 삼진.
커브를 간파하긴 했는데 그게 존 안쪽으로 들어갈 줄은 몰랐던 것 같다. 당연하 일이다. 솔직히 던진 나도 공을 받은 쪼유도 그게 그렇게 절묘하게 들어갈 줄은 몰랐으니까.
그리고 타석으로 앞선 타석에서 홈러을 도둑맞았던 백강호가 걸어 들어왔다.
그 표정부터 걸음걸이 그리고 웅장한 등장곡까지.
거의 무슨 인터넷에 짤로 돌아다니는 이정재의 등장씬을 연상케 할 만큼 압도적인 등장이었다.
[타석에 백강호. 백강호 선수가 들어왔습니다. 현재까지 12홈런. 시즌 49홈런 페이스로 본인의 커리어 하이를 훨씬 넘어가는 페이스입니다.]
[49홈런. 정말 대단한 페이스죠. 아마 예년이었다면 홈런왕은 따놓은 당상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닌 기록입니다만 놀랍게도 지금 마운드에서 공을 던지는 최수원 선수가 그보다 2개 많은 14개의 홈런을 기록 중입니다. 심지어 오늘 경기 직전까지만 하더라도 1홈런 차이였는데 투수로 출장한 경기에서 대뜸 홈런을 하나 추가를 해버렸어요.]
[그렇습니다. 이렇게 되면 백강호 선수 입장에서는 어떻게든 홈런을 추가하고 싶을텐데요. 앞선 첫 번째 타석 참 아쉽게 외야 뜬공으로 물러났던 백강호 선수. 과연 오늘 두 번째 타석 어떤 모습을 보여줄지 기대가 되는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