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4화. 무결점 이닝(2)
우중간으로 날아가는 큼지막한 타구.
그것을 대충 파악한 마린스의 우익수 서경준은 직감했다.
‘아, 이거 망했는데?’
우중간. 낙구 예상지점이 절묘하게 멀었다.
아슬아슬하게 담장 상단을 맞추거나 혹은 넘어가거나인데. 답이 나온다. 이건 아무리 뛰어가도 안 된다. 20대 때 날랜 몸으로 돌아간다고 해도 이건 안되는 거다.
그리고 서경준보다 더 먼 곳.
최수원에게 타구 판단을 제외한 나머지 모든 부분에서 메이저급이라는 판정을 받은 외야수가 달렸다. 그것은 옆도 뒤도 보지 않은 채 그저 정해진 곳을 향해 달리는 눈가리개가 씌워진 경주마와 같았다.
빨랐다.
아무튼 빨랐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정말 빨랐다.
돌아보지 않았다.
자신의 선택을 확신해서 돌아보지 않은 것이 아니다.
아무리 이주혁이라도 느낄 수 있었다.
이건 돌아보는 순간 받을 수 없는 공이다. 처음 생각한 그곳을 향해 달려라. 우왕좌왕 하지 말아라.
달려가던 속도 그대로 담장을 밟았다. 치킨집 광고가 그려진 담장은 생각보다는 단단했다. 경화된 애나멜 페인트의 영향이었다. 하지만 괜찮았다.
[어······.]
그렇기에 그것은 마치 영화의 한 장면 같았다. 물론 게임이나 영화처럼 담장을 밟고 삼각 점프로 더 높게 뛰어오르는 일은 없었다. 그런 건 아무래도 현실이라는 물리엔진에서는 이뤄지기 힘든 장면이었으니까.
스파이크로 담장을 밟고 공중에 뜬 이주혁의 몸이 아주 조금 그러니까 약 4센티 정도 더 올라갔다. 중요한 점은 그로 인해 체공 시간이 상당히 더 길어졌다는 점이었다.
쭉 뻗은 글러브가 날아오는 공을 향해 움직였다.
***
“미친······.”
나도 모르게 입에서 극찬이 튀어나왔다.
아니, 물론 이주혁이 종종 미친 수비를 보여주긴 했다. 그보다 많은 뇌절 수비를 보여줘서 문제였지만.
그런데 방금 이건 아예 수준이 달랐다. 솔직히 이 수비는 뒤에 배경음 깔고 KBO 레전설 수비 이런 걸로 두고두고 박제될만한 수비다. 메이저에서 이런 수비 했으면 앞에 The가 붙어도 이상하지 않을 수비라는 뜻이다.
여유로운 표정으로 달리던 백강호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이주혁 쪽을 바라봤다. 경기장의 분위기 역시 비슷했다. 백강호의 타격에 요란해지던 경기장이 잠깐 정적에 잠겼다.
그리고
-짝짝짝
어디선가 박수가 나왔다.
난 이 박수가 마린스 팬이 아니라 돌핀스 팬이 치기 시작한 박수라고 해도 믿을 수 있다. 그리고 돌핀스 팬들 역시 내 생각과 비슷했던 것 같다.
막 우레와 같은 환호성과 박수는 아니었지만 와, 이걸 잡아? 하는 느낌의 박수가 경기장에 울려 퍼졌다.
한 발, 아니 한 열 발쯤 늦게 도착한 서경준이 공을 받고 바닥에 풀썩 떨어졌던 이주혁에게 손을 내밀었다.
1회 말.
삼자범퇴.
그나저나 역시 컨디션 좋은 날에는 오히려 결과가 더 안좋은 징크스는 현실로 이뤄지는 건가? 분명 공은 제법 좋았는데 이걸 저기까지 날릴 줄이야······.
“좀 몰리긴 했는데, 확실히 홈런왕은 다르긴 다르네. 어지간하면 못 칠 줄 알았는데 타이밍 좀 늦었는데도 마지막까지 방망이 끌어당기니까 그게 저기까지 날아가네. 그래도 오늘 공 진짜 좋으니까 팍팍 던지자. 이게 백강호 선배님이나 되니까 저렇게 날아간 거지. 보통이었으면 다 평범한 외야 플라이야.”
“박 주원 선배님이면?”
“어······. 아무튼 팍팍 가자. 2점이나 앞서고 있잖아.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공 네 개에 1회 끝난 거잖아.”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에서 쪼유가 나를 격려했다.
덕아웃에 앉아서 투수용 점퍼를 걸치니까 조금 더운 느낌이었다. 그런 와중에 저기서 이주혁과 서경준이 자기들끼리 떠들면서 들어왔다.
“와, 미친. 야, 어떻게 그런 공을 잡으러 갈 생각을 하냐.”
“그냥 뭔가 왠지 거기에 공이 올 것 같아서요······. 운이 좋았습니다.”
“마, 감각은 다 그런 식으로 쌓여 가는 거야. 너도 이제 좀 그게 삘이 오기 시작하나보다. 이게 외야수는 이런 경험이 또 중요한 거거든. 내 감각이 딱 맞아떨어지는 그거. 거기서 자신감 붙기 시작하고 그게 선순환되면서 실력이 팍팍 느는 거야. 오늘 수비는 진짜 너 하이라이트급이다.”
내가 보기에는 순 뽀록 같아 보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서경준의 말처럼 오늘 수비가 하이라이트급이긴 했다. 그래서일까? 이주혁의 얼굴에도 부쩍 자신감이 그득하다.
그래, 뭐 좋은 수비 다음에는 좋은 공격도 따라오는 거고 저런 자신감이라면······.
-부웅!!!
“스트라잌!! 아웃!!!”
아······.
뭐지?
분명 1회 초 공격 때는 마린스 같지 않은······. 그래, 마치 밤사이 내가 지구 1이 아니라 지구 616이라는 평행차원으로 이동이라도 한 것 같은 공격을 보여줬는데 2회 초 공격에서는 또 그대로 마린스다운 공격이었다.
좋은 수비 다음에 좋은 공격은 개뿔.
삼자범퇴인데 그것도 KKK로 삼자 범퇴다. 아니, 인간적으로 세 타자 연속 삼진은 좀 너무한 거 아니냐? 사람이 아니라 허수아비를 세워놔도 그것보단 낫겠다.
특히 마지막 헛스윙 삼진으로 돌아온 쪼유가 아무런 말 없이 묵묵하게 포수 장비를 착용하는 꼬라지가 상당히 꼴보기 싫었다.
‘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1회 말 수비 때 호수비 했잖아. 오늘 정도는 그냥 타석에서는 좀 허수아비더라도 특타 1,000개 정도로 용서해주자.’
다시 마운드 위로 올라가기까지 고작 5분.
어깨는 조금도 식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투수용 점퍼를 걸쳤더니 조금 더워서 그런가? 몸이 조금 후끈한 느낌이다.
가볍게 공을 두 개 던졌다.
-뻐엉!!!
공 끝이 쭉쭉 뻗어나간다.
물론 타석에 서봐야 정확히 알 수 있겠지만 여기서 봤을 때는 공이 진짜 좋아 보인다. 잊지말자. 브레이브스의 학폭이가 던지던 공이 KBO 최고 수준이라고 불렸다. 그리고 내가 던지는 공은 학폭이의 공과 비교해 절대 부족하지 않다.
그리고 타석에 박주원이 올라왔다.
어······. 그러니까 나이가 좀 들긴 했는데 메이저도 다녀온 리그의 전설적인 홈런왕이다. 솔직히 MLB에서는 실패한 거라서 탈 KBO급이라고 부르긴 좀 애매했지만 아무튼 KBO에서는 규격 외의 성적을 기록한 적이 있는 선수다. 그러니까 나이가 30대 후반에 접어들었는데도 홈런을 30개 가까이 때려낼 수 있는 거겠지.
자리에 서서 방망이를 슬쩍 들어 올렸다.
묵직하다.
확실히 현재의 실력과 무관하게 그 사람이 만들어낸 커리어라는 것은 그 나름의 무게감으로 다가온다. 아마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나를 상대했던 투수들 역시 나에게서 저러한 무언가를 느꼈었겠지.
그렇기에 답은 간단했다.
쫄지 않고
빠른 공으로
윽박지른다.
-부웅!!!
“스트라잌!!!”
흥을 많이 낸 나머지 살짝 몰린 공.
박주원의 방망이가 늦었다.
그리고 공을 받은 쪼유가 잠깐 멈칫했다.
녀석의 시선이 전광판으로 향한다.
뭐지?
[······.]
[······.]
[배······, 백 육십이!! 아, 죄송합니다. 순간 너무 당황해서 제가 말하는 걸 잊었네요. 그러니까 지금 구속이 162km/h가 나왔습니다!!]
[162.6km/h 이건 반올림 하면 사실 163이라고 봐야죠.]
[그러니까 지금 이건 101마일. 한국 최고 기록 아닌가요?]
[어, 그러니까 일단 기본적으로 구속은 KBO에서 인정하는 공식 기록은 아닙니다. 각 구단마다 장비 차이도 있고. 뭐 여러 가지 문제로 확실히 규격화 시키기 어려운 문제가 있으니까요. 다만······. 일단 제가 아는 한도 내에서는 162.6km/h면 KBO 역대 가장 빠른 공입니다.]
[그러니까 지금까지 KBO에서 이것보다 빠른 공을 던진 한국인은 없었다. 뭐 그런 말씀이시군요.]
[아뇨.]
[네? 분명 방금 가장 빠른 공이라고······.]
[162.6km/h면 한국인이 아니라 외국인 용병까지 다 포함해서도 가장 빠른 기록입니다.]
[······.]
와······.
쪼유 녀석의 시선을 따라 나도 전광판을 좀 봤는데 나도 놀랐다.
아니, 컨디션이 좀 좋긴 했고 공이 쭉쭉 뻗어나가는 느낌이긴 했는데 162.6km/h라고? 특별히 쥐어짜낸 느낌도 아니었는데?
박주원도 전광판을 한 번 보더니만 허탈하게 웃었다.
물론 그 허탈한 웃음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다시 방망이를 쥐고 타석에 서서 매서운 눈빛으로 나를 노려봤다.
근데······.
조금 전의 그 묵직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쪼유가 다시 건네준 공을 잠시 쪼물딱거리면서 생각했다.
더 세게 던져볼까?
몸쪽 낮은 코스를 요구하길래 고개를 저었다.
진짜 세게 던져보고 싶은데 이건 잘못하면 진짜 37살 타자 무릎부상으로 은퇴시킬 수도 있다. 바깥쪽 높은 코스.
진짜 최선을 다해서 공을 뿌렸다.
-뻐엉!!!
“스트라잌!!!”
아, 조금 빠졌는데 박주원의 체크스윙이 아무래도 넘어간 것 같다. 심판이 스트라이크를 외쳤다.
살짝 기대감을 안고 전광판을 바라봤다.
162.7km/h.
어······.
쫌 애매하다.
이번엔 진짜 전력으로 뿌렸는데 고작 0.1km/h 차이. 더 올라가긴 했는데 기대했던 것만큼 빠르게 나오진 않았다.
하지만 박주원의 표정을 보고 있자니 그 0.1km/h의 차이가 아무래도 상당히 큰 충격으로 다가온 것 같았다.
대충 해석하자면
‘아니, 거기서 구속을 더 끌어올린다고? 너 나한테 왜 그러냐?’
이런 느낌?
물론 금방 표정을 수습하고 다시 타석에서 다음 공을 대비하는데 표정이 사뭇 비장했다.
그래서 던졌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뚝 떨어지는 커브를.
그야말로 정석 그 자체의 떨공삼.
사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을 것이다. 박주원은 전성기에도 97마일 이상의 공에 약점을 보이던 타자다. 그런데 지금 101마일짜리 공을 어떻게든 쳐보겠다고 억지로 타이밍을 빨리 가져가는 타이밍에 떨어지는 공을 만났다?
한때 KBO를 대표했던 홈런왕을 상대로 깔끔한 삼구삼진.
경기장에서 뭐라 콕 찝어 말할 수 없는 무언가 묘한 분위기가 느껴졌다. 그러니까 굳이 기억을 되살려 보자면 대충 메츠의 그 미친놈이 5이닝 동안 삼진을 13개 잡던 그 분위기랑 비슷하다.
돌핀스의 타자가 올라왔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돌핀스의 타선은 KBO의 평균레벨을 아득히 상회한다. 불과 작년만 하더라도 돌핀스 하위타선이 마린스 상위타선보다 강하다는 이야기가 나올 정도였다.
그런데 뭐랄까?
아무리 생각해도 내 공이 얻어 맞을 것 같은 분위기가 아니다.
특히 타자의 저 당황한 표정을 보고 있자면 더더욱.
간다.
162.7km/h의 강속구
-뻐엉!!!
“스트라잌!!!”
[최수원 선수!! 과감하게 몸쪽 깊숙한 코스로 속구를 찔러넣습니다!! 구속은 무려 161.1km/h!! 와, 정말 항상 이야기합니다만 160을 던지는 투수면 어지간하면 잔재주가 필요 없어요. 그냥 던지면 됩니다. 최수원 선수 지난 브레이브스와의 경기 이후로 정말 강속구 투수다운 시원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어요.]
[게다가 커맨드도 아주 훌륭합니다. 사실 160정도 되는 공은 존에 넣는 것만으로도 훌륭하거든요. 근데 보시면 최수원 선수 공은 완벽하게 가운데로 몰리는 공이 많지 않아요. 전체의 1/3도 채 안됩니다.]
아, 이 느낌이 아니었는데.
뭔가 좀 더 스무스하게 팔을 휘둘렀던 것 같은데.
두 번째.
159.9km/h의 속구가 존의 복판을 꿰뚫었다.
-부웅!!!
“스트라잌!!!”
볼카운트 0-2.
쪼유가 커브를 요구했다.
올바른 선택이었다.
그런데 뭔가 지금 속구가 좀 감이 오는 느낌이라서 더 던져보고 싶다는 욕심이 생겼다. 사실 실전에서 연습하는 놈처럼 멍청한 놈이 없긴 한데 원래 선발 투수는 멍청해야 할 수 있는 포지션이니까 괜찮지 않을까?
다행히 녀석도 지금 나의 속구에서 뭔가를 느끼고 있어서일까?
쪼유가 고개를 젓지 않았다.
세 번째.
-뻐엉!!!!
“스트라잌!! 아웃!!!”
바깥 코스 절묘하게 빠지는 160.1km/h의 속구.
심판이 시원하게 스트라이크 콜을 불러줬다.
평소에 내가 타석에서 손해 보는 거 생각하면 솔직히 이 정도는 줘야 셈이 맞다.
그렇게 두 타자 연속 삼진.
세 번째 타자가 타석에 올라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