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3화. 무결점 이닝(1)
야구, 아니 어느 스포츠건 간에 기세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마린스가 돌핀스를 상대로 2년 7개월 만의 위닝 시리즈가 확정이라는 말은 반대로 바꿔보면 돌핀스가 마린스를 상대로 2년 7개월만에 루징 시리즈가 확정됐다는 말과 같다. 심지어 연패로 따져보면 돌핀스는 지난 2023시즌 초반에 스윕을 당했던 이후로 단 한 번도 연패를 당한 적이 없었다.
무려 4년만에 마린스에게 당한 연패.
돌핀스의 라커룸에 묘한 고요함이 맴돌았다.
“······.”
평소 시끄럽게 떠드는 이들조차 활발하게 떠들지 못했다. 하지만 그 분위기가 침체된 분위기인가 하면 또 그건 아니었다.
이것은 굳이 설명하자면 폭풍전야의 고요함에 더 가까울 것이다.
돌핀스는 2020년 이후 꾸준히 포스트 시즌에 진출했으며 특히 지난 4년간은 KBO 최정상을 지켜온 팀이었다. 대부분의 선수들이 승리하기 위해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확실하게 알고 있다는 뜻이었다.
스윕패는 곤란했다.
그것도 지난 몇 년동안 꾸준히 호구를 잡아 온 상대에게 스윕패는 더더욱.
“가자.”
주장 박주원의 묵직한 한 마디가 선수들을 일으켰다.
마린스와의 3차전.
상대는 KBO 최고의 천재 최수원이었다.
***
지난 23시즌부터 26시즌까지 4시즌 동안 돌핀스와 마린스의 상대 전적은 64전 12승 51패 1무. 물론 돌핀스는 그 기간 동안 실제 통합우승까지 했던 우승 후보였고 마린스는 꾸준히 성적이 좋지 못했다곤 하지만 실로 처참한 성적이었다.
하지만 이것이 과연 순수한 실력의 차이였을까?
“물론 실력 차이지. 마린스 지난 4시즌 승률 자체가 3할 초중반인데 뭐.”
“아니, 아무리 그래도 2할 3푼이 말이 되냐? 거의 1할 넘게 차이 나는 건데.”
“돌핀스 지난 4년 승률이 6할이 넘어가니까 얼추 따져보면 말이 되는 것 같은데?”
물론 누군가의 이야기처럼 그럴 수도 있다.
하지만 또 다른 이는 이렇게 말을 하기도 했다.
“원인과 결과가 바뀐 거지. 뭐, 그게 아니라고 해도 혼재된 수준이라고 봐야할 거야. 애초에 돌핀스의 6할 승률 자체가 마린스와의 경기에서 연전연승한 덕분인 거고, 마린스의 승률이 2할 3푼인 건 돌핀스한테 완전히 호구를 잡힌 덕분인 거니까.”
“그렇군요. 근데 마린스가 절대열세인 팀이 돌핀스만은 아니었잖아요.”
“······.”
······.
***
아침에 눈을 번쩍 떠졌다.
일단 침대에서 비비적거리고 싶지 않은 것이 컨디션이 최악은 아니다.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풀었다.
몸이 가볍다.
“아······. 이러면 플래그가 별론데 이거.”
묘하게 이번 시즌 컨디션이 막 좋은 날에는 오히려 성적이 좀 별로고 컨디션이 평범했던 날에 성적이 괜찮았다. 심지어 노히트 했던 날에는 좀 피곤해서 컨디션이 썩 좋은 편이 아니었는데 노히트까지 했다.
한 대여섯 경기 그런 일이 반복되면 그게 징크스가 돼버린다.
그게 무슨 멍청한 생각이냐고 말할 수도 있겠지만 이게 운동하다 보면 진짜 징크스를 믿을 수밖에 없다. 물론 빅리그에서 뛰던 시절에는 학창 시절에 공부 똑바로 안 한 멍청이들이라서 그딴 거 믿는다고 독설 날리던 투수 놈도 있긴 했지만 정작 그놈도 말년에는 마운드 밟을 때 꼭 왼발부터 밟더라.
아무튼 컨디션은 좋은데 괜히 좀 찝찝한 마음이었다.
지난번 노히트 때 좀 너무 피곤해서 아침에 어떤 식으로 움직였었는지 잘 기억이 안나는지라 그때 루틴을 완전히 따라하지는 못했다. 그냥 적당히 기억나는 대로 움직였다.
우선 씻기 전에 아침부터 든든하게 먹었다. 아무래도 선발 등판 당일에는 갈비찜 먹는 게 루틴이 된 것 같아서 미리 포장해다가 호텔에 부탁해둔 갈비찜이었다.
샤워부터 피칭 전 회의, 그리고 준비운동을 하는 순서까지 정해진 대로 다 끝내고 경기장으로 향하는 버스에 탑승했다.
-뻐엉!!!
“와우, 굿볼!!”
옘병.
역시나 컨디션이 좋아서 그런지 공도 좋았다.
쪼유가 엄지를 척 치켜들었다. 워낙 오래 지내서 그런지 저 녀석의 엄지손가락도 나 기분 좋으라고 올라오는 거랑 진짜 감탄해서 올라오는 게 좀 구분이 되는 느낌인데 이번 엄지손가락은 진짜로 감탄해서 올라오는 것 같다.
연습 투구를 다 끝내고 쪼유와 함께 타격 연습하는 곳을 찾았다.
사실 원래는 이 타이밍에 혼자 앉아서 고독을 좀 씹으며 이미지 트레이닝을 해야 했다. 그런데 오늘 내 공이 너무 좋았고 그렇다면 파국의 시작은 아마도 저 야수놈들이 아닐까 하는 합리적 의심이 무럭무럭 생겨났다. 그리고 그런 의미에서 이놈들 컨디션을 눈으로 좀 확인하고 싶다는 궁금증을 참아내기 힘들었다.
-딱!!!
규만 선배야 뭐······. 연습배팅에서는 워낙 잘 치니까.
저 양반은 발이 문제지 타격은 문제가 없다.
대체적으로 크게 컨디션이 나빠 보이는 녀석은 없었다. 강라온이 어제 너무 오버하는 느낌이라 좀 불안했는데 오히려 그게 오버가 아니라 힘숨찐이 드디어 왼팔의 흑염룡을 해방한 느낌으로 오늘도 쌩쌩 날아다니는 느낌이다.
“어? 뭐야? 오늘 선발인데 배팅도 연습하려고 온 거야?”
“아뇨. 그냥 기운만 좀 받으려고요.”
“욕심이 과한 거 아니야? 피칭만 잘 하면 됐지 홈런까지 치려고? 아, 하긴 지금 강호 형이랑 홈런 딱 1개 차이로 좁혀졌지? 왜? 그래서 걱정이라도 되는 거냐?”
“아, 그래요? 그 선배님 제가 쉬는 동안 열심히 치셨네. 근데 어차피 이번 시리즈 끝날 때까지 차이가 벌어지면 벌어졌지 좁혀지지는 않을테니까 별 걱정은 안 듭니다.”
“크, 하여간 건방짐 하나는 최고라니까. 아무튼 오늘 점수는 우리한테 맡기고 가서 하던 대로 이미지 트레이닝이나 해. 안 그래도 어제는 형욱 선배가 또 소갈비 사서 다들 컨디션 엄청 좋으니까.”
“네? 저 빼고 야수들 전부 또 소갈비 회식을 했다고요?”
“네 껀 쪼유가 따로 포장해서 챙겨 놨으니까 경기 끝나고 집에 가서 일요일에 구워 먹어. 너 오늘 등판이라고 배려해준 거니까.”
사실 별 건 아니었지만 순간적으로 좀 섭섭할 뻔했는데 따로 챙겨놨다는 말에 다시 기분이 괜찮아졌다. 단순히 공짜 갈비의 문제가 아니라 뭐랄까? 중학교 시절 반 단합대회 때 다 초대되는데 나만 초대 못 받는 느낌이랄까? 참고로 야구부라서 스케줄 때문에 못 받았던 거지 왕따라서 그랬던 건 아니다.
아무튼 선수들까지 모두 눈으로 확인하고 나니까 뭐랄까?
전부 다 너무 좋아서 안심된다기보다는 오히려 불안했다. 분명 마린스가 다 좋을 리가 없는데······. 이건 역시 운수 좋은 날의 김첨지 엔딩을 암시하는 건가?
아니, 아니다.
괜히 안좋은 상상을 하지 말자.
마지막 순간 온통 0으로 뒤덮인 전광판을 등지고 마운드 위에서 두 팔을 번쩍 드는 나의 모습을 그려봤다.
선명한 이미지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
근데 선명하게 그려지기는 그려지는데 배경이 왜 한국이 아니라 양키 스타디움이지?
아무튼 1회 초.
오늘 선두타자로 나온 이정훈이 나를 향해 오른쪽 눈을 깜빡이더니 자신감 넘치는 표정으로 자기 배트를 챙겨 그라운드로 나갔다.
-부웅!!!
그리고 7구째 장렬한 헛스윙 삼진.
“잘 봤지? 이게 다 1번 타자로 상대 투수의 공을 최대한 보여주려는 선배의 마음이었다.”
“이왕이면 그 마음의 끝이 출루였다면 더 좋았을텐데 좀 아쉽네요.”
“······.”
그리고 두 번째.
강라온.
-딱!!!
깔끔한 초구 타격.
심지어 깔끔하게 2루까지 안착하는 장타였다.
물론 그 장타가 별다른 의미는 없었지만.
-뻐엉!!!
6구째 몸쪽 높은 코스 볼넷.
슬쩍 마운드의 투수를 한 번 노려보고 1루로 출루했다.
“스읍······. 자꾸 이러면 나 오늘 손에서 공이 빠질 것 같은데······.”
“야, 인마. 그냥 실투잖아 실투.”
“아니, 그러니까 저도 그냥 실투 할 것 같다고요. 실투. 무서워서 손에 힘이 풀려서 하는 실투.”
“야, 그게 그러니까······.”
백강호가 한참 오늘 투수가 얼마나 제구가 별로인지를 떠들었다.
“아니, 그렇게 제구가 안 좋으면 몸쪽 공은 던지지 말아야죠. 어차피 볼넷으로 내보낼 거 바깥쪽만 던지면 좀 좋습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우리 제발 어? 신사적으로 가자.”
“생각해볼게요.”
“아니, 생각만 하지 말고.”
-딱!!!
이어지는 노형욱의 시원한 타격.
타구가 쭉쭉 뻗어나갔다. 2루에 있던 강라온이 홈까지. 그리고 나도 2루를 지나 3루까지 미친 듯이 달렸다.
“세이프!!!”
후아······.
자리에서 일어나 엉덩이에 묻은 흙먼지를 털어냈다.
나에게 뇌절주루를 시켰던 3루 코치가 슬쩍 다가와 내 손이 닿지 않았던 부분까지 털어주며 말을 걸어왔다.
“너무 무리하는 거 아니야? 오늘 같은 날은 좀 설렁설렁 뛰어도 괜찮은데.”
“원아웃 주자 2루랑 3루는 또 다르잖습니까. 1점 등에 업고 던지는 거랑 2점 등에 업고 던지는 것도 좀 다르고요.”
“그래, 아무튼 너무 무리하지 말고. 어지간하면 슬라이딩 자제하고.”
“네.”
그리고 나의 질주는 보답을 받았다.
솔직히 이전의 우리 팀이었다면 여기서 깔끔한 병살. 혹은 삼진 후 내야 땅볼 같은 것이 정석적인 스토리였을 것이다.
하지만 놀랍게도 규만 선배는 여기서 ‘외야 희생 플라이’를 쳤다.
추가 1점.
벌써 2:0
시작이 좋았다.
덕아웃에 돌아와 마운드로 올라갈 준비를 했다.
적절한 준비였다.
서경준이 깔끔하게 내야 땅볼로 물러났다.
“가자.”
글러브와 공을 챙겨들고 마운드로 향했다.
포수 마스크를 쓴 쪼유가 홈플레이트 너머에 자리 잡았다.
-뻐엉!!
세 개의 연습구.
영점을 잡는 데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타석에 돌핀스의 1번 타자 강일진이 올라왔다. 좋은 타자다. 기본적으로 내야수였지만 외야수 땜빵도 가능하고 작년 성적도 0.313/0.404/0.398로 리그에 13명밖에 안되는 3할 타자 중 하나다. 심지어 나이도 스물셋. 높은 확률로 내년에 LA 올림픽이나 3년 후에 도하 아시안 게임에서 나의 군 면제 버스에 탑승할 예정이다.
그러니 그때의 감사함을 미리 땡겨서 갚는다는 느낌으로 오늘은 얌전히 폭풍삼진으로 물러나길 바란다.
초구.
몸쪽 높은 코스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빠른 공.
강일진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높게 치솟은 공.
하지만 그냥 높기만 했다. 앞으로 날아가는 대신 그 자리에서 뒤쪽으로 높게 솟은 타구. 쪼유가 마스크를 벗어 던지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공을 쫓았다.
“아웃!!!”
좀 아슬아슬하기는 했는데 애초에 저렇게 아슬아슬한 것 자체가 쪼유의 운동신경이 워낙에 좋은 덕분이다. 어지간한 포수였다면 그냥 어버버하다가 파울로 끝났을 것이다.
공 하나에 아웃 카운트 하나.
일단 좋은 시작이었다.
타석에 잭 해밀턴이 올라왔다.
용병 타자로 빠른 공을 잘 치는 타자로 소문이 났다.
-부웅!!!
“스트라잌!!”
아, 물론 여기서 빠른 공은 KBO수준의 빠른 공이다.
159.4km/h의 속구가 시원하게 홈플레이트를 갈랐다.
그리고 두 번째.
기분 좋은 빠른 커브.
-딱!!!
잭 해밀턴의 방망이가 공의 윗둥을 두들겼다. 바닥을 찍고 높게 솟구친 타구. 피칭 이후 무너진 자세를 빠르게 수습했다.
그리고 그 사이 잭 해밀턴이 1루를 향해 빠르게 달려갔다.
하지만 내가 조금 더 빨랐다.
크게 튕긴 공을 글러브로 받아 손목을 가볍게 튕겨냈다. 수비 잘하는 내야수 애들이 종종 하는 건데,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난 MLB를 기준으로는 폐급 판정을 받긴 했어도 KBO를 기준으로는 아주 훌륭한 일루수였다.
-뻐엉!!!
“아웃!!!”
깔끔한 투 아웃.
그리고 지금 나랑 홈런이 딱 한 개 차이.
리그 홈런 2위의 강타자.
3번 타자 백강호가 타석에 올라왔다.
참고로 말하자면 오늘 그의 홈런이 늘어날 일은 없을 예정이다.
-딱!!!!
“어?”
이주혁이 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