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2화. 인생의 낭비(4)
한우는 비싸다.
특히 유명한 수원 왕갈비집은 더더욱 비싸다.
“1인분에 10만원이 넘어?”
“형님, 이런 데서는 촌스럽게 가격표 보고 그러는 거 아니에요.”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거 300인분이면 작년 내 연봉······.”
“에이, 올해는 잘 하고 계시잖아요. 내년에는 3000인분쯤 사실 수 있을 겁니다.”
이주혁은 일단 가격표를 보고 좀 기가 죽은 느낌이었다. 하지만 의외로 쪼유 녀석이 뭔가 익숙해 보였다.
“어차피 규만 선배가 사는 거잖아요. 이럴 때 팍팍 먹어둬야죠. 그냥 감사합니다하고 팍팍 드시면 돼요. 들어보니까 그 뭐더라? 회식도 그 무슨 복리후생비? 비용처리? 아무튼, 그거 된다고. 걱정하지 말고 먹으라고 하셨어요.”
고액 납세자를 해본 경험으로 이 정도 규모로 먹는 것까지 다 될 것 같진 않았지만 뭐 굳이 태클을 걸지는 않았다. 어차피 그 액수는 달라도 자산이 막 백억 단위를 넘어가면 일반적인 소비에서는 막 엄청난 느낌이 들진 않는다. 내가 알기론 규만 선배도 지금까지 수령한 연봉이 세후로 백억이 훌쩍 넘고 재테크도 제법 잘해서 알짜배기 부동산도 몇 개 굴리고 있다고 알고 있다.
이 정도쯤이야. 뭐······.
“자, 다들 마음껏 먹어라. 단 술은 금지다.”
“에? 오늘 좋은 날이데 그래도 맥주 한 잔 정도는······.”
“경준아, 우리 오늘 1점 차이로 이겼다. 누구 하나라도 컨디션이 조금만 나빴으면 졌을 거라는 거야.”
이규만이 상당히 엄하게 서경준의 말을 끊었다.
사실 운동선수들의 체중과 평균적인 신체 능력을 생각하면 맥주 한 잔 정도는 정말 기분만 내는 거다. 하지만 이규만은 오늘 그 기분만 내는 것조차도 허락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것을 어떻게 느꼈을까? 분명 경기도 이긴 좋은 날에 빡빡하게 군다고 투덜거리는 녀석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대부분은 고개를 끄덕였다.
승리는 항상 옳다.
“진작에 좀 저렇게 하라니까······. 내가 몇 번을 말했는데. 하여간. 느리다니까. 쯧······.”
강라온이 나지막하게 투덜거렸다.
묘하게 친해지기 힘든 남자였다. 분명 팀에서 제일 정상인 포지션이고 항상 상식적인 말을 하긴 하지만 항상 부정적인 느낌이랄까? 하지만 강라온의 저런 모습도 어쩌면 마린스라는 괴물로 인한 부작용일지도 몰랐다. 이 팀에서 상식적인 모습이라는 것은 거의 모든 것을 부정해야지만 가능한 일이었을 테니까.
“네가 고생했다. 제로 콜라?”
“그냥 물로요.”
“그래, 술이나 콜라보단 낫지만, 탄산도 간에 무리 주는 것 똑같아. 물 마셔라. 아니, 아니다. 넌 체중 좀 붙어야 하니까 이거 주스의 탈을 쓴 설탕물 마셔라.”
아니, 대체 왜 물어본 걸까?
강라온이 나의 잔에 어디서 챙겨왔는지 모를 델몬트 오렌지 주스를 따랐다.
“이게 참 웃기긴 웃기네. 내가 아무리 입으로 떠들어도 술 쳐마실 놈들은 술 처마시고 경기 져도 좋다고 히히 웃으면서 야식 먹던 놈들은 야식 쳐먹었는데. 그냥 야구 겁나 잘하는 놈 하나 오니까 사람들이 바뀐다는 게.”
“선배.”
“어?”
“혹시 몰래 술 드셨어요?”
“이 새끼. 진짜 말 막하네. 넌 정훈이형 말처럼 야구 좀만 못했으면 진짜 줄빠따다.”
“제가 야구를 잘못했으면 예의가 좀 더 바르지 않았을까요?”
“그런가? 아무튼 야구 못하고 예의 바른 것보다는 야구 겁나 잘하고 싸가지 없는 게 더 나으니까 그냥 이대로 가자.”
강라온이 내 접시 위에 적당히 익은 고기 한 점을 올렸다.
“야, 먹어라. 내가 사는 건 아니지만 많이 먹어라.”
“네. 잘먹겠습니다.”
“하······. 진짜 널 보면 복잡하다. 내가 입으로 떠들 시간에 진짜 야구를 겁나 잘했어야 했나. 뭐 그런 생각? 솔직히 저 양반들 그냥 프로 정신이 부족해서 무기력한 거라고 생각했었는데. 저런 양반들도 희망이라는 게 보이니까 참······.”
확실히 고기가 좋았다.
내가 KBO에서 뛰던 시절에 이 가게는 아니고 근처 다른 가게에서 먹어본 적이 있는데 사실 고깃집에따라 고기가 극적으로 차이가 난다고 보긴 힘들고, 이건 그냥 이 양반들이 워낙에 여기 단골이라서 사장님이 특별히 좋은 고기를 챙겨 두신 거라고 봐야겠지.
입에서 살살 녹는다.
“근데 선배.”
“어?”
“제가 볼 땐 그게 프로 정신이 부족한 거 맞아요. 희망이고 뭐고. 이길 만하니까 기세 올려서 덤비는 건 동네 PC방에서 게임 하는 백수들도 그렇게 할걸요? 돈 받고 게임하는 프로라면 희망이 하나도 보이지 않을 때 그 깜깜한 풍경 너머를 상상하고 덤벼 들어야죠. 아, 이거 맛있네. 이모, 여기 생갈비 두 개만 더 주세요.”
“······.”
강라온이 피식 웃었다.
“하, 새끼. 맞는 말이고 내용도 과거의 내 생각이 맞았었다는 거니까 분명 기분 좋은 이야기 맞는데. 칭찬도 싸가지 없게 하는 건 뭐 어디서 과외라도 받은 거냐?”
“칭찬 감사합니다.”
“새끼. 오래 살겠네. 고기나 더 먹어라. 너 지금은 시즌 초반이니까 풀파워로 그렇게 엑셀 밟을 수 있지. 그거 오래 가기 힘들다. 여름에는 특히 더. 심지어 투타겸업에. 요즘 계속 볼넷으로 나가는 바람에 주자로 뛰느라 체력 소모도 크고.”
“안 그래도 잘 챙겨 먹고 있습니다.”
“괜히 몸보신 한다고 한약이니 뭐니 먹지 말고. 의사가 정해준 영양제로 딱 챙겨 먹어. 의사도 어디서 주워들은 이상한 명의 찾아가지 말고 구단 지정 의사만 찾아가고.”
말투도 좀 강하고 틱틱거리는 느낌이 있긴 했지만 강라온은 꽤 좋은 선배였다.
특히 마음에 드는 부분은 고기를 매우 잘 굽는다는 점과 그렇게 구운 고기를 내 접시에 먼저 올려준다는 점이었다. 사실 이런 가게는 이모님들이 고기를 구워주시는 데 시간이 늦기도 했고 선배들이 미리 이야기를 했는지 사장님과 알바생들이 고기를 서빙만 했을 뿐, 우리가 직접 구워 먹어야 했다.
“야, 쪼유, 아, 이 새끼. 넌 진짜 집개 집지 마라. 이 좋은 고기를. 어휴.”
“선배님!! 한 번만 더 기회를 주십쇼!! 다 이러면서 배우는 거 아니겠습니까!!”
“그러니까 학습은 나중에 호주산으로 하고 오늘은 그냥 쳐 먹으라고 좀.”
맥주 한 잔 없는 야수들의 회식이 그렇게 평탄하게 흘러갔다.
그리고 2차전.
-딱!!!
백강호가 홈런을 두 방을 때렸다.
그리고 박주원도 홈런을 하나 때렸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디에고 로드리게스는 평소와 비슷하게 던졌다. 하지만 1인분에 10만8천원짜리 한우가 힘을 발휘한 것일까? 야수들의 집중도가 조금 달랐다.
6회까지 피홈런만 3개가 나왔음에도 불구하고 고작 4실점.
“어, 뭐지? 데자뷰인가? 나 이거 비슷한 장면 되게 많이 본 것 같은데?”
“야, 잠깐만. 나 PTSD가 올 것 같아.”
“진정해!! 3홈런 4득점 우리 팀이 아니야!! 상대 팀이라고!!”
TV로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당황했다.
시즌이 시작한 이후 홈런이 평균 1.5타점이 안 되는 것은 줄곧 마린스의 경기였다. 하지만 오늘 돌핀스는 홈런을 제외하면 좀처럼 점수를 만들지 못하고 있었다.
바로 하루 전 무려 15점을 뽑아낸 돌핀스의 타선이었다. 그리고 그게 아니더라도 돌핀스가 리그 최강의 타선이라는 것을 부정할 사람은 없었다. 꽤 오랜 기간 투고타저가 이어진 KBO의 경기당 평균 득점은 4.2점 내외였다. 하지만 돌핀스는 무려 4년 연속으로 경기당 평균 5점이 넘는 점수를 올렸다.
게다가 마린스의 팀 컬러는 어떠한가.
모래알 같은 수비 조직력.
끈끈함이라는 단어와 가장 거리가 먼 것에 순위를 매겨 본다면 마린스의 수비 조직력은 사하라사막의 모래알과 함께 순위를 다툴 만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오늘 경기에서 마린스는 합이 맞는 수비라는 것을 보여줬다.
야구의 수비에서 개인의 기량이 차지하는 비중은 절대적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수비의 조직력이라는 것이 아예 없는가 하면 또 그건 아니다.
예컨대 강라온의 송구.
공을 받아낸 그의 송구가 평소에는 사람이라면 이 정도는 받아야지 하는 느낌으로 조금 거칠게 날아갔다면 오늘은 그래, 규만 선배라면 종종 사람 미만이니까 내가 여유가 되는 만큼 최대한 좋은 송구를 해주자 하는 따듯함이 느껴졌다.
또한, 예컨대 강라온의 수비.
노형욱의 경우 자기 존에 오는 공은 확실히 잘 처리하는 편이지만 그 존이 그리 넓은 편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강라온은 조금 박하게 사람이라면 저런 공은 당연히 받아야지 하는 태도였다면 오늘은 그래, 더 젊고 잘 뛰는 내가 조금 더 뛰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더 넓은 범위를 커버했고, 심지어 노형욱의 실수에도 대비를 해주었다. 아마 노형욱이 흘린 공을 미친 속도로 달려나가 잡아냈던 강라온의 호수비가 없었더라면 오늘 우리는 2점은 더 내줬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아, 근데 말하다 보니까.
강라온 저 새끼. 저거 더 잘할 수 있는데 괜히 삐져서 틱틱거렸던 것 같은데?
아무튼 돌핀스의 타선이 홈런을 세 방이나 깠음에도 4점밖에 못 내는 변비 걸린 것 같은 상황을 이어갔을 때 우리는 고작 홈런 한 방에도 불구하고 무려 6득점을 하는 기염을 토했다.
“수원이 교체 할까요?”
“······. 다음 타석 또 볼넷으로 나가면 혁주 대주자로 넣고 빼도록 하지.”
방망이 안 휘두르고 볼넷으로 나가면 체력적으로 좀 더 보전이 될 거라는 생각을 하는 사람이 가끔 있는데 사실 이게 더 힘들다.
그냥 자동 고의사구로 내보내 주면 투수도 편하고 나도 편한데 요즘은 또 그건 잘 안 해준다. 이게 듣기로는 심판들 사이에서 내 버릇이 별로라고 판정에서 살짝 투수들에게 유리하게 잡아준다는 소문이 돌아서라고는 하는데, 애매하긴 하다. 그래도 판정에 일관성은 있는 것이 나한테 감정이 별로라서 주는 판정이라기보다는 일반적인 신인 길들이기 수준 같기도 하고······.
아무튼, 그렇게 타석에 서고 또 매번 주자로 뛰기까지 하니까 뭐랄까? 차라리 홈런 치고 설렁설렁 걸어 들어오는 게 더 편하달까?
네 번째 타석.
파울 하나 치고 볼카운트 1-3.
싱커성으로 들어오는 공이 살짝 몰린 것 같아서 두들겼는데 아쉽게 내야를 벗어나지 못했다.
내야 땅볼 아웃.
“고생했다. 먼저 씻고 좀 쉬어라.”
내일 경기 선발이었던 만큼 조금 늦은 감이 있는 교체이긴 했다.
아무튼, 먼저 샤워하고 퇴근도 먼저 했다.
경기를 지켜보는 것도 나쁘진 않았겠지만, 그것보다는 빨리 든든하게 먹고 소화 시키고 일찍 자고 싶었다.
[마린스 돌핀스를 상대로 7:5 승리!!! 2년 7개월 만에 위닝 시리즈 확정!!]
와······.
승리는 기뻤는데 그 뒤에 붙는 말이 정말 놀라운 수준이었다.
아니, 이 팀은 뭔가 부정적인 기록은 천문학적인 수준까지 가야 명함을 좀 내밀 수 있는데 이런 류의 좋은 쪽 기록은 허들이 너무 낮다. 무슨 스윕도 아니고 특정 팀을 상대로 위닝 시리즈가 2년 7개월 만이라고?
그러면 스윕은 대체 언제 하고 못 했다는 거지?
잠깐 찾아볼까? 하는 생각이 들었는데 그냥 참았다. 뭔가 그곳은 사람이 봐서는 안 될 심연이라는 느낌이다.
아니, 사실 찾아보려고 했는데 알고 싶지 않은 기록만 알게 됐다.
그러니까 지난 달에 돌핀스 이겼던 그 경기가 돌핀스 상대로 16연패를 끊은 거라고 하더라. 작년 시즌에 돌핀스 상대로 0승이었다고······. 참고로 이 부문 최장기록도 마린스으 18연패다······.
나쁜 건 그만 보자.
새겨야 하는 것은 승리의 이미지.
경기를 완벽하게 끝내고 마운드 위에서 환호하는 나의 모습이다.
***
3차전.
마린스가 돌핀스를 상대로 4년 1개월 만에 스윕에 도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