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1화. 인생의 낭비(3)
빅리그에서 4할을 치는 타자가 AAA에 내려가면 5할을 칠 수 있을까?
그럴 리가.
누구나 알고 있다. 40점이 80점이 되는 것보다 80점이 100점이 되는 게 더 어렵다는 것을.
심지어 4할은 99.99점 정도고 5할은 99.999999점 정도의 영역이다. 이건 실력이나 노력으로 가능한 영역이 절대 아니다.
게다가 애당초 4할이라는 것 자체가 꿈의 타율이다. 현대 야구에서는 정상적인 상황에서는 나올 수 없는 기록이라고 보는 것이다.
과거 ESPN에서는 4할을 만들기 위한 요건은 크게 3가지로 잡았었다. 높은 홈런율과 낮은 삼진율 그리고 높은 BABIP이 그것이다.
ESPN은 당시 그 세 가지에서 각각 리그 최고였던 타자들을 뽑아 셋의 수치를 섞어봤는데 그 결과는 0.396.
실제로 현대 야구에서 4할이란 저기 타이완에서나 가능한 수치라고 여겨진다. 싱글A급 리그에 우연히 AAA급 선수, 혹은 메이저 턱걸이는 가능할 수준의 선수가 등장하면 가능한 수치라는 뜻이다.
그리고 현재 KBO에는 그 99.999999점을 기록하고 있는 5할 타자가 있었다.
“곧 퍼질거야. 야, 솔직히 0.526/0.690/1.298. 이게 말이 되냐? 아니, 출루율이랑 장타율이야 그렇다고 치자고. 아니 무슨 5할이라니. BABIP신이 얼마나 도운 거냐?”
“어······. 의외로 그렇게 돕지는 않았을걸?”
“그게 무슨 헛소리야.”
“아니, 얘 57타수 30안타인데 그중 홈런이 12개······. 타율 높은 이유가 그냥 때리는 족족 다 넘겨 버려서니까.”
“아, 됐고. 무조건 퍼진다. 투수도 같이 하는데 체력이 딸릴 수밖에 없잖아. 그리고 최근 성적 봤지? 2타수 무안타. 초반에 투수들이 방심하고 좀 설렁설렁하다가 두들겨 맞은 거고 지금 까다롭게 가져가니까 안타고 홈런이고 딱 멈췄잖아.”
1회 초.
원아웃에 주자 1루.
그 안타고 홈런이고 딱 멈춘 타자가 타석에 들어왔다.
최. 수. 원.
세워진 지 230년이 넘어가는 이 땅 최초의 계획도시 수원과 같은 이름을 가진 사나이.
수원 돌핀스의 팬들이 주먹을 꽉 쥐었다.
***
최근에 타격이 좀 별로였다.
아니, 근데 이건 어쩔 수가 없는 게 애초에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거고 공을 던져야 뭘 치든지 말든지 하지.
지난 그리핀즈 전 이후로 나를 제대로 상대하는 팀은 없었다. 솔직히 OPS가 2.0이 나오는 타자인데 진작에 그러고 싶었는데 그래도 시즌 초반에 신인 상대로 그러는 건 좀? 하는 분위기에서 쟤들도 하는데 뭐 어때? 하는 분위기로 바뀌었달까? 근데 그게 좀 심했다.
진짜 스트라이크 존에 제대로 들어오는 공을 구경 못 한 게 대체 몇 경기인지.
여차하면 볼넷으로 내보내야지가 아니라 어떤 상황이건 그냥 존 안에는 공을 넣지 말아야지라는 집념이 느껴질 정도다.
이건 확실히 메이저 뛰던 시절에도 받아보지 못한 대우였다.
하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비슷한 느낌이 있었던 적은 있는데 당시에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 괜히 그거 내가 어떻게 해보겠다고 이상한 짓 하면 더 답이 없다는 것이 바로 그 교훈이다.
애초에 도망 다니는 놈들 때려잡겠다고 어설프게 뭐 하다보면 살짝 망가진다. 타격이란 정교한 기계와 같아서 그 살짝 망가지는 게 진짜 골치 아프다.
그러니까 그냥 포기하고 볼넷을 받는 게 낫다.
괜히 배리 본즈가 최전성기 출루율 6할에 장타율 1할 4푼씩 나오던 시기에도 타율은 4할 초반에 멈춘 게 아니다.
하지만 이게 또 사람이라는 것이 답을 알고 있다고 항상 답대로 갈 수 있는 게 아니란 말이지······.
-뻐엉!!
돌핀스의 에이스 알렉스 크루즈의 커터가 존 밖으로 빠져나갔다.
솔직히 좀 움찔할 뻔했다. 잘 던진 공인 것도 있었지만 뭐랄까? 솔직히 방망이를 좀 돌리고 싶다는 마음이 있어서 그런 것 같다.
그래, 진정하자. 이게 다 요즘 시원하게 방망이를 못 돌려서 마음이 좀 갑갑해서 생긴 일이다.
두 번째.
속구? 커터?
외곽에 절묘하게 제구된 공이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커터다.
하지만 지금 돌핀스의 마운드에 선 투수인 알렉스 크루즈는 최근 3경기에서 22이닝 무실점. 현재 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투수 중 하나였다.
칠까? 말까?
참았다.
-뻐엉!!!
“스트라잌!!!”
아슬아슬하게 존의 외곽을 스쳐 지나간 속구.
마운드의 알렉스 크루즈가 씨익 웃었다. 매우 확실하게 재수가 없었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점은 저 녀석 나를 상대로 나름대로 간을 보고 있다는 점이었다.
하긴 거의 일주일 정도 안타도 없었고 지난 등판 경기는 좀 조지기도 했으니 슬슬 이런 녀석이 나타날 때도 됐다.
타격은 사이클이다.
한참 타오를 때 쭉 피해버리면 김이 좀 빠져버린다. 그리고 그거 다시 시동 걸리는 데는 또 시간이 걸린다. 가끔 선수들 중에는 시즌 초반에 타오르다 중간에 김이 한 번 빠지는데, 시즌 끝날 때까지 그 감각을 못 찾는 경우도 있다.
지난 두 경기에서 연속으로 외야 플라이만 두 개씩 날렸으니 슬슬 내 감이 좀 떨어질 때가 됐다고 판단한 걸지도 모르겠다.
세 번째.
-부웅!!
“스트라잌!!”
존에서 빠지는 커터였다.
볼카운트 1-2.
관중석 쪽에서 약간의 웅성거림이 느껴졌다.
“뭐야? 최수원 삼진으로 잡는 건가? 대박······.”
“아니, 타자한테 삼진 하나 잡는다고 뭐 대박씩이나······.”
“쟤 지금까지 삼진 다섯 개야.”
“어?”
“57타수 30안타에 삼진으로 잡힌 게 딱 다섯 개라고. 쟤 지금 BABIP이 0.409인가 그런데 물론 높은데 그래도 좀 인간적인 이유가 홈런이 많은 것도 있지만 삼진이 너무 적어서 그런 거야.”
마운드의 투수가 네 번째 공을 준비했다.
마찬가지 코스.
정말 커터인지 속구인지 거의 구분이 가지 않을 만큼 완벽한 자세였다. 솔직히 저 정도면 그냥 빅리그에서 불펜 정도로는 충분히 뛸 수 있었을 것 같은 실력이다.
그리고 그 말을 바꿔보자면 빅리그에서 불펜으로 뛰지 못하고 KBO에 왔다는 건 분명 내가 알지 못하는 약점이 존재한다는 뜻이기도 했다. 혹은 그냥 오늘이 정말 컨디션이 엄청 좋은 날일 수도 있고.
나가던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는다. 포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체크 스윙 여부를 확인했다.
어림 없는 시도였다. 방망이가 1/3지점도 채 지나가지 않았는데 이건 물어볼 필요도 없이 안 돌았다.
다섯 번째.
공이 날아왔다.
빠르고 낮았다. 코스는 조금 전보다는 살짝 안쪽. 상식적으로 생각해보면 방망이를 유혹하는 존을 빠져나가는 커터여야 했다.
근데 왜일까?
그냥 속구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성과 감각이 서로 다른 답을 내렸을 때 내가 선택하는 것은 감각이다. 고작 중학 수준의 지적 능력보다는 월드 클래스의 감각 쪽이 더 믿을 만하다.
-따악!!!
시원한 타격.
아주 오래간만에 공이 쭉쭉 뻗어나갔다.
[쳤습니다!! 높게 뜬 타구!! 쭉쭉 뻗어 나갑니다!!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 갔습니다.]
[아, 보시면 공이 살짝 몰렸는데 최수원 선수 이걸 놓치지를 않네요.]
[아무래도 알렉스 크루즈 선수가 살짝 이지선다의 심리전을 건 것 같은데 최수원 선수 여지 없이 통타를 해버리네요.]
[이걸로 시즌 13번째 홈런!! 최수원 선수가 다시 백강호 선수와 홈런 격차를 3개로 벌려놓습니다.]
[최수원 선수, 최근 몇 경기에서 장타율이 좀 떨어지면서 OPS 2.0이 깨졌었는데 이걸로 다시 2.038. 와······. 다시 한번 이 선수에게는 좋은 공을 주면 안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네요.]
[사실 알렉스 크루즈 선수 최근에 공이 정말 좋았거든요. 22이닝 동안 무실점. 피안타 여덟 개. 볼넷도 두 개밖에 내주지 않았어요. 하지만 역시 최수원 선수. 정말 뭐랄까? 수준이 다르다는 느낌입니다.]
“선배님, 감사합니다.”
“어? 뭐가?”
“파이팅 하라고 하셨잖아요!! 파이팅 해봤습니다.”
1루를 밟고 지나가는 길 백강호에게 약한 도발을 걸어주었다.
“아니, 우리랑 말고 다음 시리즈부터 하라고 했잖아!! 야!! 야!! 최수원!!”
등 뒤에서 애타게 나를 부르는 목소리를 무시하고 2루를 지나 3루. 그리고 홈까지 들어왔다.
나보다 한 발 먼저 홈플레이트를 밟은 서경준이 나를 향해 손바닥을 내밀었다.
-짝!!!
“끝나고 왕갈비?”
“사주시는 겁니까?”
“당연히 밥은 선배가 사는 거지. 뭐 그런 걸 묻고 그러냐.”
“오, 감사합니다!!”
“참고로 규만 선배도 데리고 갈거다. 비싼 밥은 역시 돈 많은 선배가 사야 부담이 없지.”
실없는 소리를 주고받으며 걸어가는 중 대기 타석에서 타석으로 걸어가던 노형욱이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어떻게 구분 한 거냐?”
“커터랑 포심이요?”
“어.”
“그냥 느낌이 속구 같더라고요.”
“상황이? 아니면 공 날아오는 거 보니까?”
오, 확실히 노형욱은 괜찮은 타자다.
슬슬 나를 활용하는 법을 익혀가고 있다.
“글쎄요. 상황은 커터였는데요. 그냥 느낌이 속구 같더라고요.”
“쿠세가 있거나 궤적이 좀 다르거나 뭔가 있긴 있나보네. 오케이. 규만 선배한테도 이야기 해주고 들어가라. 잘 지켜보라고.”
“네.”
규만 선배 역시 나의 이야기에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별다른 말 없이 묵묵하게 알렉스를 바라봤다.
가끔 규만 선배를 보고 있으면 뭐랄까? 진우 선배의 그 마지막이 생각이 났다. 사실 17년의 프로 생활 동안 은퇴하는 선수는 많이 봤다. 그리고 규만 선배 정도 되면 정말 자랑할만한 은퇴였다.
사실 이 바닥에서 타의가 아닌 자의로 하는 은퇴라는 것 자체가 어지간해선 있기 힘든 일이다. 게다가 본인이 뛰었던 구단만이 아니라 다른 구단에서까지 은퇴식을 준비해준다는 것은 보통 일이 아니다.
그래서 조금 이상했다.
평생에 걸쳐 쌓아 올린 찬란한 금자탑의 마지막 한 조각을 남겨 둔 선수가 때때로 보여주는 감정이 절박함이라는 것이.
그리고 그것이 열여덟 평생을 달려온 길을 포기해야 했던 소년의 뒷모습과 겹쳐 보인다는 것이.
-부웅!!!
“스트라잌!!! 아웃!!!”
노형욱의 배트가 6구째에 시원하게 허공을 갈랐다.
-딱!!!
그리고 이규만이 휘두른 방망이는 깔끔하게 초구 내야 땅볼로 이어졌다.
2:0
고작 2점의 리드.
아마 예전이었다면 많이 불안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난 트레이드 이후 우리 팀의 사정은 많이 달라졌다. 이제 우리 팀에서 강한 것은 선발 만이 아니었다. 강력한 선발의 뒤를 받쳐줄 수 있는 불펜들이!!
-딱!!!
[강일진 선수!! 딜튼 도일리의 153km/h 초구를 타격!!! 유격수의 키를 넘기는 안타를 만들어냅니다!!]
-딱!!!!
[잭 해밀턴!! 큼지막한 타구!!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담장을 직격합니다!! 그 사이 강일진 2루 지나 3루까지!! 어? 3루에서 멈추지 않습니다!! 홈까지!! 홈까지!!]
-뻐엉!!
“세이프!!!”
[1회 말!! 노아웃 주자 1루 상황에서 잭 해밀턴의 2루타!! 돌핀스가 1점을 따라 붙습니다!! 역시 디펜딩 챔피언 돌핀스!! 리그 최강의 타격이 무엇인지를 여실하게 보여줍니다.]
[타석에는 3번 타자 백강호 선수가 올라옵니다. 현재까지 홈런만 무려 열 개!! 페이스를 보면 거의 50홈런 페이스로 자기의 커리어 하이를 확실하게 갱신할 기세입니다.]
[홈런왕을 경쟁중인 최수원 선수가 직전 공격에서 홈런 하나를 추가하며 다시 차이를 벌린 상황!! 과연 백강호 선수. 이번 타석에서 어떤 모습을 보여줄 수 있을까요.]
돌핀스와의 1차전.
지금까지 꾸준히 잘 던졌던 딜튼이 3.1이닝 6실점으로 펑!! 터졌다.
[마린스 vs 돌핀스 치열한 난타전!!]
[양팀 합계 31득점!! 16:15. 승리를 결정지은 최수원의 빠른 발!!]
[노형욱의 단타에 2루에서 홈까지 쇄도하는 최수원의 센스 있는 주루플레이.]
6시 30분에 시작한 경기가 연장 10회.
무려 10시 37분에 끝났다.
“이거 갈비는 못 먹겠는데요?”
“무슨 소리야. 밤에 먹는 갈비가 얼마나 별미인데. 니가 그러니까 살이 안 찌는 거야.”
“아니, 식당 문 안 닫아요?”
“사장님이랑 우리가 몇 년째인데. 미리 다 예약해놨지. 갈비도 좋은 놈으로 남겨 두셨다니까 얼른 정리하고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