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8화. 이제 벚꽃은 잊어라(5)
“끄응······. 이봐 전 단장. 아무리 그래도 이건 좀······.”
“꼭 좀 부탁드립니다.”
“아니, 이거 정말 해야 하는 거야? 솔직히 까놓고 말해서 지금 상황에서 우승은 어차피 못하던 거니까 못 해도 상관이 없었는데. 이거 이렇게까지 하고 우승 못 하면 진짜 나가리라고. 그런데도 정말 괜찮겠어?”
월급쟁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무엇일까?
그건 당연히 따박 따박 월급 받아 가는 안정적인 직장이다. 성과 좀 잘 내자고 직장에서 짤릴 위험을 감수한다? 그건 사업가의 마인드였지 월급쟁이가 갖춰야 할 마인드가 아니다.
“사장님. 어차피 못 해도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우승이니까 더 가치가 있는 겁니다. 생각해보세요. 마린스 35년 만의 우승!! 어디 재계약이 문제겠습니까? 장담합니다. 마린스의 역사가 계속되는 한, 영원히 회자할 겁니다.”
하지만 어디 야구팀의 사장과 단장이 단순한 월급쟁이라던가.
물론 그들 역시 월급을 받고 일하는 노동자인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애당초 임원은 계약직에 불과하며 솔직히 그만한 자리에 오른 이들이라면 단순한 경제적 안정을 넘어서는 무언가를 노릴만한 마음을 가질 자격이 있다.
“엄청난 후폭풍이 닥칠 거야. 자네도 알다시피 이 선수들 이름값도 그렇고 현재 팀에서 차지하는 위상. 앞으로의 성장 가능성까지. 설사 우승을 한다고 해도 이 선수가 나중에 기대치 이상으로. 아니, 기대치만큼만 성장을 해도 엄청난 욕을 먹는 건 당연한 일일 거고.”
“하지만 그 모든 것들은 결국, 우승을 하게 되면 다 잊혀질 일일 겁니다.”
“사람들은 유망주를 팔아 치우고 올해 전력으로 달리는 것을 납득하지 못할 거야. 우리는 누가 봐도 미래가 창창한 팀이니까.”
“하지만 저와 사장님은 우리가 어째서 올해 전력으로 달려야 하는지를 납득하고 있지 않습니까.”
최수원은 앞으로 6년 간 헐값에 써먹을 수 있는 유망주가 아니라는 사실.
적어도 이 자리에 마주한 두 사람은 그 사실을 공유하고 있었다. 박충식 사장이 그에게 물었다.
“최수원이 MVP를 못 딸 가능성은 정말 제로라고 생각하는 건가?”
“수원이가 지금 당장 부상을 입어서 시즌 아웃을 당하거나, 규만이가 갑자기 회춘을 해서 은퇴 직전에 커리어 하이를 찍어주고 커리어 500홈런 달성이라도 하지 않는 이상 무리일 테니. 사실상 제로라고 봐야겠죠.”
“이면 계약을 무효화 할 방법은?”
“없습니다. 만약 그런 시도를 한다면 포스팅피조차 건지지 못하겠죠. 게다가 어쨌든 그런 계약 내용이 외부로 다 밝혀질 겁니다. 그 경우······.”
“적어도 자네와 나는 끝장이라고 봐야지.”
긴 고민.
마침내 박충식 사장이 고개를 끄덕였다.
“꼭 우승해야 할걸세.”
“그럴 생각입니다.”
“이건 정말이지. 나도 대체 회장님을 어떻게 설득해야 할지 막막하군.”
“역시 답은 우승 아니겠습니까. 사실 회장님도 누구 못지 않게 우승이 간절하실 테니까요.”
“그래, 그렇지. 우승······. 우승이라······. 허허, 참.”
***
“안녕하세요.”
“오래간만입니다. 이지연 기자님.”
“어? 제 이름 기억하시네요?”
“하하, 당연하죠. 그때도 말씀 드렸잖아요. 사춘기 소년은 예쁜 누나는 절대 잊지 않는다고요.”
“사춘기 소년······. 그러고보니 제가 최수원 선수를 처음 뵀던 게 벌써 햇수로는 3년 전 일이네요.”
“네, 그게 제가 고2 때 초반이였으니까. 만으로 해도 2년이 넘어가네요.”
“참, 그때도 대단한 선수가 될 거라고 예상은 했지만······.”
“이 정도로 대단할 줄은 몰랐다. 뭐 그런 말씀이시죠?”
최수원의 당돌한 말에 이지연의 입가에 자신도 모르게 미소가 걸렸다. 외동딸인지라 정확히 알 수는 없었지만 아마 귀여운 남동생이 있었더라면 이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선수들 사이에 최수원 선수 입담이 유명하다고 하던데, 왜 그런지 알 것 같네요.”
“하하, 뭐 선배님들이 귀여워해 주신 덕분이죠.”
“지금 시즌이 시작하고 한 달이 조금 지난 시점에서 벌써 득점과 타점 도루를 제외한 타격 모든 부문에서 1위. 특히 홈런은 12개로 2위인 백강호 선수와 다섯 개나 차이가 나는 상황입니다. 게다가 선발로는 무려 3승까지. 그야말로 지금의 KBO는 제2의 최수원 리그다 라는 말까지 나오고 있는 상황이거든요.”
“네? 제2의 최수원 리그요?”
“2년 전에 드래프트 때문에 최수원 리그라는 말이 나왔었거든요.”
그렇게 생각해보면 당시 마린스의 100패는 정말 2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아니 10보 전진을 위한 1보 후퇴 정도의 느낌이었다. 당장 최근 인터넷에 피닉스 최대 역적은 당시 막판에 터지는 바람에 피닉스의 꼴찌를 막았던 오민엽과 최으뜸이라는 농담이 진지하게 떠돌고 있을 지경이었다.
“아, 기억납니다. 아마 제가 U-18 야구 월드컵 때문에 미국 가있을 당시 이야기인 것 같네요.”
“맞습니다. 아무튼 최수원 선수가 최근 이런 압도적인 활약을 보여주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마린스의 성적은 4위와 5위를 오가고 있었는데요. 이번에 마린스 프런트에서 정말 대단한 결정을 내리지 않았습니까?”
“프런트의 대단한 결정이라면 혹시 이번에 허니 갈릭 소스의 비율을 변경한 거 말씀하시는 건가요? 확실히 훌륭한 결정이었습니다. 안 그래도 마늘 맛이 좀 적다는 느낌이었거든요. 한국인은 단군 이래 역시 마늘 아니겠습니까.”
“네? 푸흡······.”
정말 재미없는 농담이었는데 이지연이 자신도 모르게 웃었다.
뭐랄까? 말 자체의 재미가 중요한 게 아니라는 느낌? 그냥 귀여웠다.
“네네. 그것도 물론 대단한 결정인 것 같긴 합니다만 그것 말고 트레이드에 관해서요.”
“아, 그거요.”
최수원이 입을 열었다.
***
다들 알겠지만, 야구와 축구는 좀 다르다.
축구가 공 하나 놓고 22명이서 운동장을 우르르 뛰어다니는 종목이고 야구는 빠따로 공을 치는 종목이라는 그런 차이 말고, 협회 차원에서 좀 다르다는 말이다.
기본적으로 축구에서 구단과 선수의 관계는 좀 독립적이다. 그러니까 선수는 완벽하게 개인사업자고 구단은 그 개인사업자와 계약을 맺은 주체에 가깝다. 물론 야구 선수도 개인사업자이긴 하다. 하지만 이 드래프트라는 제도부터 해서 뭐랄까? 그 자율성이 많이 떨어진달까? 특히 트레이드에 관해서는 더더욱 그렇다.
축구의 경우 구단끼리 합의가 되건 뭐건 선수가 No를 하면 못 간다. 사실 여긴 트레이드라기보다는 이적이라는 표현에 더 가깝다. 시장 자체도 완전한 자율경쟁이고.
야구는 그런 거 없다. 오늘 경기 잘 뛰고 왔는데 라커에 내 짐 없으면 방 빼는 거다. 홈런을 몇 개 쳤건 노히트를 했건, 아니 심지어 퍼펙트를 했더라도 얄짤이 없다. 물론 몇 가지 제도로 선수의 권리가 보호되긴 하지만 아무튼 원론적으로는 그렇다.
물론 구단끼리의 트레이드라는 것도 결국 그 구단 소속의 사람이 하는 일이고, 윗선에서는 아무리 비밀을 지킨다고 해도 친한 실무진들이 은근슬쩍 언질을 주는 경우가 많아서 대충 어느 정도 미리 짐작을 하는 경우도 많았지만, 정말 막판까지 비밀이 지켜지는 경우도 드문 일은 아니었다.
그러니까 그날의 그 일은 그냥 야구를 하다 보면 흔히 있을 수 있는 일이었다.
광주에서 호크스와의 2차전 날.
우리 10억 5천짜리 5선발 최민혁은 드디어 시즌 첫 번째 승리를 기록했다. 그리고 그의 공을 받았던 최진웅은 마치 자신의 일처럼 기뻐해 주었다. 심지어 최진웅은 그 경기에서 오래간만에 멀티 출루까지 기록했었다.
최민혁이 마음 고생을 많이 했다는 것은 우리 모두가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나도 그렇고 백하민도 그렇고 스프링 캠프 전까지만 하더라도 최민혁보다 아래로 평가받던 투수자원이었다. 그런데 결과를 보니 5선발. 심지어 우리가 3승 2승씩 거두는 동안 혼자서 0승이었으니 얼마나 초조했을까.
아무튼 인터뷰도 잘하고 깔끔하게 샤워도 끝내고 짐 챙겨서 버스를 탔다.
“민혁아, 진웅아. 이따 숙소 가면 감독님 방으로 찾아가봐라.”
“네!!!”
솔직히 다들 감독님이 뭔가 격려를 해주거나 좋은 거라도 주시려고 부르는 거겠거니 하고 생각을 했었다.
아무튼 1승에 아무튼 멀티 출루였으니까.
그리고 그게 녀석들의 마린스 마지막 경기가 됐다.
[부산 마린스 – 서울 브레이브스 전격 트레이드!!]
[최민혁, 최진웅 – 박재혁, 고설민, 태지완 2:3 트레이드!!]
어······. 뭐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경기 끝나고 왔는데 아무 말도 없이 라커에서 짐 빠져있던 것보다는 많이 인간적이기는 했다. 그냥 타이밍이 좀 그랬을 뿐이다. 하필 아주 좋은 경기를 펼친 날에 트레이드라니.
게다가 주전급 2명이 빠지고 3명이 새로 들어왔다.
그 말인즉 최소 하나는 상동으로 내려가야 한다는 뜻이었다. 심지어 건너오는 셋이 전부 불펜이다. 지금 라인업에서 최소 둘은 상동으로 가게 생겼다.
아니, 브레이브스 이놈들은 대체 무슨 생각으로 A급 불펜을 셋이나 내주는 거지? 물론 KBO가 선발이랑 포수가 금값인 건 맞고, 저 둘이면 A급 선발에 포수자원이긴 하다지만······. 내가 알기로 쟤들은 재무구조가 좀 이상해서 성적이 안 나오면 다음 해에 재정이 꽤 치명적이다. 분명 저렇게 셋이 다 빠지면 쟤들도 성적 꽤 압박이 올 텐데······.
이별을 찐하게 나눌 시간 따윈 없었다.
지금은 시즌 중이었고 당장 우리는 내일 호크스와의 3차전이 있었으며 브레이브스 역시 내일 재규어스와의 3차전이 있었으니까.
“나중에 봐요.”
“야, 뭐 그리 죽상이냐. 부산에서 서울 가는 거면 좋은 일이지. 서울 프리미엄으로 막 5억, 10억씩 부르는 판국에. 나중에 서울 오면 연락해.”
“연락은 무슨. 어차피 우리 다음에 서울 가면 상대 팀이 브레이브스에요.”
“하······. 그러네. 그러면 다음에 너를 상대로 공을 던질 수도 있겠네?”
“안 봐줄 거예요.”
“야, 좀 봐주라. 안 그래도 1승 하고 서울로 쫓겨나서 기분도 꿀꿀한데.”
“방금 서울 프리미엄이 5억에서 10억이라면서요.”
“서울 프리미엄이 아무리 좋아도 우승만 할까.”
“······.”
최민혁이 나를 한번 꾹 끌어안았다.
“이왕이면 꼭 우승해라. 어? 나라는 팀의 미래를 팔아서 현재를 사는 건데. 우승 정도는 해줘야 내 미래가 더 가치 있어 보이지 않겠냐. 안 그래?”
“안 그래도 그럴 생각입니다.”
뭐, 딱히 엄청 친한 관계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나도 하민이 형이랑 친하고, 최민혁도 하민이 형이랑 친해서 그럭저럭 어울리는 관계였다고 할까?
최민혁이 떠났다.
내 공을 못 받는 결정적인 약점이 생겨버린 최진웅과 함께.
그리고 또 떠나는 사람이 있었다.
투수 최고참인 곽재영과 불펜 투수 강세준이었다.
각기 6.11과 6.34의 평자책을 기록 중이었는데 솔직히 말하자면 1군에서 뛰면 안될 불펜들이기는 했다. 뭐 6점대 평자책을 기록 중인 불펜이 저 둘 만이 아니라는 것이 마린스의 아주 거대한 문제이기는 했지만.
아무튼 그 빈자리에 평자책 2~3점대의 불펜들이 들어온다는 것은 분명 당장 전력 면에서 매우 긍정적인 소식이었다.
전력에서 좀 부정적인 부분은 최진웅의 빈 자리를 메우는 것이 2군에 내려갔던 한교철이라는 점이었는데······. 확실히 운이 따르는 인간이다.
물론 운이 따르는 인간은 한교철만이 아니었다.
한명훈.
작년 6승 11패 4.11에 빛나는 마린스 토종 최다승 투수.
이 양반이 결국 선발 한 자리를 차지했다.
다만 이 경우는 단순히 운이 좋았다고 표현하기도 좀 그렇고 본인이 롱릴리프로 확실한 성적을 보여준 결과라고 봐야겠다.
솔직히 최민혁이 10.5억짜리 투수라는 상징성이 너무 강해서 그랬지 그냥 이번 시즌 성적만 놓고 보면 최민혁과 비교해도 크게 떨어지지 않는다.
호크스와의 3차전.
우리는 매우 오래간만에 역전승을 거뒀다.
승리 투수는 브레이브스에서 내려온 연봉 2억 4천만원짜리 불펜 투수 태지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