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6화. 이제 벚꽃은 잊어라(3)
공을 때리는 순간에는 찌릿한 게 손맛이 너무 안 좋아서 이거 큰일 났다 싶었는데 다행히도 수비 위치부터 주자의 발까지 모두 나를 도왔다.
깔끔한 1타점 추가.
“와, 이 독하다. 독해. 그걸 억지로 또 치고 있네. 투수로 나왔으면 어? 좀 쉬어가고 그런 맛도 있어야지.”
“저도 그러고 싶었는데 타자로 나왔을 때 너무 충분히 쉬어가서요. 그래도 돈 받은 만큼은 뛰어야죠.”
“야, 너 이미 돈 받은 만큼 뛰고 남았어. 신인이라 최저 연봉 받는 구만. 무슨 돈 값을 이야기 하고 있냐.”
“저 계약금으로 20억 받았는데요.”
“그건 좀 다르지. 누가 계약금을 그렇게 계산하냐. 너 어차피 그거 세금 처리도 5년 나눠서 할 꺼 아니야. 그러면 활약도 5년 치로 나눠서 4억씩만 해야지.”
참 쓸데없는 대화가 오고 갔다.
“아니, 그건 또 무슨 어······ㄱ!!”
-뻐엉!!
깔끔한 견제구.
와, 이번엔 진짜 위험했다.
“아까비.”
“와, 견제구 너무 매서운 거 아닙니까? 이거 진짜 선배가 자꾸 쓸데없는 말 거는 게 견제구에 신경 못 쓰게 하려는 패턴인 거 몰랐으면 큰일 날 뻔했네.”
“······. 와, 너 진짜 내가 본 놈들 중에서 주둥이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것 같다.”
“더 정진하라는 의미로 알아듣겠습니다.”
-딱!!
노형욱의 안타.
정확하게 타격의 순간 나의 몸은 이미 2루를 향해 움직이고 있었다. 솔직히 아주 좋은 타이밍은 아니었다. 주루를 진짜 잘하는 애들은 속도 이전에 타이밍에서 이보다 미묘하게 빠른 뭔가가 있다. 게다가 묘하게 초반 가속도 걔들이 더 빠른 느낌이고. 게다가 난 전성기 기준으로도 주루는 리그 평균 이하였다.
하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나는 프로 짬밥만 17년에 현재 플러스 알파로 진행중인 타자다. 거기에 열아홉의 쌩쌩한 몸이 더해졌으니 현재를 기준으로 본다면 빅리그에 진출해도 평균 이상이라고 자부할 만하다.
빠르게 달리는 와중에 타구의 방향을 살폈다.
확실히 외야에서 날아오는 타구 보는 것보다 여기서 날아가는 타구 보는 게 예측이 더 쉽다. 이건 빠지는 공이다. 몸의 무게중심을 왼쪽으로 슬쩍 옮겼다. 속도와 회전반경. 내가 경험적으로 얻어낸 가장 적절한 선에서 2루 베이스를 밟고 3루를 향해 달렸다.
이 와중에 내 선행 타자인 이정훈 엄청 빠르다.
벌써 3루와 홈의 1/3지점을 달리고 있다. 나 역시 달려 나가는 속도에 힘을 더했다. 3루 베이스가 성큼성큼 가까워진다. 어 근데?
[아!! 빠졌습니다!! 튕겨 나가는 공!! 중견수 잡아서!! 2루로!!]
3루 주루 코치님이 팔을 돌렸다.
등 뒤에서 대체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 것일까 의문을 갖지 않았다. 그저 기계적으로 최선을 다해서 달렸다. 1루에서 홈까지 270피트. 약 83미터 정도.
100미터도 안되는 거리였지만 짧지 않았다. 90도의 급격한 선회를 두 번이나 해야 한다. 몸이 왼쪽으로 크게 기울었다. 햄스트링이 폭발할 것처럼 약동한다. 확실히 몸이 건강했다. 이전이었으면 이런 주루를 하면 무릎이 시큰했을 텐데 그런게 전혀 없다.
홈을 향해 달렸다.
포수가 앞으로 성큼 나와 있다. 물론 그의 등 뒤로 홈플레이트가 절반은 열려 있다. 언제라도 공을 받고 등을 돌릴 수 있는 자세.
홈플레이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쭉 뻗은 손.
주자용 벙어리 장갑을 끼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위험할 수 있다는 사실은 이미 머릿속에 없었다. 오늘 경기의 중요성이니 뭐니를 다 떠나서 대체 점수를 낼 수 있는 상황에서 몸을 사린다? 가능할리가. 설사 동네 야구라도 승리를 위해서는 최선을 다한다. 승리와 패배로 모든 것이 나뉘는 이분법적인 세계에 몸 담은 프로 선수의 경쟁심이란 그러한 법이다.
-뻐엉!!
홈플레이트에 손이 닿기 전.
포수의 미트에 중계된 송구가 꽂혔다. 그의 몸이 빠르게 회전했다. 하지만 내가 더 빠르다. 슬쩍 옮겨진 다리가 홈플레이트를 가로막았지만 괜찮았다. 바닥을 스치는 몸을 비틀어 약간의 회전을 만들었다. 왼쪽 손을 축으로 30도 정도. 오른쪽 손이 홈플레이트를 막은 포수의 다리를 피해 홈플레이트를 –툭 건드렸다.
“세이프!!!”
자리에서 일어나 가슴에 묻은 흙을 툭툭 털었다.
몸은 조금 힘들긴 했지만 뭐랄까? 기분이 상쾌했다. 열아홉의 내 몸은 정말 쌩쌩하구나. 내가 이렇게까지 달릴 수 있구나를 새삼 실감했달까?
아무튼 점수는 3:0.
어······. 근데······.
“선배?”
“······. 그냥 들어가자. 그래도 나 덕분에 네가 홈에서 점수 무사히 낸 거니까.”
노형욱 이 양반······.
아니, 1루 주자가 홈까지 왔는데 2루에서 아웃을 당했다고? 자기가 규만 선배도 아니고, 아니 물론 규만 선배였으면 고작 이런 걸로 2루까지 달리지는 않았겠지만······. 아무튼 딱 봐도 원래 2루까지 달릴 생각 없었는데 저쪽 외야수가 공 놓치면서 뒤늦게 2루로 달리다가 죽은게 티가 난다.
뭐, 그래도 포스 아웃 상황도 아니었으니 2루수가 잠깐 이 양반 태그하고 어쩌고 하는 바람에 내가 무사히 홈까지 들어올 수 있었던 건 맞는 것 같다. 잠깐만. 근데 그러면 이 양반의 본헤드 플레이가 아니었으면 내가 뛴 게 본헤드 플레이가 될 뻔했다는 건데?
저기 3루 주루 코치가 쑥스럽게 웃는다.
와, 역시 마린스라는 말 밖에 안 나오네 이거.
이후 규만 선배가 뜻밖의 안타를 치며 분전했지만 서경준이 깔끔하게 외야 플라이를 날리면서 1회 말 우리의 공격이 끝났다.
***
카메라로 이 모든 장면을 담아낸 뉴욕 메츠의 스카우트 김진규가 다시 자신의 태블릿에 몇 가지를 써내려 갔다. 주루 센스가 아주 좋은 편이라고 보긴 힘들었다. 하지만 운동 능력이 꽤 괜찮았고 깔끔했다. 아쉬운 점은 플레이가 너무 과감하다는 점?
메이저리그에서는 저만한 선수에게는 절대 저런 주루 플레이를 요구하지 않는다.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연봉을 받는 팀의 중심 자원이다. 물론 연봉이야 DL에 오르면 보험으로 어느정도 보전이 된다지만 팀의 성적은 그 보험금으로 어떻게 할 수 있는 게 아니다.
하지만 그래도 저 과감한 주루 덕분에 오늘 한 가지 좋은 것을 체크해볼 수 있는 기회가 됐다고 생각이 된다.
현재 기량의 대부분이 증명된······.
“아니지, 아니야. 아직 AA레벨에서 활약인데 증명이라고까지 하기엔 좀 과하지.”
혼잣말을 중얼거리던 그가 이내 다시 고개를 저었다.
“아냐, 아무리 평균적으로 AA급이라고 해도 상대한 선수들 가운데는 분명 빅리그 레벨의 선수도 있었어. 게다가 AA리그라고 해도 이만큼 리그를 파괴할 정도면 증명 했다고 봐야지.”
아무튼 그러한 최수원의 기량 가운데 딱 한 가지.
유일하게 부정적. 혹은 물음표에 가까운 것이 있었으니 그것은 다름 아닌 체력이었다.
농구나 미식축구 등의 체력과 야구의 체력은 조금 기준이 다르다.
그것은 단거리 달리기와 장거리 마라톤의 차이와 흡사했는데 마라톤에서 체력이 반환점은 넘어가야 알 수 있는 것처럼 기본적으로ㅛ 야구의 경우 체력이라는 것은 적어도 7월이나 8월은 돼봐야 알 수 있는 요소였다.
하지만 딱 한 포지션.
야구 선수임에도 불구하고 농구나 미식축구 등과 비슷한 종류의 체력을 요구하는 포지션이 있었으니 5일에 한 번 등판하는 선발 투수가 바로 그것이다.
그리고 지난 경기에서 최수원은 그것을 나름대로 증명을 하긴 했다. 9이닝 완봉이라는 것을 통해서.
다만 그 직후 본인의 루틴을 깨고 토, 일 이틀을 내리 쉬었다. 심지어 월요일이 휴식일이었다는 점까지 감안한다면 사흘을 쉰 셈이다. 게다가 7회 이후 타석에서 보여줬던 모습들은 명확히 체력적으로 힘에 부치는 모습이었다.
무엇보다 저 체격. 키에 비해서 상당히 작은 저 체격을 보고 있자면 저 퍼포먼스 자체가 정말 몸의 성능을 극한까지 쥐어 짜낸 결과가 아닌가 하는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1회부터 저렇게 체력적으로 소모가 많은 플레이를 보여줬다는 것은 그의 궁금증을 해소할 좋은 기회일 수 있었다.
2회 초.
최수원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
아쉽게도 퍼펙트도 노히트도 없는 경기.
하지만 3:0.
4연패를 끊어내는 투수가 된다는 것에 의미를 갖기로 했다.
지금까지 내 시즌 성적은 21이닝 3실점 2자책.
이렇게 된 이상 단순한 MVP가 아니라 최동원 상까지 한 번에 다 가져가는 진짜배기 기록을 노려볼 수밖에 없다.
타석에 그리핀즈의 4번 타자가 올라왔다.
카를로스 에드윈.
멕시코 출신의 남자로 현재 그리핀즈에서 우익수를 맡은 정통파 우타 거포다. 프로필상으로 191cm에 127kg.
하지만 조금도 뚱뚱한 느낌이 없다. 그야말로 근육으로 꽉 찬 것 같은 거인.
바로 저 남자가 내가 딜튼을 확실하게 전투력에서 한국 최강으로 꼽지 못하는 이유 중 하나다.
미국에 딜튼 도일리가 있다면 멕시코에는 카를로스 에드윈이 있다고 해야할까? 딜튼이 레슬링 대신에 야구를 선택함으로써 한국에 오게 됐다면, 카를로스는 본래 루차 리브레라는 멕시코식 프로레슬링 선수를 꿈꿨지만, 키가 너무 자라는 바람에 포기하고 야구를 한 덕분에 한국에 온 남자였다.
그가 손에 쥔 방망이는 규격 내에서 가장 크고 무거운 방망이였지만 그럼에도 마치 이쑤시개처럼 보이는 느낌을 준다.
-부웅
가벼운 연습 스윙.
자세가 썩 좋지는 않았지만, 그 배트에 실린 막대한 힘이 확실히 맞추면 넘어가겠다 싶은 느낌을 줬다.
뭐, 아마 좀 빗맞아도 넘어가긴 할 거다. 쟤 힘은 솔직히 반칙이니까.
참고로 수사적인 의미에서 반칙을 말하는 게 아니다.
진짜 말 그대로 반칙이다. 쟤 저거 스테로이드에 성장호르몬까지 풀로 빤 몸이다. 작년 하반기에 합류할 때랑 올 초에 도핑 테스트는 어찌어찌 넘어갔는데 올스타브레이크 직전에 기습적으로 했던 도핑 테스트에 제대로 걸려서 36경기 출장정지 먹고 그날로 웨이버 공시됐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아직 닥치지 않은 미래.
일단 내가 상대해야 할 것은 방망이를 든 고릴라 정도 된다고 생각함이 옳았다. 뭐 반칙이니 아니기를 따지고 싶지는 않았다. 솔직히 열아홉 살짜리 쌩쌩한 몸에 메이저리그 명전급 타자의 경험이 들어온 쪽이 더 반칙에 가까웠으니까. 실제로 성적도 그렇게 나고 있었고.
하지만 적어도 지금 마운드에 선 것은 메이저리그의 경험을 가진 타자 최수원이 아니었다. 정말 열아홉 수준의 경험, 아니 어쩌면 그 경험의 연속성이 끊긴 덕분에 원래 열아홉 살의 투수 최수원이 뽑아낼 수 있었던 맥시멈의 기량도 뽑아내지 못하고 있는 투수 최수원이다.
쪼유가 소심하게 초구로 떨어지는 커브를 요구했다.
마음에 들었다.
솔직히 저 덩치를 보고 정면 승부 하라는 건 좀 말이 안된다. 게다가 아무 공에나 방망이가 붕붕 나오는 약점도 뻔히 있는 타자인데 말이다.
초구.
뚝 떨어지는 커브.
-부웅!!!
“스트라잌!!!”
한 치의 망설임도 담겨 있지 않은 스윙이 허공을 갈랐다.
나쁘지 않다.
‘어? 두 번째도?’
쪼유가 확신에 가득 찬 모습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믿어보겠다.
두 번째.
또 뚝 떨어지는 커브.
-부웅!!!!!!!
“스트라잌!!!”
뭐지?
쟤 바본가?
방금이랑 완전 똑같은 공이었는데 또 방망이를 휘두른다고?
카를로스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붕붕 방망이를 휘둘렀다.
살벌하다.
게다가 씨익 웃는 모습이 진짜 무슨 악역 레슬러 그 자체다. 아무리 봐도 쟨 루차 리브레를 포기하고 야구를 하는 대신 악역으로 미국 프로 레슬링에 진출하는 편이 나았다. 게다가 거긴 약 좀 빤다고 퇴출 당하는 세계도 아니니까 누이 좋고 매부 좋았을 텐데.
세 번째.
조유가 정말 신뢰감이 가득 담긴 표정으로 나를 바라봤다. 솔직히 저건 좀 연기 같긴 했지만 아무튼 고개를 끄덕였다.
녀석이 요구한 것은 몸쪽 높은 코스 빠른 공.
뚝 떨어지는 느린 공 두 개 다음에 보여주기에 나쁘지 않은 공이었다.
커다란 와인드 업.
앞선 수비 이닝 때 슬라이드 스텝으로 던질 때의 갑갑함을 모조리 던져 버렸다. 게다가 앞선 공격 이닝 때 간만에 신나게 주루를 한 덕분에 기분도 좋았다.
그냥 빠르고 강한 공.
161.3km/h
내 최고 기록보다 0.2km/h나 더 빠른 공이 날았다. 물론 코스는 원하던 몸쪽 높은 코스는 아니고 좀 가운데로 몰리긴 했다.
-딱!!!
카를로스의 방망이가 나의 공을 두들겼다.
빗맞았음에도 불구하고 쭉쭉 날아오르는 것이 진짜 미친 힘이었다.
이주혁이 똑바로 달렸다.
조금도 틀리지 않은 방향으로.
얼마나 빨랐는지 달려가서 고개를 돌려 공을 한 번 보고는 앞으로 슬쩍 세 걸음 다시 나와서 공을 받았다. 그래도 저게 어디냐 싶다. 특유의 갈지자 수비로 방향만 두 번 꺾었는데 결국 엉뚱한 곳에 공 떨어져서 안타 내주던 이주혁이 저만큼 발전했으면 많이 발전한 거지.
아무튼 이주혁치고는 상당히 깔끔한 외야 플라이 아웃.
2회와 3회 그리고 4회까지.
그렇게 그리핀즈 타순이 거의 두 바퀴를 도는 동안 나는 1점도 내주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