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5화. 이제 벚꽃은 잊어라(2)
아, 근데 침을 뱉고 보니까 생각이 났다.
이거 방금 안타였으니까 노히트도 어차피 깨진 거잖아. 바로 직전 등판도 타자 하나 나갔는데 노히트를 해서 그런가 자연스럽게 안타를 맞고도 노히트를 생각해버렸다.
부끄러움에 잠시 머리를 휘휘 저었다.
괜찮다. 어차피 내가 침 뱉은 게 무슨 이유인지 아는 사람은 없다.
저 멀리 조유진이 웃었다.
찝찝한 미소다.
타석에 두 번째 타자가 들어왔다.
초구는 어쩌다 보니 두들겨 맞았지만 그렇다고 쫄보가 될 이유는 없었다. 나를 믿어라. 내 공은 기가 막히게 좋다.
1루를 한 번 바라봤다.
세트 포지션에서 슬라이드 스텝.
와인드업 포지션에서 제대로 스텝을 밟는 것만큼 힘이 실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 대신 타이밍은 반의 반걸음쯤 빠르다.
‘아······.’
근데 그 반의 반 타이밍 때문에 여러 가지가 좀 희생이 되긴 했다. 구속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로케이션이 영 구렸다.
퀵 모션, 그러니까 슬라이드 스텝은 결국 왼쪽 다리를 쭉 끌어당겼다가 내뻗는 시간이 빠지는 만큼 힘을 모을 시간이 줄어들게 된다. 조금 더 상체 힘으로 공을 던지는 느낌이라고 해야할까?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점은 역시 하체에서 상체로 연결되는 동작의 타이밍이 어긋나면서 밸런스가 좀 흐트러진다는 점이다.
구속이나 구위보다는 커맨드에 더 큰 영향을 준다고 해야할까?
한복판으로 몰린 157.1km/h의 속구.
-부웅!!!
그러나 그 공에도 타자의 방망이는 헛돌았다.
자신감이 다시 차오른다.
그래, 역시 내 공은 죽여준다.
두 번째.
신중함보다는 차라리 과감함에 더 가깝게.
겸손함보다는 차라리 자만심에 더 가깝게.
박자가 조금 어긋났다.
세트포지션도 그렇고 슬라이드 스텝은 역시 조금 더 가다듬을 필요가 있다.
아, 물론 요즘에 와서는 세트포지션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슬라이드 스텝은 이게 좀 무용한 게 아닌가 하는 의견도 많지만 글쎄······. 타자의 입장에서 이 슬라이드 스텝이라는 녀석은 상당히 골치 아프다.
타격은 타이밍. 그렇기에 피칭은 타이밍을 뺏는 기술이라는 명제로 보자면 슬라이드 스텝의 유용성은 명확했다.
익힐 수 있다면 익혀야 한다. 이왕이면 메이저에 가기 전에 말이다.
-부웅!!
“스트라잌!!!”
하지만 그 어긋난 박자가 오히려 더 좋았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2구 연속 헛스윙 스트라이크.
쪼유가 살짝 떨어지는 커브를 요구했다.
하지만 글쎄······. 왠지 지금은 느낌이 좋았다.
타자가 내 공에 영 적응을 못 하고 있다.
그러니까 3구 연속 속구로 간다.
확실히 쪼유는 좋은 포수였다. 쉽게 말해서 기세가 오른 투수의 기분을 맞출 줄 안다는 뜻이다. 녀석이 흔쾌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세 번째.
이번에는 밸런스가 좀 잘 맞았다.
바깥쪽 낮은 코스로 꽉 차게 들어가는 속구.
-부웅!!!
“스트라잌!! 아웃!!!”
깔끔한 삼구삼진.
아, 근데 방금 공은 솔직히 쳤으면 그대로 더블아웃일 만큼 좋은 공이었는데 공이 너무 좋아도 이런 문제가 있다.
타석에 이제 3번 타자인 채창식이 올라왔다.
좌타자. 교정받은 것도 아니고 그냥 원래 왼손잡이다.
그걸 내가 어떻게 아냐면 어제 1루에서 나눈 수많은 대화 가운데 자기가 오른손잡이였다면 연봉이 1.5배는 됐을 거라는 이야기만 두 번을 들었기 때문이다. 발이 느려서 외야는 못 뛰고, 좌투라서 1루 제외한 다른 내야도 못 뛰는 게 자신의 최대 단점이라며 어찌나 한탄을 하던지······.
자신이 우투로 교정만 받았어도 2루수는 충분히 하고 있을 거라는데 뭐, 포구 능력을 생각해보면 설득력이 영 없는 이야기는 아니다. 실제로 왼손잡이들 가운데 야수는 어릴 적에 수비 제약을 없애기 위해서 우투로 교정을 많이 받는 편이다.
아무튼 오른손잡이가 좌타자로 교정받은 게 아닌 만큼 펀치력이 상당하다.
물론 그러거나 말거나 내가 해야 하는 것은 똑같았다.
조금 전 마지막 공의 감각이 너무 손에 남아있다.
우타자를 기준으로는 바깥쪽 낮은 코스.
그러니까 좌타자인 채창식을 기준으로는 몸쪽 낮은 코스 바짝 붙는 속구. 이건 제대로 들어가면 처음부터 그 코스를 노린 게 아닌 이상 어지간한 타자는 절대 못 친다.
조유진이 채창식 쪽으로 슬쩍 붙었다.
이번에도 세트포지션.
슬라이드 스텝.
‘아······.’
객관적으로 보면 슬라이드 스텝에서도 나의 컨트롤은 나쁘지는 않은 편이다.
기본적으로 스트라이크 존에 공이 들어가는 것 자체가 컨트롤의 증명이고 아마 그냥 그걸 노렸더라면 충분히 존에 들어가는 공이었을 테니까.
문제는 지금 내가 노린 곳이 몸쪽 깊숙한 코스 낮은 공이었다는 점이다.
-퍼억!!!
하지만 결과는 나쁘지 않았다.
채창식은 발은 느리지만 반응속도는 아주 훌륭한 선수였다. 그리고 150이 넘는 공은 맞아서라도 출루하기에는 너무 빠른 공이기도 했다.
공에 맞은 것은 쪼유였다.
너무 낮게 형성된 공을 녀석이 몸으로 막아냈다. 덕분에 공이 뒤로 빠지지 않고 홈플레이트 근처로 툭 떨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결심했다.
오늘은 쪼유가 5타수 무안타 5삼진을 당하더라도 놀리지 않겠노라고. 아, 물론 빠따가 그 모양이면 당연히 특타는 시킬거다. 그건 녀석을 위한 사랑의 매니까.
아무튼 쪼유 녀석을 향해 슬쩍 엄지를 치켜드는 것으로 나의 마음을 표현했다.
채창식이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사실 의도한 것이 아니기도 했고 이틀 동안 조금 친해진 느낌도 없잖아 있는지라 눈빛으로 고의가 아니었음을 전달했다.
내 마음이 잘 전달됐는지 안 됐는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채창식이 타석에 들어왔다.
항상 느끼지만 몸쪽에 강속구를 꽂아 넣으면 몸이 살짝 뒤로 빠지는 건 어쩔 수 없는 본능인 것 같다. 채창식의 발은 여전히 이전 그 자리였지만 몸의 중심이 미묘하게 뒤로 빠졌다는 느낌적인 느낌이 왔다.
그렇다면 노릴 것은 바깥 코스. 쪼유 역시 나의 생각에 동의했다.
가볍게 1루를 한 번 바라보고 이규만에게 공을 뿌렸다.
-뻐엉!!
“세이프!!”
어딜 감히 건방지게 세 걸음 반이나!!
물론 견제구 하나에 리드폭이 극적으로 줄어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주자의 무게 중심은 뒤로 미세하게 빠졌다.
볼카운트 1-0.
두 번째.
바깥 코스 가장 빠른 공.
근데 이번에도 또 좀 몰렸다.
-딱!!!
채창식이 그 공을 놓치지 않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몸의 중심도 뒤로 좀 빠졌고 타이밍도 살짝 어긋났다. 밀린 타구가 2, 3루 쪽으로 그리 빠르지 않게 흘러갔다.
1루 주자가 2루를 향해 돌진했다.
차라리 타구 속도가 빨랐더라면 깔끔하게 병살로 처리 될 만한 공이었는데 타구 속도가 느린 탓에 살짝 위협적으로 변했다. 발이 느린 채창식이야 아웃이 될 게 뻔했지만 1루 주자는 또 모를 일이다.
그리고 유격수 강라온이 빠르게 앞으로 달려나왔다.
제 자리를 지키지 않는 수비. 달려나오는 기세 그대로 공을 잡아낸 그가 무너지는 자세에서 2루로 공을 토스했다.
확실히 이럴 때 보면 강라온의 수비는 아주 괜찮았다. 사람들은 기본기 타령을 좀 하긴 했지만 방금도 저렇게 달려 나와서 자세가 무너지건 말건 2루로 토스하는 것 자체가 아주 훌륭하다.
물론 저기서 2루수가 김훈이나 정지운이었으면 포구를 못 했을 수도 있었지만, 다행히 오늘 우리 2루수는 수비 요정 사울 로페즈였다.
“아웃!!!”
그야말로 흠잡을 곳 없는 깔끔한 더블 아웃.
고작 공 다섯 개에 1회 초 그리핀즈의 공격이 끝났다.
“쪼유.”
“어?”
“굿.”
“땡큐. 아 맞다. 너 아까 안타 맞고 퉤퉤퉤 했던 거······.”
“아니다. 그런 거.”
선제적으로 답변을 했지만 쪼유 자식 능글맞게 웃으면서 꿋꿋하게 말을 걸어온다.
“그렇지? 안타 맞았는데 퍼펙트는 깨졌지만 노히트는 아직 남았어. 뭐 이런 멍청한 생각 했던 거 아닌 거 맞지?”
“너 오늘 안타 못 치면 특타 1,000개.”
“수원아······.”
공 안 흘린게 기특해서 800개 정도로 끊어주려고 했는데 역시 안되겠다. 이렇게 능글능글 거릴 체력이면 방망이나 휘둘러야지. 게다가 어차피 이 녀석이 내일 선발로 출장할 가능성은 0에 한없이 수렴한다.
좋은 수비 뒤에는 좋은 공격이 나온다.
항상 맞는 말은 아니지만, 이번에는 좀 맞았다.
-딱!!!
김새한.
뭔가 익숙한 이름과 인상의 투수가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어······. 뭐지? 간질간질하게 기억이 날랑말랑하는데 잘 모르겠다. 뭔가 중요한 일이 있었던 것 같기도 하고, 없었던 것 같기도 하고.
공 던지는 걸 보면 딱히 대단한 투수가 아닌 건 분명한데······.
타석에 2번 타자 이정훈이 올라갔다.
최근 슬슬 타격감이 올라오고 있는 것이 약간의 기대 정도는 걸어봐도 괜찮지 않을까?
-딱!!!
파울타구가 아슬아슬하게 글러브를 피해 내야 관중석으로 넘어갔다. 와······. 저 양반. 하여간 언제나 기대를 배신해주는 맛이 있는 것이 본인은 결단코 부정하지만 뼛속까지 마린스맨답다.
두 번째.
골랐다.
그리고 세 번째도 또 골랐다.
그래, 이정훈.
너의 장점은 공을 보는 눈이다.
살아나가라. 그리고 우리 만루를 만들어서 노형욱에게 타점을 만들어주자.
아, 말하고 보니까 대체 난 왜 정강이 보호대며 각종 보호 장구를 착용했는지 의문이다. 어차피 볼넷 아니면 고의사구로 자동출루 할 것을.
네 번째.
이정훈이 자신의 장점을 버리고 또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이번에는 아슬아슬하지 않게 뜬공이 아니라 땅볼로 파울을 만들었으니까.
볼카운트 2-2.
김새한이 인상을 찌푸리고 로진백을 몇 차례 툭툭 두들겼다.
아!!!
그 순간 기억났다.
저 녀석 그 녀석이다.
내가 시범경기에서 홈런 치고 오른손 좀 치켜들었다고 동기들한테 이러쿵 저러쿵 이야기 했던 놈.
재규어스의 강소구가 그걸로 나한테 시비 걸길래 잘 기억해놨다가 투수 데뷔전에서 허벅지에 그대로 빈볼을 꽂아버렸다. 아, 물론 고작 그 시비 때문에 빈볼을 던졌던 건 아니고 재규어스 놈들한테 빈볼 하나 던져야만 했는데 마침 선두타자가 강소구였던 거다. 아무튼 간질간질하게 기억이 날까 말까 뭔가 찝찝했는데 그런 기분이 깔끔하게 사라졌다.
“어, 근데 잠깐만.”
아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가능성은 희박했다.
오늘 난 투수다. 그것도 선발 투수.
그리고 난 내 투수 데뷔전에서 감히 내 몸에 공을 맞추는 팀은 160짜리 속구로 보복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실하게 보여줬다.
실제로 그 이후로 좀 건방지게 굴었음에도 감히 나한테 빈볼을 던지는 투수는 나오지 않았다. 물론 내 성적이 워낙에 압도적이었고 화제성이 있었던 탓에 부담스러운 부분도 있었을 것이다.
근데 그건 그렇다고 치더라도 쟤 안 그래도 나한테 감정이 별로였을 텐데 지 친구도 나한테 빈볼 맞고 벌금까지 냈다.
악감정이 상당할 거다.
어······.
그렇다면 어쩌면 혹시?
-딱!!!
이정훈이 기어코 자신의 장점을 포기하고 방망이를 또 휘둘렀다.
“어라?”
그런데 뜻밖에도 그 공이 안타가 됐다?
노아웃 주자 1, 2루.
방망이를 쥐고 털래털래 걸어나갔다.
그리고 적당히 타석에 섰다.
도발 섞인 눈빛 따윈 보내지 않았다.
동태 썩은 것 같은 눈빛으로 ‘어차피 고의사구 아니면 볼넷이잖아. 그냥 빨리빨리 하자.’라는 마음의 소리를 강하게 전달했을 뿐이다.
김새한의 안면이 붉게 달아올랐다.
일단 그리핀즈 덕아웃에서는 고의사구 사인이 나오지 않았다. 자동 출루가 아닌 일단 공을 던져는 보겠다는 뜻이다. 뭐, 어제도 그렇게 해놓고 결국 볼넷으로만 세 번을 나갔다.
초구.
만약을 대비하여 타석에 붙어서지 않았다. 상당히 멀찍한 거리에서 혹시 모를 빈볼을 대비했다.
약간의 건들거림.
어차피 볼넷 할 거 그냥 빨리빨리 하자는 마음을 동작으로 표현하기 위하여 정말 최선을 다했다.
초구
-뻐엉!!
방망이를 휘두르지도 않았다.
손목에 스냅으로 가볍게 방망이를 돌려 다시 어깨에 얹었다.
타격 준비 자세라기보다는 정말 쉬어간다는 느낌.
공이 날아왔다.
빈볼은 아니다.
그냥 나름대로 내 허를 찌르겠다는 듯 바깥 코스 스트라이크 존에 살짝 걸치는 공. 아마 덕아웃에서 뭐라고 하더라도 그냥 손에서 공이 빠졌다. 뭐 그 정도 변명이 가능할 것 같은 그런 공이었다.
타석에 조금만 더 가깝게 섰더라면 좋았을 것을.
아니, 그랬더라면 이런 공도 던지지 않았겠지.
그렇기에 가능성은 생각하지 않았다.
그저 크게 휘두를 뿐
-딱!!!!
벼락같이 뽑혀나간 방망이의 끝이 공을 두들겼다. 손바닥에 밀려오는 통증. 순간 아······, 이거 그냥 볼넷으로 나갈 껄 그랬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2, 3루 간.
2루수의 키를 넘긴 공.
우익수의 수비 위치는 상당히 뒤편으로 물러난 상태였다.
텍사스성 안타.
강라온이 홈플레이트를 밟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