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마린스는 정말로 강팀이 되었나?(6)
노형욱이 그게 무슨 소리냐는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음······. 그러니까 제가 보기엔 쟤들 지금 선배 상대로 장난질하는 것 같거든요.”
“장난질이라고?”
“네, 앞에서 저 고의사구로 걸어가게 해서 선배 자존심 긁어서 어떻게든 방망이 휘두르게 만들고 존 살짝살짝 벗어나는 공으로 간 보잖아요. 제 기준에서 두 타석 통틀어서 진짜 스트라이크 줄 만한 공은 하나 정도였거든요. 그것도 진짜 아슬아슬한 공이었고요. 솔직히 상대가 좋은 공을 안 주는데 굳이 휘둘러 줄 이유는 없잖아요.”
“······.”
노형욱이 작게 신음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좋은 타자다. 그리고 본인도 그 사실을 잘 알고 있고 그런 만큼 자존심도 강하다.
실력을 차치하고 새카만 후배를 볼넷으로 내보내고 만루를 만든다.
심지어 만루 상황에서 밀어내기 볼넷으로 점수까지 내주면서 그에게 만루 밥상을 차려준다. 그런 상황에서 뭔가를 보여주겠다는 욕망을 제어할 수 있는 타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게다가 직전 브레이브스와의 경기에서 에이스 조창혁을 상대로는 비슷한 상황에서 만루 홈런까지 기록했었다.
그러니까 그의 생각이 다 이해는 된다. 하지만 이해가 된다고 해서 그 선택이 올바른 선택이었다는 뜻은 절대 아니다.
“솔직히 선배, 제가 고의사구로 나가서 만루 된 상황이 아니라 그냥 만루였으면 아마 볼넷을 노리셨을걸요.”
21세기 초반.
야구계에는 커다란 변화가 있었다. 빌리 빈에게서 시작된 그것은 야구에서 승리하기 위해 고평가된 스탯과 저평가된 스탯을 분류하고 그것을 통하여 가장 가성비가 좋은 선수를 찾아냈다.
그리고 20년이 훌쩍 넘는 시간이 흘렀다.
이제 OPS형 타자는 누구도 ‘가성비’가 좋은 타자라고 하지 않는다. 그리고 노형욱은 OPS 타자. 혹은 거기에 수비 스탯까지 매우 준수한 WAR형에 해당하는 선수라고 볼 수 있었다.
그렇다면 완성형 타자와 OPS형 타자를 구분하는 것은 무엇인가.
타율이다.
본래 노형욱은 공을 잘 치는 타자라기 보다는 명확한 존을 가지고 있는 남자였고 칠 수 없으면 볼넷을 만들 수 있는 타자였다. 뭐, 거액을 받고 마린스에 온 이상 그것만으로는 곤란했겠지만.
노형욱은 나의 말에 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충분했다.
그는 위대한 타자도 훌륭한 타자도 아니었지만 좋은 타자였다.
그리고 그 말은 재능이 엄청나던지, 아니면 충분한 재능과 그것을 제대로 활용하는 방법을 아는 영리함, 그리고 그것을 행동에 옮길만한 실행력을 두루 갖췄다는 뜻이다. 노형욱은 당연히 후자였다.
5회 말.
나의 세 번째 타석.
[그리핀즈, 세 타석 연속 고의사구를 선택합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겠죠. 만루에서 밀어내기까지 감수하고 볼넷을 줬는데 지금 원아웃 주자 없는 상황에서 굳이 승부를 할 이유는 없을 테니까요.]
[정말이지 이건 최수원 선수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아니면 그리핀즈가 대단하다고 해야 할지. 뭐가 됐건 참 대단하다는 말밖에는 나오지를 않네요.]
너무나도 자연스럽게 1루로 걸어 나갔다.
“오늘 자주 보네?”
“그러게요. 이러다가 방망이 녹슬겠어요.”
“그러라고 이 짓거리 하는 거야. 제발 녹 좀 슬어라.”
오늘 그리핀즈의 1루수는 채창식.
올해 31살로 노형욱과 동갑이다. 외야수를 보기에는 발이 너무 느린데 하필 좌투좌타라서 볼 수 있는 내야가 1루뿐이라서 1루수를 보고 있는 선수다. 물론 그거랑 별개로 당연히 1루수를 보는 만큼 상당히 뜨거운 빠따를 자랑한다.
게다가 1루 수비만 놓고 보면 리그 최고다. 포구 능력이 거의 미친 수준인데 그리핀즈가 내야 땅볼을 유독 잘 처리하는 건 대충 던져도 척척 다 잘 받아내는 채창식이 있기 때문이라는 말이 있을 정도다.
게다가 친화력은 또 어찌나 좋은지. 앞선 두 번의 출루에서 나에게 슬금슬금 말을 걸어오는데 나도 모르게 괜히 친근감이 들 지경이다.
“내일은 쉬는 거지? 모레 공 던지려면 좀 쉬어야 하잖아.”
“아뇨, 지명타자로 타격에 완전 빡집중할 예정인데요.”
“너 젊다고 그렇게 몸 함부로 막 쓰다가 훅 간다. 투수가 팔꿈치 아낄 줄 알아야지. 롱런 하려면 젊을 때는 좀 사릴 줄도 알아야 해. 형이 다 동생 같아서 하는 이야기야. 그러니까 내일은 쉬는 걸로 하자.”
“어차피 내일 경기 뛴다고 해도 이대로면 방망이 휘두르지도 않고 그냥 설렁설렁 달리기나 할 것 같은데요 뭐.”
“아, 이게 또 그렇게 되네.”
***
수원의 조언이 와닿았는가를 묻는다면 그렇다.
마린스에 이적한 이후 그는 공을 쳐야 한다는 약간의 강박을 갖게 됐다. 어쩔 수 없었다. 110억을 받고 온 타자가 볼넷으로 출루만 하는 것을 환영하는 팬은 없었고 마린스라는 팀이 그에게 바라는 것은 홈런과 장타였지 높은 출루율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서 수원의 조언을 실행에 옮길 의향이 생겼는가를 묻는다면······.
마운드의 제프 캐일런이 1루를 한번 힐끔 살폈다.
본래 노형욱 시프트로 최수원의 두 걸음 뒤편에서 2루 쪽으로 또 반걸음 더 가까이 있던 채창식이 슬금슬금 1루 쪽으로 이동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견제구.
-뻐엉!!!
“세이프!!!”
최수원이 자리에서 일어나 자신의 몸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냈다.
“이걸 사네.”
“그렇게 대놓고 견제구 올 거라고 1루쪽으로 가시는데 그걸 당할 순 없죠.”
“신인 애들은 나랑 수다 떨다 보면 정신줄 놓고 아웃 당하기도 하고 그러는데. 확실히 넌 귀염성이 없네.”
“너무 대놓고 노리시는 게 빤히 보여서요.”
-뻐엉!!!
초구 존을 살짝 벗어나는 바깥 코스 낮은 포심.
“확실히 형욱이가 작정하고 공 고르면 잘 고르기는 한단 말이지. 어때? 너라면 저거 고를 수 있겠어?”
“저요? 저라면 안 참죠. 그냥 잡아당길 걸요? 대충 93마일 왔다 갔다 하는 공을 저 코스로 주는데 저건 치라고 주는 공이잖아요.”
“와······. 너 진짜 재수 없다. 내가 선후배 좀 덜 따지는 깨인 사람이라 망정이지 빠따 좀 맞을 스타일인데?”
“안 그래도 그런 이야기 많이 듣습니다. 야구 좀만 못 했으면 진짜 큰일 났을 거라고.”
“그리고 너 한국 놈이 킬로같이 좋은 거 놔두고 마일은 무슨 마일이야.”
-뻐엉!!!
노형욱이 센터에서 절묘하게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슬라이더에 배트를 멈춰세웠다. 구심은 스트라이크를 선언하지 않았다. 포수가 체크 스윙 여부를 물었지만, 결과는 변하지 않았다.
“아, 아니다. 조만간 미국 간다는 소문 있던데. 그냥 마일 써라. 괜히 이것저것 쓰면 헷갈리지.”
“제가 미국 간다고 소문이 났습니까?”
“한국 쪽은 아니고. 우리 단장이랑 전력분석팀장이 미국에서 야구 하던 양반들이잖냐. 그쪽 애들은 너 내년에 미국 오는 거 거의 확실한 것처럼 군다던데? 아니냐?”
“에이, 20억이나 받았는데 마린스가 그냥 쉽게 놔주겠습니까?”
“그거 포스팅비로 다 충당되지 않나? 아닌가?”
“이번에 재개정 돼서 국제유망주의 경우 일괄로 20%는 아니긴 한데, 그래도 제 가치에 비하면 큰 금액은 아니죠. 리그 MVP급 선발 투수랑 타자를 로스터 하나에 묶어서 싼값에 6년을 쓸 수 있는 건데요.”
“와, 어떻게 사람이 이렇게 말 하나하나가 재수 없지? 근데 또 이게 팩트라서 더 재수가 없네?”
-뻐엉!!!
몸쪽 낮게 들어와서 떨어지는 투심.
이번에도 노형욱이 방망이를 참았다.
볼카운트 0-3.
“근데 너 그런 거 다 생각해놓은 거 보니까 마냥 헛소문은 아닌 것 같다?”
“글쎄요. 아직은 헛소문이라고 생각합니다만 사람 미래는 또!!!”
-뻐엉!!!
“세이프!!!”
기습적인 견제구.
수원이 또 한 번 자신의 옷을 털었다.
“······모르는 거니까요.”
“하, 징한 놈. 타이밍 완전 먹은 것 같았는데 이걸 또 사네.”
세 걸음 반.
최수원이 자세를 낮췄다.
그리고 노형욱이 그런 수원을 한 번 바라봤다.
볼넷이라고?
좋은 조언이었다.
볼넷을 많이 얻는 타자는 어떤 타자인가. 존에서 빠져나가는 공을 잘 골라내는 타자다. 그렇기에 거기에는 투수가 빠지는 공을 던져야 한다는 한 가지 전제 조건이 붙는다.
그렇다면 대체 어떤 타자에게 투수는 존에서 빠지는 공을 던지는가.
볼카운트 0-3
몸쪽 낮은 코스.
조금 전에 볼 판정을 받았던 투심보다 살짝 더 파고 들어오는 공.
노형욱의 방망이가 벼락처럼 움직였다.
그라운드에 야수들은 여전히 예의 그 시프트를 펼친 상태였다.
잡아당겼다.
몸에 오래 새겨넣은 그대로.
둘 중 하나.
투심 혹은 포심.
그것을 구분할 수는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전신의 모든 힘을 타격 포인트에 집중시킨다는 감각으로
-딱!!!
타구가 하늘을 날았다.
손끝이 저릿했다.
더러운 볼 끝은 이번에도 스윗스팟을 벗어났다.
1루의 최수원이 출발했다.
타구가 쭉쭉 뻗어나갔다.
외야 플라이?
홈런?
모르겠다. 노형욱이 그냥 달렸다.
그리핀즈의 좌익수는 이미 담장에 바짝 붙어있었다. 타구는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그리핀즈의 좌익수가 담장을 밟고 몸을 날렸다.
점핑 캐치.
[아······. 담장 앞······. 좌익수 임동훈이 타구를 잡아냅니다.]
최수원이 다시 1루로 귀루했다.
아쉬운 결과.
아주 조금, 아주 조금이 부족했다.
그렇기에 노형욱은 인정해야만 했다. 자신의 타격 사이클이 조금 내려왔다는 것을.
투 아웃 주자 1루.
점수는 나지 않······.
-딱!!!
“어?”
“어!?”
“응??”
초구.
이규만.
실투.
쭉쭉 뻗어나간 타구가 우중간 담장을 직격 했다.
최수원이 또 달렸다.
조금 전보다 더 빠르게.
이규만 역시 달렸다.
아무리 이규만이라도 담장을 직격한 안타를 땅볼로 만들 만큼 느릴 수는 없었다. 제법 여유있는 1루 세이프.
그리고 이규만이 여유있게 1루에 도착할 수 있는 시간은 빠른 주자를 기준으로 한다면 1루에서 출발하여 2루를 지나 3루. 심지어 홈까지 쇄도하기에 충분한 시간이라는 뜻이다.
중견수에서 유격수로 이어지는 중계 플레이.
그리핀즈 입장에서는 참 아쉬움이 있는 수비였다. 차라리 0.2초 정도 늦게 강견인 우익수가 공을 잡게 내버려 두고 송구를 했더라면 결과가 더 좋았을지도 몰랐을 것이다.
-뻐엉!!!!
거의 동시.
하지만 최수원의 오른손이 홈플레이트에 먼저 닿았다.
“세이프!!!”
4:3.
딜튼이 그 거대한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기민한 속도로 덕아웃을 뛰어나왔다.
“하하하. 스완!! 굿!! 이런 예쁜이 같으니라고. 해낼 줄 알았어. 믿고 있었다고!!”
5회 말의 역전.
물론 거기에 또 추가점이 더해지는 기적은 없었다.
하지만 딜튼에게는 그것으로 충분했다.
6회와 7회 그는 신이 난 자신이 얼마나 더 강력한 투수인지를 확실하게 보여줬다.
7회 그가 마지막으로 던진 공의 구속은 무려 157.9km/h
그가 오늘 경기, 아니 이번 시즌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공이었다.
[프로 야구 사상 최초 밀어내기 고의사구의 주인공 탄생!! 최수원 4타석 0타수 4볼넷.]
[그리핀즈의 선택은 올바른 선택이었을까?]
[부산 마린스!! 리그 최강의 선발진, 강력한 타선 그리고 최악의 불펜.]
클래식 시리즈 1차전.
경기를 지켜 봤던 마린스의 오랜 팬들은 이렇게 말했다.
에이스의 호투.
타자들의 투혼.
그리하여 마지막까지 박빙으로 이어진 경기.
그리고 불펜의 방화로 인한 역전패까지.
오늘 경기는 지극히 마린스다운 경기였노라고.
“그래도 우리 좀 강해지지 않았냐? 내가 볼 때 우리 올해는 진짜 가을 야구 갈 듯.”
“넌 오늘 경기를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그리고 우리가 강해졌다고? 너 나랑 같은 경기 본 거 맞아?”
“아니, 원래 스토리 대로면 여기서 환장의 수비까지 나와야 하는데 그건 없었잖아. 보면 요즘 이주혁도 수비 곧잘 하는 느낌이고.”
“아 씹······. 뭐지? 짜증 나는데 왜 설득력이 있지?”
부산 마린스는 과연 강해졌을까?
그리고 2차전
최수원은 전타석 출루에 성공했다. 3개의 볼넷. 그리고 하나의 2루타와 고의사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