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52화 (152/305)

152화. 마린스는 정말로 강팀이 되었나?(5)

“너무 성급한 결정 아니었을까?”

“너도 동의했잖아. 이게 어떤 상황이건 확률적으로 가장 높은 선택이라는 거.”

“하지만 찰리 너도 알잖아. 야구에서 확률만 따지다가는 골로 간다는 거. 필드에서 뛰는 플레이어들은 게임 캐릭터가 아닌 살아 있는 사람이야. 감정에 따라서 달라진다고. 게다가 만약에 노형욱이 여기서 뭔가를 해내기라도 한다면······.”

“일단 첫 번째. 게임 캐릭터가 감정이 없는 건 그 변수를 세팅하지 못해서일 뿐이야. 그리고 두 번째. 그래서 우리는 덕아웃에 감독을 두는 거잖아. 현장에서 그 부분을 판단해서 결정을 내리라고 말이야. 잊었어? 우리의 권유는 절대적인 지침이 아니야. 현장에서 얼마든지 판단하고 그 이후 그에 적합한 근거를 가져오면 되는 문제라고.”

만루에서 밀어내기 고의사구.

너무나도 위험한 선택이었다. 그리핀즈의 단장인 강지우는 볼넷을 주더라도 상관 없는 수준의 까다로운 승부를 거듭하는 것이 더 좋지 않겠냐는 의견을 냈었다. 하지만 전력분석팀장인 찰리 김의 생각은 달랐다.

“두고 보라고. 곧 우리 팀의 선택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었다는 걸 다른 모든 곳에서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테니까. 알다시피 지금 우리에게 필요한 건 이 데이터라는 녀석이 플레이어 출신들이 갖고 있는 그 거대한 커넥션을 압도할만큼 가치가 있다는 증거야. 저 괴물을 가장 먼저 알아봤다는 건 거기에 충분한 근거가 될 거라고.”

VIP룸.

그들의 시선이 타석에 들어서는 노형욱에게로 향했다.

***

거대한 충격이 사직 구장을 덮쳤다.

3:2의 상황에서 3:3 동점이 된 상황.

그것도 심지어 홈 경기였다. 하지만 장내는 생각처럼 소란스럽지 않았다. 아니,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건 고요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어? 뭐야? 지금 만루인데 고의 사구인 거야? 저거 점수 1점 내주는 거 아니야?”

“어······. 맞아.”

“그래도 야구 꽤 본 것 같은데 이건 처음 보는 것 같은데? 아, 이거 고의사구 공 네 개 안 던지고 그냥 내보는 거 한 지가 아직 몇 년 안 돼서 그런 건가?”

“몇 년 안 되기는 지금 그거 실행한지가 벌써 9년째인데······.”

“규환이 넌 만루에 고의사구 본 적 있어?”

평소 친구들 사이에서도 야구광으로 유명한 규환씨였다.

그래서 지금 이게 보기 드문 광경이긴 했지만, 규환 씨 정도의 야구광이라면 처음 보는 장면은 아니었겠지.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의 대답은 예상을 완벽하게 벗어났다.

“있겠냐?”

“어?”

“저거 메이저리그에서도 몇 번 안 나온 기록이야. 한국에서는 아예 없다고.”

“그러니까 신인한테 만루에서 고의사구 준 거?”

“아, 진짜. 말 못 알아듣네. 그냥 만루에서 고의 사구 자체가 없다고. 어느 미친놈이 만루에서 점수를 그냥 내줘. 아니, 진짜 확률상 그게 이득일 수도 있긴 하겠지. 근데 이건 그냥 너무 대놓고 자기 선수 못 믿는다는 거잖아. 그걸 받아들일 선수 자존심은 어떻게 되겠냐?”

엄밀하게 말해서 한국에서 만루에 고의사구를 준 적이 없다는 규환씨의 말은 틀리기는 했다. 대학야구와 고교야구에서는 존재하는 기록이었으니까.

하지만 적어도 KBO에서는 82년 리그가 시작된 이후 단 한 번도 없었던 기록이기는 했다.

“아니, 근데 그래도 배리 본즈는 많이 당하지 않았어?”

“배리 본즈랑 최수원이 지금 비교가 되냐? 걘 몇 년이나 리그를 파괴한 미친 놈이었고 최수원은 이제 신인인데 투수가 받아들이는 것 자체가 다르지. 게다가 배리 본즈도 그냥 뭔가 어어? 하면서 만루에 밀어내기 볼넷인거지 대놓고 승부 안 할 거야 그냥 나가. 하는 식의 고의 사구는 한 번인가 밖에 없었어.”

“그러니까 지금 결론이······.”

“둘 중 하나지. 그리핀즈 덕아웃이 미쳤거나, 아니면 우리 수원이 방망이가 진짜로 미쳤거나.”

***

노형욱이 웃었다.

사람의 분노가 한계를 넘어가면 웃음만 나온다더니 그 때문일까?

아니, 그건 아닌 것 같았다.

자신이 앞서 삼중살을 쳤다고 무시하는 차원에서 밀어내기 볼넷을 선택했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건 분노라기보다는 그냥 어이가 없어서라고 봐야 했다.

솔직히 최수원 빠따질 하는 거 보면 이건 규격 외의 괴물이라는 게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을 종종 받긴 한다. 가끔 얘를 전성기 7관왕 시절의 이규만과 비교하는데 글쎄? 동의하기 힘들다.

그건 단순히 지금 최수원이 7관왕 시절의 이규만에 주루까지 더해져서 완전체라서 하는 말이 아니다.

얘 타격은 뭔가 다르다. 아, 물론 성적이 7관왕 시절 이규만보다 더 잘나올수 있을까를 묻는다면 그건 잘 모르겠다. 어디에서나 상단이라는 것은 정해져 있고 당시의 이규만은 그 상단에 도달했었다고 봐야 했으니까.

하지만 상단이 달라진다면? 그러니까 예컨대 메이저리그라면? 노형욱이 보기에 지금 최수원과 당시 이규만이 메이저에서 뛴다면 분명 유의미한 차이가 있을 것 같았다. 그리고 그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지금의 저 만루에서 밀어내기 고의 사구일 것이다.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건 이거다.

2이닝 만에 벌써 두 번째 만루 밥상.

밥상을 걷어차는 것은 한 번으로 족했다.

29홈런 타자 노형욱이 타석에 다시 올라왔다.

제프 캐일런이 잠시 침묵했다.

그라고 어찌 기분이 좋을까. 솔직히 만루에 밀어내기 볼넷라고 해도 볼넷을 내줘도 상관 없다는 마인드로 피칭을 하는 것과 공 하나 던지지 않고 내보내는 것 사이에 간극은 매우 컸다.

고의 사구라는 하나의 선택.

그리고 그 하나의 선택에 상처 입은 투수와 타자가 마주 봤다.

세 개의 공이 투수와 포수 사이를 오고 갔다.

그 사이 방망이가 나온 것은 단 한 번.

볼카운트는 2-1.

최수원만큼은 아니었다.

하지만 노형욱 역시 주요하게 경계할만한 타자였다. 최악의 경우 볼넷으로 점수를 하나 더 내주더라도 최대한 까다롭게 공을 가져가야 하는 상대다.

네 번째.

몸쪽 깊숙한 코스.

앞서 삼중살을 잡아냈던 바로 그 코스였다.

노형욱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그는 대단한 타자였다.

본능적으로 앞선 타석의 투심을 기억했고 그의 방망이는 약 3센티 정도 더 낮은 곳을 향했다.

-딱!!!

타격의 순간 알 수 있었다.

조금 늦었다.

그리고 높았다.

투심이 아닌 포심. 그것도 거의 완벽하게 들어오는 포심이었다.

타구가 높이 떴다. 물론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서 잡아당긴 배트에는 충분한 힘이 실려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담장을 넘어갈만한 힘이었냐면 결코 그렇지 않았다.

뒤로 몇 걸음 물러난 좌익수가 노형욱의 타구를 가볍게 잡아챘다.

외야 플라이 아웃.

2회 말.

3:3 동점.

노형욱이 두 번 연속 만루 밥상을 걷어 찼다.

그리고 마린스의 두 번째 공격이 끝났다.

***

공수교대.

3점 뒤지던 걸 동점을 만들어냈음에도 덕아웃의 분위기는 영 좋지 못했다. 단순히 만루에 외야 플라이 찬물이라서 그런 게 아니다.

내 타석 직전까지만 해도 으쌰으쌰해서 따라잡자는 느낌이었고, 실제로 따라잡는 데도 성공을 하긴 했는데 그 따라잡는 결정적인 순간이 우리가 뭔가를 해서 이뤄낸 게 아니라, 상대방이 출혈을 최소화하기 위한 투자. 그러니까 밀어내기 볼넷이었다는 게 문제였다.

임계점 가까이 간 우리가 뻥!! 하고 터트리기 전에 상대방이 먼저 김을 빼버렸달까? 그리고 노형욱이 거기서 뭐라도 해줬다면 모르겠는데 첫 번째 타석에서는 삼중살. 이번 타석에서는 외야 플라이다.

물론 작전이라는 게 어디까지나 순간순간의 확률에 따라 선택하는 것이지만, 지금 결과만 놓고 보면 그리핀즈가 의도한 그대로 따라가는 그림이 돼버렸달까?

게다가 노형욱과 나의 팀 내 입지? 뭐 그런 것 때문에 더 분위기가 그렇다.

사실 요즘 내가 더 잘 치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고, 클래스 차이가 좀 난다는 것도 다 인지하고 있지만 그래도 나는 신인이고 노형욱은 12년 차 베테랑. 바로 작년까지 팀에서 제일 잘 치던 타자다. 고작 열 몇 경기 만에 그걸 공공연하게 말할 수 있는 선수는 없다. 최소한 내가 한 1년 정도 잘 치고 MVP라도 딴 다음이라면 또 모를까.

그런데 이렇게 노골적으로 상대 팀에서 급에 차이가 있다고 선언하고, 그게 또 현실로 대뜸 나와 버리면 노형욱보다 연차가 안 되는 선수들은 물론이거니와 연차가 되는 선수들까지도 노형욱의 눈치를 조금 볼 수밖에 없다.

지금까지 으쌰으쌰 분위기를 만들어내던 조유진도 별말을 하지 않았다. 뭐, 저 녀석이야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니까 당연한 일이다.

“형욱아.”

“네?”

“원래 공 치다 보면 다 그런 거다. 병살이고 뭐고 다 잘 치는 타자들이라서 따라오는 거야.”

이규만의 이야기에 덕아웃에 잠깐의 침묵이 찾아왔다.

그 침묵에 이규만 본인도 좀 당황했는지 괜히 옆에 있던 조유진을 한 번 바라봤다. 그리고 조유진은 역시 기대를 저버리지 않았다.

“크, 역시 주장님. 대단하십니다. 한국 최고의 타자가 직접경험을 이야기해 주시는 거라서 그런지 확실히 이야기에 무게감이 있네요.”

“그래, 내가 한국에서 병살타 제일 많이 치긴 했지.”

“아니, 선배님.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라······.”

가벼운 만담.

눈에 띄게 당황한 쪼유를 바라보던 사람들의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노형욱 역시 피식 입꼬리를 들어 올렸다.

“자자, 다들 기운 차렸으면 얼른 가서 저 녀석들 엉덩이 걷어 차주고 돌아오자고. 역전 못한 건 조금 아쉽지만 그래도 이렇게 1점씩 1점씩 내다보면 오늘 경기도 우리가 충분히 가져올 수 있을 거야. 오늘 이 몸이 던지는 날이잖아.”

딜튼이 글러브를 쥐고 다른 선수들을 향해 소리쳤다.

그는 물론 다른 선수들 사이에 무슨 대화가 오고 간지 몰랐다. 다른 선수들 역시 딜튼이 지금 무슨 말을 했는지 정확하게 알아들은 이는 드물었다.

하지만 때론 분위기와 표정 그리고 목소리와 같은 비언어적인 무언가만으로도 서로의 뜻이 통할 때가 있는 법이다. 지금이 그러했다.

글러브를 낀 선수들이 그라운드로 달려나갔다.

“쪼유, 방금 쫌 좋았다. 올해 네가 한 플레이 중에서 제일 좋은 플레이였어.”

야구 못한다고 돌려 깐 것을 눈치챈 것일까?

쪼유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추가점 없이 경기가 계속됐다.

딜튼은 1회 초에 3점이나 내줬던 것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신나게 공을 뿌렸다.

제프 캐일런은 딜튼과는 조금 달랐다.

포심과 투심 그리고 슬라이더.

보통 땅볼을 유도하기 위해서는 끝이 더러운 속구 혹은 바깥쪽 낮은 코스에서 도망가는 구질의 공이 필요했다.

전자의 경우는 공의 위력이 중요했고, 후자의 경우는 커맨드가 중요했는데 KBO를 기준으로 봤을 때 제프 캐일런은 그 두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투수라고 볼 수 있었다.

기본적으로 바깥쪽 낮은 코스 승부를 주로 하다가 카운트가 몰리면 적극적으로 승부를 하는데 MLB를 기준으로는 두들겨 맞기 딱 좋은 153km/h정도의 공이 KBO를 기준으로는 강속구의 범주에 속하는 탓에 이게 좀 통한다. 게다가 중간중간 들어오는 투심도 좀 까다로웠고.

“수원아, 너라면 뭘 노릴 거 같냐.”

갑자기 노형욱이 나에게 질문했다.

아니, 이건 질문이라기보다는 조언을 요청하는 거라고 봐야 했다. 뭐 조언 구하는 데 나이가 무슨 의미가 있느냐고 말할 수도 있긴 했지만, 사실 자기보다 어린 후배에게 뭔가 조언을 구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

“글쎄요······. 한 너댓 개에 하나 정도는 그래도 존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 같은데 저라면 그런 공 노려볼 것 같은데요. 하지만 제가 만약 선배라면······.”

“나라면?”

“그냥 안 치지 않을까요?”

“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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