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1화. 마린스는 정말로 강팀이 되었나?(4)
원아웃 주자 2, 3루.
아마 1점 차이의 승부였다면 고의 사구를 지시했을 것이다.
원아웃 주자 2, 3루와 원아웃 주자 만루 상황에서 각기 기대 득점을 구했을 때, 1.46점과 1.65점으로 만루쪽이 더 높다.
하지만 야구란 참 오묘해서 단순히 득점 확률을 보게 되면 원아웃 주자 2, 3루가 70%. 그리고 원아웃 만루가 67.2%로 원아웃 주자 2, 3루 쪽이 3%가량 더 높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은 무려 3점을 리드하고 있는 상황.
게다가 상대 타자는 8번 포수인 최진웅이었다.
-부웅!!!
“스트라잌!!!”
빠지는 슬라이더에 헛스윙.
제프 캐일런이 웃었다.
그를 설득하러 찾아왔던 그리핀즈의 단장 강지우와 전력분석팀장 찰리 김의 말은 옳았다. 그들은 자신이 드래프트 되던 순간부터 지켜봐왔다고 말했다. 아니, 애초에 그가 드래프트 3라운드에 뽑힌 것 자체가 자신들의 강력한 주장 때문이었다고 했다.
그리고 말했다.
한국에 와도 너는 더 강해질 수 있다고.
“한국에 ‘오면’이 아니라 한국에 와도 라고요?”
“네, 뭐 솔직히 여기 남아도 제대로만 하면 더 강해질 수 있을 거라고 봅니다. 다만 이제 슬슬 미래도 생각할 나이고, 마이너가 많이 좋아지긴 했지만 그래도 KBO가 환경이 더 좋거든요. 몸 관리 해주고, 돈 많이 주고, 주거비에 식비도 구단 운영비로 처리해주고. 딱 야구에만 집중하기 좋은 환경이니까요.”
설득력이 있는 말이었다.
사실 어정쩡한 레벨의 선수에게 KBO나 NPB 용병 생활은 나쁘지 않은 길이었고 제프 캐일런의 경우 아직 나이가 좀 덜 차기는 했지만 이대로 2, 3년만 더 보내면 그쪽 길을 알아보는 게 맞는 레벨이기도 했으니까.
“게다가 제가 볼 때 한 2년? 성적 잘 내고 MLB 복귀하는 거. 꿈 아닙니다.”
그래서 마지막 그 말은 과장이라 생각했지만 뭐, 몇 년 일찍 꿈을 접는다는 느낌으로 한국행을 택했다.
하지만 놀랍게도 그들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이유는 다름 아닌 슬라이더였다.
나름대로 슬라이더는 이제 슬슬 장인의 경지에 이르지 않았나 하고 생각하던 제프 캐일런이었지만 한국에 와서 투수들이 슬라이더라고 던지는 공들을 봤을 때 아, 이건 미친놈들인데? 하는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이게 슬라이더라고요?”
“어.”
“이것도?”
“어.”
“진짜 이것까지도?”
“아, 그렇다니까.”
아니, 그러니까 스플리터 비스무리하게 떨어지는데 그건 종슬라이더.
분명 체인지업인데 그게 느린 슬라이더.
컷패스트볼 비스무리한데 그건 또 고속 슬라이더.
제프 캐일런이 목격한 KBO는 슬라이더에 미친 리그였다.
지난겨울 그리핀즈에 합류하고 약 3개월.
제프 캐일런은 적어도 자신의 슬라이더가 반걸음 정도는 스탭업을 했다고 생각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시원한 헛스윙 삼진.
투아웃에 주자 2, 3루.
타석에 이주혁이 올라왔다.
약간의 긴장감.
이주혁이 자신의 마른 입술을 핥았다.
최근 며칠.
그는 최수원과 함께 타격을 연습했다. 수원의 집에서 자신도 함께해도 되냐고 물었던 것은 분명 충동적인 선택이었다.
물론 최수원의 타격 성적은 압도적이긴 했다. 하지만 최수원과 자신의 피지컬적인 조건은 너무 다르고 적어도 이론적인 부분에서는 그 역시 뒤질 게 없다고 생각했다. 아니 훨씬 낫다고 확신했다. 그도 그럴 것이 수원은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살 소년이었고 이주혁 자신은 무려 군대까지 다녀온 6년 차 선수였으니까.
게다가 그가 공부하고 적용해본 타격 이론이 대체 몇 개였던가. 장담하건대 적어도 타격 이론만으로 따진다면 이주혁은 어지간히 제대로 공부한 코치에 뒤지지 않을 것이다.
“에······. 제가 볼 때 선배는 생각이 너무 많은 것 같은데요?”
“어?”
“아니, 사실 그 타격 이론이라는 거 결국 잘 보고 잘 치는 법이잖아요.”
“그렇······지?”
“그러면 결국 잘 치는 법은 몸에 완전히 박아넣고 공을 그냥 잘 보기만 하면 되는 거 아닌가 싶어서요.”
중학교 시절 타격 코치와 고등학교 시절 타격 코치.
그리고 프로에 와서 바뀐 세 명의 타격 코치.
약 12년의 시간 동안 그가 만났던 모든 코치들은 이주혁의 뭔가 잘못된 습관을 고쳐주고 그의 타격이 제대로 되지 않는 이유를 이론적으로 세세하게 풀어주었다.
이주혁은 그때마다 고개를 끄덕이며 참으로 옳은 말씀이라고 생각했다. 참으로 많은 공부를 했고, 그 공부에 맞게 타격폼을 꾸준히 수정해왔다.
“뭐, 결국 로테이셔널이니 웨이트 시프트니 하는 것들도 어느게 꼭 맞고 틀리다기 보다는 지금 리그의 상황, 사용하는 타자의 신체 조건 등이 다 고려해야하는 일종의 ‘방법론’ 아닐까요? 가장 중요한 목적은 결국 무슨 수를 쓰더라도 공을 강하게 멀리 쳐내는 거니까요.”
벼락과 같은 깨달음이라는 말은 과장이 아니었다.
어떤 순서로 어떻게 움직이겠다는 강박을 지웠다.
아니, 지우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원래 무언가를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무언가를 억지로 잊겠다고 결심하면 그것에 더 함몰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었다.
그렇기에 선택해야 하는 것은 그저 투수가 던지는 공에 대한 집중.
투아웃 주자 2, 3루.
마운드의 투수가 와인드업했다.
-뻐엉!!!
초구 슬라이더.
움직이던 배트를 멈춰세웠다.
구심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하지만 공을 받은 포수가 3루심을 향해 체크 스윙 여부를 물었다.
“스트라잌!!!”
이주혁이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이내 다시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머릿속은 복잡했지만 복잡하지 않으려 노력했다.
두 번째.
몸쪽 낮은 코스.
포심?
아니면 앞서 노형욱 선배에게 삼중살을 뽑아냈다는 그 투심?
모르겠다.
일단 그냥 느낌이 오는 대로 휘두르자.
-딱!!!
힘차게 잡아당긴 방망이가 야구공을 때렸다.
예상보다는 조금 낮게 들어온 공이었다. 무난한 코스로 그리 강하지 않은 타구가 날았다.
그러나 운이 좋았다.
내야수 전체가 몇 걸음 걸어 들어온 전진 수비를 하고 있던 상황. 타구가 이루수의 키를 살짝 넘어갔다.
마찬가지로 어느 정도 전진해 있던 우익수가 빠르게 공을 향해 달렸다.
하지만 이주혁이 누구던가.
명실상부 KBO에서 가장 빠른 사나이다. 그의 발이 무난하게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세이프!!!
그리고 이주혁이 베이스를 밟고 약 0.3초 후.
이규만의 손이 홈플레이트를 스쳤다.
타자주자가 공을 치고 1루까지 달려가는 것보다 3루 주자가 홈까지 도착하는 것이 더 늦은 보기 드문 광경이었지만 어쨌거나 지금 중요한 것은 마린스가 홈런이 아닌 연속된 안타로 1점을 뽑아냈다는 점이었다.
“와, 내가 살아 생전에 이주혁이 친 안타에 이규만이 홈에 들어오는 꼴을 보게 될 줄이야······.”
“그러게. 오늘 이규만은 2루타를 치지 않나, 이주혁은 외야로 공을 보내지를 않나. 야구 오래 보고 볼 일이야.”
2회 초, 투아웃에 주자 1, 3루.
타석에 1번 타자 강라온이 올라왔다.
***
와, 이주혁이 안타를 치는 장면에서는 진짜 감탄을 할 수밖에 없었다.
너무 잘 쳤냐고? 그럴 리가. 지금 저건 야수가 제 자리에 있었으면 무조건 아웃 될 코스다. 그냥 운이 너무너무 좋았다. 내가 감탄한 부분은 나한테 조언 좀 들었다고 그걸 의심하지 않고 그대로 실행에 옮기는 저 얄팍한 팔랑귀였다.
아니, 프로에 와서 6년 동안 타격폼만 크게는 세 번. 미세하게는 열 번 가깝게 조정을 했다는 말이 거짓말이 아니었겠다 싶다.
물론 안되는 폼을 제대로 가다듬는 건 매우 중요하다.
여기 이 조유진을 좀 봐라. 정신적으로 문제가 있어서 그걸 강제로 폼으로 교정하니까 그래도 고3 때 잠깐 사람 같은 타격을 했었던 거. 물론 되지도 않는 포텐셜 터트려보겠다고 원래 폼 돌아가는 바람에 도로 아미타불이 되긴 했지만.
아무튼 내가 봤을 때 이주혁은 타격폼 어쩌고 하는 강박관념을 벗고 그냥 타석에서 타격 그 자체에 좀 집중할 필요가 있다.
그나저나 연속 안타로 점수를 내고 투아웃에 주자 1, 3루라.
기적적인 일이었다.
규만 선배가 땀을 뻘뻘 흘리며 덕아웃으로 돌아왔다.
“선배님 나이스!!”
그리고 쪼유가 그런 규만 선배에게 다가가 헬멧을 받아줬다.
투아웃이기는 했지만 상위 타순부터 다시 시작되는 우리의 공격. 하지만 신기할 만큼 기대가 되지 않았다.
그것은 강라온의 문제가 아니었다.
마린스라는 팀에 대한 믿음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찬물을 끼얹지 않는다면 마린스가 아니라는 강력한 믿음. 왜냐하면 그것이 마린스니까.
-딱!!!
그 순간 공이 날았다.
아슬아슬한 코스.
어?
근데 이번에도 그리핀즈 야수들의 위치가 좀 이상했다.
본래라면 병살타도 너끈할 공이었는데······.
[3루 주자 사울 로페즈 홈으로!!]
“세이프!!!”
사울 로페즈의 홈인.
[1루 주자 이주혁!! 이주혁!! 매우 빠릅니다. 2루 지나 3루까지!!!]
[강라온의 깔끔한 적시안타. 2회 말 마린스가 추가점을 획득합니다. 이제 점수는 3:2. 투아웃 주자는 여전히 1, 3루입니다.]
[이제 타석에는 이정훈 선수가 올라옵니다.]
뭐지?
내가 일단 방망이를 들고 대기 타석으로 향했다.
뭔가 분위기가 좀 이상했다.
마린스의 야구가 아닌, 그냥 정상적인 야구가 되는 것 같은 묘한 감각.
“자자!! 역전 가즈아!!!”
오늘 벤치를 뜨겁게 달구고 있는 쪼유의 목소리가 등 뒤에서 들려왔다.
“수원아, 여기서 잘 지켜봐라. 이 선배가 영웅이 되는 순간을.”
“선배, 지금 분위기도 좋은데 괜히 이상한 스윙 하지 말고 어떻게든 연결이나 해주세요. 지금 뭔가 이번 이닝에 역전 꼭 해야할 것 같은 분위기니까.”
분명 투아웃에 아직 1점을 뒤지고 있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흐름이 우리쪽으로 완전히 넘어왔다는 느낌이었다. 정상적인 마린스라면 여기서 어이없이 그 흐름이 끊기면서 어처구니 없는 패배를 당하겠지만 왠지 오늘은 느낌이 달랐다.
“아휴, 하여간 진짜 말하는 꼬라지가. 넌 정말 야구 쪼금만 못했어도 많이 맞았을 거다.”
“야구 못했으면 대신 싸가지가 더 있었겠죠.”
“그러니까 지금 싸가지를 버리고 야구 실력을 챙긴 거다? 갑자기 그 실력이 확 이해되네. 스읍······. 나도 그러면 뭔갈 버려야 하나?”
이정훈이 헛소리를 주절주절 늘어놓으며 타석으로 걸어갔다.
-부웅!!!
초구 크게 퍼 올리는 시원한 헛스윙.
그야말로 오늘 시즌 1호 홈런을 쳐내겠다는 강렬한 의지가 느껴지는 스윙이었다.
역시 마린스의 의지는 오늘도 이렇게 이어지는 걸까?
잠시 타석에서 물러난 이정훈이 나를 한번 바라보며 개구지게 웃으며 뭐라 입을 뻥긋 거렸다.
‘준. 비. 해.’
뭐, 입 모양만 본 거라 아닐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느꼈다.
그리고 다시 타석에 선 이정훈이 연속으로 2개 공을 골라냈다.
아······. 저 양반 설마? 일부러 초구부터 강렬한 의욕을 보여줘서 유인구를 끌어낸 건가? 네 번째에 파울. 그리고 다섯 번째에 또 파울.
여섯 번째에 볼. 그리고 마지막 일곱 번째에
-뻐엉!!
몸쪽 낮은 코스 투심을 골라내며 볼넷.
2회 말 3:2.
2사 만루.
촌스러운 올드 유니폼으로 가득한 사직 구장.
팬들의 응원 소리가 나의 귀청을 때렸다.
게다가 이쪽저쪽 어디를 살펴도 보이는 79라는 백 넘버. 아니, 정식 유니폼도 아니고 올드 유니폼에다가 내 등번호는 대체 언제 박아 넣은 건지.
이전에도 한번 말했지만, 이렇게 시간을 거슬러 온 이상 나는 슈퍼 스타가 되고 싶다.
그리고 지금 이런 타이밍은 슈퍼스타가 되기 더 없이 적절한 타이밍이었다.
그래, 가자.
그때였다.
그리핀즈의 덕아웃이 움직였다.
그리고 그 결정에 과장을 조금 보태 사직 구장이 얼어붙었다.
물론 내가 메이저 MVP급 타자임을 아는 나로서는 충분히 이해가 가는 결정이긴 했지만 와, 그래도 벌써 이걸 한다고?
[에?]
[2회 말. 3:2 상황. 2사에 만루. 그리핀즈가······, 그리핀즈가······. 그러니까 고의 사구를 선택했습니다.]
[밀어내기 볼넷. 밀어내기 볼넷입니다. 맙소사. 최수원. 최수원이 밀어내기 볼넷으로 마린스에 1점을 더해줍니다. 3:3. 투아웃 만루. 타석에 마린스의 4번 타자 노형욱이 올라옵니다.]
3:3
그러니까 지금까지는 홈런을 쳐야지만 간신히 획득할 수 있었던 1타점.
오늘 나는 방망이 한 번 휘두르지 않은 채 그 소중한 1타점을 획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