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0화. 마린스는 정말로 강팀이 되었나?(3)
노형욱이 방망이를 꾹 쥐었다.
바로 지난 주 금요일. 그러니까 고작 나흘 전에 비슷한 일이 있었다. 완전히 같지는 않았다. 당시에는 원아웃에 주자 1, 3루. 그러니까 만루를 채우고 병살을 노리는 전략일 수도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노아웃에 주자 1, 2루.
이건 시그널이 너무 명확해서 오해할 여지가 없다.
“와······. 여기서 또 최거노가 나오네.”
“뭐야? 그러면 노형욱 한 번 더 보여주는 건가?”
“근데 난 진짜 지금 이 장면에서 노형욱의 소중함을 한 번 더 크게 느낀다.”
“응? 벌써? 아직 노형욱 아무것도 안했는데?”
“아니, 노형욱 작년에 홈런만 스물아홉 개 때린 타자잖아. 솔직히 쟤 처음에 110억 할 때 좀 창렬한 느낌이었는데, 지금은 오히려 혜자 같단 말이지? 근데 저런 타자가 뒤에 버티고 있는데도 노아웃 1, 2루에 거른다? 진짜 노형욱 아니었으면 수원이 홈런 두 자리 되는 순간부터 방망이 휘두르는 꼴 아예 못 볼 수도 있었다고 본다.”
“하긴······. 그러면 지금이 좀 중요하겠네. 여기서 노형욱이 최거노 한 번 더 보여주면 되는 각인가?”
그리핀즈의 야수들이 분주하게 움직였다. 보통 만루에서는 전진 수비가 많다. 하지만 그리핀즈의 야수들이 보여주는 움직임은 그와는 크게 달랐다.
내야수 전원이 좌측으로 이동하고 유격수가 외야 잔디를 밟는 위치까지 빠졌다. 삼루수와 이루수 역시 거의 외야 잔디의 경계까지 물러났고 1루와 2루 사이에는 1루수 만이 홀로 덩그러니 섰다.
물론 최근에는 KBO에서도 수비 시프트는 상당히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있긴 했다. 하지만 이건 조금 극단적인 느낌이었다.
[와, 그리핀즈. 오늘도 상당히 극단적인 수비 시프트를 보여주는군요.]
[이거 뭐라고 해야 할까요······. 사실 앞선 이주혁 선수의 경우만 봐도 알 수 있듯이 시프트가 항상 성공하는 건 아니거든요. 어처구니 없는 공을 안타로 만들 때도 있어요. 심지어 만루에서 이런 시프트라니. 이건 너무 리턴에 비해서 리스크가 큰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드네요.]
[사실 최근 그리핀즈의 수비시프트가 좀 심해지긴 했습니다만 당장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수비 시프트가 이 정도까진 아니었던 것 같은데 역시 감독이 메이저 출신으로 바뀐 영향일까요?]
[글쎄요. 최근 3년 그리핀즈가 체질 개선을 상당히 많이 했거든요. 감독을 메이저리그 출신을 앉히는 경우는 종종 있었습니다만 당장을 메이저 프런트 출신. 그러니까 환태평양 스카우트쪽이 아닌 정말 아이비리그를 졸업해서 시니어 디렉터급까지 올라간 인물을 데려온 건 이번이 처음 아니겠습니까?]
[그렇죠. 그야말로 그리핀즈니까 가능한 선택이긴 했습니다.]
[아무튼 최근 3년. 상당한 잡음이 있긴 했습니다만 이번 겨울 감독과 코치를 비롯한 상당수 인원이 미국 쪽 사람들로 교체가 됐단 말이죠. 전 지금 이게 단순히 감독이 바뀐 영향이라기보다는 정말 메이저식의 데이터에 의한 프런트 야구가 진행되고 있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듭니다.]
노형욱이 또 한 번 인상을 썼다.
이렇게 되면 1루 쪽으로 번트를 굴리면 무조건 추가점이라고 봐야 했다.
하지만 이제 1회 말.
점수는 3:0
만루에 4번 타자 노형욱.
당연히 덕아웃은 번트를 지시하지 않았다.
약 80년 전, 지금 노형욱과는 반대로 2, 3루 간이 텅 비어 있었던 테드 윌리엄스에게 어느 기자가 물었다.
“밀어 쳐서 안타를 치면 되는 거 아닙니까?”
테드 윌리엄스는 그 기자의 말에 홈런으로 답을 했다.
그리고 80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테드 윌리엄스의 그 답은 수비 시프트에 대한 가장 올바른 답이었음이 밝혀졌다.
마운드의 제프 캐일런이 와인드업했다.
144km/h의 슬라이더.
-부웅!!!
“스트라잌!!!”
큼지막한 스윙.
제대로 맞으면 무조건 담장을 넘겨버리겠다는 살벌함이 담긴 스윙이었다.
역시 경기 전 미리 받은 데이터처럼 좋은 타자다.
외야로 나가는 공은 비교적 균일하게 뿌려진다.
하지만 내야 쪽에 떨어지는 공은 80% 이상의 확률로 2, 3루 간으로 향한다.
KBO의 투수들은 아직 전통적인 수비를 조금 더 믿는 경향이 있었다. 마치 빅리그의 몇몇 노장들이 그런 것처럼. 하지만 그것은 어쩔 수 없다. 사람은 본래 쉽게 바뀌지 않는 법이니까.
제프 캐일런은 달랐다.
비록 앞선 이주혁의 타구가 시프트가 아니었다면 딱 병살이 되기 좋은 코스였다지만 그럼에도 수비 시프트라는 것이 더 ‘높은’ 확률로 실점을 줄여준다는 것을 그는 머리가 아닌 ‘경험’을 통해 알고 있었다.
미리 정해둔 그대로.
초구 바깥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다음 바깥쪽 높은 코스 아슬아슬하게 걸치는 속구.
-뻐엉!!!
원하던 것보다 조금 더 빠졌다.
괜찮았다. 상정한 이내다.
볼카운트 1-1
세 번째.
몸쪽 낮은 코스 매우 깊숙하게.
볼이 되면 어쩔 수 없다는 각오로.
그리고 ‘전력’을 다해서.
노형욱의 눈이 번쩍였다.
까다롭지만 좋아하는 코스.
아슬아슬했지만 그래도 가능할 것 같은 코스.
그의 방망이가 불을 뿜었다.
-딱!!!
아릿하게 올라오는 손바닥의 통증.
마지막 순간에 보여준 약간의 변화.
투심이었다.
땅볼 타구.
하지만 마지막까지 최대한 잡아당겼던 만큼 힘은 충분했다. 어쩌면 충분히 내야를 뚫어낼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볼 만큼 매우 빠른 땅볼이었다.
그래, 만약 유격수와 이루수가 평소와 같은 위치였다면 말이다.
2, 3루 간에만 무려 세 명의 내야수가 서 있는 상황에서 필연적으로 3루수는 3루쪽으로 크게 치우칠 수밖에 없다.
그리핀즈의 3루수가 빠르게 날아오는 땅볼 타구를 잡아냈다.
3루에서 2루 주자 포스 아웃.
그리고 그대로 2루에서 1루 주자 포스 아웃.
노형욱은 이를 악물고 달렸다.
-뻐엉!!!
“아웃!!”
하지만 소용 없었다.
1루 타자주자 포스아웃.
무사 만루 상황에서 쉽게 보기 힘든 삼중살이 터져나왔다.
“아니, 여기서 땅볼 삼중살을 한다고?”
“미친? 아니, 1, 2루 쪽이 저렇게 텅텅 비었는데 또라인가?”
“그냥 퍼 올리기만 했어도 점수가 나는 건데 땅볼? 땅보올?”
점점 커지는 관중석의 웅성거림.
노형욱의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분노일까? 아니면 부끄러움일까? 확실한 것은 그게 1루까지 전력을 다해 달려서 생긴 홍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1회 말.
마린스의 공격이 삼중살로 끝났다.
***
덕아웃의 분위기가 좀 별로였다.
어쩔 수 없다.
원래 달아오른 적 없는 것보다 달아오르는데 찬물 맞은 게 분위기에는 더 안좋았으니까. 안그래도 내 노히트 이후에 2연패 해서 좀 별로였는데 나름 에이스 내놓고 1회에 3점 내주고 노아웃 만루에서 무득점까지 했으니 여기서 으쌰으쌰하는 분위기를 낼 수 있다면 그거야 말로 미친······.
“자자!! 파이팅!! 아직 8이닝이나 남았슴다!! 깔끔하게 막아보시죠.”
조유진이었다.
참고로 이 녀석 오늘 스타팅도 아니다.
스읍······. 이거 분위기 봐서는 괜히 쿠사리나 먹을 것 같은데.
“그래, 유진이 말이 맞다. 이제 1회 지났다. 깔끔하게 막고 역전 가보자.”
“네!!!”
“새끼, 너 오늘 스타팅도 아니면서 빠이팅 좋다? 그래, 인마. 이런 거 보여줘야 감독님도 대타 쓸 때 좀 생각해보지.”
“경준 선배. 유진이 타율 1할 8푼······.”
“아, 그러냐? 에이, 그래도 뭐 꼭 타격이 그거 따라가나. 포수 뛰면서 하는 거랑 대타랑 또 다르고 컨디션에 따라 다른 거지.”
“하하, 지당하신 말씀이십니다.”
어? 뭐지?
규만 선배와 서경준이 조유진의 편을 들었다.
‘야 뭐냐?’
‘뭐가?’
‘아니, 네가 뜬금없이 발진했는데 규만 선배랑 경준 선배가 도와줬잖아.’
‘아, 그거. 선배들이랑 어제 셋이 밥 먹으면서 이야기 좀 했는데 요즘 우리 덕아웃 분위기 너무 정적이라고 어린 내가 좀 나대보라고 하시더라고.’
‘어? 규만 선배가?’
‘어, 선배님들이 직접 하시기에는 오히려 부담스러울 것 같다고.’
그때 모임에 조유진을 데리고 나갔던 게 효과가 있는 걸까? 그래도 내가 모르는 곳에서도 나름대로 잘해보려는 움직임이 있긴 했구나. 하긴, 규만 선배도 은퇴까지 선언한 마당에 마지막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 마음이 크긴 하겠지.
그 모습을 지켜보던 딜튼이 괜히 쪼유의 등을 한 차례 가볍게 툭 두들기고 마운드로 향했다.
나름대로 마음에 들었다는 표시인 듯싶었다. 물론 그 한 번의 가벼운 터치가 쪼유에게는 강력한 등짝 스매쉬 같이 느껴진 것 같긴 했지만 그건 그리 중요한 일은 아니었다.
중요한 것은 딜튼의 기분이었다.
그래, 분명 딜튼은 약점이 있는 투수였다.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딜튼은 7점대 평자책을 기록하고 3개월 만에 쫒겨 났던 투수였다. 그리고 내가 봤을 때 그 약점 가운데 가장 거대한 것은 바로 그의 멘탈이었다. 하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에서는 그 멘탈이 오히려 득이 될 수도 있었다.
기분이 나빠지면 그에 따라 피칭도 한없이 나빠지지만, 분위기를 타면 실력 이상의 뭔가를 보여준다.
물론 직전 우리의 공격은 완벽한 찬물이었다. 하지만 딜튼은 그럼에도 불구하고 파이팅을 외치는 덕아웃이 제법 마음에 든 것 같았다.
-딱!!
강라온이 몸을 날렸다.
아슬아슬한 한 치의 간격.
쭉 뻗은 그의 팔이 땅볼을 잡아냈다. 반쯤 무너진 자세. 그가 그 자세 그대로 사울에게 공을 토스했다.
사울은 그 공을 글러브로 받지 않았다.
그것은 정말 유려하다는 표현이 어울리는 동작이었다. 가볍게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오는 공을 맨손으로 낚아채 그 낚아채던 기세 그대로 1루를 향해 뿌렸다.
-뻐엉!!!
“아웃!!!”
정확하게 이규만의 미트로 꽂히는 송구.
마운드의 딜튼이 마치 삼진이라도 잡아낸 것처럼 포효했다.
그리고 그 기세 그대로 삼자범퇴.
분명 경기는 3:0으로 지고 있었다.
1회에 득점에 실패한 과정도 썩 좋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느낌이 괜찮았다.
2회 말.
규만 선배가 안타를 쳤다.
야구계에는 ‘이규만 3루타 치는 소리하네.’ 라는 말이 있다.
참고로 규만 선배가 21시즌 2517경기, 10311타석, 8812타수, 2772안타에 451홈런을 치는 동안 쳐낸 3루타는 고작 8개다.
즉 ‘이규만 3루타 치는 소리하네.’라는 말은 그만큼 터무니없는 소리라는 뜻이었다. 하지만 최근 그 말은 한단계 더 업그레이드 되었으니 ‘이규만 2루타 치는 소리하네.’가 바로 그것이었다.
최근 주력이 더 떨어진 규만 선배에게 우익수 앞 땅볼은 너무 흔한 일이었고 좌익수 앞 단타도 너무 당연한 일이 돼버렸다.
근데 그런 규만 선배가 2회 말 선두타자로 올라와서 안타, 그것도 2루타를 쳤다.
이규만 2루타 치는 소리가 현실에 일어난 것이다.
2루에 선 규만 선배가 숨을 헐떡였다.
아마 이주혁이었다면 인사이드파크홈런도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은 상황에 간신히 2루타가 된거긴 했지만 어쨌든 2루타는 2루타였다.
이게 점수로 이어진다면······.
서경준에 사울 로페즈, 최진웅 그리고 이주혁으로 이어지는 하위 타선. 다른 팀에 비해서는 좀 부족해 보였지만 그래도 현재 우리 팀에서 내보낼 수 있는 가장 강력한 하위 타선 구성이다. 솔직히 저기에 조유진이랑 김훈, 정지운, 권혁주 같은 애들이 들어있는 것보다는 확실히 가능성이 보이는 타선이기도 했다.
-딱!!!
서경준의 외야 플라이.
그리고 이어지는 사울 로페즈의 2루타로 원아웃 주자 2, 3루.
고환 붓기와 내전근 파열로 6주 만에 돌아온 최진웅이 타석에 들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