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44화 (144/305)

144화. 강속구(6)

7회 초.

최수원이 선두타자로 나왔다.

브레이브스의 바뀐 투수는 강희찬. 서른다섯의 노장으로 젊었을 적에는 제법 잘 나갔던 적도 있었지만, 작년에 방출된 이후 브레이브스가 연봉 7천에 데리고 온 투수로 제법 쏠쏠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후······.’

그는 젊었을 적에 전성기의 이규만도 몇 번이나 상대해봤었다.

지금은 그냥 병살이나 치고 우익수 앞 땅볼이나 만드는 돼지지만 불과 10년 전의 이규만은 그야말로 언터쳐블. 아니, 대체 왜 메이저 안 가고 KBO에 남아서 투수들 괴롭게 만드냐. 라는 평가를 받던 타자였다.

하지만 당시 이규만을 상대하는 것과 지금 최수원을 상대하는 것 중에서 뭐가 더 살 떨리는가를 묻는다면 단연코 지금이다. 그때는 그래도 어쩌면 자신이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젊은 혈기라도 있었는데 지금은 그게 아니라는 걸 아는 중년의 현실성만이 남았기 때문이다.

삼진을 노리지 않았다.

최대한 까다롭게.

볼넷을 줘도 상관 없다는 너그러운 마음으로.

그냥 최대한 존의 구석만을 노려가면서 공을 던진다.

전성기에도 최고 147km/h 한 번 던져본 게 전부였으니 딱히 강속구 투수는 아니었다. 시즌 평속만 따지자면 142km/h대가 최고 기록이다. 현재 이를 악물고 던지면 144km/h정도. 그나마도 1이닝 던지고 내려오는 불펜이니까 가능한 구속이다.

대신 쓸데없는 잔재주와 레퍼토리들은 늘었다. 그럭저럭 써먹을 만한 구종이 다섯 가지다.

물론 그 가운데 삼진을 잡아낼 만한 결정구는 없었지만.

괜찮다.

16년의 세월은 그에게 타구가 안타가 될 확률은 5할이 넘지 않는다는 것. 그리고 타구를 안타가 아닌 범타로 만드는 데 투수의 역량이 3할이나 된다는 것을 알려주었다.

135km/h의 꽉 찬 커터.

-딱!!!

최수원이 시원하게 방망이를 잡아당겼다.

“아······.”

원래 존에서 공 하나 정도 빼려던 게 조금 덜 빠져서 3/4정도 빠진 커터인데 이걸 저렇게 잡아당긴다고?

와······. 근데 또 그게 외야로 쭉쭉 날아가네?

그래서 그냥 웃었다.

원래 힘들 때 웃는 게 일류인 법이다. 어차피 저 잘난 예비 메이저리거 학폭이도 홈런을 두 방이나 맞았는데 뭐, 칠천짜리 투수가 홈런 한 방 맞는 게 무슨 대수랴.

브레이브스의 좌익수가 달렸다.

아니, 사실 그렇게 많이 달리지는 않았다. 애초에 담장에 상당히 가까운 위치로 후진 수비를 하고 있는 상황이었으니까.

담장 바로 앞 워닝 트랙.

그가 팔을 쭉 뻗었다.

[담장 앞 뜬공 아웃!! 최수원의 타구가 담장 앞에서 잡혔습니다.]

[많이 빠지는 공이기는 했습니다만 사실 최수원 선수 같은 경우 저 코스도 종종 담장을 넘겼었거든요. 그런데 강희찬 선수 맞는 순간 좀 웃는 것 같던데. 외야 플라이를 의도한 것 아닌가 싶네요.]

[아, 그러니까 평소에도 저 정도 빠지는 공에는 배트가 나온다는 판단하에 의도를 했다. 뭐 그런 말씀이신가요?]

[네, 아무래도 강희찬 선수. 최수원 선수에 대해 연구를 상당히 많이 하고 나온 게 아닌가 싶습니다.]

강희찬이 생각했다.

죽다 살았다.

꼼짝없이 넘어가는 줄 알았는데.

하긴, 벌써 7회 초다. 타자로는 네 타석. 투수로는 6이닝을 던졌다. 손아귀에 힘이 좀 풀릴 때도 됐다.

아······. 근데 잠깐만. 뭐가 좀 이상한데? 근데 그게 뭔지를 모르겠네······.

최수원이 살짝 아쉬운 표정으로 덕아웃에 돌아갔다.

점수는 여전히 7:0

그리고 그러한 이상함을 느낀 것은 강희찬만이 아니었다.

“야, 근데 이번 타석까지 최수원 선 거 보면 투수교체 없는 거겠지?”

“글쎄······. 6이닝이면 슬슬 내려갈 때 된 거 아닌가? 원래 5.1이닝 5.2이닝 던졌었잖아. 신인이니까 투구 수 관리도 해줘야 하고. 지금 타구 보니까 힘도 좀 빠진 것 같은데? 게다가 얘 지난 경기 때도 투수 강판 안 시키고 외야수로 돌려서 경기 끝까지 세워놨었잖아. 오늘도 그런 거 아닐까?”

“그런가? 근데 뭔가 좀 찝찝한데······.”

오늘 비록 개똥 같은 시야 제한석에 앉은 덕분에 타석을 보려면 고개를 어디까지 뻗어야 했고, 조금만 오른쪽으로 붙어도 마운드까지 절반쯤 가렸지만, 그 대신이랄까? 외야 쪽 전광판 하나만큼은 시원하게 아주 잘 보였다.

“어······. 야, 잠깐만······. H가 뭐였지?”

“H? 갑자기 왠 H?”

“아니, 전광판에 H있잖아.”

“그거야 당연히 Hit. 안타지. 넌 야구를 몇 년을 보는데 그걸 아직도 모르냐.”

“그렇지? H면 안타 맞지?”

“대체 뭐 때문에 그러는데?”

R H E

7 8 0

0 0 1

어······?

잠깐만······. 브레이브스 아직 안타가 0개다?

그러니까 지금······.

“노히······.”

“이 미친 놈아!! 쉿!! 부정 탈라.”

“아······.”

맙소사.

너무 압도적인 홈런쇼를 감상하느라 잊어버리고 말았다. 지금 홈런을 두 방이나 터트린 저 놈이 오늘 마운드에서도 아주 패기 넘치는 피칭을 이어가고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그 패기 넘치는 피칭의 결과가 6이닝째 노히트로 연결되고 있었다는 것을 말이다.

7회 초.

강희찬이 진땀을 빼가며 간신히 무실점으로 이닝을 마무리지었다.

그리고 마운드에 또 다시 최수원이 올라왔다.

***

6이닝 노 히트.

물론 AA급 리그다.

하지만 설사 AA급 리그라고 해도, 아니 AA급 리그이기에 고작 열아홉의 소년이 더 하위리그에서 적응도 없이 곧바로 리그 에이스급 피칭을 보여준다는 것에 놀랄 수밖에 없다.

타석에서 보여주는 모습이 너무 압도적이라 사실 묻히는 감이 있긴 했다.

김진규 역시 최수원이 조금 전 타석에서 외야 플라이를 날릴 때까지만 하더라도 선수를 판단해야한다는 본분을 잊고 그냥 대체 어디까지 방망이를 휘두를 수 있나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경기를 지켜봤으니까.

하지만 냉정하게 봤을 때 이제 막 드래프트 된 고졸 선수가 AA에서 이만한 피칭을 보여준다? 그건 냉정하게 볼 수 있는 것 자체가 미친놈이다.

언론이고 뭐고 미래의 사이 영 탄생.

명전급 투수의 발견.

향후 10년간 팀을 이끌어갈 인재.

온갖 수식어가 덕지덕지 달라붙을 만하다.

‘아니지. 아니야. 그래도 KBO는 투고타저니까······.’

그래, 작년을 기준으로 KBO리그는 투고타저로 유명한 이스턴보다 리그 평자책이 0.4점이나 낮게 잡힌 리그다. 근데 만약에 이스턴 리그에서 이제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19살짜리 투수가 세 경기 만에 6이닝 노히트를 하고 있다면?

“향후 10년간 팀을 이끌어갈 투수 유망주?”

고개를 몇차례 좌우로 저은 김진규가 오늘 경기를 다시 한 번 찬찬히 복기했다.

오늘 최수원의 피칭은 어떠했는가.

그는 최수원이 출장했던 모든 경기를 직관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가 등판했던 지난 두 경기는 모두 현장을 찾아가 직관했었다.

그렇기에 알 수 있었다.

오늘 최수원의 피칭이 이전과 조금 다른 형태였다는 것을.

7회 말 마운드를 오르는 시점에서 지금까지 투구 수는 고작 76개.

지난 두 경기에서 5.1이닝, 5.2이닝을 던졌을 때 각각 투구 수가 90개에 육박했다. 사실 그것만 하더라도 특별히 많은 투구 수는 아니다. 헌데 0.1이닝을 더 던졌는데 투구 수는 14개가 더 적다?

단순히 산술적으로 본다면 남은 3이닝을 다 던진다고 해도 투구 수는 114개.

‘아니지, 아니야. 아무리 그래도 열아홉짜리 유망주한테 투구 수 114개라니······.’

2010년대 이후 메이저리그에 완투, 완봉을 선발의 미덕으로 꼽는 팀은 사라졌다.

물론 지금은 노히터 중이다. 충분히 대기록이다. 하지만 기록도 중요하지만, 저만한 선수의 미래는 더더욱 중요하다. 그것도 고작 이런 마이너 경기에서······.

‘잠깐만, 근데 여긴 마이너리그가 아니잖아?’

***

아쉬웠다.

넘어갈 것 같았는데, 마지막에 힘이 좀 부족했다.

사실 투수를 하면 가장 먼저 떨어지는 건 악력이다. 근데 이 악력이라는 것은 타격에서도 상당히 중요하다.

조금 전 타석에서 내가 친 공은 사실 완벽하게 정타라고 보긴 힘들었다. 바깥으로 빠지는 공이었고 덕분에 오른손에 상당한 울림이 왔다. 이때 끝까지 공을 잡아 당기는 게 매우 중요한데 바로 직전까지 공을 던지느라 손아귀에 힘이 떨어진 게 좀 문제가 됐다.

오른손을 몇 차례 쥐락펴락했다.

다행인 점은 내가 타석을 마무리하고 우리 타자가 번개불에 콩볶아 먹는 속도로 아웃카운트 두 개 적립하는 게 아니었다는 점이다. 그래도 나름 치열하게 승부했고 잔루 2루를 남겨 놓고 이닝이 종료됐다.

한 6분? 7분? 조금 더 쉬고 싶다는 마음은 있었지만 어쨌거나 쉬긴 쉬었다.

포수 마스크를 뒤집어 쓴 조유진이 나에게 공을 건냈다.

속구로 가볍게 세 개를 던졌다.

몇 분 쉬었지만, 감각은 여전히 예리하게 살아 있었다.

브레이브스의 덕아웃에서 1번 타자가 방망이를 쥐고 걸어 나왔다.

벌써 세 번째 타순이었다. 어쨌거나 프로팀의 1번 타자. 그것도 가을 야구를 지속적으로 노리는 팀의 선두타자다. 슬슬 내 공에 어느 정도 적응했을 것이다.

투구 패턴을 좀 바꿔볼까?

조유진이 고개를 저었다.

그리고 엄지 하나를 치켜들더니 미트를 팡팡 치고 쭉 내민다.

확실히 저 녀석은 손에 들린 것이 방망이냐, 미트냐에 따라 사람 자체가 확 달라지는 느낌이다. 방망이 들었을 때는 그렇게 신뢰가 안 가는 녀석이 미트만 손에 쥐면 참 든든하다.

심지어 얼굴도 포수마스크를 써서 그런지 뭔가 잘생겨 보인다. 나중에 소개팅 같은 거 나갈 때 저러고 나가라고 추천해 봐야겠다.

그래.

복잡한 생각을 하지 말자. 내 공은 상당히 좋다. 아까 우리 학폭 조창혁 선생도 보여주지 않았던가. 99마일 정도 던지는 투수는 그냥 머리 비우고 팡팡 던지면 된다는 것을. 물론 그러다가 홈런 두들겨 맞고 침몰하긴 했지만 그건 상대가 메이저 MVP급 타자인 나이기 때문이지 KBO 레벨에서는 저 정도면 충분히 리그 에이스급 투수로 군림할 수 있다는 뜻이다.

게다가 쟤는 기껏해야 99마일짜리 투수고 나는 무려 100마일짜리 투수 아니던가. 아, 물론 엄밀히 말하면 나도 아직 161km/h까진 0.9km/h 부족했으니 100마일 투수는 아니긴 했지만······.

머리를 몇 차례 휘휘 저어 잡생각을 떨쳐냈다.

공을 강하게 움켜쥐고 몸에 완벽하게 박아 넣은 그대로 팔을 휘둘렀다.

아, 근데 순간 손에서 공이 좀 빠졌다.

중앙으로 많이 몰린 156.1km/h의 속구.

타자가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깔끔한 초구 타격.

코스가 괜찮았다.

이거 설마 중전 안타인가?

이주혁이 달렸다.

오늘도 어느 기사에 달렸던 댓글처럼 5타수 5안타 5홈런을 하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그 뜀박질만큼은 저 세렝게티 초원을 누비는 얼룩말, 아니 치타 같았다.

구린 타구 판단.

그리고 그것을 커버하는 압도적인 주력.

분명 이주혁은 자신의 머리 너머로 날아가는 타구가 아닌 앞으로 떨어지는 타구에 한정 짓는다면 메이저급. 아니 메이저에서도 최상위로 분류될만한 수비를 보여줄 능력이 있는 남자였다.

“아웃!!”

이주혁을 향해서 엄지를 치켜주었다.

괜히 머쓱하게 웃으며 자기 자리로 돌아간다.

음······.

초구에 안타성 타구를 한 대 얻어맞고 나니까 괜히 좀 위축이 되는 느낌이다. 그리고 그 타이밍에 또 타자는 기가 막히게 찬민이 형이 올라왔다. 브레이브스에서 사실상 가장 강력한 타자다.

-펑펑

쪼유가 이번에는 엄지 한 번 브이 한 번 그리고 자신의 미트를 두들겼다.

괜찮겠지?

그래.

복잡한 생각하지 말자. 내 공은 엄청 좋다. 진짜 좋다. 100마일짜리 투수는 원래 머리 좀 비우고 펑펑 던지면 된다. 게다가 옛날에 찬민이 형 100마일짜리 공은 그거 보통 사람이 칠 수 있는 공이 아니라고 분명히 이야기했었다.

부상 당하기 전에 보통 사람이 아니던 시절이면 몰라도, 햄스트링 나간 다음에는 자기도 치기 힘들다면서 말이다.

전신의 힘을 끌어냈다.

-으드득

이를 악물었다.

그야말로 전력을 다한 피칭.

그리하여 내 손 끝에서 진짜 강속구가 날았다.

161.1km/h

100마일의 벽이 깨지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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