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42화 (142/305)

142화. 강속구(4)

에휴······.

조유진 저 멍청이는 뭐가 좋다고 저렇게 헤실헤실 웃는 건지.

쪼유는 2군에서 코치의 지도 아래 열심히 훈련했다. 프로 코치의 의견이었으니 정말 열심히 노력 했을 거다. 하지만 그건 사실상 원래의 거지 같은 폼으로 돌아가는 과정이었다. 쪼유는 1루 강박증이 있어서 녀석의 포텐셜을 완전히 다 뽑아먹을 수 있는 폼으로 타격하면 안되는 놈이기 때문이다.

아무튼 지금 녀석의 상태는 상당히 어정쩡하다.

시범경기 기간을 거치면서 나의 조언을 다시 받아들였고 이전의 폼을 되찾으려고 하고 있었지만, 사람의 습관 혹은 버릇이라는 건 참 무섭다.

반복 숙달이라는 것은 결국 그 동작을 완벽하게 몸에 익힌다는 뜻이다. 야구의 동작들이 그렇다. 특히 타격이나 피칭 같은 부분은 한 번 몸에 익힌 것을 수정하기란 보통 힘든 일이 아니다.

다행히 쪼유는 그 웃긴 폼을 1년이나 박아넣었던 만큼 의식적으로 다시 그 폼을 사용할 수는 있었지만, 문제는 지금처럼 긴장한 순간에는 그게 또 틀어진다.

결국 이건 본인이 더 반복 숙달하고 몸에 박아 넣는 것밖에는 답이 없다. 어쨌거나 녀석이 더 오래 해온 폼은 답이 없는 삼단분리 타법이고 따라서 생각 없이 휘두르면 그쪽의 버릇이 나올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딱!!!

초구.

조창혁의 157.1km/h 속구에 강라온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아무래도 빠른 공에 타이밍을 계속 맞춰온 것이 효과를 본 모양이다.

하지만 그럼에도 방망이가 늦었다. 배트 스피드의 문제라기 보다는 조창혁의 투구 타이밍이 조금 더 빨랐던 탓이다. 게다가 조창혁의 구위가 워낙에 좋았던지라 의식적으로 조금 높게 방망이를 휘두른 듯 싶었는데 그게 너무 높았다.

2, 3루 방면.

유격수인 창민이 형이 빠르게 달려 나왔다.

쪼유는 이미 미친 듯한 속도로 2루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와, 순간 무슨 외야에서 혼자 달리기 시합하는 이주혁을 보는 것 같았다. 게다가 강라온의 속도 역시 범상치 않았다.

햄스트링을 다치기 전의 창민이 형이었다면 벌써 공을 던졌을 타이밍.

하지만 미묘하게 출발이 늦었다. 한 박자 늦게 공을 받은 그가 한발 늦게 글러브에서 공을 뽑았다. 물흐르듯이 부드러운 동작. 창민 형이 파탄 없이 이루수를 향해 공을 던졌다.

그와 동시에 쪼유의 밴트레그 슬라이딩.

2루수가 포구와 거의 동시에 살짝 몸을 띄웠다. 그리고 그대로 일루로 송구.

-뻐엉!!

그야말로 간발의 차이.

하지만 분명 공이 조금 더 빨랐다.

“아웃!!!”

[더블 아웃!! 더블 아웃입니다. 정창민의 부드러운 수비. 3회 초. 0:2 무사 1루 상황을 2사 주자 없음으로 돌려 놓습니다.]

응?

쪼유가 이쪽을 향해 뭐라뭐라 이야기하는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설마 자기가 세이프라는 건가?

[아, 2루 주자 조유진 선수. 지금 말하는 것을 보니 공을 받기 전에 2루에서 발을 뗏다. 뭐 그런 이야기를 하는 것 같습니다.]

[마린스 덕아웃, 지금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는군요.]

몇몇 오래된 야구 팬들은 아직도 착각하는 부분이 있는데 네이버 후드 플레이. 그러니까 2루에서 유격수나 2루수가 정확하게 베이스를 밟지 않거나, 조금 일찍 베이스에서 발을 떼더라도 암묵적으로 아웃으로 처리해주는 플레이가 아직도 가능하다고 믿는 부분이다.

원래 이 네이버 후드 플레이라는 것 자체가 1루 주자가 좀 공격적인 주루 플레이를 하기 때문에 생긴 암묵적인 규칙이었는데 21세기 들어와서 그런 공격적인 주루 자체가 규칙으로 막혔다. 당연히 네이버 후드 플레이도 사라짐이 마땅했고, MLB 사무국도 그렇고 KBO에서도 2루에 비디오 판독을 허가함으로써 완벽하게 사라졌다.

[아,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거의 동시인 것 같습니다만 공이 도착하기 직전에 발을 뗐네요.]

[이렇게 되면 1사에 주자 2루. 타석에는 2번 타자 이정훈 선수가 올라옵니다.]

다행이었다.

우리 팀의 타자들이 방망이에 좀 문제가 있더라도 죄다 무슨 세렝게티를 달리는 얼룩말들처럼 뜀박질이라도 잘하는 덕분에 더블아웃이 진루타로 끝났다. 아니, 근데 진짜 쪼유 쟤는 매일 쪼그려 앉아야 하는 포수가 왜 무릎이 저렇게 멀쩡한거지?

대기타석으로 방망이를 들고 걸어 나가는데 정훈이 형이 말을 걸어왔다.

“나 오늘 컨디션 좋다.”

“다행일까요?”

“다행이냐니? 당연히 다행이지. 다행 아닐 건 또 뭐냐?”

“아니, 첫 타석에서 초구 내야 뜬공으로 물러나셨잖아요. 컨디션이 별로면 그래도 컨디션이 별로라서 그런건데 컨디션도 좋은데 그러신거면 좀······.”

“이 자식이? 잘한다, 잘한다 했더니 선을 아주 쎄게 넘네? 너 내가 책임지고 나갈 거니까 나 꼭 들여보내라. 못 들여보내기만 해봐. 아주.”

이정훈이 콧김을 씩씩 내뿜으며 타석으로 올라갔다.

의도한 대로다.

평온하고 침착하게 타석에 섰을 때 잘 치는 타자가 있는 반면에 스스로를 좀 몰아 넣어야 성적이 나오는 타입이있다. 내가 몇 달을 지켜본 결과 이정훈은 후자다. 전날 술을 그렇게 마시고 오늘 못 치면 술 마셨다고 각종 비난에 시달릴게 두려워 안타를 쳤다는 이야기를 뻔뻔하게 하는 것 부터가 보통 정신머리가 아니다.

-뻐엉!!

초구 빠지는 공을 예리하게 골라냈다.

아무 공이나 안 휘두르는 걸 보니 비록 이전 타석에서는 초구 내야 뜬공이었지만 확실히 그의 이야기처럼 컨디션이 좀 좋긴 한 모양이다.

두 번째.

-부웅!!

“스트라잌!!”

몸쪽으로 크게 파고드는 슬라이더.

KBO는 슬라이더를 던지는 투수의 비율이 굉장히 높다. 아무래도 코치진 자체가 은퇴한 투수들이고 결국 자기들이 현역 시절에 잘 써먹었던 구종을 전수하는 경향이 있는데 그게 슬라이더인 탓이다. 뭐, 덕분에 슬라이더가 맞지 않은 선수들도 죄다 슬라이더를 던지는데 그래서인지 슬라이더 그립으로 던지는데 종으로 훅 떨어트리는 변태도 있고 진짜 체인지업처럼 구속을 한 15마일씩 떨어트리는 투수도 있다.

조창혁의 경우 좀 정통파적인 슬라이더를 구사하는데, 얘도 정상은 아닌 게 보통 같은 손 타자를 상대로 바깥으로 빠지는 슬라이더가 정석인데, 얘는 다른 손 타자의 몸쪽으로 공을 집어 넣는걸 주저하지 않는다. 그만큼 슬라이더의 제구에 자신이 있다는 이야기다.

세 번째.

156.8km/h의 낮게 깔려 들어오는 속구.

나라면 무조건 방망이를 휘둘렀다. 하지만 이정훈의 선택은 조금 달랐다. 현명한 선택이었다. 그의 스윙 궤적 자체가 이런 공을 제대로 공략하기에는 그리 좋은 스윙이 아니었다.

-뻐엉!!

아슬아슬한 코스.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자세를 가다듬는 이정훈의 표정이 좋아 보인다.

볼카운트 2-1.

타자에게 제법 좋은 카운트다.

상황이 이렇게 되면 투수는 선택을 해야 한다. 볼넷을 각오하더라도 까다로운 공을 계속 던져 볼 것인지. 아니면 그냥 윽박지를 것인지.

그리고 그것은 투수 본인의 공. 그리고 타석에 선 타자가 누구냐에 따라서 달라진다.

조창혁이라면 당연히 후자를 선택할 것이다. 하물며 지금 타석에 선 이정훈이 연 평균 홈런이 다섯 개가 채 되지 않는 다는 점을 고려한다면 더더욱.

그리고 이정훈 역시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부웅!!

“스트라잌!!”

예상을 했음에도 불구하고 바깥쪽으로 살짝 걸치는 158.9km/h의 속구가 이정훈의 방망이를 헛돌게 했다. 그야말로 강속구의 위력이다. 나였다면 담장을 넘겼을 것 같지만, 세상에 나같은 타자는 몇 안 되니 마운드에서 저런 똥배짱 부리는 것은 좀 보고 배울 필요가 있다.

그리고 다섯 번째.

2-2의 상황.

아직 공 하나의 여유가 있는 상황이지만 내가 생각하는 조창혁이라면 충분히 힘으로 윽박지를 수 있다. 물론 후속 타자가 나라는 점을 생각하면 장작을 하나 더 쌓는 것이 두려울 테니 하나 정도 뺄 수도 있긴 하다.

과연 녀석의 선택은 무엇일까?

-뻐엉!!!

이번에는 이정훈의 운이 좋았다. 내가 보기엔 스트라이크인데 구심이 스트라이크콜을 하지 않았다. 그래서일까? 조창혁의 표정이 영 좋지 않았다.

여섯 번째.

풀카운트에서 몸쪽 공을 밀어쳐 파울.

그리고 일곱 번째.

살짝 중앙으로 몰린 공.

-딱!!!

기세를 탄 이정훈이 그 공을 두들겼다. 그리 빠른 타구는 아니었지만, 위치가 좋았다. 1, 2루 간을 꿰뚫는 안타. 쪼유가 빠르게 달렸다. 홈까지 가능할까? 어쩌면 가능할지도. 하지만 3루 코치가 팔을 휘두르지 않았다. 이미 2점을 앞서는 상황이기도 했고 아직 원아웃에 후속 타자가 나와 노형욱인 상황에서 굳이 위험한 승부를 하지 않겠다는 의미인 것 같았다.

1루에 선 이정훈이 거들먹거리는 표정으로 나를 뚫어지게 바라봤다.

뭐, 판정에서 좀 이득을 보긴 했지만 어쨌거나 7구까지 가는 끈질긴 집중력은 본인이 말했던 좋은 컨디션을 증명하기 충분했다.

브레이브스의 덕아웃이 잠시 웅성였다.

아마 고의사구를 할지 승부를 보게 할지를 의논하는 과정일 것이다.

조창혁은 이런 상황 자체가 매우 마음에 들지 않을 것이다.

어쨌거나 자신은 메이저 진출이 확정이나 다름 없는 투수였고, 나는 데뷔한 지 고작 한 달밖에 안 된 신인이었으니까.

하지만 어쩌겠는가. 그 신인이 역대 KBO의 기록을 줄줄이 갈아치우고 있는 대단한 타자인 것을.

개인적으로 확률은 7:3 정도라고 봤다.

왜 10:0이 아니냐면 그래도 내 뒤에 타자가 노형욱이기 때문이었다. 바로 직전 이닝에서 백투백홈런을 때렸고 최근 타격감도 나쁘지 않다.

무엇보다 조창혁의 자존심도 걸려 있었으니······.

[아, 브레이브스의 덕아웃. 여기서 고의 사구를 선택하는군요. 최수원이 1루로 걸어 나갑니다. 이제 원아웃에 만루. 타석에 노형욱 선수가 들어옵니다.]

[최근 최수원 선수의 타격 페이스가 워낙에 무서웠던지라 아주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래도 마운드의 투수가 에이스 조창혁임을 생각하면······. 과연 브레이브스의 이 선택이 어떤 결과로 돌아올지 궁금해지는 순간이로군요.]

***

“어? 뭐야? 여기서 고의사구로 거른다고? 감독이 똑똑하네.”

“에이, 그건 아니지. 아무리 최수원이라도 그렇지. 명색의 노형욱인데.”

“노형욱이 뭐 어때서. 솔직히 지금 2:0인데 확정 5:0되냐, 좀 높은 확률로 점수 몇 점 더주냐 고르라면 후자 아니겠냐?”

“야, 아무리 수원이라도 투수가 조창혁인데 확정 홈런은 좀······. 게다가 형욱이도 1회에 홈런 쳤잖아.”

경기를 지켜보던 팬들이 수군댔다.

그리고 그것은 VIP룸에서 경기를 관전중이던 은진과 세희도 마찬가지였다.

“이게 그 고의사구인가 그거죠? 무서운 타자 자동으로 내보내는 거.”

“어.”

“오늘 투수도 굉장히 잘 던지는 투수라더니. 역시 수원오빠한테는 안되나보네. 근데 언니 나 궁금한 게 있어요.”

“뭔데?”

“이게 왜 고의사구에요? 고의로 죽은 공? 그냥 공 던지지도 않았는데 투수가 죽었다. 뭐 그런 뜻이에요?”

“아니, 죽었다는 건 아니고. 애초에 그 사가 숫자를 뜻하는 걸 거야. 볼넷을 고의로 내주는건데. 지금은 공을 굳이 안 던지는데 옜날에는 이것도 투수가 공을 네 개 꼭 던졌었거든.”

“아, 그렇구나.”

노형욱이 타석에 들어왔다.

피가 거꾸로 솟는 기분이었다.

솔직히 최수원이 요즘 가장 뜨거운 타자인 것은 인정한다. 하지만 이성적으로 인정할 수 있는 것과 감정적으로 화가 나는 것은 또 다른 이야기다.

그리고 화가 난 것은 마운드의 조창혁 역시 마찬가지였다.

공을 쥔 손에 힘이 꾹 들어갔다.

기본적으로 조창혁은 마운드 위에서는 일부러라도 더 화를 내는 타입의 투수다. 본래 불꽃처럼 윽박지르는 강속구에는 그런 것이 더 어울리는 법이니까.

오늘 경기장을 찾은 스카우트들이 이것을 대체 어떻게 평가할까?

신인에게 쫄아버린 에이스 투수?

그가 1루에서 세 걸음을 걸어 나온 애송이를 한번 강하게 노려봤다. 열아홉 살이라고 했던가? 그야말로 핏덩이 그 자체다.

그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어차피 도루도 불가능한 상황이다. 던질 수 있는 가장 강한공으로 윽박질러 이닝을 끝내겠다.

3회 초.

슬슬 몸이 풀려가는 시기.

꿈의 100마일에서 딱 0.7마일 부족한 99.3마일.

159.8km/h의 강속구가 그의 손을 떠났다.

커맨드는 그리 좋지 못했다.

하지만 앞서 봤듯이 160에 육박하는 공은 그 자체로 강력하다.

그래, 만약 타석에 선 타자가 이제 절정기를 맞이하는 컨디션 최고조의 노형욱이 아니었다면 말이다.

-딱!!!

마운드의 투수가 분노를 힘으로 치환했던 것처럼 타석의 타자 역시 분노를 힘으로 치환했다. 그리하여 살짝 밀린 배트는 그 거대한 힘이 충분하게 메워주었다.

그리하여 노형욱의 연타석 홈런이 고척돔 외야의 1층 중앙을 두들겼다.

조창혁의 얼굴이 시퍼렇게 질렸다. 그의 피칭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조창혁 역시 에이스는 에이스였다. 이규만에서 시작되는 마린스의 타선을 안타 하나로 막아내며 꿋꿋하게 3회를 마무리 지었다.

그리하여 점수는 무려 6:0.

이제는 정말 몇 점을 내줘도 상관이 없을 것 같든 든든함 속에서 최수원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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