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0화. 강속구(2)
“세희야, 여기 너무 비싼 곳 같은데?”
“어휴, 언니. 어차피 나도 아는 아저씨한테 공짜로 얻은 거야.”
“아니, 아무리 그래도. 이거 그 VIP석인가 그거 아니야?”
“그렇기는 한데 그 아저씨 말이 어차피 한국은 표 값이 싸서 괜찮데. 그리고 우리도 이제 얼굴 좀 알려졌는데 막 노출된 곳은 좀 그렇잖아.”
고척 스카이돔의 VIP석인 스카이룸.
단 둘이 사용하기에는 너무 넓은 공간이었다. 당연하다. 실제로 정원은 아홉 명인 공간이었으니까.
“그나저나 언니 동창? 저 오빠 되게 멋진데? 저만하면 얼굴도 잘생겼고.”
“세희 너 어제 고창영이랑 방송했잖아. 대한민국에서 제일 잘생긴 남자랑 방송해놓고 쟤가 잘생기긴 뭐가 잘생겼다고 그래.”
“에이, 창영 오빠는 너무 잘생겨서 오히려 부담스럽지. 게다가 그 오빠는 풀메이크업에 코디까지 완전 완료 한 거잖아. 근데 저 오빠는 맨얼굴이고. 게다가 피지컬은 저 오빠가 더 멋진데? 야구 선수는 좀 더 크고 뚱뚱할 줄 알았는데 저 오빠는 되게 날씬하네.”
“아냐, 세희 니가 멀리서봐서 그래. 가까이서 보면 엄청 두꺼워.”
“어휴, 언니, 알았어. 알았어. 안 그래도 언니 남자친구 안 뺏어 가니까 너무 그러지 마.”
“남자친구 아니라고!!”
“아, 맞다. 실수, 실수. 동창이었지? 그냥 동창. 매일 매일 뉴스 체크 하는.”
“야!!!”
***
조창혁의 얼굴이 크게 일그러졌다.
빌어먹을······.
무엇보다 짜증이 나는 것은 홈런을 날리고 설렁설렁 뛰는 저 건방진 모습이다. 아니, 이제 막 데뷔한 새끼가 어디서 무슨 20년 차 선수쯤 되는 것처럼 뛰는 건지. 홈런을 쳤으면 빠릿하게 한바퀴 돌고 들어갈 것이지.
얼씨구? 아예 홈에서 3루 내야 쪽 원정팀 응원단에게 손까지 흔든다. 완전 미친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다. 감히 160을 던지는 투수를 도발하다니. 대가리 깨지는 게 두렵지도 않은······.
‘아니, 잠깐만. 저 새끼. 오늘 선발 투수지.’
그것도 진짜 160이 넘는 공을 던지는······.
역시 답은 그냥 인맥으로 조지는 수밖에 없는건가? 조창혁이 마린스에 녀석을 갈굴만한 동기, 혹은 후배들이 누가 있는지를 고민했다. 그리고 그사이 타석에 노형욱이 올라왔다.
작년 마린스에서 가장 무서웠던 타자.
이번 시즌의 경우 최수원에게 조금 묻힌 감도 있고 물론 3할에 육박하는 타율을 뽐내던 작년만큼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여전히 0.279/0.341/0.499의 성적을 기록 중이다.
초구 슬라이더.
노형욱의 경우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르는 경향이 있기에 작년에 제법 재미를 봤던 공이다.
-뻐엉!!
하지만 무슨 일인지 방망이가 나오지 않았다.
볼카운트 1-0
참아?
그럼 어디 하나 더.
-뻐엉!!
그리고 볼카운트 2-0
괜찮았다.
도망가는 투수는 이런 상황에서 할 것이 없지만 조창혁은 그런 투수가 아니었으니까.
그에게는 최고 160에 달하는 속구가 있었으니까.
바깥쪽 꽉찬 코스.
시작 지점은 방금 전 슬라이더와 비슷하게.
156.4.km/h의 강속구가 그의 손을 떠났다.
물론 투수가 던진 공이란 바깥쪽 꽉 찬 코스를 노렸다고 항상 거기에 들어갈 수는 없다. 이번 역시 마찬가지였다. 약간 안쪽으로 몰렸다. 하지만 그 정도는 156.4km/h라는 속도가 보통 다 해결해준다. 그래, 보통은.
-딱!!
노형욱의 방망이가 그 공을 후려갈겼다.
앞선 타석.
최수원의 방망이가 흘러나왔던 것과 비슷한 타이밍으로.
높게 뜬 타구가 쭉쭉 뻗어나갔다.
최수원의 경우 각도가 제법 높았다. 하지만 노형욱은 그보다 조금 낮았다. 당연히 천장에 닿기에는 한 없이 부족했다. 하지만 고척돔이라고 해서 항상 천장에 공이 틀어박혀야만 홈런이 되는 것은 아니었다.
외야 펜스를 아주 살짝 넘어가는 홈런.
[홈런!! 홈런입니다!! 마린스 백투백 홈런!!]
[1회 초, 마린스가 투아웃 상황에서 백투백 홈런으로 조창혁 선수에게 2점을 뺏어옵니다.]
[노형욱 이걸로 시즌 두 번째 홈런입니다.]
[사실 12경기 만에 2호 홈런이면 평소 노형욱 선수 페이스와 크게 차이 나는 것도 아닐뿐더러 리그에서 그보다 많은 홈런을 친 선수도 고작 여섯뿐입니다. 근데 팀에 말도 안 되는 선수가 하나 있어서 그런지 이게 참 적어 보이네요.]
[점수는 2:0. 타석에 이규만 선수가 올라옵니다.]
백투백 홈런.
올해를 끝으로 포스팅으로 미국에 진출하기로 팀과 약속이 끝난 조창혁에게 1회 초 백투백은 악몽과도 같았다. 당장 지금 고척에 모인 MLB의 스카우트가 대체 몇 명일까?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어지는 타자가 이규만이었다는 점 정도였다.
157km/h를 오가는 속구가 연달아 들어갔다.
-부웅!!
-부웅!!!
그리고 마지막 슬라이더.
-부웅!!!
“스트라잌!! 아웃!!”
깔끔한 삼구삼진.
막 데뷔했을 때라면 또 몰라도 지금 이빨이 다 빠져버린 이규만이라면 조창혁과 같은 강속구 투수에게는 너무 쉽다.
공수교대.
최수원이 마운드 위로 올라왔다.
***
“흐음······.”
메츠의 한국 스카우트 김진규가 자신의 턱을 긁적였다.
사실 오늘 그가 보러 온 선수는 조창혁이었다. 그가 평가할 때 조창혁은 솔리드한 메이저의 3선발이 되기에 충분했다. 예상하는 금액은 4년에 3천만 달러. 현재 리그의 평균적인 선수 몸값을 생각해보면 최고 99마일. 시즌 평균 95.7마일을 던지며 꾸준히 180이닝 이상을 소화 가능한 선발을 3천만 달러에 써먹는다면 무조건 남는 장사다.
백투백 홈런.
솔직히 고작 그런 하나의 결과에 마음이 오락가락하기에 그는 너무 오랜 기간 조창혁을 지켜봤다. 게다가 지금 홈런을 친 타자가 누구인가.
최수원.
한국에서는 무슨 괴물급 신인이네. 아무리 20억이라도 예상치 못한 결과네. 같은 이야기도 나오고 있지만 천만의 말씀이다. 이쪽 관계자라면 어느 정도는 이미 예상하고 있던 일이다. 물론 예상보다 조금 더 잘하는 것은 맞다. 다른 투수라면 몰라도 임광형은 진짜배기였으니까.
하지만 메츠의 알렉산더 맥도웰이 입이 닳도록 자기의 라이벌이라고 떠드는 선수다. 그의 성품을 생각할 때 자기보다 못한 녀석을 라이벌이라고 해줄 리 만무하다는 점을 생각하면 알렉산더 맥도웰 그 이상.
최수원보다 1년 일찍 프로에 데뷔했던 그는 작년 싱글A와 더블A를 박살 내고 9월에 확장 로스터로 빅리그에 올라와 박살이 났다. 하지만 메츠 내부에서는 누구도 그의 성공을 의심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번 시즌.
그는 그 기대에 걸맞게 고작 14경기 만에 무려 3개의 홈런을 기록하며 팀에서 가장 핫한 타자로 떠오르고 있다. 물론 이번 시즌 내내 이런 성적을 유지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지만 만약에 그럴 수만 있다면 신인왕은 물론이고 MVP까지 사정권에 둘만큼 대단한 출발이다.
그리고 최수원은 알렉산더 맥도웰과 동갑이다.
18살의 알렉산더 맥도웰이 박살 냈던 AA급 리그를 19살의 최수원이 박살 내지 못한다?
그럴 리가.
다만 관건은 투수.
그래, 과연 투수로 얼마큼의 성장을 보여줄 것인가다.
특히 중요한 것은 ‘현재의 기량’이 아니다.
‘성장’이다.
개인적으로 김진규는 그가 투수로써는 너무 잘 하지 않기를 바랐다. 지금도 그 가치만 따지자면 최소 1억 5천만. 그래, 최소 1억 5천만이다. 물론 지금 분위기로 봐서는 국제유망주 계약기간 이내에 미국에 진출할 것은 확정적이다. 그렇기에 더 문제다.
최소 1억 5천만짜리 선수를 고작 600만에 사 올 수 있다?
파워볼이 적어도 3주는 이월돼야 모일 만큼 막대한 금액의 복권인 셈이다. 하물며 거기서 투수까지 메이저급. 그러니까 적어도 선발 로테이션을 뛸 수 있는 수준이라면?
대체 무슨 조건을 내밀어야 그런 선수를 메츠로 데려올 수 있을까?
알렉산더 맥도웰과의 친분? 뉴욕이라는 대도시의 강점?
글쎄······.
-뻐엉!!!
“스트라잌!! 아웃!!”
마운드의 최수원이 선두타자를 상대로 삼진을 뽑아냈다.
157.8km/h.
1회 조동혁이 최수원에게 던졌던 가장 빠른 공보다 딱 1마일 정도 느린 공.
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조동혁이 던졌던 그 공이 그의 모든 것을 짜낸 것 같은 공이었다면 방금 최수원이 던진 것은 모난 곳 하나 없이 부드럽기 짝이 없는 공이었다는 점이다.
‘조급함이 전혀 없어.’
뉴욕 메츠의 스카우트 김진규.
본래 조동혁을 보기 위해 고척을 찾았던 그의 머릿속에는 어느새 최수원에 관한 생각만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지금 고척에서 그런 일을 경험한 메이저리그의 스카우트가 김진규만이 아니었다는 점이었다.
***
2:0.
이전부터 느꼈지만 난 확실히 0:0의 팽팽하고 쫄리는 상황보다 좀 여유가 있는 쪽이 던지기 훨씬 편하다.
뭔가 경기에 지고 있으면 아무리 잘 던져도 결국 질 경기라는 생각이 들어서 흥이 안 난다고 할까?
타석에 브레이브스의 2번 타자 찬민이 형이 들어왔다. 올해 스물아홉의 유격수로 현재 리그에서 유일하게 강한 2번을 하는 브레이브스에서 몸값이 제일 비싼 타자다.
쉽게 말해 포스팅으로 미국에 갈 만큼은 아닌데, 브레이브스에서 잡을 사이즈는 아니라서 FA직전인 올해에 가장 많은 연봉을 주는 상황이라고 보면 된다. 나중에 FA로 뺏길 때 보상금이라도 두둑히 땡기려는 의도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내가 신입으로 브레이브스에서 뛸 때 정말 많은 도움을 줬던 선배다. 연봉도 빵빵해서 밥도 참 많이 사줬었다.
저 선배 같은 경우도 나처럼 신인 때부터 정말 기대를 많이 받았다고 들었다. 브레이브스가 주전 유격수로 써먹던 선수들을 두 번이나 연속으로 빅리그에 보냈고, 심지어 성공까지 했으니 당연하다면 당연한 일이다.
실제로 메이저 갔던 그 선배들도 찬민이 형한테 이것저것 많이 알려줬었다고 했다. 나중에 내가 빅리그에 갔을 때는 그 노하우들이 실전 안 되고 나에게라도 이어져서 참 다행이라며 웃는데 그 모습이 뭔가 가슴이 찡했던 기억이 난다.
하지만 뭐 그런 기억은 기억이고 어쨌거나 지금은 적이다.
저 선배가 제일 까다롭게 생각하던 공은 체인지업. 뭐 체인지업이 어느 타자에게 안 까다롭겠느냐마는 저 선배의 경우는 유독 좀 심했다. 이게 잘 나가던 시절에 목표를 매우 높게 잡고 미국에 적응하려다가 생긴 부작용 중에 하나였는데 저 선배 레그킥을 내려놓는 속도가 굉장히 빠르다.
뭐 받쳐놓고 치는 게 나쁘다는 건 아니다. 매우 좋다. 근데 이건 뒷다리가 느린 공이 들어올 때도 버텨줄 만큼 탄탄할 때 이야기인데 20대 초반에는 그게 됐었다는데 중간에 햄스트링이 한 번 나간 이후로 좀 망가졌다.
-뻐엉!!!
초구 158.8km/h의 강속구.
살짝 아슬아슬했다.
“스트라잌!!!”
하지만 스트라이크 콜.
마스크를 뒤집어 쓴 조유진이 슬쩍 엄지를 치켜들었다. 그래, 넌 방망이만 안 들면 도움이 되는 거 인정이다.
두 번째.
높은 코스.
-딱!!!
완전히 빠지는 코스의 공을 억지로 후려갈겼다.
당연히 내야관중석으로 떨어지는 파울.
힘이 조금 부족했으면 내야뜬공도 가능했는데 그래도 1년에 홈런 20개씩 치는 유격수답게 쉽지 않다.
하지만 의도한 대로다.
완벽하게 나의 빠른 공에 타이밍을 맞춘 상황.
세 번째.
서클 체인지업.
구속은 139.4km/h
솔직히 말해서 내 서클 체인지업은 영 쓸만한 공이 아니다. 구속은 딱 KBO 속구의 평균에 가깝고 공의 테일링 역시 그리 좋지 않다. 보고 치기 딱 좋은 공이라는 뜻이다.
하지만 타자가 강속구를 잘 치고, 그래도 그나마 내 속구에 방망이가 따라 나오는 찬민이 형이라면?
-부웅!!!
“스트라잌!! 아웃!!!”
나의 속구에 타이밍을 맞추고 있던 찬민이 형의 방망이가 멋지게 허공을 갈랐다. 최대한 내려놓는 발의 타이밍을 늦추려 한 것 같았지만 덕분에 균형이 흐트러진 탓이다.
깔끔한 삼구삼진.
그리고 이어지는 후속 타자까지 뚝 떨어지는 커브로 공 다섯 개 만에 삼진.
KKK.
체감 상 마린스 팬이 거의 두 배는 될 것 같은 고척돔이 또 한 번 끓어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