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8화. 미스터 마린스(4)
“아······. 역시 아무리 생각해도 내가 거기서 그런 나이스 플레이를 하지 말았어야 해. 으뜸이도 좀 적당히 못 던졌어야 했고.”
“선배, 그만 하세요. 정민이 들으면 웁니다.”
“그래, 들으면 울겠지. 근데 들어야 울지. 걔 올라오려면 최소 3년 본다.”
“에이, 그래도 올해 전체 2번인데······.”
“작년 하반기에 너랑 같이 올라왔던 규탁이도 3년 전에 전체 1번이잖냐. 걔도 첫해에 두 경기 던지고 2군에서 1년을 내리 썩었어. 10억짜리 계약금 내준 유망주인데.”
“뭐, 우리가 선수단 운영이 좀 보수적이긴 하죠. 근데 규탁 선배는 재작년에 2군 성적이 좀 그랬었잖아요. 투구 밸런스 깨지는 바람에.”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야, 장담하는데 최수원도 우리 팀이었으면······. 아, 씹. 아니다. 걘 우리 팀이었어도 씹어먹고 올라왔겠다. 너처럼.”
“제가 씹어먹긴 뭘 씹어먹습니까.”
“포수가 2군에서 본즈 놀이 하는데 그게 씹어먹는 거지. 아무튼 오늘 경기는 꼭 잡았어야 하는 경기인데. 하······. 내일 잭이 완봉 같은 거 안해 주려나?”
“글쎄요······. 요즘 잭 컨디션이 좀 올라오긴 했는데······. 근데 선배님도 오늘 보셨잖아요. 광형 선배님도 컨디션 진짜 죽여줬는데 최수원이 죄다 두들겨서 그 좋은 컨디션 결국 강제로 깨트린 거.”
“야, 소나기는 피해가는 거라고, 당연히 걸러야지. 솔직히 오늘이야 광형 선배 자존심도 있고 기록도 걸려있고 뭐 그랬으니까 어쩔 수 없었지만. 어차피 홈런 기록이야 다행히 마지막 타석에 안타로 끝나서 7연타석 홈런으로 끝난 거고 이제는 안 거를 이유도 없지.”
“잭이 그러려고 할까요? 그래도 작년까지 에이스로 뛰었던 자존심이 있는데.”
***
[아, 피닉스의 덕아웃. 고의사구를 신청합니다. 잭 서튼. 두 타석 연속으로 최수원 선수를 거르네요. 최수원 선수가 1루로 걸어 나갑니다.]
[사실 생각해보면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긴 할 겁니다. 지금 최수원 선수 방망이가 워낙 무섭거든요. 지난 돌핀스와의 2차전. 본인이 직접 등판했던 경기에서 무려 4타석 연속 홈런. 그 경기에서 WAR가 거의 1.0이 올랐어요. 그리고 바로 직전 경기에는 일루수로 출장해서 3연타석 홈런에 2루타까지. 마찬가지로 WAR이 0.47이 올라갔습니다. 단 두 경기만에 어지간한 백업 멤버의 1년 치 활약을 보여줬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박동식 위원님. 방금 그 말씀은 그러니까 KBO 경기가 144경기니까 최수원 선수가 그런 백업 멤버의 72배쯤 되는 가치가 있다. 뭐 그런 말씀인가요?]
[아, 물론 그렇게까진 아닙니다. 일단 선발 투수로 등판은 일주일에 한 번이고. 거기에 빠지는 경기도 있고. 게다가 지난 두 경기 같은 미친 활약을 계속 할 수는 없으니까요. 다만 어쩌면······. 40년 가깝게 깨진 적 없던 KBO의 WAR 기록이 이번에 바뀔 가능성은 있지 않을까. 뭐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똥식이, 쟤 이제 완전 돌아선 거야? 아니, 무슨 마린스 유망주 후빨을 저렇게까지 맛깔나게 하냐?”
“뭔 헛소리야. 후빨이라니. 사실적시지.”
“야, 40년간 깨진 적 없는 KBO의 WAR 기록이면 86 SUN이야. 참고로 그 해에 262.2이닝 던지고 평자책 0.99했다. 물론 그 해에 리그 평자책이 3.08이라서 올해랑 거의 1점 차이 나긴 하지만 아무튼 262.2이닝 던지고 평자책 0.99해야 나오는 괴물 같은 숫자를 어떻게 갱신을 하냐?”
“응, 최수원 두 경기 그러면 20경기 하면 14.5니까 21경기 하면 딱 되겠네.”
“글쎄다. 21경기나 등판할 수 있겠냐? 신인이 저렇게 구르는데? 아, 하긴 마린스면 원래 MVP급 투수 팔꿈치로 반지 따내는 팀이니까 잘하면 올해 반지는 따낼 수도 있겠네.”
“와, 이 변절자 새끼 선 쎄게 넘네. 왜? 블레이즈는 이번 시즌 영 시들한데 마린스 잘 나가니까 질투 나냐?”
“질투 같은 소리 하네. 잘 봐라. 봄린스의 야구는 원래 벚꽃과 함께 지니까. 그러니까 딱 이번 주가 끝이겠네.”
***
“또 왔네.”
“그러게요. 이왕이면 좀 더 가고 싶었는데. 딱 여기까지네요.”
“어제 많이 갔잖아. 좀 참아. 모레는 공도 던진다면서 왜 무리를 하려고 그래.”
“에이, 어제 갔다고 오늘 안 가나요. 선배님도 어제 많이 가셨는데 오늘 또 가셨잖아요.”
“나야 이제 갈 날이 얼마 안 남았으니까 그런 거고. 넌 앞으로 창창하잖아.”
“선배님도 졸업하자마자 바로 1군에서 시즌 딱 절반 뛰고 홈런 20개 치셨잖아요.”
“오, 뭐야? 그걸 알고 있어? 설마 내 팬? 하긴 나이대를 생각하면 딱 그럴만한 나이대이기는 한데. 싸인해줄까?”
“아뇨. 괜찮습니다.”
1루에서 채광민과 실없는 소리를 주고 받았다.
사실 이규만도 그렇고 채광민도 그렇고 이전에는 지금처럼 편하게 대화를 나눌만한 상대는 아니었다. 당시 나는 이제 막 1년 차 애송이에다가 지금처럼 대단히 야구를 잘하는 상황도 아니었으니까.
아무튼 채광민은 상당히 유쾌한 성격이었다.
“너 그러면 그것도 알겠네? 내가 프로 야구 사상 최연소 4번 타자였다는 거?”
“알죠. 그래서 사람들은 전부 홈런 타자일 줄 알았는데 아직 307홈런 밖에 못 치신 것도요.”
“야, 그건 내가 일본 좀 잠깐 다녀오는 바람에······. 아무튼 내가 신인 때부터 날아다녀봐서 잘 아는데. 지금 잘 하고 있으면 그냥 더 발전하려고 하지 말고 딱 그만큼만 해라. 괜히 옆에서 이것만 더 하면 더 잘한다. 뭐 그런 소리에 귀 팔랑였다가는 이도 저도 안 되니까.”
“선배님은 그러셨었습니까?”
“그래, 인마. 내가 괜히 그거 다 들었다가 2년 차에······. 아이 참······. 내가 무슨 소리를 하는 거야. 아무튼······.”
-딱!!!
[쳤습니다!! 노형욱!!! 1, 2루 간으로 향하는 빠른 타구!!]
대화를 나누는 사이에도 신경의 8할은 타자에게 향해 있던 상황. 나의 발이 빠르게 2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하지만 오늘 피닉스의 2루수가 정말 환상적으로 반응했다. 멋진 다이빙 캐치. 그대로 몸을 일으킨 2루수가 2루로 커버를 나온 유격수 오민엽의 글러브를 향해 공을 던졌다.
아슬아슬할까?
아니, 아니다. 내 발은 제법 빠른 편이지만 이건 내가 아니라 이주혁이라도 아웃이다. 무리다. 그러니 일단 벤트 레그 슬라이딩으로 슬쩍 오민엽의 송구를 방해한다.
아 물론 의도적으로 야수의 몸에 발을 들이 미는 것은 MLB뿐만 아니라 KBO에서도 반칙이다. 그러니까 딱 거기에 걸리지 않는 수준으로. 나의 경로 그대로. 그러니까 2루 베이스를 밟고 있던 발이 조금 위험하게 느껴질 만큼만.
하지만 역시 작년 골든글러브 수상자는 다르긴 달랐다.
물론 KBO의 골든글러브가 MLB의 골드글러브처럼 순수하게 수비로 주는 상이 아니라 오히려 공격력을 갖고 주는 상이기는 했는데, 오민엽의 경우 공격력보다 오히려 수비력이 돋보인다는 소리를 듣는 유격수였으니 그 수비 실력을 짐작할 만했다.
KBO에도 2루에 슬라이딩 위협 금지 조항이 개설된 이후, MLB와 마찬가지로 네이버 후드 플레이가 막히고 비디오 판독 대상이 됐다. 즉, 공이 정확히 글러브에 박힐 때까지 2루 베이스에서 발을 떼면 안 된다는 뜻이다.
그렇기에 이것은 묘기였다.
2, 3루 간에서 2루 베이스로 달려오던 타이밍과 공을 건네받는 타이밍의 정확한 일치. 그리고 그 달려가던 기세를 그대로 살려 점프 스로우까지.
-뻐엉!!!
심지어 그러한 불안정한 자세에도 불구하고 매우 정확한 송구가 이뤄졌다. 진짜 1루수가 미트만 가져다 놨는데 거기에 공을 넣어준 수준이었다.
[안정적인 수비. 피닉스가 더블 플레이를 만들어냅니다.]
[마린스가 3회 초 공격에서 점수를 만들어내지 못하며 이닝이 마무리됩니다.]
[어제 임광형에 이어서 오늘 잭 서튼까지. 피닉스의 선발들이 상당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사실 피닉스가 선발진은 상당히 괜찮거든요. 잭 서튼 선수도 지금까지 총 17이닝 7실점 3자책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참······, 그러고 보면 잭 서튼 선수도 승운이 없어요. 그런 성적에도 불구하고 아직 0승이거든요. 과연 오늘을 시즌 첫 승을 올릴 수 있을지!! 자, 이제 다시 피닉스의 공격. 마운드에 딜튼 도일리 선수가 올라옵니다.]
“스완, 어제 경기에서는 홈런만 세 개에 2루타까지 하나 쳤잖아. 그렇게까진 바라지도 않으니까 어떻게 홈런 한 방만 좀 갈겨 달라고.”
“나도 그러고 싶지. 근데 상대를 안 해주잖아.”
“젠장. 빌어먹을 쫄보들 같으니라고.”
딜튼이 투덜거리며 마운드로 올라갔다.
그를 지나쳐 나 역시 1루에 자리를 잡았다. 뭐, 열심히 투덜거리고 있긴 했지만 그래도 크게 걱정이 되지 않는 것은 오늘 우리 선수들의 타격 컨디션이 그리 나쁘지 않기 때문이다.
오늘 잭 서튼만 하더라도 임광형이 있으니까 2선발인 거지 어지간한 팀에 1선발을 할만한 투수였다. 그런 투수를 상대로 3이닝 동안 안타만 세 개다.
최수원과 여덟 난쟁이라면 상대의 선택은 너무 쉽다. 어지간한 상황에선 그냥 계속 거르면 그만이다. 하지만 한 명, 혹은 두 명. 확실한 타자가 내 뒤를 받쳐준다면 마냥 볼넷으로 내보내기도 껄끄럽다.
-뻐엉!!!
“스트라잌!! 아웃!!”
딜튼 도일리가 기분 좋게 아웃 카운트를 하나 잡아냈다.
확실히 공이 좀 뻗어 나온다. 이런 공이라면 확실히 상대방도 쉽게 공략을······.
-딱!!!
[오민엽!! 오민엽 쳤습니다!! 큼지막한 타구!! 중견수 이주혁!! 달려갑니다!! 빠릅니다!!]
그리고 최근 꾸준히 좋은 모습을 보여주던 이주혁이 또 한 번 이주혁을 해버렸다.
그러니까 낙구 예상 지점이 너무 멀어서 공을 못 잡은 게 아니라, 낙구 예상 지점을 지나쳤다가 다시 돌아와서 공을 잡으려다가 공을 놓쳤다. 너무 빠른 발이 만들어낸 비극이었다.
[아······.]
[야구에는 좋은 수비 뒤에는 좋은 공격이 따른다는 속설이 있습니다. 직전 이닝 좋은 수비를 보여줬던 오민엽 선수에게 행운이 따르는군요.]
딜튼이 벌개진 얼굴로 콧김을 훅훅 뿜어냈다. 실책에 대한 자책 때문인지 외야에 선 이주혁의 얼굴이 그리 썩 좋아 보이지 않았다. 뭐, 방금 실책이 실점으로 이어진다면 진로를 잘못 선택한 것 같은 저 거대한 레슬러의 손바닥이 자신의 등짝을 향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일 수도 있긴 했다.
아무튼 분노한 딜튼이 정말 폭발적인 공을 뿌렸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155km/h를 오가는 강속구.
커맨드는 썩 좋지는 않은 공이었지만 피닉스의 타자들은 딜튼의 공을 쉽게 공략하지 못했다. 그래, 오민엽이 좀 특별한 거지 피닉스에 오늘 저 공을 제대로 공략할 만한 타자는 많지 않다.
기껏해야 정병철. 거기에 굳이 하나 더 해주자면 채광민까지.
경기가 이어졌다.
0:0의 팽팽한 상황을 깨트린 것은 4회 초에 터진 규만 선배의 시즌 두 번째 홈런포였다.
어제와 크게 다르지 않은 비거리의 솔로 홈런포.
솔직히 어제, 오늘 홈런을 쳤다고 규만 선배의 기량이 한순간에 다시 쑥 올라왔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그러나 폼은 일시적이더라도 클래스는 영원한 법이다. 이건 컨디션 난조로 쑥 떨어져있던 타격 사이클이 어제 홈런을 계기로 쑥 하고 올라왔다고 봄이 타당했다.
그리하여 8회 초 노아웃.
점수는 5:1
-딱!!!
서경준과 이정훈. 그리고 심지어 그 앞에 조유진까지 모두 출루한 상황.
나의 방망이가 깔끔한 3타점을 만들어냈다.
[미스터 마린스 부활!? 2경기 연속 홈런!!]
[11:3 대승!! 마린스 위닝 시리즈 확정!!]
[파죽의 기세!! 마린스!! 피닉스와의 시리즈 스윕!!]
[드디어!! 드디어!! 올해는 정말로 다르다!! 마린스!! 1년 3개월 만의 시리즈 스윕!!]
야구에는 기세라는 것이 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분명 우리는 기세를 잡았다. 그도 그럴 것이 돌핀스와의 경기 이후로 무려 5연승.
다음 경기는 또다시 서울.
상대는 돌핀스와 함께 리그 최강의 빠따를 논하는 팀이자 작년 우리 마린스가 17점을 내주고 영봉패를 당했던 브레이브스.
그리고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기 전.
내가 뛰었던 팀이기도 했다.
아, 그리고 또 한 가지.
“어? 박은진?”
“박은진? 혹시 누구 아는 애 있어?”
“아니, 여기 세 번째. 얘요.”
“앤지?”
“앤지요? 유명한가요?”
“아니, 아직 그렇게 유명한 건 아니고. 그냥 신인 걸그룹인데 2군을 넘본다 정도?”
“2군을 넘보는 거면 3군이잖아요. 그러면 그거 완전 조진 거 아니에요?”
“아니지. 아니야. 아이돌의 세계는 우리랑은 좀 다르지.”
벌써 몇 달이나 소식 한 통 없던 동창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아이돌로 데뷔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