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7화. 미스터 마린스(3)
[크······. 큽니다!!]
타격의 순간 경기장에 있는 모든 이들이 알 수 있었다.
넘어간다. 아주 아주 커다랗게.
피닉스의 외야수들이 걸음을 멈췄다. 타구는 정말 별이라도 될 것처럼 쭉쭉 뻗어나가 112미터 거리의 좌중간을 까마득한 높이로 지나갔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팔을 쭉 뻗은 관객들 역시 멀었다. 그리하여 대전 야구장의 좌중간 끝, 126미터를 날았음에도 떨어질 생각을 하지 않던 타구는 결국 경기장을 완전히 넘어갔다.
[장외······. 장외홈런입니다. 괴물, 아니, 그 말로도 부족한 신인 최수원. 7연타석 홈런을 장외홈런으로 기록했습니다!! 아, 지금 화면에 잠깐 임광형 선수가 잡혔는데요. 살짝 웃는 것 같은데. 제 착각일까요?]
[아뇨, 솔직히 저런 상황에서는 실소밖에 안 나올 겁니다. 바깥쪽 안쪽 보더라인을 저렇게 활용하고, 심지어 방금 공은 정말 임광형이니까 던질 수 있는 완벽하게 제구된 슬라이더였거든요. 근데 그걸 기다렸다는 것처럼 받아쳐서 저렇게 담장을 넘겨버리는 건······. 글쎄요. 저라도 너무 어이가 없어서 웃음이 나올 것 같군요.]
어처구니 없는 웃음이 흘러나온 건 임광형만이 아니었다.
최수원의 바로 다음.
자신의 차례를 대기하고 있던 노형욱 역시 실소가 나온 것은 마찬가지였다. 열다섯 경기만에 벌써 두 자릿수 홈런이라니.
재작년에 21홈런. 그리고 작년에 29홈런.
노형욱의 기록은 적은 숫자가 아니었다. 실제로 재작년과 작년 그는 마린스에서 가장 많은 홈런을 쳐낸 타자였으니까. 하지만 급이 다르다. 방금 저 홈런이 추가됨으로써 이제 최수원의 홈런 경쟁 상대는 ‘선수’가 아니라 ‘팀’이 됐다. 이미 녀석보다 홈런을 적게 친 팀이 3팀이다.
점수는 이제 3:5.
하지만 왠지 저 거대한 장외홈런을 보고 나니 경기에 지고 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 피닉스의 홈팬들 역시 그런 감정을 느낀 탓일까? 앞서 6연타석 홈런이라는 신기록을 세울 때만 하더라도 기꺼이 환호해주던 그들이 조금 조용했다.
그 기묘한 분위기 속에서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아온 최수원이 특유의 묘하게 건방진 표정으로 홈플레이트를 밟았다. 이미 앞서 5연타석 홈런, 6연타석 홈런이라는 대기록을 세웠을 때 덕아웃에서 할 수 있는 환영이란 환영은 다 해버린 탓일까?
아니, 어쩌면 앞선 6연타석 홈런까지는 새로운 기록을 써 내려가는 위대한 선수의 새싹 정도 느낌이었다면 지금의 7연타석 홈런은 아예 우리와는 종류가 다른 괴물을 보는 감각이라서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고생했다.”
“고생은요. 이제 시작인데요.”
역시나 건방지다. 그런 건방진 말을 건넨 최수원의 눈동자가 전광판에 새겨진 3:5라는 숫자로 향했다.
그래, 저만한 대기록을 세웠음에도 불구하고 점수는 여전히 3:5였다.
노형욱의 이성은 그것이 그저 순수한 승리에 대한 열망이라고 이해했지만, 그의 감정은 최수원의 저 시선을 아무것도 하지 못하는 밥버러지라는 질책으로 받아들였다.
방망이를 쥔 노형욱이 타석에 섰다.
과연 빅리그에서 한때 정상에 가깝게 다가갔던 투수의 관록이라는 것일까?
한 타자에게 한 경기에 무려 3연타석 홈런을 두들겨 맞았음에도 불구하고 마운드에 선 투수는 여전히 거대했다.
알 수 없는 표정.
마운드의 투수가 와인드업했다.
역시 모르겠다.
덕아웃에서 바라볼 때는 분명 살짝 팔의 각도가 내려갔다. 어떻게든 체인지업에 힘을 덜 싣고자 하는 부작용이었겠지.
하지만 타석에서는 보이지 않았다.
숨겨져 있던 투수의 왼팔이 튀어나오는 것은 그야말로 일순간.
완벽하게 로케이션 된 공이 날아들었다.
-부웅!!!
“스트라잌!!!”
투심 패스트볼.
체인지업을 노리던 노형욱의 방망이가 허공을 갈랐다.
그래, 노형욱이 아직 신인에 가까웠던 그 시절처럼.
당시 임광형은 리그 최강의 투수였다.
그를 공략할 수 있는 타자는 그야말로 극소수. 당연히 노형욱은 거기에 포함되지 않았었다.
그리고 7년.
인간에게 시간은 공평하지 않았다.
젊고 경험이 없던 타자는 충분한 경험을 쌓아 전성기에 이르렀고, 전성기 언터쳐블의 기량을 자랑하던 투수는 더 많은 경험을 쌓았으나 그 경험만큼 늙었다.
노형욱이 두 번째 공을 기다렸다.
보이지 않는 팔꿈치에 대한 미련을 지웠다. 생각하지 않으려고 하면 더 생각나는 것이 인간의 마음이라지만 일류의 타자가 처음 방망이를 잡은 이후 수백만 번 몸에 박아넣은 동작과 루틴은 그것조차 뛰어넘는다.
그의 몸에 새겨진 시계가 움직였다.
0.01초 단위로 움직이는 그 정교한 시계는 조금 전 완벽하게 로케이션 됐던 그 투심에 맞춰졌다.
-부웅!!!
“스트라잌!!”
체인지업이었다.
타자는 정해진 루틴에 맞춰 자신의 몸을 움직였다. 충분한 경험과 아직 노쇠라는 단어보다는 절정기라는 단어가 어울리는 서른한 살의 육체.
볼카운트 0-2.
-뻐엉!!
하나의 공을 보냈다.
-딱!!!
하나의 공을 커트했다.
그리고
-딱!!!
완벽하게 로케이션 된 바깥으로 빠져나가는 절묘한 투심 패스트볼.
스윗스팟은 아니었다. 하지만 적어도 타이밍 하나만큼은 완벽했다. 1루의 채광민이 손을 높이 들었으나 부족했다. 그의 머리를 살짝 넘어가는 타구.
노형욱의 몸이 1루 베이스를 밟았다.
“세이프!!!”
[노형욱!! 안타!! 마린스의 노형욱이 오늘 경기 첫 번째 안타를 기록합니다!!]
[7회 초. 현재 스코어는 3:5. 놀랍게도 이게 마린스의 네 번째 출루입니다. 오늘 경기 임광형 선수가 허용한 안타는 단 4개. 그 가운데 무려 3개가 최수원 선수의 홈런이었습니다.]
[타석에는 이제 이규만 선수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지난 시즌 말에 이번 시즌을 끝으로 은퇴를 선언했는데요. 현재까지 성적은 0.207/0.258/0.207로 조금 아쉬운 상황입니다.]
[본래도 발이 좀 느린 편이라서 타구질에 비해 장타율이 좋지 못했는데, 올해는 그게 조금 더 심한 느낌입니다. 이전에는 2루타를 단타로 만들었다면, 최근에는 3루타조차 단타가 되는 느낌이죠.]
[맞습니다. 실제로 지난 돌핀스와의 시리즈에서 대주자로 올라갔던 이주혁 선수가 1루에서 홈까지 뛰는 동안 2루 베이스를 밟지 못했던 적이 있었습니다.]
무사에 주자 1루.
4년 전 아니 3년 전만 됐더라도 마린스의 팬들은 이런 상황에서 이규만이 올라오는 것에 거대한 기대를 했을 것이다.
물론 작년에도 이규만은 0.222/0.296/0.418을 치면서 팀에서 다섯 번째로 좋은 타격을 보여줬다. 하지만 동시에 무려 21개나 되는 병살타를 기록하며 리그 전체 병살타 2위를 기록했다.
“수원이가 분위기 반전시켰고 노형욱이 이어놨는데 여기서 그대로 이규만이라고?”
“아니, 대철이 믿음의 야구도 좋지만. 여기선 어? 딱 분위기 살려갈 수 있게 대타 써야지. 감독이 그러라고 있는 거 아니야?”
“맞아. 내가 쭉 보니까 요새 정지운이 타격감 좀 올라왔던데.”
“야, 아무리 그래도 정지운은 아니지. 차라리 조유진이라면 모를까.”
“됐다 그래. 조유진 걘 수비요정인 건 인정이지만 타격폼 자체가 글러 먹었어.”
“니들 다 바보냐? 아무리 규만이 빠따가 엉망이 됐어도 그런 똑딱이들이랑 비교하는 건 좀 아니지. 혁주라면 또 모를까.”
“응, 다음 삼진왕.”
“맞아. 그래도 조유진이나 정지운이는 공이라도 건드리지. 권혁주 걘 그냥 붕붕이잖아.”
이제는 그를 응원하던 팬들조차 기대를 보내지 않는 늙은 타자가 타석에 섰다.
올해는 다를 것이라는 믿음으로 몸을 만들고, 은퇴 마지막 시즌을 화려하게 불태우겠노라는 의지로 겨울을 불태웠다.
하지만 돌아온 결과는 작년보다 더 처참한 성적이었다. 팀 내부의 잡음에 신경 쓰지 않고 오직 그 자신의 성적만을 위해 시간을 보냈음에도 그러했다.
늙은 타자가 마운드의 투수를 바라봤다.
저 투수가 막 데뷔 했을 때, 그는 이미 리그 최고의 타자였다. 물론 녀석도 데뷔와 동시에 리그 최고의 투수 중 하나가 되긴 했었지만.
그리고 17년이 흘렀다.
대체 어디서 무엇이 잘못된 것일까?
리그 최고의 타자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남기지 못한 채 그저 KBO에 누적만 꾸역꾸역 쌓아 올린 퇴물 타자가 되어 버렸다. 반면 패기 넘치던 신인 투수는 KBO를 넘어 모든 야구 선수의 꿈이라 할 수 있는 메이저리그에서 그 자신을 증명했다.
과거, 패기 넘치던 어린 투수가 자신을 바라보던 눈동자에는 ‘호승심’이라는 감정이 그득했었다.
그리고 오늘도 늙은 타자는 더이상 어리지 않은 투수의 눈동자에서 그러한 감정을 읽을 수는 있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그 감정이 향한 곳은 자신이 아니었다.
그 감정이 향한 곳은 이제 막 데뷔한 열아홉의 새파란 타자였다.
만약 첫 번째 FA 때 팀에 대한 의리라느니, KBO에 남는 것과 크게 다르지 않은 오퍼액이라느니 하는 것들을 무시하고 빅리그에 진출했더라면 뭔가 달랐을까?
그게 아니라면 두 번째 FA 때 세계적인 역병으로 리그가 못 열릴지도 모른다는 말 따위는 무시하고 진출을 했었더라면 또 뭔가 달랐을까?
아니, 어쩌면 모두가 늦었다고 이야기하던 37세 시즌. 마지막 FA때 도전을 했더라면 정말 무엇인가 달랐을지도 모르겠다.
방망이를 쥔 이규만이 마운드의 임광형을 바라봤다.
표정 없는 얼굴.
그래, 바로 저 표정이다.
패기 넘치는 얼굴로 자신만만하던 어린 투수는 두들겨 맞고, 나이를 먹어가면서 점점 포커페이스를 배워 나갔다.
그리하여 그가 미국 땅에 진출을 선언했던 그 시기. 마침내 저러한 표정을 지었던 임광형은 결국 이규만 자신과 나란한 높이에 섰다.
그리고 7년이 흘렀다.
저 먼 미국 땅에서 6년과 1년의 재활. 그가 보지 못했던 그 시간 동안 이규만 자신이 이토록 늙어버렸거늘 저 투수는 저토록 건재했다.
아직 미숙했던 타자에게 7년은 전성기에 다다르는 시간이었으며 전성기의 초입에 서 있던 투수에게 7년은 절정을 지나 쇠퇴를 시작하는 시간이었다.
하지만 전성기의 마지막을 지나던 타자에게 7년이란 은퇴하지 않고 버텨낸 것만으로도 칭찬받기 충분한 시간이었다.
마운드의 투수가 첫 번째 공을 준비했다.
초구.
빠른 공.
-부웅!!!
“스트라잌!!!”
143.7km/h.
그것은 평균 수준의 속구였으나 그 공 안에는 로케이션과 디셉션. 그리고 테일링까지. 단순히 구속만으로 설명할 수 없는 투수의 경험이 가득했다.
두 번째.
마찬가지로 빠른 공.
그 각이 크지 않게 살짝 안으로 꺾여 들어오는 슬라이더였다.
하지만 마치 존 안쪽으로 들어오는 것처럼 굴던 공이 급격하게 꺾여 몸 깊숙한 곳 무릎 아래로 들어온다면 그건 도저히 칠 수 없는 마구나 다름 없다. 그래, 조금 전 홈런을 쳐낸 최수원과 같은 괴물이 아니라면.
아니, 어쩌면 그만큼은 아닐지 몰라도 리그 최고의 타자로 불렸던 이규만이라면 쳐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부웅!!!
하지만 마흔두 살의 이규만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후우.
잠시 타석을 물러난 이규만이 호흡을 가다듬었다.
팔꿈치······.
세 번째.
공이 떴다.
첫 번째 타석에서 그에게 헛스윙 삼진을 끌어냈던 커브였다. 하지만 임광형 역시 지친 것은 마찬가지였을까? 2회 때와는 다르게 공이 부웅 하고 떠오르는 것을 느꼈다.
-뻐엉!!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1-2.
광형이가 지금까지 몇 개나 던졌더라?
90개? 100개?
이규만이 마운드의 임광형을 자세히 바라봤다.
살짝 붉어진 얼굴. 벌어진 입 사이로 호흡이 오고 갔다.
6년 전 36세의 이규만은 어떠했는가.
사람들은 그를 여전히 리그 최고의 타자라고 불렀었다. 이규만 자신도 그렇게 생각했었다. 하지만 불과 3년 전이었던 33세의 이규만과 비교하자면 어땠을까? 그렇기에 그는 33세의 이규만만큼 방망이를 휘두르기 위해 악착같이 애를 썼었다.
그렇듯 이미 지나온 이규만 자신의 경험이 마운드에 선 임광형을 조금은 이해하게 해주었다.
저 녀석 역시 전성기의 끝을 지나고 있는 투수라는 것을.
네 번째.
이전이었다면 패기 넘치게 삼진을 잡으러 들어왔을 투수의 공을 그냥 흘려보냈다.
2-2.
다섯 번째.
그래, 이제 그냥 끝내자는 뜻일 것이다.
이규만은 리그에서 가장 병살타를 많이 치는 타자 중 하나였고 임광형의 체인지업은 리그에서 병살타를 가장 많이 끌어낼 수 있는 구종 중 하나였으니까.
뽑혀 나온 왼팔이 보였다.
과장 잔뜩 보태 지나가던 파리의 날개짓까지 보이던 예리한 동체시력은 이제 없었다. 아니, 시력 자체가 좀 떨어졌다. 지금처럼 해가 지면 아무리 조명탑을 밝게 켜도 시력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런 흐린 눈으로도 분명했다.
그 팔꿈치의 위치는 지금까지 마치 자로 잰 것처럼 정확했던 다른 모든 공과 확실히 달랐으니까.
-딱!!!
미스터 마린스가 크게 공을 퍼 올렸다.
전성기와는 사뭇 다른, 하지만 지금 이 느린 공을 멀리 쳐 내기에는 가장 어울리는 스윙으로.
그것은 누군가처럼 경기장 자체를 넘어갈 만큼 거대한 홈런과는 거리가 멀었다.
113미터.
그야말로 간신히 아주 간신히 담장을 넘어가는 자그마한 홈런.
하지만 그것 역시 홈런이었으니 방망이를 멋지게 집어 던지고 느린 달리기로 1루를 향해 달려가는 이 늙은 타자의 걸음은 실로 위풍당당했다.
7회 초.
노아웃에 5:5.
피닉스의 에이스가 마침내 마운드를 내려갔다.
마린스의 불펜은 한명훈 정도를 제외한다면 그리 좋은 편은 아니었다. 하지만 피닉스의 불펜은 누구도 좋은 편이 아니었다.
그것이 그들의 시리즈 1차전 승패를 갈랐다.
마린스가 피닉스와의 시리즈 1차전을 가져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