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36화 (136/305)

136화. 미스터 마린스(2)

이규만.

그는 지금까지 KBO에서 뛰었던 모든 타자 가운데 가장 짱짱한 커리어를 가진 타자였다. 비록 이런저런 이유로 해외 진출이 몇 번이나 무산된 덕분이라고는 하지만 그게 그의 커리어를 폄훼할 이유는 될 수 없다.

하지만 커리어는 커리어고 폼은 폼이다.

현재 그가 기록하고 있는 0.207/0.258/0.207의 성적은 절대 일시적인 부진이 아니었다. 올해 나이 42세. 작년에 기록한 성적이 0.222/0.296/0.418이다. 이건 그냥 자연스럽게 나이를 먹으며 하락했다고 봄이 타당했다.

“가능할까요?”

“수원아.”

“네?”

“왜, 그런 말이 있잖냐. 폼을 일시적이지만 클래스는 영원하다고.”

어······, 음······.

그래, 뭐 그런 말이 있기는 하지.

“넌 아직 스무 살도 안 돼서 이해가 안 될 거야. 근데 사람이 나이를 먹는다는 건 말이다. 이게 참 어려운 거거든. 서른만 넘어도 밤새 놀아도 멀쩡하던 몸이 밤 12시에 자고 일어났는데도 뻐근해지고 막 그래요.”

잘 안다.

나이를 먹으면 가장 먼저 기복이 생긴다. 컨디션 좋은 날에는 별 차이가 없는데, 가끔씩 그냥 컨디션이 안 좋아진다. 반응이 느려지고, 눈이 나빠진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 서른넷의 나는 162경기 가운데 한 스무 경기 정도는 그런 날이었다. 그렇다면 마흔둘의 저 노장은 과연 어떨까?

일 년의 절반. 아니, 어쩌면 그 이상.  야구는 루틴의 운동이다. 그러니까 그렇게 망가진 사이클로는 시즌 전체가 망가진다.

“아무튼 저 선배 저래 보여도 진짜 대단한 사람이다. 나이 먹고 반응속도 좀 떨어지고 그래서 그렇지 짬밥은 어디 가는 거 아니거든. 게다가 지금 구분되는 공이 뭐냐. 체인지업 아니냐.”

“아······. 느린 공.”

“그래, 폼만 구분할 수 있으면 120짜리 공은 배팅볼로 쓰기 딱 좋은 공 아니냐.”

확실히 설득력은 있었다.

단, 이규만이 임광형의 폼을 구분할 수 있다는 전제하에.

떠들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말했다.

이유는 누구나 있다. 이규만이 해외에 진출하지 않은 것인지, 못한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그렇기에 중요한 것은 결과다. 그는 오직 KBO에서만 뛰었고 상위리그에서 검증을 받지 못했다. 그러니 저 MLB에서 유의미한 성적을 낸 타자들에 비하자면 한 수 아래일 수밖에 없다.

솔직히 말하면 나도 이 이야기에 어느 정도 공감을 한다.

이규만이 KBO 리그 최강의 타자였다고? 그래, 인정한다.

하지만 당장 KBO에서 준수한 일루수 소리 듣던 내가 빅리그 가서 일루수 불가 판정받았었다.  그런데 KBO에서 빠따는 괜찮은데 수비는 좀 별론데? 하는 평가를 듣던 유격수는 오히려 빅리그에서 최고의 수비수에게 수여되는 골드글러브 최종후보까지 올라갔다.

이렇듯 하위리그의 좋은 성적은 상위리그에 도전할 ‘자격’의 증명일 뿐이다. 실제로 마이너를 씹어먹으며 메이저에 올라온 선수가 크게 실패하고 꾸역꾸역 마이너를 통과한 선수가 10년 넘게 빅리그에 붙어있는 일도 허다하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선 임광형은 명백하게 ‘빅리그 레벨’의 투수였다. 과연 이규만이 그런 임광형의 디셉션을 간파할 수 있을까?

“선배, 못 알아보시겠어요?”

“으음······.”

노형욱의 질문에 이규만이 미간을 찌푸렸다.

그리고 노형욱에게 답하는 대신 나를 바라보며 물었다.

“그러니까 이걸 수원이 네가 눈치 챈 거라고?”

“네.”

“확실히 말을 듣고 보니까 그런 것 같긴 한데······. 이걸 대기 타석에서 정훈이가 헛스윙 하는 것만 보고 눈치챘단 말이지······.”

“아, 구분 가능 하시겠어요?”

“글쎄······. 여기선 잘 보이긴 하는데. 타석은 들어가 봐야 알 것 같네. 아, 체인지업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이정훈이 기대를 배신하지 않고 멋지게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공수교대.

6회 말.

최민혁이 또 다시 마운드에 올라갔다.

***

수비 이닝.

오늘 선발로 출장한 멤버 모두가 빠진 자리에 오직 반쪽짜리 야구 선수만이 덕아웃에 남았다.

그래, 반쪽.

반쪽이다.

불과 4, 5년 전만 하더라도 이렇게 덕아웃에 남아있는 순간이 참으로 갑갑했었다. 오히려 필드에 나가서 경기를 쭉 이어나가는 쪽이 마음도 편했고 타격감도 훨씬 괜찮았다.

하지만 삼십 대 후반이 되고, 마흔을 넘어 다시 일 년. 바로 작년의 일이었다. 지독하게 컨디션이 안 좋았던 바로 그날. 이규만은 일루에 나가는 대신 이렇게 덕아웃에 남아있는 것에 안도를 했었다.

그리고 그 순간 깨달았다. 아, 나는 이제 은퇴를 해야 하는구나.

그랬다. 그가 은퇴를 결심한 것은 단순히 FA계약 기간이 올해까지라서가 아니었다. 필드에 나가지 않음에 안도하는 것이 어떻게 야구 선수란 말인가.

가끔 인터넷을 떠도는 호사가들 가운데 야구를 레저라 비하하는 이들이 있다. 농구, 축구에 비하면 이건 운동도 아니라고. 배에 지방이 낀 운동선수가 말이 되느냐고.

하지만 그들은 주 6일. 1년 144경기의 가혹함을 모른다.

사나흘에 한 번씩 전력을 다 쏟아내는 스포츠와 주 6일을 꾸준히 잘해야 하는 스포츠가 다름을 모른다. 그들은 더는 주 6일을 뛸 수 없기에 은퇴해야 하는 선수의 마음을 모른다.

늙은 타자가 주먹을 움켜쥐었다.

전광판의 점수는 2:5

그 2라는 숫자를 만들어낸 팀의 가장 어린 선수는 본래 자신이 서 있어야 하는 자리에 서 있었다. 그가 뿜어내는 젊음과 재능은 너무나도 반짝거려서 실로 눈이 부셨다.

체인지업.

그래, 어디 한 번 해보자.

“자!!! 파이팅!! 마린스!! 이대로 깔끔하게 막고 역전 가보자!!”

덕아웃 펜스에 기대 크게 소리치는 주장의 생경한 모습에 마린스 선수들의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

-뻐엉!!!

최민혁의 공이 바깥으로 빠졌다.

볼카운트 2-3.

포수가 던져준 공을 받아든 그가 오른손을 몇 번 쥐락펴락했다.

통증은 없었다. 수술은 아주 잘 됐고 재활도 훌륭했다. 하지만 복귀 첫 시즌은 그가 그 고통스러운 재활을 견뎌내며 꿈꿔왔던 것과는 크게 달랐다.

5선발.

그것도 그보다 어린 후배들에게 밀려나 5선발이다. 스프링캠프에서 이후로도 꾸준히 친하게 지내고 있었고, 겉으로 크게 티는 안 냈다고 생각했지만, 솔직히 자존심이 너무 상했다.

뭔가를 보여주고 싶었다.

하지만 그런 그의 마음과 달리 프로 1군의 벽은 너무나도 단단했다.

10억 5천짜리 유망주.

-뻐엉!!!

오늘 경기 네 번째, 그리고 이번 이닝 두 번째 볼넷이었다.

그리하여 원아웃에 주자 1, 2루.

투수 코치가 마운드로 올라왔다.

“수고했다 민혁아.”

마운드에 선 197cm의 거한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저 고개를 떨궜다.

***

‘명훈아, 기회다. 뭔가 보여 줄 기회.’

계약금 7,000만 원.

작년 연봉 3,800만 원. 그리고 올해 연봉 5,300만 원.

프로 통산 11승.

23세의 투수 한명훈이 지금까지 프로를 뛰면서 벌어들인 총수입은 2억 4천만 원이었다. 분명 고작 나이 스물셋에 벌어들인 돈이라고 하기에는 매우 큰 돈이다. 실제로 그는 동기들 가운데 1라운드로 들어와 계약금으로 억 단위를 땡긴 녀석들을 제외한다면 가장 많은 돈을 번 축에 속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부족했다.

단순히 돈의 문제가 아니었다. 프로에서 돈이란 결국 그의 가치다. 프로 1군에서 벌써 3년 차. 작년 토종 최다승까지 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선발로 뛰지 못하는 것은 결국 그런 문제라고 생각했다.

20억짜리.

8억5천만짜리.

10억5천만짜리.

정말 억 소리 나는 금액들이다.

고작 열아홉의 나이에 계약금만으로 어지간한 중소, 중견기업 월급쟁이의 생애 소득에 가까운 금액을 벌어들인 유망주들 앞에서 2억 4천만은 너무 초라하다.

그러니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19살, 20살, 21살의 10억, 20억짜리 재능들이 품었을 가능성보다 23살의 7천만 원짜리 투수가 갈고 닦은 현재의 기량이 더 쓸모 있다는 것을 증명하는 것뿐이었다.

최선을 다한 공 하나.

-딱!!

빠른 땅볼.

팀에서 그래도 가장 믿음직한 내야수인 유격수 강라온이 그 공을 받아 사울 로페즈에게. 그리고 사울 로페즈가 다시 일루의 최수원에게.

-뻐엉!!

“아웃!!!”

6-4-3 병살.

공 하나로 이닝을 마무리 지은 최다승 투수가 씰룩거리는 입꼬리를 최선을 다해 억제하며 최대한 덤덤한 표정으로 마운드를 내려왔다.

***

[피닉스와 마린스. 마린스와 피닉스. 시리즈 1차전. 경기는 어느새 7회 초. 지금 마린스의 일곱 번째 공격이 시작됩니다.]

[경기 시작하고 이제 1시간 45분 정도 지났나요? 오늘 경기 템포가 상당히 빠릅니다.]

[그도 그럴 것이 지금 피닉스의 선발 투수인 임광형 선수는 인터벌이 짧기로 유명하거든요. 게다가 오늘은 거기서 끝이 아닌 게 지금까지 투구 수가 고작 81개. 삼진만 무려 11개. 이닝당 삼진을 2개에 가깝게 뽑아내는 페이스로 달리고 있습니다.]

[그를 상대하는 마린스의 선두타자는 최수원. 앞서 말씀드린 그 무시무시한 페이스의 투수를 상대로 무려 2연타석 홈런. 세계 최초로 6연타석 홈런을 기록했습니다.]

[하, 정말 대단한 선수입니다. 프로 야구 역사상, 아니 야구 역사상 이런 선수가 또 있었을까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데뷔해서 개막전에서 2연타석 홈런. 그리고 잠실에서 또 홈런. 이제는 6연타석 홈런까지. 지금 시즌 15경기째인데 벌써 홈런이 아홉 개에요.]

[15경기 9홈런이면······. 와, 대충 계산해보니까 86홈런 페이스네요.]

[하하, 물론 시즌 초반에 달려 나갔다고 그런 말도 안 되는 숫자가 가능하지는 않겠습니다만 확실한 건 2003년 이후로 깨지지 않고 있는 KBO 역대 최다홈런 갱신은 매우 유력하다는 점입니다.]

확실히 신기록이라는 게 참 좋다.

기록 그 자체 때문이 아니다. 아, 물론 기록 자체도 좋긴 하다. 근데 지금 같은 상황에서 특히 더 좋은 점은 투수가 나를 피할 수 없다는 점이다.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당장 저 뒤편에 꼰대 그 자체인 구심도 판정으로 루킹 삼진 콜 하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상황이다. 그런데 여기서 고의사구를 던진다? 심지어 주자도 없고 점수는 3점이나 앞서는 상황인데? 가능할 리가 만무하다.

그리고 그렇게 선택지에서 볼넷을 지워 버리는 것만으로도 상황 자체가 내가 몇 수는 먹고 들어가는 상황이 만들어진다.

초구.

바깥쪽 꽉 찬 코스 투심 패스트볼.

이미 앞서 4절을 넘어 뇌절까지 했던 공이지만 여전히 효과적이었다.

-딱!!!

1루 쪽 폴대를 아슬아슬하게 비껴 나가는 거대한 파울 홈런.

내가 요즘 투수까지 해서 그런가? 지금 임광형이 어떤 심정일지 좀 예상이 된다.

체인지업은 두 번 연속으로 홈런 두들겨 맞았고.

커브는 귀신처럼 눈치채고.

바깥쪽 보더 라인에 걸치게 투심을 던지는데 그것도 점점 홈런에 가까워지는 느낌이고.

만약 내가 지금 투수라면 머리를 비우고 에라 모르겠다. 몸 쪽 높은 직구다!! 하고 던지겠지만 임광형에게는 나처럼 160까지 나오는 속구가 없으니 그것도 안 된다.

그러니 결국 할 수 있는 것은.

-딱!!!

몸에 맞을지도 모르는 위협을 감수하고라도 존의 복판으로 들어오는 척하면서 몸에 딱 붙게 들어오는 슬라이더겠지.

모처럼 제대로 단단하게 조인 겨드랑이로 완벽하게 공을 받아쳤다.

쭉 뻗어 나가는 타구.

“북두칠성 완성.”

“아······, 씹······. 이거 진짜 완전히 미친 새끼네.”

일곱 타석 연속 홈런.

가장 높은 곳에서 가장 밝게 빛나는 북극성이 되고 싶은 것처럼 나의 홈런이 저 하늘 높은 곳까지 쭉쭉 날아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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