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4화. 성공한 투수(4)
이정훈은 좋은 타자다.
아니, 빈말이 아니라 진짜로 좋은 타자다.
-부웅!!!
“스트라잌!!”
[높은 공에 헛스윙!! 이정훈 선수 배트 타이밍이 좀 늦었습니다.]
하지만 역시 체인지업 이야기는 안 하는 쪽이 더 낫지 않았을까 싶다. 방금 저 스윙은 누가 봐도 체인지업을 노리는 것 같았는데 빠른 공이 들어와서 헛친 거다.
사실 투수가 공을 던지는 동작은 상당히 간결하다. 키킹 동작부터 릴리즈까지는 기껏해야 1초 남짓. 심지어 그 동작 가운데서 마지막까지 공을 숨기기 위해 디셉션까지 준다. 헌데 여기서 팔꿈치의 높이를 보고 구종을 파악한다? 쉽지 않다.
게다가 피처빌리티라는 말로 표현되는 저 임광형은 그 디셉션까지 여간 좋은 게 아니다. 날고 기는 타자들이 가득한 빅리그에서도 팔꿈치 각도가 지금이랑 비슷한 수준으로 떨어졌던 초반에는 오히려 더 잘 통했었다.
두 번째.
-딱!!!
이번에는 다행히 타이밍은 맞았다.
그게 커브라서 문제지. 그래도 내야땅볼 대신 파울로 끝났다. 세 번째 기회 정도는 돌아왔다는 뜻이다.
볼카운트 0-2.
세 번째.
대기타석에서 지켜보는데도 던지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체인지업이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깔끔한 삼구삼진.
이정훈이 인상을 일그러트린 채 들어왔다.
“야, 팔 각도라며. 진짜 맞아? 잘못 본 거 아니야?”
“네, 팔 각도 맞던데요. 마지막에 체인지업인 거 티가 확 나던데.”
“아씨······. 난 왜 모르겠지?”
“글쎄요······.”
***
임광형이 실소했다.
초구에 대응하는 것을 보는 순간 알 수 있었다. 아니, 알 수밖에 없었다. 하는 짓이 너무 뻔하니 생각이 읽힌다.
이정훈 저 녀석 지금 체인지업을 노리고 있다.
설마 앞서 최수원이 자신의 체인지업을 두들겨서 홈런을 만들었다고 자신도 그게 가능할 거라고 믿는 건가?
심지어 커브조차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면서 쓸데없이 배트 타이밍을 늦게 가져가다니.
이어지는 볼카운트 0-2에서는 앞선 타석에서처럼 공을 커트하는 것으로 카운트를 벌어 가려는 의도가 너무 보이기에 체인지업 하나를 넣었더니 그대로 헛스윙 삼진.
이정훈은 나름 리그 정상급 타자 중 하나다. 그렇기에 확신할 수 있었다. 역시 임광형 자신의 체인지업을 노리고 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그것은 메이저리그에서 이미 증명됐다. 심지어 그 시대 최강의 타자였던 마이크 트라웃조차도 그의 체인지업만큼은 제대로 공략해내지 못했었다.
타석에 최수원이 들어왔다.
두 번째 타석.
아직 앳된 얼굴의 그가 방망이를 치켜세웠다. 그 기세의 삼엄함이 어찌나 날카로운지 그 분위기만으로도 살이 베일 것 같았다.
그렇기에 정병철은 그에게 굳이 말을 걸었다. 그 기세에 살짝 바람이라도 빼놓고자 하는 마음을 담아서.
“축하한다.”
“네?”
“연속 홈런. 세계 최다 연타석 홈런이랑 타이기록이라며. 한국에서는 최초고.”
“아, 그거요.”
정병철의 이야기에 최수원이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답했다.
“근데 그건 아직 축하하시기에는 좀 이른 것 같은데요.”
“어?”
“아직 안 끝났잖아요. 기록 경신. 축하는 원래 결과가 나오고 하는 거지, 진행 중에 하는 거 아니죠.”
장대 높이 뛰기나 멀리뛰기 같은 종목에 세계 기록이 나왔다고 경기가 끝난 것인가.
아니다.
수원이 생각하기에 기록이란 그 자체로 의미가 있지만, 그보다는 그 다음으로 넘어갈 수 있는 자격증과 같은 역할을 하기에 더 의미가 있다. 본래 61호 홈런이란 62호 홈런을 치기 위한 발판 아니던가.
“허······. 새끼. 진짜 꿈 하나는 기똥차네.”
“꿈은 잘 때 침대에서 꾸는 게 꿈이고요. 제가 하는 건 다가올 예견? 뭐 그런 거죠.”
“아까 세러모니 할 때부터 알아봤지만 싸가지는 여전하구나?”
“사람이 원래 일관성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아냐, 내가 보기엔 넌 그거 좀 없어도 괜찮을 것 같아.”
쓸데없는 잡담.
마치 칼날 같던 최수원의 기세가 조금 부드러워졌다.
정병철이 웃었다. 상대방의 화를 돋워서 흔들리게 만들지는 못했지만 적어도 김은 좀 빼놨다.
그리고 지금 마운드에 선 임광형은 한국 최고의 투수다. 비록 1회에 불시에 홈런을 허용하긴 했지만 그것으로 충분하리라.
그가 크게 와인드업했다.
초구.
바깥쪽 꽉 찬 코스.
-뻐엉!!!
살짝 존의 경계 밖으로 빠져나가는 투심 패스트볼.
최수원은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그리고 아주 잠깐의 정적.
“스트라잌!!!”
심판이 크게 스트라이크를 외쳤다. 타석의 최수원이 고개를 돌려 심판을 한 번 바라봤다.
정병철은 굳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다. 심판의 표정은 아마 영 좋지 않으리라. 이제 프로에서 고작 열몇 경기를 뛴 새카만 신인이 감히 판정에 불만이라니.
최수원 역시 그것을 느낀 것일까?
아니면 굳이 입을 열어 불만을 표할만큼의 판정은 아니었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가 다시 고개를 돌렸다.
아무래도 정병철 자신의 말로는 빡치게 만들지 못했지만, 아무래도 심판의 판정은 그를 빡치게 만드는 데 성공한 것 같았다. 처음 타석에 들어왔을 때 날카롭던 그 기세는 어느새 사라지고 그 자리를 대신하는 것은 이글이글 타오르는 것 같은 뜨거운 열기였다.
물론 모르는 사람이라면 그것도 그 나름대로 무서운 것 아닌가 생각할 수도 있다. 그래, 뭐 그런 경우도 있다. 분노는 사람을 강하게 만든다. 강속구 투수들이 괜히 마운드 위에서 소리를 지르고 화를 내는 게 아니다.
하지만 배팅은 타이밍이며 그 타이밍을 조절하는 것은 투명한 이성, 혹은 예리한 감각이다. 물론 뜨거운 분노가 빗맞은 타구에 힘을 보태주는 경우도 있긴 하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오늘 마운드에 선 투수는 임광형. 그는 한국 최고의 투수이며 이런 종류의 타자들을 가지고 노는 데 도가 튼 사람이다.
임광형이 두 번째 공을 준비했다.
비슷한 코스.
조금 더 빠지는 투심.
-딱!!!
최수원의 방망이가 튀어나왔다.
3루 파울라인 밖으로 크게 날아가는 타구. 확실히 타구의 크기는 크다. 하지만 이런 코스는 아무리 제대로 친다고 해도 파울일 뿐이다.
볼카운트 0-2.
투수에게 일방적으로 유리한 상황.
정병철이 입을 열었다.
“어때? 네가 말하는 그 예견? 뭐 그걸로 보면 아직도 막 희망이 반짝반짝 그래?”
“글쎄요, 뭔가 반짝반짝거리기는 게 보이기는 하는데······. 아, 너무 멀리 날아가서 저 하늘의 별이 된 제 타구였네요.”
“지랄한다. 불타오르는 네 희망 회로는 아니고?”
세 번째.
-뻐엉!!
방금 휘둘렀던 것에서 아주 조금 더 빠져 나간 공.
최수원의 방망이가 움직이지 않았다. 그리고 심판이 잠시 망설였다. 솔직히 말하면 이건 스트라이크를 줘도 된다고 봤다.
앞서 최수원이 휘두른 공과 크게 차이 나지 않을뿐더러 감히 신인 주제에 볼 판정에 이의를 제기한 괘씸죄. 그리고 마운드의 투수가 임광형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이 정도는 줘도 아무 상관이 없을 테니까.
하지만 5연타석 홈런이라는 대기록.
그 묵직한 부담감이 구심의 어깨를 짓눌렀다. 솔직히 존에서 조금 빠지긴 빠진 공이다. 근데 이걸 삼진을 준다?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볼카운트는 이제 1-2.
최수원이 네 번째 공을 기다렸다.
***
처음 고개를 돌려 심판의 얼굴을 본 이유는 별다른 건 아니었다.
그냥 나중에 홈런왕이나 뭐 그런 거 하고 인터뷰할 때 세계 최초 6연타석 홈런에 가장 큰 장애물은 무엇이었습니까? 이런 거 묻는 사람한테 말해줄 답을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와, 아무리 가재는 게 편이고, 팔은 안으로 굽는다고 해도. 용병한테 별 존을 주는 것도 아니고, 같은 한국 사람이 대기록 눈 앞에 두고 있는데. 짬밥 좀 더 된다고 저런 공을 잡아주다니.
솔직히 몸쪽에 저만큼 잡아줬으면 화도 안 냈을 거다.
그건 이미 1회에 그렇게 잡아줬고 이후로도 꾸준히 저런 식으로 잡아줬으니까. 근데 우타자 기준으로 바깥쪽에는 저 정도까진 안 잡아줬었는데 갑자기 저걸 스트라이크를 준다고?
임광형 저 양반도 그거에 어지간히 기분이 좋았는지 2절에 3절까지 아주 뽕을 뽑아먹을 기세로 달려들었다. 솔직히 여기서 이번 3구까지 스트라이크 콜을 했으면 별 수 없었다. 그냥 6연타석 홈런은 다음 기회로 남긴 채, 심판 얼굴에 썩은 달걀이라도 맞기를 기도하는 수밖에. 하지만 그래도 거기까지 가는 건 심판 본인한테도 어지간히 부담이었는지 스트라이크 콜은 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자, 과연 임광형은 다음 번에 무슨 짓을 할까?
4절까지 부르는 건 뇌절임을 인지하고 다른 걸 할까? 아니면 뇌절이고 뭐고 4절까지 꾸역꾸역 같은 공을 집어 던질까?
임광형이 네 번째 공을 뿌렸다.
-뻐엉!!
커브였다.
아니, 내가 이정훈도 아니고 이런 거에 속아 넘어가서 방망이가 나올 거라고 생각했다면 참 섭섭하다. 아니다. 그래 뭐, 지금 카운트도 유리하고 오늘 우리 팀 타자들이 이 커브에 제법 속아 넘어갔으니 하나 정도 안전하게 가고 싶었던 마음 이해한다.
다섯 번째.
체인지업.
확실히 티가 났다.
단단하게 받쳐놓고 그대로 휘둘렀다.
이 와중에도 임광형이 대단한 점은 초구, 내가 때리려다 말았던 코스에 가까운 곳에 체인지업을 욱여 넣었다는 점이다.
몸쪽 공에 존을 워낙 넓게 주는 관계로 존에 바짝 붙어 서지 않았으니 겨드랑이가 좀 풀리지 않고서는 도저히 스윗스팟을 때려내기 힘든 코스다.
그래, 만약 이게 빠른 공이었으면 진짜 어려웠을 거다.
근데 기껏해야 120km/h 남짓.
정말 여유롭게 타점을 뒤에 두고 극단적으로 몸을 뒤틀었다가 방망이를 후려갈겼다. 마치 이 공이 뒤에서 똥같은 판정이나 하고 있는 심판 녀석의 머리라도 되는 것처럼.
그리하여 잠깐동안 쌓였던 체증이 후욱 내려가는 느낌과 함께
-딱!!!
야구공이 높이, 높이 날아갔다.
“별이 되어라?”
“이 미친 새끼가······.”
[쳐······쳐······쳤습니다!! 최수원!!! 2-2 상황에서 임광형 선수의 체인지업을 그대로 받아 넘깁니다!! 큼지막한 타구!! 담장을!! 담장을!!!!!! 넘어갔습니다!!]
[6연타석!! 6연타석 홈런!! 세계 최초!! 6연 타석 홈런입니다!! 데뷔 1년 차!! 올해 열아홉 살의 어린 타자가 불과 재작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선발로 뛰던 임광형 선수를 상대로 연타석 홈런을 기록합니다!!]
-짝짝짝
그라운드를 도는 나에게 사방에서 박수 갈채가 쏟아졌다.
오늘 경기는 원정이었다.
물론 마린스는 요즘 페이스가 괜찮았고 덕분에 제법 많은 마린스 팬들이 경기장을 찾긴 했지만 어쨌거나 원정 경기는 원정 경기였다. 하지만 경기장에 울려 퍼지는 박수 소리는 이곳이 원정 구장이라는 것을 잊어버릴 만큼 거대했다.
역시 한국인의 정인가?
아니, 그보다는 그냥 워낙에 대단한 기록이라 그런 걸지도 모르겠다. 게다가 응원하는 팀이 아직 1점 차이로 이기고 있으니까 마음에 여유도 있겠지.
[와, 정말 이걸 뭐라고 설명을 해야 할까요. 오늘 피닉스의 마운드에 선 임광형 선수는 정말 대단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었거든요. 지금까지 3.1이닝 동안 삼진만 여섯 개에 피안타는 고작 두 개밖에 안 됩니다. 근데 그 두 개가 전부 최수원 선수의 홈런이에요. 하······. 최수원 정말 무섭습니다.]
내야를 돌아 다시 홈까지.
덕아웃에서 달려 나온 동료들이 미친 듯이 나에게 손바닥을 내밀었다. 덕분에 연달아 하이파이브를 하느라 멋지게 주먹을 불끈 쥘 시간도 없었다.
뭐, 나쁘지는 않았다.
2:3.
임광형은 또다시 삼진을 두 개 추가하며 이닝을 마무리지었다.
***
“하······ 씨······. 진짠가? 치는 거 보면 진짠데······. 돌겠네.”
“뭐가 진짜라는 건데?”
작년까지 마린스의 타선을 책임지던 사나이.
팀 내 최고 연봉자 노형욱이 이정훈에게 말을 걸어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