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3화. 성공한 투수(3)
[호······, 홈런입니다!! 최수원!! 임광형의 다섯 번째 공을 그대로 받아 넘겨버립니다.]
[5연타석 홈런!! 지난 경기 4연 타석 홈런에 이어 5연타석 홈런이 터졌습니다!! 맙소사!! KBO 최초!! 지금까지 NPB에서만 딱 한 번 나왔을 뿐 MLB에서도 한 번도 나오지 않았던 5연타석 홈런입니다!!]
[사실 저희 박동식 해설 위원님이 최수원 선수 타석 전부터 참 안절부절못하셨거든요.]
[맞습니다. 이게 기록을 앞두고 그걸 이야기하면 좀 부정을 타는 뭐 그런 게 있어서······. 아무튼 정말 대단합니다. 대단하다는 말로도 부족할 만큼 대단하네요. 게다가 오늘 선발로 선발로 마운드에 선 임광형 투수. 바로 재작년까지 메이저리그에서 선발로 뛰던 선수잖습니까? 작년에 서른다섯이라는 적지 않은 나이에 팔꿈치 수술 후 재활이라는 결정을 내리고 이번 시즌 지난 두 경기에서 15이닝 동안 27삼진 4실점 무자책이라는 터무니없는 기록을 보여줬거든요. 그런 투수를 상대로, 그것도 지금 체인지업을 두들겨서 홈런을 만들었습니다!!]
[하하, 우리 박동식 해설님이 조금 흥분하신 것 같네요.]
[아니, 이걸 보시면 흥분을 안 하기가 힘듭니다. 보세요. 27개의 삼진 가운데 무려 16개를 끌어낸 결정구가 저 체인지업이었습니다. 임광형 선수의 체인지업 하면 메이저리그에서도 알아주는 공이었거든요. 전성기였던 2023시즌을 찾아보면 임광형 선수의 체인지업은 시즌 내내 홈런을 단 하나도 허용하지 않았어요. 그것도 무려 메이저리그에서 말이죠. 놀랍습니다. 최수원. 정말 놀라워요.]
“똥식이 이 새끼. 시범 경기에서 뭐 홈런 신기록 아무것도 아니다. 정식경기 가서 죽 쑬 게 분명하다. 그러더니 말 바꾸는 것 좀 봐.”
“야, 똥식이도 마린스 빠돌이하다가 흑화한 거잖냐. 솔직히 최수원 정도 보면 다시 돌아올 때 됐지. 5연타석 홈런. 진짜 가슴이 웅장해진다. 그것도 메이저리거급 투수 상대로.”
“에이, 임광형이 솔직히 이제 메이저리거급 투수는 아니지. 말년에 완전 죽 쒔었잖아.”
“죽 쑨 거야 팔꿈치 때문에 그랬던 거지. 개막전부터 지난 경기까지 못 봤어? 무슨 삼진 머신인 줄. K/9가 16.2이라고. 이게 말이 돼?”
“하긴, 그건 또 그렇네.”
마운드의 임광형이 자신도 모르게 실소했다.
지난 두 경기. 그는 총 4점을 내주기는 했지만, 그 모든 실점은 비자책이었다. 피닉스의 수비진이 워낙에 행복 수비를 시전했던 탓이다. 하지만 이번 홈런은 달랐다.
‘체인지업을 기다리고 있었어.’
굳이 투수의 결정구를 골라서 기다리는 타자들이 있긴 하다.
자신의 실력에 확신, 혹은 환상을 가진 미친놈들. 그걸 구분하는 방법은 간단하다. 쳐내면 확신이고, 못 쳐내면 환상이다.
“재밌네.”
메이저에서까지 확실하게 자신의 기량을 입증한 서른여섯의 노장. 강속구보다는 이런저런 변화구들을 조합하여 상대를 요리하는 피처빌리티의 대명사, 보통 사람이 생각할 때는 허허실실의 야구 도사. 득도한 신선과 같은 이를 생각한다. 하지만 실상은 절대 그렇지 않다. 만약 그런 성품이라면 서른다섯의 나이에 수술과 재활을 선택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비록 구속이 2마일 가깝게 떨어졌다고 해도 KBO라면 굳이 수술 없이도 충분히 통했을 테니까.
그는 이글거리는 승부욕의 화신이었으며 메이저에 남음으로써 벌게 될 수천만 달러의 돈보다 그가 나고 자란 나라의 사람들에게 임광형이라는 투수가 역대 최고의 투수였음을 입증하길 원하는 사내였다.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은 최수원이 주먹을 불끈 쥐었다. 신인의 그 건방진 세러머니가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그래. 허락한다. 임광형 자신을 상대로 홈런을 쳐냈다면 그 정도 자축을 할 자격은 충분했으니.
-부웅!!!
“스트라잌!! 아웃!!”
노형욱이 삼진으로 물러났다.
마운드의 임광형은 주먹을 불끈 쥐지 않았다.
***
오늘 우리 팀의 선발은 5선발인 최민혁이었다.
저기 피닉스는 지난 월요일의 휴식일을 이용해서 선발 등판을 하루씩 당겼지만 우리 감독은 굳이 그런 선택을 하지 않은 탓이다. 마음에 드는 선택이었다.
고작 하루 더 쉬고 덜 쉬는 게 얼마나 큰 차이가 있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제법 있다. 당장 주 5일 근무하던 사람들한테 토요일 쉬고 일요일에 회사 나오라고 하면 업무 효율 안 나오는 건 당연지사다. 하물며 야구 선수, 특히 투수라는 건 루틴의 집합이나 다름없고 휴식일에는 휴식일 나름의 루틴이 존재한다. 그렇기에 그게 깨지면 성적도 와장창 하는 경우가 매우 많다.
[마린스의 영건 3인방 중 맏형이죠? 마운드에 최민혁 선수가 올라오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까지 마린스의 성적이 굉장히 좋은데요. 물론 여기에는 최수원 선수의 폭발적인 방망이도 한몫을 하지만 그보다 제가 주목하고 싶은 건 생각 이상으로 탄탄한 선발진입니다.]
[맞습니다. 용병 원투펀치. 100만달러짜리 용병 딜튼 도일리와 작년 이미 자신을 증명한 디에고 로드리게스 선수야 그렇다고 치더라도 최수원, 백하민의 3, 4선발이 생각보다 훨씬 훌륭한 피칭을 보여주고 있어요. 최수원 선수가 2경기 11이닝 3실점에 2자책. 그리고 백하민 선수가 2경기 12이닝에 3자책입니다.]
[5선발인 최민혁 선수같은 경우 지난 등판에서 3.2이닝 6실점으로 크게 부진했습니다만 그래도 3회 원아웃까지 상당히 좋았거든요. 아직 젊은 선수인 만큼 위기에서 흔들리는 것은 어쩔 수 없겠습니다만, 최민혁 선수가 그 부분만 극복할 수 있다면 이번 시즌 마린스. 정말 크게 기대해볼 만할 것 같습니다.]
[네, 저도 박동식 위원님의 말에 동감합니다. 사실 KBO 리그에서 다섯 명의 선발진이 다 제대로 갖춰진다는 건 정말 엄청난 의미니까요.]
오늘 나의 보직은 지명타자가 아닌 일루수.
이것 역시 사소하지만, 나의 루틴이었다. 선발로 등판한 다음 경기는 완전히 휴식. 그리고 그다음 두 경기에서는 일루수로 출장. 그리고 지명타자. 이후 투타 겸업. 장기적으로는 휴식일을 없애는 것이 베스트겠지만 그건 지금의 루틴에 적응을 한 다음도 늦지 않을 것이다.
마운드의 최민혁이 살짝 긴장된 표정으로 몇 차례 공을 던졌다.
지난 돌핀스와의 시리즈에서 나와 백하민은 나란히 첫 승을 거뒀다. 언론도 그렇고 주변에서 우리와 함께 영건 3인방이라는 이름으로 묶이는 최민혁인 만큼 부담감도 상당하리라.
그의 공이 시원하게 홈플레이트를 갈랐다.
-뻐엉!!
“스트라잌!!”
153.4km/h.
197cm에 110kg의 덩치에 어울리는 강력한 속구였다.
그리고 거기에 더해진 144km/h의 슬라이더.
계약금 10억5천만 원의 유망주 최민혁이 피닉스의 타선을 봉쇄했다. 그의 공이 훌륭한 것도 있었지만 거기에 더하여 피닉스가 현재 10개 구단 최악의 방망이를 자랑한다는 것 역시 무시할 수 없는 부분이었다.
삼진 하나.
그리고 내야 땅볼 두 개.
무실점으로 깔끔하게 이닝을 마무리 지은 최민혁이 단단하게 기합이 들어간 모습으로 덕아웃에 돌아갔다.
다시 우리의 공격 타이밍.
외야에서 돌아온 이정훈이 슬금슬금 나에게 다가와 속삭였다.
“어떻게 쳤던 거냐?”
“네?”
“아니, 광형이 형 체인지업. 어떻게 그렇게 기다렸다는 것처럼 받아 넘긴 거냐고.”
“그거야 선배가 보여줬잖아요. 체인지업.”
“그러니까 지금 설마 광형이 형 체인지업을 실제로 딱 한 번 봤는데 그걸 그렇게 기다렸다는 것처럼 받아 넘겼다고? 이거이거, 누굴 바보로 아나. 인마, 차라리 귀신을 속여. 애초에 배트 돌아가는 타이밍이 애초에 딱 체인지업 타이밍이드만.”
하, 이 양반.
참 꼼꼼하게도 봤다.
그래, 솔직히 난 임광형의 체인지업을 구분할 줄 안다.
내가 시간을 거슬러오기 전 임광형이 팔꿈치 수술 안 받고 메이저에서 쭉 뛰었던 역사에서는 언론에까지 보도됐던 이야기다. 사실 재작년 그의 메이저 말년 커리어가 꼬였던 것도 메이저 몇몇 구단에서는 이걸 눈치챈 덕분이기도 했고.
“그게, 그러니까 느낌이 좀 다르더라고요.”
“느낌?”
“네, 팔 각도가 좀 낮은 느낌?”
훗날 임광형이 언론에서 인터뷰하기로는 팔꿈치 통증이 심해진 이후 전체적으로 속구 구속이 좀 떨어졌는데 체인지업 구속은 별로 안떨어졌고 덕분에 구속의 갭이 줄어들면서 체인지업이 더 잘 두들겨 맞기 시작했었다고 했다.
그래서 구속을 떨어트리는 과정에서 팔꿈치가 좀 내려갔는데, 초창기에는 사람들이 그걸 구분 못 해서 다시 재미를 좀 봤고, 그게 조금씩 심해지다 보니 결국 어지간한 선수라면 대충 다 눈치챌 만큼 차이가 나게 돼서 망했고 그걸 수정하기도 전에 팔꿈치가 완전히 터져서 은퇴했다. 뭐 그런 인터뷰였다.
“그러면 커브는? 어떻게 구분한 거야?”
“그건 티가 좀 많이 나잖아요. 공이 부웅 하고 날아오니까.”
-부웅!!
“스트라잌!! 아웃!!”
규만 선배가 체인지업도 끌어내지 못한 채 커브에 헛스윙 삼진으로 물러났다.
“그러니까 저게 부웅 하고 날아오는 티가 많이 나는 공이라고?”
이정훈이 싸늘한 눈빛으로 나를 바라봤다.
“네.”
“아······. 이 재능충 쉑. 지가 무슨 밥 아저씨도 아니고 참 쉽죠? 이러고 있네.”
마린스의 타자들이 임광형의 공 앞에 추풍낙엽처럼 나가 떨어졌다.
KKK.
와, 분명 빅리그에서는 땅볼 유도 위주의 피칭을 하는 투수였는데 이게 수준 차이인가? 싶을 정도다. 아, 물론 MLB와 KBO의 수준 차가 아니라 MLB와 마린스의 수준 차이다. 적어도 돌핀스 타자들 정도 되면 두들기긴 했을 테니까. 아무튼 전성기 시절에 사이 영 최종 후보도 두 번이나 오른 적 있는 투수다운 피칭이었다.
“아······. 체인지업만 좀 몇 번 보면 모르겠는데 꼴랑 한 번 봐서는 아예 감도 안 오네. 진짜 팔꿈치 맞지?”
“그렇다니까요.”
“내가 볼 땐 이거 다른 사람들한테 말 안 한 거 잘한 거 맞는 것 같다. 나도 한 번 보고는 무슨 소린지 모르겠는데 괜히 이거 신경 쓰다가 오히려 더 망하겠네.”
매우 짧은 휴식.
그리고 다시 우리의 수비 이닝.
최민혁의 피칭이 이어졌다.
4번 타자는 피닉스의 상징인 채광민.
우리 팀 규만 선배와는 같은 86년생으로 마찬가지로 KBO에 굵직한 족적을 남긴 타자였다. 동갑인 규만 선배에게 묻힌 탓에 만년 2인자 이미지이기는 했지만, 피닉스의 각종 타격 관련 기록은 거의 다 가지고 있다고 봐도 무방할 만큼 대단한 타자였다.
-딱!!!
둔한 몸에 어울리지 않는 부드러운 타격폼.
그가 잡아당긴 타구가 유격수의 수비를 뚫어냈다. 주루 역시 둔한 몸치고는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안정적인 안타.
그리고 타석에 정병철이 들어왔다.
컸다.
정병철은 내가 시간을 거슬러오기 전에 나와 항상 KBO의 MVP를 다투던 선수였다. 당시 그의 유일한 약점은 팀이 포스트시즌을 절대 나갈 수 없는 마린스라는 점이었다. 그런 의미에서 보자면 그는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옴으로써 가장 큰 수혜를 입은 선수일지도 모른다.
아, 물론 마린스 거르고 피닉스면 별로 바뀐 게 없을 수도······.
아무튼 본래 정병철은 데뷔 1년 차부터 1군에서 제법 활약을 했었다. 경하고 출신으로 마린스에 1라운드 전체 1번으로 뽑혔으니 1군에서 일단 사용되는 건 너무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진짜 제대로 터진 것은 4년 차였던 2029년으로 내가 대폭발해서 타격 4관왕을 하고 MVP를 받았던 해였다.
하지만 역시 마린스라는 환경은 그에게 독이었던 것일까?
역사가 바뀐 지금 그는 본래보다 무려 3년이나 빠르게 자신의 포텐셜을 폭발시켰다.
-딱!!!
시원하게 뻗어나간 타구가 좌측 외야 담장을 두들겼다.
정훈 선배가 열심히 달렸지만 소용 없었다. 채광민은 우리 규만 선배와는 달리 큰 덩치에 어울리지 않는 주력까지 갖춘 타자였다.
1:1 동점.
최민혁이 눈에 띄게 흔들렸다.
그리고 그 흔들림은 곧 결과로 이어졌다.
추가 2실점.
그나마 거기서 더 추가점을 내주지 않은 것은 실책만큼이나 파인플레이도 종종 보여주는 우리 중견수 이주혁이 환상적인 수비를 보여준 덕분이었다.
1:3.
임광형은 여전히 좋은 공을 뿌렸다.
이주혁이 수비에서 좋은 모습을 보이면 공격에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확률이 높다는 속설 따위. 정말 속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보여주며 깔끔한 삼구삼진.
이어지는 한교철이 KBO에서 포수 타석은 원래 쉬어가는 것이라는 것을 증명하며 깔끔하게 내야땅볼.
그리고 서경준이 6구까지 끌고 가는 승부 끝에 장렬하게 삼진아웃.
“아······. 무슨 체인지업을 하나를 안 던지냐?”
계속되는 경기.
이정훈의 투덜거림 속에서 3회 말이 무탈하게 흘러갔고 마침내 4회 초. 그의 타석이 돌아왔다.
“그러니까 체인지업 팔 각도 낮은 거 맞지? 확실하지?”
상당히 미심쩍은 정보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