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2화. 성공한 투수(2)
이정훈은 최근의 마린스가 상당히 괜찮다고 느끼고 있었다.
그는 기본적으로 상당히 자유로운 영혼의 소유자였는데 그에게 10년 전의 마린스는 그야말로 지옥과도 같았다.
말로만 듣던 군대가 이러했을까? 학교에 다니던 시절 가끔 모교방문을 했던 아주 연차 많은 선배님들의 무용담이 마린스에서는 실제로 벌어지고 있었다. 심지어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성골이니 진골이니. 혹은 육두품이니.
솔직히 처음에는 그게 무슨 말인지도 몰랐다. 국사는 선택과목도 아니었고 그가 학교 다니던 시절만 하더라도 야구부가 공부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으니까. 아무튼 그게 뭐 신라 시대에 신분제도였다는 것은 그리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정훈이 성골도 진골도 아닌 육두품이라는 점이었으니까.
처음에는 우스웠다.
아니, 애들 장난도 아니고 이게 다 무슨 짓인가. 하지만 그 우스움은 곧 무서움으로 변했다. 애들 장난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팀에서 가장 위대한 타자인 이규만 역시 성골이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는 진골에 속했다. 그런 그가 팀의 대표가 됐을 때, 이정훈은 이 모든 것이 괜찮아지겠지 생각을 했었다.
하지만 신라의 태조무열왕 김춘추가 왕이 됐다고 육두품들의 처우가 딱히 크게 개선되지 않았던 것처럼 그저 이전까지는 진골과 성골을 구분하던 그 경계만이 희미해졌을 뿐 타지 출신들을 향한 차별은 여전히 존재했다.
그리고 직장이라는 곳에서 업무적인 스트레스 이상으로 인간관계에 스트레스가 생긴다면 업무에도 지장이 생기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그 와중에 그나마 다행인 점이 있었다면 그것은 이정훈 본인이 제법 훌륭한 야구선수였다는 점, 그리고 그 멘탈의 단단함이 본인이 생각하는 것 이상이었다는 점 정도였다. 그런 상황에서도 꾸역꾸역 성적을 기록하며 1군에 붙어있을 수 있었다.
하지만 아무 연고도 없는 외지에서 직장 동료들마저 적대적이었으니 그가 유흥에 빠진 것은 어쩌면 필연일지도 몰랐다.
“부산에 남은 이유요? 에이, 뭐 별 거 있겠습니까? 당연히 돈이죠.”
거짓말이었다.
현역 시절 꼴값 떨던 놈들이 코치로 부임해서까지 꼴값을 이어가는 게 아니꼬워 10억을 덜 줄더라도 서울로 가려던 그를 잡았던 것은 새로 부임한 단장이었다. 그는 비록 외국인 감독은 실패했지만 그런 개혁을 이어갈 것이라 그에게 확언했다.
이 망할 팀에 애정이 남았던 것일까?
어쩌면 사직구장에 ‘이정훈’이라는 이름이 박힌 저지를 입고 모였던 사람들의 주머니를 생각해서일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한 장이 돈 십만 원은 할 텐데 자원 한 톨 안나는 나라에서그 많은 옷이 못 입는 옷이 되는 건 좀 그렇지 않은가.
최근 몇 주.
이정훈은 조금씩 느끼고 있었다. 어쩌면 지금이 ‘타이밍’이 아닐까?
컨디션은?
솔직히 모르겠다. 안 놀고 잤다고 막 몸이 날아갈 것 같고 그렇지는 않았다. 오히려 밤에 술 안 마시고 자려니까 잠이 잘 안 와서 잠을 설쳤다.
마운드에 투수는 임광형.
또라이다.
아니, 그냥 미국에서 은퇴나 할 것이지 대체 피닉스에 뭐 받아먹을 게 있다고 돌아와서 저러는 건지.
초구.
143.4km/h의 속구.
-부웅!!
“스트라잌!!”
미친 듯이 정교하게 보더라인에 걸쳐 들어온 속구였다.
하지만 단순히 로케이션 때문에 당한 것은 아니다.
타이밍이 달랐다.
‘투심?’
본래도 완급조절, 다양한 구종의 활용으로 유명했던 선배였다. 그런데 미국물 좀 먹고 오더니 더 지독해졌다. 조금 전 서경준에게 던졌던 포심과 완전히 같은 폼, 같은 코스로 투심을 던졌는데 테일링이 기가 막히다.
두 번째.
마찬가지로 바깥쪽 꽉 찬 코스.
-뻐엉!!
휘두르던 방망이를 간신히 멈춰 세웠다. 포수가 3루심에게 체크스윙 여부를 물었다. 동방예의지국답게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대신 양손으로 공손히. 3루심이 그의 공손함에 화끈한 주먹으로 답을 했다.
“스트라잌!!”
슬라이더인 걸 깨닫고 곧바로 방망이를 멈췄는데 이게 스트라이크라니. 억울하다는 표정으로 구심을 한 번 바라봤지만, 딱히 달라지는 건 없었다. 육두품의 설움 중 하나다. 한국 야구판은 죄다 인맥에 학맥인데 이게 심판들도 전원 프로리그 출신이다 보니 위쪽으로 선이 없는 것은 이런 순간에도 서럽다.
물론 어떻게 보면 피해의식이라고 볼 수도 있긴 하다. 심판이 정말 정확하게 판정내린 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이정훈 입장에서는 또 그런 생각을 아예 안 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세 번째.
투심.
-딱!!!
배트를 짧게 쥐고 밀어내는 느낌으로 커트를 했다. 3루 파울라인을 슬쩍 벗어난 공이 바닥을 굴렀다.
카운트가 별로일 때, 좋은 공이 올 때까지 버티는 전략이다.
물론 마운드에 선 투수가 임광형인 만큼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모르는 일이다. 하지만 이정훈 역시 마린스에서 벌써 11년째다. 버티는 데는 이골이 날 대로 났다.
네 번째.
드디어 포심.
하지만 코스가 너무 구렸다.
-뻐엉!!
첫 번째 볼이었다.
카운트는 이제 1-2.
대기 타석에 최수원이 보였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 골품제가 뭔지도 몰랐던 이정훈은 이제 그게 과거 이 땅에 존재했던 신라라는 나라의 제도이며 진골이 결국 왕위에 올랐던 것과 달리 6두품은 신라라는 나라가 망하는 순간까지도 6두품이었던 것까지도 알고 있었다.
‘그러니까 저 최수원이 이제 이 마린스라는 팀이 망할 징조라 이건가?’
아니, 그럴 리가.
고작 10개 팀밖에 없는 리그에서 35년 간 우승을 못했으면 그건 이미 망한 것이나 다름 없다. 그러니 마린스는 이미 망한 팀이다. 망한 걸 어떻게 또 망하게 할까. 그러니까 이건 그냥 신라가 망한 자리에 고려가 새로 세워진 것처럼 마린스가 새롭게 태어날 징조라고 봄이 타당할 것이다.
-딱!!
두 번째 커트.
그래도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잘 맞았는지 야구공이 3루 내야 관중석 깊숙한 곳까지 날아갔다.
‘그러면 수원이가 왕건이고 나는 궁예 정도 되는 건가? 근데 외눈 대머리는 너무 폼이 안 나는데······.’
쓸데없는 잡생각.
하지만 그럼에도 이정훈의 방망이는 예리했다.
-딱!!
벌써 세 번째 커트.
1군으로만 11년을 버텨낸 선수의 날카로운 스윙이 147.9km/h의 포심을 3루 파울라인 너머로 날려 보냈다.
볼카운트는 여전히 1-2.
마운드의 임광형이 일곱 번째 공을 던졌다.
이정훈의 방망이가 움직였다. 상당히 늦게 시작된 스윙이었다.
변화구에 맞춘 타이밍이었으며 속구라면 커트를 해낼 만한 타이밍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늦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123.8km/h의 체인지업.
터무니없이 느린 공이었다. 이것은 임광형이 메이저에서 6년이나 뛸 수 있었던 가장 강력한 무기로 실제로 임광형의 전성기를 기준으로는 플러스플러스급의 평가를 받았던 공이기도 했다.
공 7개 만에 헛스윙 삼진.
좀 아쉬운 결과였다. 한때 이 짓거리에 심취했을 때 읽어봤던 메이저리그의 리포트에 따르면 타자가 10개 정도 공을 보면 삼진을 당해도 이득이라고 했으니 이건 분명히 손해다.
하지만······.
“선배 잘 봤습니다.”
“좀 알겠냐?”
“네, 오늘 체인지업 타이밍이 어떨지가 궁금했는데 딱 좋네요.”
대기 타석에 있던 마린스의 최고 타자가 방망이를 쥐고 타석으로 걸어갔다.
KBO 역사상 한 번도 없었던. 그리고 세계 야구 역사에도 단 한 번밖에 없었던 5연타석 연속 홈런에 도전하기 위하여.
***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면서 역사에 상당히 많은 변화가 생겨났다.
거기에는 나와 상관이 크게 있는 부분, 그러니까 2026년과 27년의 드래프트 같은 부분도 있었지만, 내가 생각할 때 나와는 크게 상관이 없는 부분도 존재했다.
그 가운데 하나가 바로 임광형이다.
정확히 기억난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도 난 분명 저 선배를 상대해본 적이 있다. 하지만 그게 1년 차인 올해는 절대 아니다. 임광형은 분명 팔꿈치 수술을 하지 않았었고 빅리그에서 3년을 더 뛰고 돌아왔었다. 내가 처음 MVP를 따냈던 2029시즌이 저 선배가 복귀하던 해였고, 그 당시 저 선배 복귀전에서 내가 멀티홈런을 쳐냈었다.
다만 그 당시 임광형은 148km/h 수준의 속구 대신에 145km/h가 될까 말까한 속구를 던졌었다. 그것도 이를 악물고 밸런스까지 깨트려가면서.
그런 의미에서 오늘 임광형은 정말 전혀 다른 투수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진짜 현역 메이저리거라고 해도 믿을 것 같다. 괜히 용병 투수 둘 다 젖히고 1선발로 뛰는 게 아니다. 물론 커리어 자체도 비교할 수 없을만큼 대단하긴 했지만.
아무튼 전성기의 임광형은 피처빌리티가 매우 뛰어나다는 평가를 듣던 투수였다. 쓸데없이 어려운 말이기는 한데 대충 요약하자면 제구력 좋고, 그 좋은 제구력 활용할만큼 영리하고 경험 많으며 다양한 구종을 구사 가능한 투수라는 뜻이다. 대충 구속 빼고 다 갖춘 투수한테 붙는 이야기라고 보면 된다.
그 구속 빼고 다 갖춘 메이저리그급 투수가 공을 던졌다.
초구는 빠른 공이었다.
방망이를 휘둘렀다.
로케이션이 정말 기가 막혔다.
몸쪽 깊숙한 코스에 높은 공.
방망이를 멈춰 세웠다.
-뻐엉!!
“스트라잌!!”
마운드의 임광형이 씨익 웃었다.
그러니까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보다 한살이 많은 투수다.
경험치만 따지자면 나와 호각. 생각도 얼추 나랑 비슷했을 것이다.
‘너 지금은 이런 공 못 치잖아. 안 그래?’
맞다.
기록을 세우는 중이 아니었다면 호쾌하게 휘둘러 볼 수도 있었겠지. 하지만 방금 공은 안타라면 몰라도 어지간해서는 담장을 넘기기 힘든 코스였다. 솔직히 이런 공에 스트라이크 콜을 받아낸 것도 앞에서 오늘 구심의 존을 거의 정확하게 파악한 결과다.
게다가 그 존에는 서비스 면적도 좀 포함이 됐다. 젠장. 하지만 어쩔 수 없다. 아파트도 최신형으로 오면 베란다의 서비스 면적이 넓어지는 것처럼 투수는 짬밥 되고 커리어 짱짱할수록 서비스 면적이 좀 넓어지는 법이다. 오늘 구심도 40대쯤 돼 보이니까 어쩌면 현역 시절에 임광형과 붙어봤을지도 모르겠다.
두 번째.
홈플레이트에서 살짝 물러난 나에게 유혹하듯 공이 날아온다.
바깥쪽 낮은 코스에 빠른 공.
-뻐엉!!!
투심이었다.
이번에는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는다. 임광형이 눈썹을 치켜든다. 미국에 살다 와서 그런가? 투수치고는 표정이 상당히 풍부하다. 너 홈런 치고 싶어 죽겠는데 낮은 코스 빠른 공에도 방망이를 안 내밀어? 뭐 대충 그런 표정인 듯 싶다.
1-1
세 번째 복판으로 날아오는 공.
하지만 커브다.
훅 하고 떨어져 바닥을 한차례 찍고 포수의 미트로 빨려들어갔다.
솔직히 이건 피처빌리티고 뭐고 티가 좀 났다. 빅리그에서도 커브는 거의 안 던졌던 것 같은데 이 영감님 오늘 흥이 좀 나신 모양이다. 그게 아니면 정말로 내가 홈런 때문에 눈이 돌아서 복판에 오는 공이면 무작정 방망이를 휘두를거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르겠다.
이제 카운트는 1-2.
난 아직 방망이도 한 번 안 휘둘렀는데 쓸데없이 수 싸움만 잔뜩 오간 느낌이다. 하여간 피처빌리티가 높은 투수라는 애들은 이래서 좀 별로다. 여기서 더 별로가 되는 경우는 쟤들 설계대로 쑥 빨려 들어가는 경우고.
네 번째.
빠른 공.
-딱!!!
힘차게 방망이를 휘둘렀다.
타구가 시원하게 쭉 뻗어는 나갔다. 그래서 방망이를 던져놓고 일단 뛰었다. 하지만 손맛이 영 별로다. 몸쪽으로 들어온 공이었는데 투심이었다. 그나마 마지막 순간에 겨드랑이를 좀 풀어서 망정이지 아니면 그대로 뜬공 아웃이 됐을 공이다.
[빠른 타구!! 아, 하지만 좌측 폴대를 살짝 벗어났습니다.]
역시나 파울 홈런이었다.
마운드의 임광형도 살짝은 놀란 것일까? 얼굴에 드러나던 풍부한 표정이 싹 사라졌다.
그래.
지금 네 앞에 선 타자는 네가 기특하게 볼 어린 후배가 아니다.
그리고 다섯 번째 공.
좋다.
체인지업이다.
타자의 타이밍을 흐트러트리는 공.
심지어 임광형의 체인지업은 그 움직임 역시 상당히 날카롭다. 아마 그의 전성기 1년을 기준으로 한다면 리그 전체를 통틀어도 열 손가락 안에는 들어가는 공일 것이다. 리그의 체인지업을 통틀어 열 손가락이 아니다. 리그 전체의 모든 구종을 통틀어 열 손가락이다.
-딱!!!
하지만 나는 야구의 역사를 통틀어 다섯 손가락 안에 들어가는 타자라고 자부할 수 있었다. 그런 타자가 투수가 던지는 공이 체인지업이라는 것을 이미 알고 있는데 과연 못 칠 수 있을까?
그래, 난 오늘 선발로 등판한 임광형이 던지는 체인지업을 구분할 수 있었다.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1:0
야구 역사상 두 번째로 기록된 5연타석 홈런.
그리고 마운드에 임광형은 아직 여력이 충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