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0화. 그에게 홈런이란(6)
사실 나를 외야로 활용하는 방안에 관해서는 내가 마린스에 입단하던 시기부터 꾸준히 논의되던 부분이었다.
지명타자와 일루수만이 가능하다는 것은 선수 본인에게도 그리 좋은 일은 아니었다. 게다가 내가 보여줬던 운동능력과 센스를 생각하면 더더욱 아쉽다고 생각했겠지. 물론 팀 전력적인 측면에서 보더라도 반쪽짜리 선수나 다름없는 지명타자보다야 외야수가 유용한 건 더 말할 것도 없을 테고.
하지만 그런 잡다한 이유를 떠나 정말 결정적인 부분은 바로 ‘지명타자의 소멸’에 관한 규칙 때문일 것이다. 야구의 룰이 복잡한 것은 사실 그 역사가 너무 오래된 탓도 적잖은데 지명타자의 소멸 역시 그런 규칙 중 하나다.
투수를 대신해서 지명타자를 내놓는 것은 오직 경기 시작 시에만 가능하다. 또한, 경기 중에 지명 타자 슬롯에 투수가 대신 타격 하는 것은 가능하지만 그 역은 불가능하다.
즉 오늘 내가 방망이를 휘두른 것은 내셔널리그 식의 투수 타석에서 방망이를 휘둘렀다는 개념이 아니라 지명 타자와 투수를 동시에 수행하고 있다는 개념이다. 그리고 이 역할을 둘로 다시 쪼개 놓는 것은 오타니 룰이 없는 KBO의 규칙 상으로는 불가능하다.
[아, 이게 어떻게 된 거죠? 왜 최수원 선수가 갑자기 외야로 나가는 걸까요?]
[아무래도 최수원 선수를 계속 타석에는 세우려는 의도인 것 같습니다. 하지만 이거 최수원 선수 외야를 보는 게 가능했었나요? 제가 알기론 일루와 지명타자 경험밖에 없거든요.]
[아무래도 이규만 선수를 내릴 수는 없으니 그런 것 같습니다.]
“아니, 오늘 서경준이 빠따 괜찮은데 뭐 칸다고 무리까지 해가믄서 최수원이를 외야로 내보내노? 그냥 이규만이 내리뿌라.”
“맞아. 오늘 규만이 3타수 무안타 아님?”
“그냥 무안타면 내 말도 안 한다. 병살타 아이가. 병살타.”
손에 낀 외야수용 글러브가 영 어색했다. 확실히 투수 글러브보다 무겁고 길다. 물론 일루수용 미트보다는 얇고 가볍지만, 무게 중심이 조금 다르다고 해야할까?
“수고해라.”
“네. 수고하셨습니다.”
그라운드를 내려가는 서경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당연하다. 교체되는데 기분 좋은 선수는 없다. 게다가 오늘 그의 타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그러니 더 아쉬울 수밖에.
내 뒤를 이어 마운드에 올라온 투수는 한명훈.
작년 6승 11패. 평자책 4.11 그리고 토종 최다승. 하지만 이 말은 절대 비꼬는 말이 아니다.
그는 ‘마린스’의 선발 투수로 저만한 성적을 거뒀다. 최민혁이나 하민이 형이 워낙에 계약금이 거대하고 나이가 깡패라 기회를 푸쉬받고 있는 거지, 한명훈 역시 언제든지 그들을 제치고 선발 자리를 차지해도 이상하지 않은 ‘실적’이다.
분명 한명훈은 작년 기준 마린스 ‘최강의 토종 투수’라는 표현에 어울리는 실력을······.
-딱!!
[쳤습니다!! 높게 뜬 타구!!]
하여간 이놈의 팀. 뭔가 칭찬만 하려고 하면 이 모양이다. 그나저나 타구 방향이 내 쪽이다. 마운드에 섰을 때나 타석에 섰을 때보다 더 긴장 되는 순간이었다. 나의 외야 수비가 좀 엉망인 탓이다.
외야수는 타격의 순간 공이 어디로 향할지를 대충 짐작해야 하는 데 이건 꾸준한 훈련으로 쌓아 올린 경험만으로 가능한 부분이다. 그리고 그건 당연히 어린 나이부터 시작하면 시작할수록 좋다. 고등학교 이후로 외야수로 전향한 선수들이 고전하는 게 모두 그 때문이다.
실제로 그런 유형의 선수들 대부분이 젊었을 적에는 빠른 발이랑 강한 어깨를 활용해서 꾸역꾸역 외야수로 버티다가도 나이 좀 먹고 발 조금 느려지면 금방 외야 수비 불가 판정 받는 게 모두 이 타구 판단 때문이다.
물론 나의 외야 수비가 좀 엉망이라고 해도 이런 평범한 외야 플라이까지 못 받을 정도는 아니다. 이 빠르고 탄력 있는 스무 살의 몸으로는 더더욱 그렇다.
그러니 빠르게 달려가 여유 있게 등을 돌렸다.
‘어?’
그리고 왔던 방향으로 다시 몇 걸음 돌아갔다. 너무 많이 이동한 탓이다.
[아웃!! 아웃입니다. 최수원 선수 처음 들어간 우익수 자리에서 수비를 아주 훌륭하게 해냈습니다.]
[이게 쉬워 보이지만, 절대로 그렇지 않거든요. 살짝 몸이 더 나가긴 했습니다만 워낙에 발이 빨라서 금방 커버가 됐네요.]
“뭐지? 나 방금 수원이 수비에서 뭔가 익숙한 향기를 느꼈는데?”
“설마······. 이주혁?”
“와, 씹······. 나 방금 소름. 수원이 설마 외야 수비 이주혁한테 과외라도 받은 거야? 갈지자 수비법은 이주혁 개인용 필살기 아니었어?”
“아니, 우린 어쩌면 큰 오해를 하고 있었던 걸지도 몰라. 저건 하드웨어가 소프트웨어를 ‘압도적’으로 능가하면 나타나는 자연적인 현상일지도······.”
“근데 그러면 수원이야 외야수 처음이니까 그렇다 치고 벌써 외야수만 6년째인 이주혁은 왜 저 모양인데?”
“그거야 6년 정도로는 육상 메달리스트급의 육체를 채워 넣기엔 너무 부족했던 게 아닐까?”
[6회 초. 투아웃 주자 2루의 위기를 한명훈이 무사히 잘 막아냈습니다.]
[작년 선발로도 준수한 모습을 보여줬던 한명훈 선수. 이번 시즌에는 필승조로 나와서 정말 훌륭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어요.]
[다만 걱정되는 부분은 2이닝 이상을 소화하는 경기가 좀 많다는 점인데요.]
[그렇죠. 물론 작년까지 선발로 뛰었던 만큼 긴 이닝을 던지는 데는 익숙하겠습니다만 아무래도 선발은 루틴이 확실한 반면에 불펜은 언제 나올지 모르는 상태로 자주 등판해야 하니까요.]
와, 순간적으로 진짜 식겁했다.
생각보다 공이 덜 뻗었다. 단순한 플라이볼이었으니까 망정이지 만약 제대로 된 배럴 타구였으면 큰일이 날 뻔했다.
6회 말, 그리고 7회 초 수비 이닝이 훅 지나갔다. 다행히 내 쪽으로 떨어지는 타구는 더 없었다. 6회 말 공격에서 감독이 한명훈 대신 대타를 쓸까 고민했던 것 같은데, 대타 안쓰고 타석 하나 날린 보람이 있는 훌륭한 피칭이었다.
그리고 7회 말.
타순은 2번 타자인 이정훈부터.
다음 순번인 나 역시 곧바로 방망이를 챙겨서 대기 타석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이런저런 이야기를 늘어놓았을 이정훈이 조용했다.
전전 타석에서 싹쓸이 홈런 치겠다더니 타점 하나 보태줘서 고맙다고 좀 놀린 탓일까? 아니면 직전 타석에서 선배만 나가셨어도 3타점짜리 홈런이었을 텐데 2타점짜리 홈런이라서 아쉬웠다고 놀린 탓일까? 이번에는 표정부터가 제법 비장했다.
지금 돌핀스의 마운드에 선 투수는 오늘 선발로 나왔던 유형준이 아니었다.
나에게 홈런을 두 방째 허용했을 때 그의 멘탈은 이미 너덜너덜했었다. 지금 올라온 투수는 조중우. 오늘 경기 돌핀스가 내민 세 번째 카드였다.
-부웅!!
초구.
각이 큰 슬라이더에 적극적으로 방망이를 휘두른 이정훈이 속았다.
“스트라잌!!”
인상을 찌푸린 그가 잠시 타석에서 물러나 크게 호흡을 가다듬었다.
타자들 가운데는 수비 직후에 타석에 들어서는 것을 좋아하는 경우도, 싫어하는 경우도 있었는데 아무래도 이정훈의 경우는 후자인 듯싶었다.
두 번째.
조중우가 던진 공이 예리하게 존의 구석을 공략했다.
-딱!!
하지만 마치 기다렸다는 것처럼 휘두른 이정훈의 방망이가 그 공을 크게 퍼 올렸다.
[쳤습니다!! 이정훈!! 우중간!! 큼지막한 타구!! 쭉쭉 뻗어나갑니다!!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방망이를 내던진 이정훈이 나를 한 번 바라보고 씨익 웃었다. 그 미소가 너무 자신만만해서 차마 뭐라 말할 수가 없었다.
돌핀스의 중견수인 강일진이 쭉쭉 달려 나갔다.
물론 우리 중견수인 이주혁만큼 빠르지는 않았다. 애당초 이주혁은 야구선수보다는 육상선수가 어울리는 주력이다.
아무튼 빨랐다. 그리고 이주혁과 달랐던 점은 그의 걸음에 ‘확신’이라는 것이 담겨 있다는 점이었다. 내가 가는 곳에 공이 떨어질 것이라는 강한 확신. 달려가던 자세 그대로 등을 돌리고 힘차게 글러브를 뻗었다.
-뻐억
[와우!! 강일진!! 슈퍼 캐치!! 이거 이거, 쉽게 보기 힘든 정말 대단한 수비가 나왔습니다!!]
[7회 말, 점수는 여전히 넉 점 차. 돌핀스 선수들 아직 집중력을 잃지 않았습니다.]
[4과 5점. 고작 1점 차이지만 그래도 느낌이 좀 다르거든요. 전자는 만루홈런 한 방이면 따라잡을 수 있는 점수지만 후자는 만루 홈런을 쳐도 따라잡을 수 없는 점수란 말이죠. 과연 지금 이 수비가 오늘 경기에 어떤 결과를 초래할지. 경기 계속됩니다.]
일루를 향해 느긋하게 달려가던 이정훈이 딱딱하게 굳었다. 근데 이런 말은 조금 그렇지만 뭔가 저 선배는 홈런 치고 들어와서 거들먹거리는 것보다 홈런인 줄 알았는데 외야플라이라 쪽팔려 하는 게 더 어울리긴 한다.
“아······. 그게 잡히네.”
“아까웠어요.”
“그러니까. 이래서 사직 담장 좀 당겨야 한다니까.”
“그나저나 방송에는 멋지게 홈런 치고 느긋하게 걷는 그림으로 잡혔을 텐데······.”
“뭐, 내가 겉멋 들었다고 욕먹는 게 하루, 이틀도 아니고. 그냥 좀 쪽팔리고 마는 거지. 그리고 경기 이기면 딱히 그런 말도 없을 거야. 게다가 오늘 화제의 중심은 따로 있잖아.”
“그건 그렇죠.”
“가서 시원하게 한 방 더 날려봐. 누가 그러더라. 기록을 세울 기회는 자주 오는 게 아니니까 기회가 왔을 때 잡아야 하는 거라고.”
“네.”
[7회 말. 원아웃에 주자 없는 상황. 타석에 최수원 선수가 올라옵니다. 오늘 경기 네번째 타석입니다.]
[3타석 3타수 3안타 3홈런 타점만 일곱 개. 마린스는 오늘 경기 타점이 모두 최수원 선수의 홈런에서 나왔습니다.]
1사에 주자 없음.
타석에 타자는 오늘 3타수 3홈런을 쳐낸 괴물.
그리고 점수는 4점 차이.
사실 상식이 있다면 여기선 거르는 게 맞다. 하지만 아마 상대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내가 홈런을 치고도 더 화려하게 세러모니를 못하는 것이 야구의 불문율인 것처럼 기록을 고의로 방해하지 않는 것 역시 야구의 불문율이기 때문이다.
물론 MLB와 달리 한국은 거기에 조금 더 관대하다. 불문율이고 뭐고 그래도 팀의 승리가 더 우선이라는 인식 때문이다.
뭐, 어느 게 더 옳다고 말할 수는 없다. 왜냐하면 우리는 룰에 맞춰 경기를 하고 있지만, 그 경기는 결국 팬들에게 ‘보여주기 위해’하는 경기이기 때문이다. 미국의 야구팬들은 설사 팀의 승리가 달려있어도 정면승부가 아닌 형태로 기록을 방해하는 것을 비겁하다고 생각하지만, 한국의 야구팬들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이건 그냥 문화가 다른 거다.
하지만 지금 점수는 무려 4점 차이. 게다가 루상에 주자도 없는 상황이다. 홈런을 친다고 해도 1점 추가다. 그런데 여기서 만약 고의사구로 나의 연타석 홈런 기록을 깨트린다? 솔직히 그건 선을 넘는 거다.
장담한다.
만약 그런 짓을 한다면 다음 경기부터 돌핀스 타자들은 내가 등판하는 모든 경기에서 머리에 강철을 덧댄 헬멧을 쓰고 나와야 할 거다.
그리고 내 예상처럼 돌핀스의 덕아웃은 심판에게 고의4구 신호를 보내지 않았다.
고교야구와 달리 프로는 진작부터 경기촉진룰을 적용하고 있었고 그에 따라 고의4구는 굳이 공을 던지지 않더라도 감독이 의사만 표현하면 고의4구를 인정한다.
마운드에 선 조중우가 신중하게 공을 준비했다.
-뻐엉!!
존을 벗어나는 초구.
-뻐엉!!
존을 또 벗어나는 두 번째 공.
-우우우우우
사직구장을 울리는 거대한 야유.
그 속에서 모자를 벗어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내는 투수.
그리고 제 3구.
나쁜 공은 아니었다.
그래, 분명 나쁜 공은 아니었다.
그냥 조금 전 이정훈에게 홈런을 맞을 뻔했던 공과 비슷한 정도?
그것으로 충분했다.
-딱!!!
이번에는 강일진도 공을 쫓지 않았다.
사직 외야의 최상단.
큼지막한 네 번째 홈런포가 떨어졌다.
[투수 최수원 데뷔 첫 승!! 그리고 역대 세 번째 한 경기 4연타석 홈런!!]
[최수원. ‘그냥 내가 잃은 점수만큼 따오자는 생각으로 휘둘렀을 뿐, 기록 같은 것은 딱히 의식하지 않았다.’]
[최수원 일요일 돌핀스와의 3차전 결장!! 신기록 도전은 다음 화요일 대전 원정으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