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9화. 그에게 홈런이란(5)
“어?”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것은 아무래도 나만이 아니었던 듯싶다.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여전히 상·하체가 분리된 쪼유의 타구가 절묘한 위치에 떨어졌다. 그래 BABIP 신이 항상 적팀만 도우라는 법은 없다. 가끔 이렇게 우리 팀도 돕고 그래야지.
아슬아슬한 타구였다. 하지만 포수 주제에 쓸데없이 발이 빠른 조유진이 일루에 도착하기에는 충분한 타구이기도 했다.
“세이프!!”
대기 타석에 있던 서경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타석으로 나갔다.
그리고 그 뒤를 이어 이정훈이 방망이를 챙겨들었다.
“수원아, 형이 나가서 점수 벌어올게.”
“그저 또 1타점짜리 홈런만 아니면 좋겠습니다.”
“저런······. 그건 들어주기 힘들겠다. 내가 앞에서 싹 쓸어버릴 예정이거든.”
“지금 이거 설마 예고 삼중살?”
“홈런!! 인마, 홈런!!”
“아······. 네······.”
“너 인마, 이거 대답이 상당히 불손해. 다녀와서 보자.”
마운드의 유형준이 한숨을 내쉬었다.
뭐, 저딴 녀석에서 안타를 허용했으니 충분히 그럴만하다.
[노아웃에 주자 1루. 타석에 서경준 선수가 올라왔습니다.]
[개인적으로 여기서는 번트도 조금 조심해야 한다고 봅니다. 서경준 선수가 번트를 정말 기가 막히게 대거든요. 좀 올드한 타입의 2번 타자라고 볼 수 있습니다.]
[작전 수행 능력이 좋은 타자다. 뭐 그런 말씀이시군요.]
[그를 상대하는 유형준 선수 역시 만만한 투수는 아닙니다. 벌써 FA만 두 번째. 토종 투수 가운데 손에 꼽을만한 투수입니다.]
[맞습니다. 몇몇 사람들은 유형준 선수가 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돌핀스 타선을 상대하지 않는 만큼 성적에 거품이 있다. 뭐 그렇게 말씀하시는데 사실 그건 돌핀스 타선 역시 투수 유형준을 상대하지 않아서 타격 성적이 좋은 걸 수도 있는 거거든요. 자, 말씀 드리는 순간 마운드의 유형준 선수 피칭 준비합니다.]
144km/h의 속구.
분명 벤치에서 번트 사인이 있었는데 서경준이 방망이를 내밀지 않았다.
-뻐엉!!
현명한 선택이었다.
존을 완전히 빠져나가는 속구. 심판의 손이 올라오지 않았다.
서경준(34).
확실히 노련한 타자다. 공을 보고서 번트를 취소한 게 아니다. 애초에 그냥 보낼 생각이었다. 이건 그냥 초구가 존 밖으로 빠져나갈 거라 예상을 했다는 거다.
두 번째.
-뻐엉!!!
이번에도 심판의 손은 올라오지 않았다.
일루수와 삼루수가 앞으로 몇 걸음 달려 나왔다가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역시 상대 팀도 서경준이 번트를 댈 거라고 강하게 생각하는 게 분명했다.
그리고 세 번째.
-뻐엉!!
“스트라잌!!”
볼카운트 1-2.
여전히 서경준은 방망이 한 번 휘두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묘한 긴장감이 그라운드를 맴돌았다.
네 번째.
이번에도 일루수와 삼루수가 몇 걸음 앞으로 나가는 그 순간.
-툭
서경준의 방망이가 부드럽게 공을 받아냈다.
143.7km/h의 속구였다.
예술처럼 1루 라인을 따라 구르는 야구공.
서경준이 미친듯한 속도로 1루를 향해 달리기 시작했다. 서른넷이라는 나이가 무색할 만큼 날랜 몸놀림이다. 과연 내가 그럭저럭 합격점을 준 남자다운 속도였다.
일루수인 백강호가 달려 나오던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하지만 공이 굴러나오는 속도가 너무 느렸다. 1루로 커버를 나와있던 유형준이 글러브를 내밀었다. 달려나가던 자세 그대로 공을 받아낸 백강호가 미트에서 공을 뽑으며 탄력 있게 몸을 돌려 공을 뿌렸다.
-뻐엉!!
싱싱한 어깨에서 나오는 빠른 송구. 심판이 잠시 망설였다.
“세이프!!”
하지만 결과는 세이프.
무사 1, 2루. 바로 그 순간 사직이 끓어올랐다.
“아웃입니다. 공이 더 빨랐어요.”
그리고 그 소란 속에서 유형준이 자신의 덕아웃을 향해 소리쳤다.
한 경기에 두 번 쓸 수 있는 비디오 판정을 가자는 뜻이었다. 돌핀스 감독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 돌핀스. 비디오 판독을 요청하는군요.]
제법 긴 시간.
마침내 결과가 나왔다.
[세이프!! 세이프입니다. 본래 판정이 유지됩니다.]
[이렇게 되면 무사에 1, 2루. 다음 타자로는 이정훈 선수가 올라옵니다. 와, 이거 마린스가 추가득점을 하게 될 확률이 매우 높아졌는데요?]
방망이를 챙겨 대기 타석으로 걸어 나갔다.
마운드의 유형준이 나를 힐끔 바라봤다. 뭐, 1회에 초구 던진 게 대뜸 담장 밖으로 넘어갔으니 신경 쓰일 만도 하겠지. 하물며 지금은 무사에 1, 2루 상황이니까 더더욱.
하지만 그건 절대 좋은 선택은 아니다.
이정훈이 비록 유흥왕에 매일 헛소리나 늘어놓는 인간이기는 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4년 42억에 도장을 찍은 선수다.
-뻐엉!!
다른 곳에 신경을 쓰면서 상대할만한 선수는 절대 아니라는 뜻이다.
공 일곱 개.
그리고 여덟 번째 타자를 유혹하는 아주 좋은 슬라이더까지.
-뻐엉!!
그 모든 것을 참아낸 이정훈이 방망이를 내던지고 1루로 걸어 나갔다.
무사 만루.
누군가에게는 부담 그 자체.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그야말로 완벽한 밥상이다.
시즌이 시작된 이후 처음으로 받는 꽉 찬 밥상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쓱 올라갔다.
‘내가 오늘은 특별히 양보한다.’
일루에 선 이정훈이 입을 뻥긋 거렸다. 나도 모르게 피식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 그게 양보이든, 아니면 그냥 할 수 있는 최선이 볼넷으로 걸어 나가는 거였든 간에 이 정도면 인정이다.
유형준의 얼굴이 딱딱했다.
그러니까 전성기에는 150km/h를 오가는 공을 던졌고 서른넷이 된 지금도 최고 147km/h까지 던지는 투수다. 구속이 좀 줄어들긴 했지만, 그의 커리어 누적 이닝이 1,700이닝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몸 관리를 굉장히 잘한 편이다. 게다가 성적만 따져보면 그 150km/h를 넘나들던 공을 던지던 시절보다 지금이 훨씬 낫다. 그때는 KBO가 타고투저였고 지금은 투고타저라는 점을 생각해도 그렇다.
적어도 KBO의 토종 투수 가운데는 열 손가락. 아마 3선발로는 리그 최강에 가깝지 않을까?
초구.
바깥쪽으로 빠지는 공.
-뻐엉!!
그냥 보냈다.
그리고 두 번째.
-뻐엉!!
높은 코스 속구. 제법 아슬아슬했지만 어쨌거나 존에서 벗어나는 공이었다.
이어지는 파울과 파울과 파울.
그리하여 볼카운트는 2-2.
나의 머릿속에서 허공에 그려낸 가상의 존.
어쩌면 심판이 바라보는 스트라이크 존보다 좁을 수도, 넓을 수도 있다. 그리고 그 존에서 조금 더 좁혀진 작은 범위.
유형준의 여섯 번째 공이 그의 손을 떠났다.
그리고 경험적으로 예측되는 궤적은 그 작은 범위의 어딘가였다.
어느 유명한 선수가 이런 말을 했다. ‘90, 91마일짜리 공을 놓친다면 정말 돈 받고 야구하는 게 미안해진다.’
145.7km/h
오늘 마운드에 선 투수가 던진 공 가운데 가장 빠른 공.
그야말로 이를 악물고 던진 그 공은 내 기준에서는 놓친다면 정말 돈 받고 야구 하는 게 미안해질 90.5마일의 평범한 공이었다.
-딱!!
타구가 담장을 넘어갔다.
***
“야, 분명 오늘 우리 100마일 던지는 투수 보러 왔잖아.”
“어······.”
“근데 이거 뭐냐?”
“그러니까······, 시즌 5호 홈런볼?”
만팔천여 명이 들어선 사직 구장.
제일 저렴한 좌석을 찾아 외야까지 밀려 나온 두 명의 젊은 청춘이 오늘 선발로 등판한 투수의 다섯 번째 홈런볼이자 커리어 첫 만루 홈런볼을 손에 쥐었다.
순식간에 점수는 5:1.
“이거 오늘 너무 쉽게 이기겠는데?”
“아직 3회 말이잖아.”
“그러면 적당히 쉽게 이기겠네.”
“최수원 투수 투타 겸업이라서 체력 생각하면 언제까지 던질지 모름. 심지어 투수 교체되면 타자로도 못 올라옴.”
“그래도 4점 차이인데 이기지 않을까?”
“응, 호크스 vs 마린스.”
“그러면 이제 박빙이네.”
냉정한 상황판단.
그때 홈런볼을 손에 쥔 그가 무언가를 깨달았다.
“야 근데 아직 벚꽃이 지지 않았잖아.”
“아······. 그러네. 그러면 우리가 오늘 경기는 이기는 건가?”
“그래, 흐드러지게 핀 벚꽃은 곧 마린스의 승리를 상징하는 법이지.”
이제는 거의 사라지긴 했지만 그래도 주말에는 은근하게 있는 아주라를 이겨낸 두 남자가 쓸데없는 만담을 주고 받으며 경기를 지켜봤다.
원하는 것은 마린스의 승리. 그리고 이왕이면 5.1이닝 무실점하고 첫 승을 챙기지 못했던 선발의 첫 승까지.
6번 타자인 노형욱이 안타.
그리고 이규만이 병살로 아웃 카운트 두 개를 적립했다.
“아, 저 돼지 새끼. 죽으려면 혼자 죽지. 또 병살타네.”
“야, 병살도 공을 치니까 나오는 거잖아. 원래 잘 치는 타자들이 병살도 많은 거야.”
“어휴, 속도 좋다. 넌 저걸 보고도 그런 말이 나오냐?”
“5:1이잖아. 우리 이기고 있다고.”
평소라면 고래고래 욕설을 퍼붓는 이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았을 상황.
하지만 4점의 리드폭이 경기를 직관하는 관중들을 너그럽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너그러움 속에서 강라온이 깔끔하게 삼진으로 물러났다.
“근데 오늘 최수원 몇 킬로까지 던졌지?”
“아까 158.9 던졌잖아.”
“오늘 컨디션 좀 별로인가? 구속이 영 안 나오네.”
“아직 3회잖아. 컨디션이 별로인 선수가 홈런을 연타석으로 날렸겠냐? 내가 보기엔 오늘 또 KBO 최고 구속 기록 갱신 쌉 가능.”
“진짜 그랬으면 좋겠다. 너 인터넷에 그 글 봤지? 최수원 160은 진짜 160 아니라는 거.”
“그 예전 스피드건이 속도가 덜 찍혔으니 162는 나와야 예전 기준 160이라는 개소리?”
“어. 솔직히 개소리인 건 잘 아는데 그냥 수원이가 162 던져서 그 새끼 코 납작하게 만들어줬으면 좋겠더라.”
“야, 그런 어그로 놈들은 162 던지면 또 던진 대로 지랄하는 놈들이야. 어디 하루 이틀이냐?”
3회 말에만 4점이라는 든든한 득점 지원을 등에 업고 최수원이 다시 마운드에 올라왔다.
“근데 이걸 득점 지원이라고 하는 게 맞냐? 전부 자기가 올린 타점인데?”
“그러면 득점 셀프 지원?”
***
승리는 더 이상 선발 투수의 미덕이 아니다.
타자로만 뛸 때 나는 그 말에 크게 공감했었다. 승리가 선발 투수의 미덕이라는 말은 타자 입장에서는 좀 짜증이 나는 말이었기 때문이다. 그라운드에서 뛰는 선수는 아홉 명인데 그 아홉 명이 만들어낸 결과물을 투수 하나가 쏙 가져간다는 것이 영 마음에 안 드는 표현이었기 때문이다.
“그래, 역시 선발 투수의 미덕은 승리지.”
하지만 정작 선발로 마운드에 서니까 또 마음이 달랐다.
솔직히 지난 경기 난 5.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아냈으니 나 할 건 거의 다 했다고 볼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팀의 패배에 속이 쓰렸고 뭔가 이해할 수 없는 열패감이 생겼었다.
뭐랄까?
오늘 경기가 ‘우리 모두의 경기’가 아니라 ‘내 경기’라는 느낌이랄까?
경기가 계속됐다.
4점을 리드하고 있기 때문일까?
이후로 이어진 피칭은 살짝 더 쉬웠다. 아니, 사실은 4점 리드 때문만은 아니었다. 백강호의 패턴이 너무 알기 쉬워진 탓이었다.
-부웅!!
누가 봐도 홈런을 노리는 거대한 영웅 스윙.
뭐, 백강호의 원래 스윙이 그 모양이었으니 딱히 팀에서 제지하는 이는 없었지만 스윙 자체보다 어떻게든 홈런을 치고 싶다는 그 의도 자체가 문제였다.
슬쩍슬쩍 유인구만 던져도 미친 듯이 방망이가 흘러나왔다.
뭐, 이건 애당초 백강호 자체가 게스 히터에 가까운 성향이었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기도 했다.
다만 잭 해밀턴과 박주원은 조금 달랐다. 중간의 백강호가 공격의 맥을 끊어주지 않았더라면 아마 더 위험했을 수도 있었다.
2점의 추가 실점.
총 5.2이닝 동안 3점을 내주고 깔끔하게 마운드를 내려왔다.
아, 물론 내가 마운드를 내려왔을 때 점수는 5:3이 아니었다.
7:3.
그리고 팀 홈런은 총 3개.
[최수원. 오늘 정말 놀라운 활약이었습니다. 3타수 3안타 3홈런이라니. 지명 타자 제도를 운용하는 KBO에서 투수가 연타석 홈런을 친 것도 KBO 사상 최초인데 삼 연타석 홈런은 정말이지······. 나중에 찾아봐야 알 일입니다만 이건 MLB에서도 찾아보기 힘든 기록이 아닐까 싶습니다. 솔직히 이 정도면 KBO 역대 세번째 한 경기 4연타석 홈런도 도전해볼만한 페이스인 것 같아서 조금 아쉬운 마음도 생기네요. 마운드를 내려가는 최수원 선수에게 관중들이 아낌없는 박수를 보내고 있습니다.]
[어······. 그런데 잠시만요. 이거 뭔가 좀 이상한데요?]
4점의 리드.
과연 그것으로 우리가 승리를 장담할 수 있을까?
솔직히 불안했다.
그리고 그런 불안감을 가진 것은 아무래도 나 혼자만이 아니었던 것 같았다.
[최수원 선수 지금 마운드에서 내려와서 외야로 향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