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8화. 그에게 홈런이란(4)
오늘 수원은 분명 최상의 컨디션이었다.
그래서 그는 경기 전까지 설마 오늘 퍼펙트 각인가? 하고 생각을 했었다.
꿈이었다.
그래도 그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강라온의 실책으로 출루한 거니까 노히트 정도는 가능하지 않을까? 하고 희망 회로를 세차게 불태웠다.
근데 이후 박주원이 친 건 뭐 BABIP신이 도왔건 뭐 건 빼도 박도 못하는 안타였다.
하지만 어쨌든 최수원은 여전히 컨디션이 좋았다.
그리고 그 좋은 컨디션으로 방망이를 휘둘렀다. 공은 당연하게도 그냥 넘어갔다.
[홈런!! 최수원 선수!! 홈런입니다!!! 큼지막한 타구가 사직야구장의 좌측 외야에 떨어집니다.]
[최수원 선수!! 시즌 네 번째 홈런!! 이번 주 화요일 잠실에서 홈런포룰 쏘아 올렸던 최수원이 고작 나흘 만에 사직에서 또다시 홈런포를 쏘아 올립니다.]
[와, 정말 신인이라는 것이 믿기지 않는 선수입니다.]
[아니, 신인을 떠나서 전 이 선수가 오늘 투수라는 것도 전 도저히 믿어지지 않습니다. 아니 선발 로테이션을 돌고 있는 투수가 지금 리그 홈런 1위예요. 심지어 피닉스랑 엘리츠는 팀 홈런 수가 최수원 선수랑 동률입니다.]
[최수원 선수가 지금 3루를 돌아 홈플레이트를 밟았습니다. 1회 말 투아웃에 주자 없던 상황. 직전 수비 이닝에서 뺏겼던 1점. 최수원이 결국 이렇게 자기 손으로 그 1점을 다시 가져옵니다.]
외야에서 공을 쫓았던 백강호가 질린 표정으로 그를 바라봤다.
백강호는 홈런 타자다. 그는 홈런을 위해 극단적으로 닫힌 스탠스에 커다란 레그킥을 고수했다. 하지만 최수원은 달랐다. 물론 그의 폼도 홈런을 위해 무게 중심의 이동이 극단적이기는 했다. 그러나 백강호의 폼에 비할 수도 없게 부드럽고 아름다웠다. 그렇기에 더 놀라웠다. 저 부드러운 폼으로 쳐낸 공이 저렇게 멀리 날아갈 수 있다니.
1회 말.
노형욱의 안타에 이은 이규만의 시원한 헛스윙으로 이닝이 마무리 됐다.
매우 짧은 휴식.
타자 최수원의 시간이 끝나고 다시 투수 최수원의 시간이 찾아왔다.
***
이게 참 컨디션 좋다고 독백까지 해서 마치 퍼펙트, 아니면 노히트라도 할 것 같은 분위기를 만든 주제에 1회에 대뜸 실점을 하여 조금 민망하긴 했지만, 아무튼 나는 진짜로 컨디션이 좋았다.
만약 오늘 상대가 KBO 최강의 빠따. 심지어 탈크보급 빠따라는 평가까지 받는 돌핀스가 아니라 시즌 개막하고 일곱 경기 동안 팀 홈런 1개에 총 득점 14점밖에 안 되는 피닉스였다면 진짜 퍼펙트나 노히트도 노려볼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헛스윙 삼진!! 2회 두 번째 삼진을 잡아내며 이닝을 마무리 짓는 최수원!! 오늘 투타 양면에서 정말 대단한 활약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참 인상적인 커브였어요. 오늘 최수원 선수를 보시면 두 가지 커브를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는데요. 이게 상당히 효율적입니다.]
[두 가지 커브라고요?]
[네, 보시면 아까 내야 땅볼을 유도한 공은 전통적인 커브라기보다는 뭐랄까? 움직임이 포크볼과 커브의 중간 정도 느낌을 보여주거든요.]
[포크볼이요?]
[네, 탑스핀으로 떨어지긴 떨어지는데 손을 떠날 때 커브 특유의 훅 치솟는 느낌이 좀 없고 떨어지는 각도 적습니다. 하지만 지금 헛스윙을 끌어낸 공을 보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전형적인 커브의 움직임이거든요. 그러니까 몇몇 사람들이 최수원 선수를 투피치라고 하는데 개인적으로는 쓰리피치라고 봐야하는 거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드는군요.]
깔끔한 삼자범퇴. 내가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솔직히 돌핀스의 5, 6, 7번 타자 정도면 피닉스 같은 팀 가면 그대로 상위 타순이다. 오늘 컨디션에 피닉스 같은 팀이 상대였다면 퍼펙트나 노히트도 노려볼만 했다는 나의 생각에도 나름의 근거가 있는 셈이다.
“수원아 오늘 공 진짜 좋아. 내가 받아 본 것 가운데 최고야.”
덕아웃으로 돌아가는 길.
쪼유가 엄지를 치켜들었다. 확실히 나도 한교철과 호흡을 맞출 때보다 훨씬 편했다. 포수가 뒤로 공을 흘리지 않는다는 것이 일상이 아니라 소중함을 느껴야 할만한 부분이라니. 나는 대체 어떤 야구를 하고 있는 걸까?
돌핀스의 토종 에이스 유형준이 마운드에 올라왔다.
앞선 이닝에서 나한테 홈런 한 방 얻어맞긴 했지만, 그리고 워낙에 팀 타자들이 대단한 탓에 좀 저평가 당하는 감이 없잖아 있긴 했지만 그래도 작년에 나름 3점대 초반 평자책을 기록한 투수다.
-딱!!!
1회 초.
멍청한 실책으로 점수를 헌납하게 만들었던 강라온이 이를 악 물고 방망이를 휘둘렀다. 타구를 바라보지 않는 질주. 누군가가 보기에는 힘만 빼는 멍청한 짓이지만 대부분 팬들 입장에서는 기꺼운 플레이다. 프로야구가 결국 팬들에게 보여주기 위한 엔터테인먼트라는 것을 고려하면 아주 훌륭한 태도다.
-뻐엉!!
“아웃!!”
물론 태도가 훌륭하다고 아웃을 세이프로 바꿔줄 수는 없었지만.
이어지는 7번 타자는 사울 로페즈. 투고타저 리그에 흔치 않은 수비요정 용병이다.
팬들은 사울의 타격 성적이 이런저런 불평을 늘어놨지만 사실 나도 그렇고 이규만도 그렇고 노형욱도 그렇고 수비보다는 빠따에 초점이 맞춰진 야수들이 다수인 팀 사정을 생각할 때 내외야를 가리지 않고 수비의 구멍을 메워줄 수 있는 사울은 아주 좋은 선수라고 볼 수 있었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물론 그건 어디까지나 30만 달러라는 몸값치고는 아주 좋은 선수라는 뜻이다. 솔직히 용병이 2할 초반에 똑딱이면 보는 팬들 입장에서는 열불난다.
그리고 이어지는 타자는 이주혁. 하드웨어가 아주 좋은 선수다. 시간을 거슬러 오기 전에는 마린스에 이만한 선수가 있는 줄도 몰랐었지만, 아무튼 하드웨어만 따지면 리그 최고 수준이 아닐까 싶다. 아쉬운 점은 하드웨어에 터무니없이 미치지 못하는 소프트웨어다. 최신형 컴퓨터에 윈도우 1.0이 깔려있는 느낌이랄까? 하드웨어가 하드웨어인 만큼 한 95정도만 되도 쓸만할 것 같은데 그게 안 된다.
-딱!!
힘없는 내야 땅볼.
마린스의 하위 타순을 삼자범퇴로 막아낸 유형준이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거 직전 이닝에 내가 삼자범퇴하고 했던 거랑 비슷한 포즈가 왠지 나를 의식한 것 같은데······. 아 나랑 눈 마주친 걸 보니 자의식 과잉이 아니라 진짜 나를 의식한 거다.
“아, 까비 내가 딱 올라가서 한 건 해주려고 했는데. 다음 이닝으로 미뤄야겠네.”
“헛소리하지 말고 얼른 장비나 착용해라.”
대기 타석에서 긴장이라는 단어 자체를 현실에 구현한 것처럼 굳어있던 조유진이 덕아웃으로 돌아와 또 입을 털었다.
“많이 쫄리냐?”
“어? 쫄린다고? 내가?”
“어, 니가.”
“······.”
“쫄지 말고 그냥 방망이 휘둘러. 어차피 너한테 타격 기대한 사람 하나도 없으니까. 네가 오늘 할 건 그냥 내 공 뒤로 안 흘리고 잘 받는 거야. 오늘은 그거면 충분해.”
“그건 지금 내 방망이 무시하는 거 맞지?”
“아니, 네 미트질을 칭찬하는 거지.”
“기분이 요상하게 나쁜 게 절대 칭찬은 아닌 것 같은데······.”
“칭찬 맞아. 그냥 공만 잘 받으면 돼. 그러면 오늘 경기 승리 지분율 2위 정도는 되는 거니까.”
“고작 그걸로 2위라고?”
“어, 오늘 내가 경기 승리 지분율 한 98%정도 가져 올 생각이거든.”
WAR(Wins Above Replacement)
대체선수대비 승리 기여도.
말 그대로 가상의 대체선수에 비하여 얼마나 많은 승리를 팀에 안겨주었는가를 말하는 이제는 너무나도 유명한 스탯이다.
하지만 한 경기에서 한 선수가 얻을 수 있는 WAR이 얼마인지를 제대로 아는 사람은 드물다. 이런저런 복잡한 식이 있는데 간단하게 말하자면 작년 KBO를 기준으로 했을 때 투수는 15.2이닝 무실점. 그리고 타자의 경우 마찬가지로 작년 KBO를 기준으로 하면 유격수나 포수로 출장해서 5타수 4홈런 정도 치면 1이 오른다.
한 마디로 1 이상의 WAR을 한 경기에서 얻기란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었다.
그래, ‘거의 불가능’하다는 뜻이다.
[타석에는 9번 타자 장진규. 작년 0.274/0.361/0.354를 기록한 선수죠. 9번에 두기에는 너무 강력한 타자로 돌핀스의 타선이 얼마나 두터운지를 알 수 있게 해주는 증거입니다.]
[사실 그것도 그렇지만 돌핀스의 타순이 전통적인 타순과는 조금 다른 형태인 점도 빼놓을 수 없는 부분입니다. 아무래도 점점 좋은 타자가 앞으로 당겨지는 추세인데 돌핀스를 보면 2번 타순에 용병인 잭 해밀턴을 그리고 3번과 4번에 백강호, 박주원을 배치했죠. 어떻게 보면 9번인 장진규 선수가 사실상 1번 타자나 다름없는 역할을 수행한다고 볼 수도 있습니다.]
방망이를 짧게 쥐고 타석에 바짝 다가 선 장진규가 나를 노려봤다.
뭐, 맞출 테면 맞춰봐라 그런 뜻이다. KBO에는 가끔 저런 애들이 있다. 팬들은 피할 수 있는 공도 맞아서 어떻게든 나가려는 저런 자세를 악바리라고 좋아하긴 한다. 어떻게 보면 절박하기 때문이다. 그렇게라도 1군에 남아있겠다는 강력한 의지다.
KBO의 타자들이 더 용감한 탓일까? 혹은 MLB의 타자들이 덜 절박한 것일까? 그럴 리가. MLB라고 어떻게 절박한 애들이 없겠는가. 몇몇 전문가들은 유독 KBO에 저런 애들이 많은 건 학창 시절에 지도자들에게 좀 잘못 배운 탓이라 이야기했다. 뭐, 그래 그런 이유도 어느정도는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생각하기에는 더 큰 이유가 존재했다.
-뻐엉!!!
“스트라잌!!”
[158.9km/h!! 과감한 몸쪽 공!! 3회 초. 최수원 선수가 더진 오늘 경기 가장 빠른 공에 장진규 선수가 방망이를 휘두르지 못했습니다.]
그냥 KBO의 평균이라고 할 수 있는 140대 공은 맞아줄 만하기 때문이다.
내가 경험적으로 봤을 때, 빈볼이라는 건 원래 잘못 맞으면 뒤지겠다 싶은 공포감이 있어야 몸이 쫄아 드는 법이다.
그래, 160에 육박하는 공이 눈 바로 앞을 스쳐 지나간 바로 지금처럼.
미미하게 몸이 굳은 장진규에게 바깥쪽 빠른 커브 하나. 그리고 원바운드되는 커브 하나를 뿌렸다.
-부웅!!
“스트라잌!! 아웃!!”
선두타자 깔끔한 삼구삼진.
조유진이 공을 흘리지 않고 완벽하게 받아냈다. 포수가 공을 제대로 받다니 실로 감동적인 장면이었다.
앞선 타석에서 유격수 실책으로 출루했던 박일진. 뭐, 실책으로 출루라곤 하지만 어쨌든 내 공을 쳐낸 것을 보면 알 수 있듯 확실히 공을 건드리는 능력은 있는 타자다.
그래서 레파토리를 좀 바꿨다.
-부웅!!
“스트라잌!!”
초구부터 커브.
오늘 속구의 커맨드도 굉장히 좋았지만 그래도 결과만 봤을 때 결고가 좋았던 커브를 더 자주 던졌다.
그리고 마지막.
-뻐엉!!
“스트라잌!! 아웃!!”
빠른 커브라고 생각했는지 방망이를 휘두르지 않았던 박일진을 깔끔하게 루킹삼진으로 잡아냈다. 타석에 잭 해밀턴이. 그리고 대기 타석에 백강호가 올라왔다.
두 선수 모두 나를 바라보는 시선이 심상치 않았다. 특히 백강호는 거의 눈에서 불똥이 튈 것 같았는데 아무래도 내가 네 번째 홈런을 쳐내는 것으로 자기와 홈런 동률이 돼서 그런 것 같았다.
그래서 기대가 됐다.
-딱!!
[높게 뜬 타구!! 잭 해밀턴 선수. 떨어지는 공을 쳐봤습니다만 타구각이 너무 좋지 못하네요. 중견수 이주혁이 가볍게 처리하며 최수원이 또 다시 삼자범퇴로 이닝을 마무리 짓습니다.]
내가 홈런을 한 방 더 때렸을 때 과연 저 표정이 어떻게 될까?
3회 말, 조유진이 타석에 들어갔다. 놀라울 정도로 아무런 기대가 되지 않았다.
-딱!!!
“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