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7화. 그에게 홈런이란(3)
솔직히 합리적인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아버지도 테이크아웃 해온 갈비찜인데 그걸 굳이 또 싸주는 것은 일종에 테이크아웃의 테이크아웃 아닌가. 게다가 뭐 특별한 맛집도 아니고 그냥 조금 고급 프랜차이즈 중 하나인지라 부산에도 있는 브랜드다. 그냥 나도 가서 테이크아웃 하면 된다.
하지만 그럼에도 굳이 받아서 왔다.
20대의 나는 합리적으로 돌아가는 세상이 아름다울 것이라 믿었지만, 30대의 나는 때론 비합리적인 것이 더 아름다울 때도 있다는 것을 깨우쳤기 때문이다.
아침에 갈비찜을 든든하게 먹어서라는 합리적인 이유에서인지 아니면 아버지의 마음이 담긴 마법의 갈비찜이라는 비합리적인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컨디션은 매우 좋았다.
게다가 또 한가지 좋았던 점은 오늘 내 공을 받는 포수가 쪼유라는 점이었다.
“역시 감독님도 내 진가를 알아보신 게······.”
“그냥 교철이 형이 떨어지는 공을 너무 못 잡아서 그런 거겠지.”
“내 타격이 눈부시게 발전한 걸 보고 그랬을 확률은?”
“글쎄? 네 타율 정도. 그러니까 한 1할 정도?”
“어허!! 1할이라니. 1할 6푼. 반올림하면 엄연히 2할에 가까운 숫자지.”
딜튼이 등판했던 지난 경기.
쪼유는 마침내 두 번째 안타를 기록하며 타율을 1할 중반으로 끌어올렸다. 한교철이 0.235였으니 초반이기는 해도 그 나름대로 제법 의미 있는 수치이기는 했다. 어쨌거나 주전 포수인 최진웅이 돌아오기까지 아직 2주 정도는 더 필요했다. 쪼유가 원래 두 번째 옵션인 한교철의 자리를 따내기 위해서는 이제 2주의 시간밖에 남지 않았다는 의미이기도 했다.
그런 의미에서 딜튼이 아닌 나와의 경기에 선발로 출장한 것은 제법 의미가 깊은 일이었다. 감독이 녀석에게 기회를 줬다는 의미였으니까. 물론 여기에는 나의 발언도 어느 정도 영향을 준 것임은 분명했다. 이틀 전에 투수 코치가 나에게 은근한 질문을 했을 때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었다.
“네, 저야 당연히 환영이죠. 아무래도 3년이나 호흡을 맞췄는데 마음이 편할 수밖에 없죠. 타격이요? 에이, 그거야 고등학교 때도 충분히 엉망이었어요. 대신 제가 잘 치니까 괜찮습니다.”
사실이었다.
3학년 때야 조금 도움이 됐지만 2학년 내내 녀석의 상, 하체 분리 타법은 나에게 큰 고통을 줬었다. 그건 단순한 성적 문제가 아니었다. 성적을 떠나 그걸 보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 같은 답답함을 나에게 선사했었다.
아무튼 이래저래 좋은 일로 가득한 두 번째 등판.
그리고 상대는 KBO 최강의 타선이라는 수원 돌핀스.
혹자는 작년의 돌핀스라면 NPB를 간다고 해도 포스트시즌을 다툴만하다고 이야기했다. 물론 내가 보기엔 영 헛소리다. 투수력 차이가 너무 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한 가지. 타격만 따져본다면 NPB 레벨이라는 말만큼은 공감한다. 아니, 어쩌면 단순한 NPB레벨을 넘어 NPB에서도 손에 꼽을 만큼 강력하다고 봐도 무방하리라.
그도 그럴것이 1번 타자 강일진으로 테이블세터는 리그에서 손에 꼽히고 클린업 트리오는 말할 것도 없이 리그 최강. 하위 타순도 요즘 같은 투고타저 시대에 시즌 10홈런 정도는 기대할만한 파워 들이 있었다. 게다가 오늘 9번으로 나오는 장진규까지도 어지간한 팀에 가면 2번 타순 정도는 충분히 담당할만한 방망이를 자랑한다.
우리 팀 빠따도 제법 훌륭했지만, 솔직히 저 팀 가서 주전 장담할만한 타자는 노형욱이랑 나, 그리고 강라온 정도밖에 없다.
타석에 선두타자 강일진이 올라왔다.
스물셋의 내야수로 미필이다. 요즘 싹수 보이는 선수들은 일단 군대부터 보내기는 한다지만 강일진만 한 재능이면 또 이야기가 다르다. 돌핀스는 이 녀석에게 군 면제를 선물할 생각이다. 일단은 내년에 있을 LA 올림픽 동메달 이상. 혹은 3년 후에 있을 도하 아시안게임 금메달. 지금까지 강일진의 커리어를 보면 메달은 몰라도, 국가대표팀 승선은 충분히 가능한 시나리오였다.
백강호에 박주원으로 이어지는 대포들에 가려지긴 했지만, 강일진의 지난 시즌 성적은 0.313/0.404/0.398로 작년 리그에서 3할 타자가 고작 13명이었다는 점. 그리고 우리 팀 최고 타율인 노형욱이 0.299였다는 점을 생각해보면 절대 무시할 수 없는 타자임은 분명했다. 그리고 그것은 올해도 크게 달라지지 않아 어제 박주원이 역전포를 쏘아 올리기까지 강일진의 노고가 지대했다.
초구.
바깥쪽 코스로.
아까 경기 전에 연습구를 던질 때 커맨드가 꽤 좋았었다. 그리고 사직구장에 가득 찬 사람들이 나에게 집중하는 이 시점에서도 그 좋았던 커맨드는 그대로 이어졌다.
-뻐엉!!!
“스트라잌!!!”
타석에 바짝 붙어서지 않았던 탓에 방망이가 나오지조차 않았다.
156.1km/h.
강일진이 손을 들어 잠시 타석에서 물러났다.
정신 못 차리게 곧바로 피칭을 이어가고 싶었는데 조금 아쉬웠다.
두 번째.
용감히 타석 가까이에 선 그에게 나 역시 용감한 공을 선사했다.
-뻐엉!!!
몸쪽 깊숙한 코스. 근데 내가 생각했던 것보다 좀 더 깊숙했다.
강일진이 화들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씹······.”
[몸쪽 깊숙한 코스. 강일진 선수가 깜짝 놀라 한 걸음 물러납니다.]
[아, 최수원 선수 지난 경기도 그렇고 종종 공이 손에서 빠지는 경향이 있는 것 같은데, 몸쪽 승부에는 조금 더 조심할 필요가 있겠습니다. 155짜리 공은 정말 흉기나 다름 없어요.]
바로 지난번 등판에서도 초구로 빈볼을 꽂았던 만큼 만약 원정이었다면 큼지막한 야유가 나와도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었다. 하지만 뭐 원래 피칭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닐까?
타자는 몸쪽 공에 대한 두려움을 안고 타석에 서는 거고, 투수는 타자 대가리를 깰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을 안고 몸쪽에 공을 찔러 넣는 거다. 그러니 대가리 깨지는 게 무서우면 홈플레이트 깊숙한 곳에 안 서면 되는 거고 남의 대가리 깨는 게 무서우면 몸쪽 공을 안 던지면 되는 거다.
게다가 이번 공은 엄밀히 말하자면 타석 안쪽으로 들어간 공도 아니었다.
그냥 강일진이 157km/h짜리 공이 자기 머리 쪽으로 오는 것 같으니 괜히 놀라서 움찔한 것뿐이다.
그나저나 오늘 컨디션도 굉장히 좋고 커맨드도 꽤 괜찮아서 막 마음먹은 대로 공이 다 들어가는 그런 날이라고 생각했는데 역시 그런 건 어디 만화나 영화에서 나오는 일인 듯하다.
세 번째.
묘하게 위축된 것 같은 강일진이 방망이를 휘둘렀다.
-딱!!!
빗맞은 타구. 2, 3루간. 빗맞은 타구.
강라온이 적극적으로 빠르게 달려 나와 공을 낚아 챘······.
[아!! 빠졌습니다. 살짝 굴절된 타구!! 강라온 선수 빠르게 공을 쫓아 보지만 늦었습니다. 그사이 강일진 선수는 무사히 1루에 안착.]
[강라온 선수, 수비가 참 아쉽습니다. 이 선수 분명 리그에서 손에 꼽을만한 유격수인데 종종 이런 수비가 나온단 말이죠. 사실 이런 기초적인 건 유격수라면 절대 해서는 안 될 실수거든요. 유격수 수비가 저렇게 불안하면 투수가 안심하고 공을 던질 수가 없습니다. 참 여러모로 아쉬운 장면입니다.]
믿는 도끼에 발등이 찍히면 더 아픈가.
적어도 이 순간에는 좀 그랬다. 나도 모르게 브루투스 너마저도 라는 표정으로 강라온을 바라봤다. 솔직히 야수 할 때 실책 좀 하고 그러면 투수들이 눈에 쌍심지키고 나를 바라보는 게 좀 엿 같았었는데, 이게 나도 모르게 그렇게 된다.
물론 여기서 굳이 입을 열지는 않았다. 동료 야수의 실책에 대해서 입을 다무는 것도 가장 중요한 불문율 가운데 하나다. 뭐 또라이 같은 투수 놈들 가운데는 안 지키는 놈이 태반이라 그런 게 있는 줄도 모르는 애들도 태반이긴 하지만 아무튼 그렇다.
이어지는 2번 타자.
1루의 강일진이 슬쩍슬쩍 나를 자극했다.
-뻐엉!!
가벼운 견제구.
강일진의 앞섶이 흙으로 더럽혀졌다.
세트포지션.
사실 빅리그에는 세트포지션을 안 쓰는 경우도 매우 많다. 이게 좀 애매한 부분인데 빅리그의 경우 몸값 비싼 선수들의 도루가 점점 자제되는 분위기고, 세트 포지션은 구위가 떨어질 수밖에 없으니 그걸로 보는 손해를 생각하면 그냥 투수가 베스트로 공을 던지는 게 낫다. 뭐 그런 분위기인 탓이다.
하지만 KBO는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내 개인적인 경험에 비춰보면 와인드업과 세트포지션을 다 쓸 줄 알면 굉장히 유용한 무기가 된다. 그게 되는 놈들이 보통 더 짜증이 났었다.
-뻐엉!!!
“스트라잌!!”
154.4km/h
대신 확실히 공의 위력이 줄어든다. 단순히 구속만이 아니다. 오히려 구속보다는 제구 쪽이 문제다. 아무래도 더 익숙한 폼이 와인드업이다 보니 커맨드가 좀 망가진다.
볼.
그리고 스트라이크.
볼카운트 1-2에서 네 번째.
-딱!!
타자가 나의 공을 밀어쳤다.
1루 파울라인을 따라 흘러 나오는 공. 규만 선배가 살짝 뒤뚱이는 걸음으로 타구를 움켜쥐었다. 그의 시선이 아주 빠르게 2루를 훑었다. 더블 아웃은 무리였다. 1루로 커버나온 나의 글러브에 정확히 공이 들어왔다.
“아웃!!!”
원아웃에 주자 2루.
안타 한 방이면 점수가 나는 상황. 백강호가 타석에 들어왔다. 입가가 씰룩거리는 것이 실로 재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조유진의 미트가 바깥쪽 존을 벗어난 곳으로 빠져나왔다.
마음에 들지는 않지만 동의하는 부분이다. 어쨌거나 상대는 KBO 최정상급 타자. 본인은 만족할만한 금액이 아니라 KBO에 남았다지만 MLB에서 증명된 게 없는 지명타자 겸 1루수에게 2년 500만 달러는 절대 작은 금액이 아니다. 그건 분명 적어도 그 팀에서 백강호를 빅리그에서도 빠따 하나는 통용될만한 강타자로 인정했다는 의미다.
초구.
어차피 주자도 2루까지 나간 상황. 와인드업 포지션에서 전력으로 공을 뿌렸다.
바깥쪽 살짝 벗어나는 공.
타자의 방망이가 따라 나온다.
-부웅!!
극단적으로 닫힌 스탠스에서 레그킥. 마치 공을 쪼갤 것처럼 살벌한 스윙이 허공을 휘저었다.
“스트라잌!!!”
156.8km/h
쪼유가 빠르게 공을 던져주었다.
그에 맞게 빠른 타이밍. 백강호가 뭐를 생각할 틈도 없게 두 번째 공을 뿌렸다. 초구가 바깥으로 살짝 빠지는 공이었던 탓인지 자신도 모르게 타석에 바짝 붙어선 그를 향한 나의 선물인 몸쪽 높은 공.
-뻐엉!!
“스트라잌!!”
157.3km/h의 속구에 그가 제대로 반응조차 하지 못했다.
솔직히 이번 공은 내가 타석에 섰어도 좀 어려웠을 공이다. 진짜 머릿속에 의도했던 베스트에 가깝게 공이 들어갔다. 그리고 세 번째.
백강호의 왼쪽 다리가 크게 올라왔다.
거대한 레그킥. 어마어마한 힘이 그의 방망이를 따라 나온다.
됐다.
저 정도로 극단적으로 닫힌 자세에서 저렇게 힘차게 돌아 나오는 방망이는 절대 멈춰 세울 수 없다.
-부웅!!
존의 복판에서 내리꽂히는 빠른 커브.
쪼유가 공을 흘리는 일 없이 완벽하게 잡아냈다.
“아웃!!”
매우 깔끔한 삼구삼진.
오늘 경기가 드디어 제대로 풀릴 징조였다.
쪼유가 공을 던졌다. 3루에서 2루로 1루로 그리고 다시 나에게.
한 바퀴를 돌아온 공에 승리를 갈망하는 내야수들의 마음이 담겼다. 그 마음을 잘 알고 있다. 투수가 삼진을 하면 이렇게 돌아오는 공을 다시 투수에게 던져주는 것은 일루수였던 나의 몫이었으니까.
그리고 그들의 마음을 담아서 타석에 올라온 서른아홉의 노장 박주원에게 공을 뿌렸다. 늙은 타자들이 가장 치기 힘든 가장 빠른 공으로.
-딱!!!
“어······.”
[박주원 쳤습니다!! 우중간. 이루수 키를 넘기는 살짝 밀어친 안타!! 2루의 박일진 빠르게 3루를 돌아 홈까지!! 서경준!! 공을 잡아 홈으로!!]
“세이프!!”
1:0.
운이 없었다. 아니, 진짜로. 밀어친 게 아니라 밀려친 타구였다. 빠른 공에 배트 스피드가 따라 나오지 못했다. 근데 워낙에 타고난 힘이 장사에다가 코스가 좋아서 안타가 된 거다. 쉽게 말해 BABIP신이 도운 상황이다.
나로서는 좀 짜증이 나는 상황이었지만, 뭐 어쩌겠는가. 이것 또한 야구의 일부일진대. 그리고 이어지는 다섯 번째 타자를 깔끔하게 삼진으로 마무리하며 1회 초 돌핀스의 공격이 끝났다.
-딱!!!
그리고 1회 말.
가볍게 친 공이 가볍게 담장을 넘어갔다.
1:1
1회 초에 내준 점수를 찾아오는 깔끔한 솔로 홈런포.
뭐, 1회 초에 내준 점수도 나의 자책점은 아니었지만, 아무튼 점수라는 것은 원래 내주면 내준 만큼 찾아오면 그만이다.
투타겸업은 원래 그러라고 있는 거니까.
사직 구장이 달아올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