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6화. 그에게 홈런이란(2)
“혜성이가 미국으로 가는 바람에 리그가 좀 루즈해지나 걱정했는데 덕분에 초반이긴 해도 꽤 재밌어졌단 말이지. 아, 너도 알지? 혜성이가 다른 건 몰라도 홈런은 끝까지 나 못 이겼던 거.”
자랑하러 온 거 맞다. 근데 자랑인데 뭔가 짠하다.
“아, 네.”
사실 홈런왕에 대한 백강호의 집착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컸다. 그는 지난 여덟 시즌 가운데 무려 네 번이나 홈런왕을 차지한 명실상부한 한국 최고의 홈런 타자였음에도 그 집착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더 커졌다고 볼 수 있었다.
그것은 내가 시간을 거슬러 올라오기 전에도 마찬가지였다.
당시에는 정말 진짜 지긋지긋할 정도로 나에게 집착을 했었는데 내가 2029년부터 홈런왕을 차지하기 시작했을 때는 거의 무슨 비극의 주인공처럼 굴었더랬다. 사실 처음에는 엄청 짜증 났었는데 2030년인가? 31년인가? 하여간 시상식 끝나고 술김에 그에 대해서 진지하게 한 번 이야기했던 적이 있었다.
대충 본인이 왜 홈런왕에 집착하는가에 대한 부분이었는데 절반은 주정뱅이의 헛소리였고 나머지 절반 정도도 찌질한 열폭이었지만 그래도 그 열폭 속에서 그가 왜 이런 찌질함을 갖게 됐는지를 알게 됐다.
그리고 그 대화 이후로는 막 짜증 난다기보다는 좀 짠해 보였다고 해야 할까? 뭐, 그랬다.
00년생.
그러니까 2019 드래프트 멤버들은 그 면면이 제법 화려하다. 특히 1차 지명으로 들어갔던 멤버들의 프로 활약상을 보면 역대급이라고 할만했는데 백강호는 그 가운데서도 발군이라고 할만했다. 고교시절부터 홈런왕으로 이름을 떨쳤었고 데뷔 첫해에 30홈런을 기록하며 신인왕을 차지했었으니 그야말로 최고의 스타였다. 하지만 3년 차를 넘어가면서부터는 이야기가 조금 달라졌다.
정혜성.
그야말로 이름 그대로 별과 같은 남자였다. 마찬가지로 00년생 2019 드래프트 멤버 중 하나였던 그는 전형적인 일본 야구 만화의 주인공 같은 스토리를 찍으며 1차 지명도 아니었던 주제에 차근차근 성장하여 결국 동기 가운데 가장 큰 성공을 이룩했다.
백강호는 포스팅으로 미국에 가지 못했다. FA로는 2년 500만 달러 정도의 제안이 있었다고 했지만 역시 미국에 가지 않았다. 반면 정혜성은 포스팅에는 실패했지만, 지난 겨울 2년 1,500만에 미국에 진출했다.
그리고 3년 차부터 8년 차까지.
백강호는 타격의 모든 부분에서 정혜성을 넘어서지 못했다. 그가 정혜성이 떠나는 마지막까지 우위를 보였던 것은 오직 홈런뿐이었다.
아, 물론 짠해 보였다고 해서 내가 백강호에게 홈런왕을 양보했단 말은 아니다. 2029년부터 2033년. 내가 MLB에 진출하기 직전까지 나는 5년 연속 홈런왕을 놓치지 않았었다. 그것도 제법 크게 차이 나는 성적으로. 사실 MLB에서 나를 가장 높게 쳤던 부분도 진출 전 몇 해 동안 홈런 2위가 40개 전후를 치는 투고타저였던 KBO 리그에서 혼자 50개씩 홈런을 날려대던 파워였다.
“솔직히 미국도 그냥 갈까 했었는데 구단에서 워낙 강하게 잡아서. 아직 내가 젊기도 하고. 작년에 우승도 했겠다. 이대로 돌핀스 왕조 세우고 다녀와도 괜찮지 않겠냐고. 뭐, 물론 우리 돌핀스야 지금도 충분히 최강팀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쓰리핏 정도는 해 줘야 왕조소리 듣지 않겠어?”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주저리주저리 늘어놓는 것이 이 인간은 진짜 변함이 하나도 없구나. 뭐 그런 느낌이었다.
-쾅!!!
하지만 한 가지.
2030년과 2027년 사이에는 다른 점이 있었다.
“하하하, 네가 수원이구나. 미안, 미안. 우리 강호가 괜히 신인 데리고 또 헛소리했네. 혹시 불쾌한 이야기 있었으면 내가 대신 사과할게. 우리 강호가 친구가 미국으로 훌쩍 떠나버리는 바람에 요즘 마음이 많이 아파.”
“아, 대장!! 제 마음 멀쩡하거든요? 지금 아픈 건 마음이 아니라 대장이 주먹으로 찍은 머리통이라고요.”
“대장 아니고 주장!! 하여간 이 새끼는 잠깐만 눈을 떼도. 수원아, 아무튼 미안하다. 오늘 경기는 서로서로 파이팅하자. 그러면 이만!!”
박주원.
돌핀스의 주장으로 올해 서른아홉.
지난 팔 년. 백강호가 차지하지 못했던 네 번의 홈런왕 타이틀 가운데 두 개를 차지한 게 바로 박주원이었다. 삼십 대 초반에 차지한 게 아니다. 서른다섯, 서른여섯에 홈런왕을 차지했다. 비록 실패하기는 했지만 메이저 경력도 있다.
게다가 또 한 가지. 내가 재작년에 깨트렸던 고교 야구 홈런 기록을 20년 전에 달성했던 게 바로 박주원이다.
저 두 사람이야말로 돌핀스 공격의 양대 축으로 둘이 합쳐서 1년에 홈런만 거의 70개 가깝게 때려내는 콤비다. 작년 피닉스의 홈런 개수가 80개 살짝 넘는 수준이라는 점을 생각하면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수준이라고 볼 수 있다.
“인마, 너 내가 괜히 다른 팀 애들한테 가서 시비 걸지 말라고 했어? 안 했어?”
“아니, 시비 거는 게 아니라 그냥 선배로서 후배한테 덕담이나 한 마디 해주러······.”
-쾅!!
“그러니까 그게 시비라고 몇 번을 말하냐. 내가 너 커버쳐주는 것도 하루 이틀이지. 게다가 마린스는 규만 선배도 있다고. 그 선배가 지금이야 잠잠하지 화 나면 진짜 장난 아니야. 내가 짬으로 뭐 어떻게 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고. 조심 좀 하자. 제발. 어?”
“아······, 진짜 시비 건 거 아닌데······.”
백강호가 질질 끌려가면서도 투덜대는 모습이 퍽이나 재밌었다.
확실히 비교적 신생팀에 근간이 됐던 선수들도 여기저기서 끌어모았던 팀이라 그런지 분위기 자체가 마린스와는 완전히 다르다.
-딱!!!
[박주원!! 쳤습니다!! 큼지막한 타구!! 담장!! 담장!!! 넘어갑니다.]
[박주원 시즌 두 번째 홈런. 와, 작년 리그 우승팀 돌핀스 정말 무섭습니다.]
[작년 기록을 살짝 살펴보면 돌핀스가 타율과 장타율에서 모두 리그 1위거든요. 리그에 30홈런 타자가 용병 타자까지 다 포함해서 딱 넷인데 그중 둘이 돌핀스 선수였어요.]
[2022년부터 리그의 투고타저가 시작된 이후로 타자 용병은 거포를 데리고 오는 게 일반적인데 이게 사실 NPB랑 좀 겹치거든요. 그래서 아무래도 가성비가 영 맞지 않단 말이죠. 그런데 돌핀스 같은 경우는 수비 좋고 공 잘 골라내는 이루수를 비교적 저렴하게 데리고 왔잖습니까? 그렇다고 돈을 안 쓴 것도 아닌 게 선발에 나머지 금액을 다 투자를 했고요. 전 개인적으로 올해도 돌핀스가 아주 강력한 우승 후보가 아닌가 뭐 그렇게 생각합니다.]
[자, 점수는 다시 5:3. 아, 마린스 결국 디에고 로드리게스 선수가 내려가네요.]
돌핀스와의 1차전.
6회 투아웃에서 쓰리런을 두들겨 맞은 디에고 로드리게스가 결국 마운드를 내려갔다. 전체적으로 공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건 그냥 박주원이 잘 친 거다. 그리고 이게 바로 홈런의 무서움이다. 2:3에서 주자 1, 2루였는데 그냥 한 방에 5:3으로 달아나버린다.
마운드에 곽재영이 올라갔다.
투수조 최고참으로 마린스의 진우 선배라고 하면 설명이 좀 쉽다. 성격이 참 좋다. 다만 좀 아쉬운 점은 실력도 진우 선배같다는 점이다.
-딱!!
투아웃에 올라와서 다행히 점수는 내주지 않았지만 잔루는 1, 3루.
작년 우리의 자랑스러운 토종 최다승 투수 한명훈이 올라왔다면 조금은 나았겠지만, 안 그래도 최근에 등판이 너무 잦았는데 아무리 노예처럼 사용되는 게 중간계투라고 그래도 점수가 밀리는 상황에서 올라오긴 좀 그렇다.
아무튼 금요일의 1차전 경기.
우리는 결국 8:4로 패배했다.
***
“그러니까 1,601번째 입장이면 최수원 선수 싸인볼에 기념사진까지 찍게 해준다 그거지?”
“그렇다니까. 거기다가 16,013번째 입장이면 오늘 경기에서 최수원 선수가 입었던 유니폼이랑 연습 때 사용했던 글러브까지 사인해서 준다더라.”
마린스 홍보팀은 나름대로 열심히 홍보를 했다.
사실 구단 홍보팀에서 할 수 있는 홍보라고 해봐야 인맥이 있는 기자의 인터넷 기사에 몇 줄 알음알음 추가하는 것. 그리고 구단 공식 홈페이지나 SNS등에 관련된 자료를 올리는 것 정도였다. 게다가 이벤트를 기획하고 컨펌을 받아서 올린 기간 자체도 기껏해야 나흘로 그리 길지 못했다. 덕분에 오늘 경기를 직관하러 오는 관중들 가운데 관련된 사실을 아는 이는 그리 많지 않았다.
“근데 이거 입장 카운트는 제대로 되는 거 맞지? 막 대충 하고 그냥 아는 사람들한테 나눠주고 그런 거 아니겠지?”
“어, 입장 코드로 카운트 한다니까 제대로 될 거야. 그리고 뭐 얼마나 대단한 거 준다고 주작을 하겠냐. 솔직히 구단 관계자면 최수원 선수 싸인볼 정도는 그냥 받을 수 있잖아.”
“아니, 그거야 그렇지만 16,013번째는 선수가 입던 유니폼에 글러브까지 주는 거잖아. 그 정도면 못해도 몇십만 원인데 그럴 수도 있지.”
“멍청아. 16,013번째는 그냥 잊어. 그건 없는 거야. 아무리 토요일이라도 그렇지 요즘 마린스 경기에 만육천 명? 그게 말이 되는 소리냐? 작년에 주말에 팔천 명 들어왔다는 뉴스 못 봤어?”
“그런가? 그래도 개막전에는 좀 오지 않았었나?”
“그거야 개막전 빨이 있으니까. 근데 그것도 구장 거의 절반은 비어 있었잖아. 장담하는데 오늘 경기 무조건 개막전보다 사람 적을 거야.”
하지만 그의 호언장담이 깨지는 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은 필요 없었다.
버스가 한 정거장, 한 정거장을 지날 때마다 점점 올라타는 사람들이 늘어났다. 교통체증이 심화됐고 마침내 출근길 만원버스보다 더 심각할 정도까지 인구밀도가 늘어난 버스는 기다리던 승객들에게 다음 버스를 타라는 이야기를 하며 사람을 태우지 않고 출발하기 시작했다.
그래, 분명 16,013명은 작년 말의 마린스에게는 상상하기 힘든 숫자였다. 하지만 그들이 간과했던 점은 작년 말의 마린스는 포스트시즌 진출이 진작에 좌절된 이후였다는 점이었다.
응원하는 팀이 패배하는 모습을 보기 위해 경기장을 찾는 팬은 없다. 사람들은 누구나 응원하는 팀이 승리하는 것을 보고 싶어한다. 그것은 ‘나는 행복합니다’, ‘보살팬’같은 문구를 표방하는 피닉스 역시 마찬가지다. 그렇기에 결국 사람들을 경기장으로 끌어 모으는 것은 승리다.
마린스는 지난 잠실 경기에서 무려 246일만에 위닝시리즈를 거뒀다. 물론 누군가에게는 ‘고작’ 위닝시리즈일 수도 있다. 하지만 오랜 기간 ‘올해는 다르다’라는 말을 꾸역꾸역 믿어 온 마린스 팬들에게 246일만의 위닝시리즈는 주말에 한 번 시간을 내서 경기장을 찾아오기 충분한 사유였다.
게다가 160.1km/h의 유망주.
비록 언론을 통한 대대적인 홍보나 광고 등은 없었지만 그래도 야구팬들 사이에서는 알음알음 소문이 퍼질 수밖에 없었다. 더더군다나 그것이 고등학교 시절부터 해서 20억짜리 유망주를 거쳐 MLB와의 연습 경기에서 혁혁한 공로를 세운 데뷔전 2연타석 홈런의 주인공이라면 더더욱.
“그러니까 오늘 선발 투수가 타자로도 서는 거란 말이지?”
“그렇다니까. 엄마 대체 같은 걸 몇 번을 물어보시는 거야. 어휴.”
“마, 엄마가 몇 번 같은 거 물어볼 수도 있지. 니 엄마는 너 어릴 때 인마, 같은 거 백번씩 물어봐도 계속 답해줬었어.”
“아니, 아빠도 엄마가 같은 질문 계속하면 짜증 내면서 왜 나한테만 그래.”
“이놈 새끼가? 머리 좀 굵어졌다고 아빠랑 맞먹으려고 그러네. 인마, 나랑 너랑 같냐? 꼬우면 너도 얼른 장가가서 마누라한테 짜증 내던지.”
“아니, 누가 안 가고 싶어서 안 갔나?”
가족 단위로 모여든 수많은 관중.
어린 시절 아버지 어머니의 손을 잡고 사직을 찾았던 아이들은 어느새 자라나 아버지와 어머니를 모시고 다시 사직을 찾았다.
18,721명의 관중.
그리고 그렇게 모여든 관중들의 시선이 모여든 중심에서 최수원이 시즌 두 번째 피칭을 준비했다.
아침에 갈비찜을 데워먹고 출근한 투수의 컨디션은 시즌이 시작한 이후로 가장 좋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