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25화 (125/305)

125화. 그에게 홈런이란(1)

오늘 경기의 수훈선수는 대타로 홈런을 친 나에게 돌아왔다. 사실 하민 형도 첫 선발 등판에 6이닝 무실점이었으니 충분히 같이 받을 만도 했지만 아무래도 재규어스도 내가 홈런을 치기 전까지 무실점을 이어갔다는 점에서 그걸 깨트리는 홈런은 친 내가 임팩트가 좀 컸던 것 같다.

뭐, 그게 아니라면 오늘 원래 진짜 최고의 활약을 보인 건 선수가 아니라 허동중 씨. 그러니까 오늘 경기에 구심이었는데 내가 홈런으로 심판을 이겼으니 나에게 돌아온 것이 당연한 일일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내게 수훈선수 인터뷰야 워낙에 익숙한 일이었으니 그리 어렵지 않았다.

“이렇게 넓은 잠실 구장에 서니까 문득 어린 시절이 생각나네요. 벌써 까마득한 옛날처럼 느껴지는 게 아마 초등학교에도 입학하기 전이었을 겁니다. 당시 저는 몰랐죠. 그냥 아버지가 데려와 주신 경기 하나가 저의 인생에 이렇게 커다란 전환점이 될······(중략)······. 참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그래서······.”

“아, 최수원 선수. 정말 좋은 인터뷰였습니다. 그러면 앞으로도 좋은 활약 기대하면서 저희는 여기서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몇 번 질문과 답변을 나누지도 않았는데 어느새 경기장이 휑했다. 역시 원정 경기에, 아무래도 평일 경기라 내일 일정도 있으니 대중교통을 생각해서 팬분들도 빨리들 나간 듯싶었다.

“나도 안 질 거다.”

“네?”

“MVP. 나도 안 질 거라고.”

“아, 네······.”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온 라커룸에서 하민이 형의 굉장히 뜬금없는 선포를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며 서둘러 샤워실로 들어갔다.

잠실 야구장은 확실히 원정팀이 쓰기에는 좀 별로다.

근데 사실 이건 잠실 야구장의 구조적인 문제라기보다는 그냥 야구장 하나를 두 개 팀이 홈으로 쓴다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봐야 했다. 잠실 야구장은 그냥 정상적으로 라커룸 두 개, 샤워 시설 두 개를 다 갖췄다. 근데 거기에 각각 한 팀씩 또아리를 틀고 있으니 공간을 억지로 창출해서 원정팀용 라커룸을 하나 만들었는데 이게 보통 구린 게 아니다.

“인마, 그래도 이 정도면 많이 좋아진 거야. 나 짬밥 안될 때는 진짜 여름에 비 오는 날에 경기 뛰고 쫄딱 젖은 채로 버스 탔다가 에어컨 바람에 감기 걸리고 그랬었다니까?”

“설마 샤워 시설이 부족해서 연차 되는 선배들만 샤워한 거예요?”

“아니, 그땐 그냥 원정팀은 샤워 시설 자체가 없는 거나 다름없었어. 샤워기 꼴랑 3개가 있긴 했는데 솔직히 거기서 언제 선수단이 전부 샤워를 하고 앉아있겠냐. 짬밥 된다고 거기서 샤워하면 다른 애들 쫄딱 젖은 채로 기다리라는 건데, 다들 숙소 돌아가서 씻었었지. 야, 바디 그거 말고 이거 써 봐.”

무슨 이유에서인지 내가 인터뷰를 끝낼 때까지 샤워하지 않고 있던 이정훈이 나에게 바디워시를 하나 쓱 내밀었다.

“뭔데요 이게?”

“내가 쓰는 거랑 같은 브랜드에 향만 다른 건데. 비싼 거야. 퍼퓸형이라서 향수 따로 안 뿌려도 되는 거다. 오늘 서울까지 왔는데 제대로 한 번 뛰어봐야지. 넌 오늘 경기에서 홈런 날렸잖아? 형이 오늘 경기에서는 홈런을 못 날렸지만, 인생의 홈런이 뭔지 제대로 보여준다.”

그건 솔직히 별로 보고 싶지 않은 홈런이었다.

“글쎄요. 제가 볼 때는 인생의 홈런보다는 그냥 내일 경기에서 홈런을 하나 날리시는 게······.”

“뭐 인마? 야. 잠실에서 홈런이 어디 말처럼 쉬운 줄 아냐? 아, 하긴 오늘 보니까 너한테는 좀 쉬웠나 싶기도 하고······. 아무튼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오늘은 같이 놀러 가는 거다?”

“죄송하지만 제가 미성년자라서······.”

“걱정하지 마. 형이 너 민짜인 것도 모르겠냐? 이미 다 알아놨어. 봐. 알지? 형도 수도권 출신인 거. 형이 드래프트가 좀 꼬여서 부산에서 이러고 있지만, 고등학교 때까지 친구들은 다 여전히 서울, 인천, 경기도 뭐 이런데 살아. 친구가 일하는 곳 있으니까 거기로 가면 돼.”

“아뇨, 미성년자라서 어디 못 간다는 게 아니라. 미성년자라서 서울 오면 부모님 뵈러 가야 한다는 건데요. 감독님도 집에 다녀오라고 하셨고요. 집에서 아빠가 갈비찜 준비해놓고 기다리실 거예요. 아마.”

“아······. 갈비찜······. 갈비찜이면 뭐 어쩔 수 없지······.”

이정훈이 시무룩한 표정으로 물러났다.

***

식탁에는 김이 모락모락나는 갈비찜이 정갈하게 준비되어 있었다. 수원의 아버지가 갈비찜을 준비해둔다는 것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물론 그의 아버지가 직접 만든 건 아니었지만.

“오늘 TV에서 경기하는 건 잘 봤다. 네가 출장하는 줄 알았으면 어떻게든 직접 보러 갔을 텐데 많이 아쉽더구나.”

“아뇨, 전화로 말씀드렸던 것처럼 원래는 출장할 계획이 없던 경기였어요. 선발로 등판하면 무조건 다음 경기는 쉬게 해주신다고 했거든요. 근데 중간에 휴식일도 있었고 뭐 그래서 대타로 올려주신 것 같아요.”

수원은 언제나처럼 아버지와 대화를 하는 것이 어려웠다.

그리고 그것은 그의 아버지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래, 감독님이 여러모로 신경을 많이 써주시는 것 같구나. 인사를 한 번 드리긴 드려야 할 텐데.”

“아버지. 이제 학교 다닐 때처럼 해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이제 저도 프로잖아요.”

“아······. 그래, 그렇지.”

잠깐의 어색한 침묵 속에서 국그릇과 숟가락이 달그락거리는 소리만이 부엌을 가득 채웠다.

“근데 저녁 이렇게 늦게 드셔도 괜찮아요?”

“어차피 회사일 하다 보면 종종 이렇게 늦게 끝나고 그런다. 너 때문에 그런 거 아니니까 신경 쓰지 마라.”

“그러면 더 신경 써야죠. 저야 아침에 늦게 일어나서 밤에 늦게 끝나는 사이클이니까 식사도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만, 아버지는 아니잖아요. 몸 챙기셔야죠. 설마 요즘도 6시 30분에 출근해서 11시 넘어서 들어오고 그러세요?”

자신을 걱정해주는 아들의 모습이 참으로 기꺼웠다. 또한, 이제 너의 등교가 그렇게 이르지 않으니 나의 출근도 그렇게 이를 필요가 없다는 말은 굳이 필요가 없었다.

그렇기에 그저 나오는 이야기라고는 퉁명스러운 한 마디 뿐이다.

“회사 일이 원래 다 그렇다.”

“누가 들으면 회사 일 아버지 혼자 다 하는 줄 알겠어요. 이제 저도 돈 버니까 쉬엄쉬엄 하세요.”

“일없다. 누가 들으면 네가 수백억씩이라도 버는 줄 알겠구나. 게다가 그 계약금 20억은 지속해서 들어오는 돈이 아니야. 네 연봉은 3,000만 원이다. 요즘 어디 작은 회사 생짜 신입으로 가도 그것보단 많이 번다. 게다가 어디 네 직업이 평생 갈 것 같으냐? 허투루 쓰지 말고 평생 벌 돈 초반에 바짝 벌어둔다는 생각으로 잘 모아둬라.”

“네, 네.”

“쯧, 벼는 원래 익을수록 고개를 숙이는 법이야. 절대 교만하지 말아라.”

마음과는 다르게 입에서는 끊임없이 잔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래서야 잔소리 그만 좀 하라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당장 방문을 ‘쾅!!’하고 닫아도 이상하지 않으리라. 하지만 어째서일까? 그를 바라보는 아들의 얼굴은 그리 화난 표정이 아니었다.

“안 그래도 그러고 있어요. 게다가 제가 선배들이랑 얼마나 친한데요. 팀에 선배들이 각자 자기가 친한 무리가 있는데요. 아시잖아요. 저 투타 겸업인거. 투수 쪽이고 타자 쪽이고 뭐 가릴 것 없이 다 저랑 친하게 지내려고 하는데. 인기가 너무 많아서 힘들 지경입니다.”

“그래, 선배들이 밥 사준다고 항상 넙죽넙죽 얻어먹기만 하지 말고. 사람은 누구나 똑같다. 얻어먹는 후배보다는 종종 지갑을 여는 후배가 예뻐 보일 수밖에 없어. 혹시라도 돈 부족하면 연락하고.”

“아버지, 저 계약금만 20억 받았습니다.”

“그건 다 저축해놓고. 요즘 애들은 그저 비용처리 하면 된다. 뭐 한다. 하지만 결국 돈은 안 쓰는 게 남는 거다. 또, 괜히 누가 술 마시러 가자고 한다고 호기심에 따라가지 말고. 언론에 안 좋은 이야기로 오르내릴 필요 절대 없다. 대중은 냉정한 법이고, 좋은 야구 선수는 본래 자기 편보다 적이 더 많은 법이다. 네가 야구를 잘하면 잘할수록 마린스 팬들은 너를 좋아하지만, 나머지 아홉 개 구단 팬들이 너를 싫어할 거다. 괜히 꼬투리 잡히면 너만 괴로워질 뿐이야.”

아버지의 긴 잔소리.

아마 예전이었다면 밥조차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아니었다. 저 많은 잔소리들이 그저 아들과의 대화가 서툰 아버지 나름의 대화라는 것을 알았기에.

그리고

“네네, 아버지. 근데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인데. 저도 독립이라는 걸 했는데 아버지는 연애는 언제 시작하실 생각입니까?”

“뭐······, 뭐라고?”

아버지의 잔소리를 끝낼 방법도 이미 알고 있었기에.

“아니, 그렇잖아요. 아버지도 이제 좋은 아주머니 만나서 알콩달콩 재밌게 보내셔야죠.”

“아니, 이 녀석이? 무슨 그런 쓸데없는 소리를!!”

그렇게 두 부자의 별 것 아닌 이야기는 제법 늦은 시간까지 이어졌다.

***

서울에서의 3연전.

첫 번째 경기를 제압한 마린스는 이내 기세를 몰아 두 번째 경기도 승리를 하는가 싶었지만 어림없는 소리였다.

10억 5천만 원짜리 투수 최민혁은 2.1이닝을 무실점으로 막았지만 이후 연속 안타를 내주며 4실점을 했고 4회에도 추가점 2점을 내주며 결국 마운드에서 내려왔다.

“젠장······.”

물론 변명거리는 많았다. 하지만 프로는 결국 결과로 말할 뿐이다. 지금 이 경기장에 그의 변명을 들어줄 사람은 없었다.

그리고 마침내 3차전.

딜튼 도일리의 등판 차례. 세계 레슬링계의 큰 족적을 남길 뻔했던 사나이는 그 대신 21세기 이후 마린스의 1선발 가운데 개막전부터 2연승을 해낸 세 번째 투수이자 두 번째 용병 투수가 되는 기록을 달성했다.

“승리의 기쁨을 스완에게 돌리겠습니다. 스완은 정말 최고의 타자라고 생각합니다. 아, 그리고 유진에게도 고마움을 표시하고 싶군요. 그는 정말 훌륭하게 공을 받을 줄 아는 포수입니다. 타격에서 조금 부진한 것은 별 의미가 없다고 봅니다. 한 번 더 말하죠. 유진은 정말 훌륭한 포수입니다.”

─가을마린스: 딜튼 도일리 “조유진은 타자로서는 의미가 없다. 공 받는 기계로서의 역할에 충실해야,”

─마린스해체좀: 와, 딜튼 지금 9푼 포수한테 고맙다고 말하는 거 실화냐? 한교철이 얼마나 공을 그지 같이 받았으면...

─수원왕최홈런: 그럴만하지. 우리 수원이가 데뷔전에서 1회에 4삼진 한 것도 그렇고. 어제 민혁이 공도 스트라이크를 볼로 둔갑시켰잖아. 거기다가 볼배합도 진짜 개똥같고.

─야잘알: ㅉㅉㅉ 포수가 볼 배합을 한다니. 아재요. 지금 2027년입니다. 80년대에서 얼른 현대로 돌아오십쇼.

─V3가즈아!!: 야, 니들 그거 아냐? 우리 이번 시리즈 246일 만에 위닝시리즈다.

─사직아재: 그게 무슨 헛소리야. 우리 분명 작년에 브레이브스 상대로도 위닝시리즈있었잖아.

─V3가즈아!!: 그러니까 그게 246일 전... 작년 7월이야...

246일만의 기록적인 위닝시리즈를 끝내고 당당하게 부산으로 돌아온 마린스를 기다린 것은 작년의 디펜딩 챔피언. 바로 지난 겨울 FA로 미국을 가네, 마네 하다가 4년 110억이라는 생각보다는 소소한 금액으로 KBO에 눌러앉은 백강호가 이끄는 수원 돌핀스였다.

“후배, 반가워.”

“아, 네. 안녕하세요.”

“요즘 상당히 뜨겁던데? 잠실에서 홈런도 쳐내고 말이야. 쉽지 않았을 텐데.”

올해로 스물일곱.

데뷔 첫해에 이미 30개의 홈런을 때려냈고 8년 차인 작년까지 꾸준히 리그 최정상급 타자로 고작 8년 만에 달성한 누적 홈런이 무려 207개. 명실상부 KBO에서 가장 뜨거운 타자인 홈런왕 백강호가 한 걸음 먼저 나에게 다가왔다.

“아, 맞다. 너도 그거 봤냐? 나 어제 홈런 하나 더 쳤던 거?”

스읍······.

그러니까 지금 이거 이제 자기가 나보다 홈런 하나 더 쳐서 4:3이라고 자랑하러 온 건가 설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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