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투수가 그냥 홈런을 잘 침-124화 (124/305)

124화. 여섯 번째 툴을 가진 투수(5)

재규어스의 셋업맨 마승빈은 매우 훌륭한 공을 가진 투수다. 그는 최고 154km/h의 속구를 존의 안과 밖으로 구분해서 던질 줄 알았다. 게다가 평균 142km/h에서 형성되는 슬라이더 역시 스트라이크와 볼을 구분해서 던질 줄 알았다.

많은 사람이 구위만 따지자면 마무리 투수를 맡아도 이상하지 않다고 이야기했고 최수원의 평가 역시 그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하지만 그에게는 한 가지 결정적인 약점이 있었다.

새가슴

모든 투수가 다 담대한 것은 아니다. 신은 그에게 최고의 투수가 될 수 있는 재능을 주었지만 동시에 투수에 참으로 어울리지 않는 성정을 함께 주었다.

그가 침을 꼴깍 삼켰다.

깔끔하게 삼자범퇴로 끝낼 수 있었는데······. 이러다가 만약 여기서 연속 안타라도 허용하면? 경기에서 패배했다고 달릴 수많은 악플들. 버스로 가는 길에 들려올 욕설과 비아냥들. 아들이 마승빈 자신 때문에 재규어스의 팬이 됐다고 하던 친구 놈 얼굴까지. 온갖 부정적인 생각들이 그의 머릿속을 소용돌이쳤다.

‘어휴, 저 새끼 저거 또 땅파고 있네.’

이제는 익숙해져 버린 재규어스의 포수 강승룡이 마운드로 올라갔다.

“승빈아, 투 아웃이다. 투 아웃. 오늘 너 뽈 진짜 좋아. 방금 주혁이가 안타 친 거? 그냥 순 뽀록이야. 게다가 대타라고 올라온 녀석은 이제 막 고등학교 졸업한 애잖아.”

“하지만 선배. 쟤 걔잖아요. 개막전에서 2연타석 홈런 친 계약금 20억짜리 슈퍼 루키.”

“그리고 두 번째 세 번째 경기에서는 홈런 없었지. 그리고 거긴 사직이었잖냐. 여긴 잠실이야. 그때 그 타구 여기로 가져오면 그냥 외야플라이야. 걱정하지 말고 팍팍 가자. 어? 게다가 오늘 심판이 좌우로 존도 넓게 잡아주고 있잖아. 진짜 오늘 네 공은 백강호가 10타석 연속으로 도전해도 홈런 하나도 못 날릴 그런 공이야.”

“그래도 승룡 선배······. 차라리 그냥 1루도 비었는데 고의사구는 어떨까요?”

최근 3년.

KBO를 기준으로한 데이터에서 2아웃 주자 2루 상황에서 득점 기댓값은 0.321. 주자 1, 2루 상황에서 득점 기댓값은 0.537로 1.5배를 상회한다. 그것은 딱 1점만 뽑아낼 확률로 계산을 좁혀도 18.1%와 23.9%로 제법 차이가 있다.

무엇보다 최수원의 뒤편.

지금 대기타석에서 실실 웃고 있는 남자는 이정훈.

그의 실력은 자명했다. 이 바닥에서 행실 안 좋기로 유명했음에도 불구하고 꾸역꾸역 프로 1군에 붙어있을 수 있는 것 자체가 그의 실력을 입증했다.

“승빈아, 형이 언제 너한테 불가능한 거 시킨 적 있었냐. 그냥 형 믿고 가자. 어? 오늘 진짜 네 공 죽인다니까.”

“선배, 작년에도 이거랑 비슷한 말 했었는데 저 그때 블론하고 인터넷 악플에 죽을 뻔 했던 건 기억하시죠?”

“그래, 그래서 내가 그거 다 내가 하자고 했던 거고 그게 가장 올바른 선택이었다고 언론 나가서 인터뷰했던것도 기억나지? 이번에도 혹시라도 잘못되면 내가 다 알아서 커버쳐줄 테니까 넌 그냥 나만 믿고 하던 대로 던지면 돼. 오케이?”

승룡이 고개를 끄덕이는 마승빈의 어깨를 두어차례 툭툭 두들기고 홈플레이트로 돌아왔다.

타석에는 최수원이 방망이를 가볍게 쥔 채 서 있었다.

“처음 보네.”

“네, 올해가 처음이라서요. 앞으로 종종 뵙겠습니다.”

“뭐, 그건 너 하기 나름이겠지.”

“아뇨, 제가 생각할 땐 그 반대일 것 같은데요.”

승룡의 눈썹이 꿈틀했다.

건너건너 싸가지 없다는 이야기는 들었지만 상상 이상이다.

하지만 그래도 역시 신인은 신인이었다. 애당초 이런 대화를 나누는 것 자체가 타자를 흔들기 위해서다. 그리고 저렇게 발끈해서 답하는 것부터가 이미 조금은 흔들렸다는 뜻이기도 하다. 결국 어찌 됐건 대화가 이어질수록 타자 쪽이 손해라는 뜻이다.

“역시 화풀이로 선배 엉덩이 날려버린 놈답게 보통 성질머리가 아니네.”

“에이, 선후배 생각했으면 홈런 치고 관중들한테 손 좀 흔들었다고 후배 엉덩이 날린 선배부터가 글러 먹은 놈이죠. 안 그렇습니까? 선.배.님?”

“새끼, 싸가지 없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는데, 너 진짜 대박이구나?”

“뭐, 종종 듣는 이야깁니다.”

“이 바닥 좁다는 이야기도 종종 들었지?”

“그렇기는 한데 뜨면 열외라는 말을 좀 더 선호하는 편입니다.”

“와, 이 새끼. 진짜 끝까지 한 마디를 안 지네.”

그래, 분명 타자 쪽이 손해다.

그런데 대화가 이어질수록 손해를 보는 기분이 드는 것은 대체 무슨 이유에서일까?

마운드의 마승빈이 세트 포지션에서 빠르게 공을 뿌렸다.

요구한 것은 바깥쪽 꽉 찬 코스. 하지만 그것보다 조금 더 공이 빠졌다.

-뻐엉!!

마승빈이 최대한 미트를 존에 걸친 채 공을 받았다. 거의 손가락에 걸치는 공이라 사실 좀 위험한 짓거리이기는 했다. 하지만 그래도 가끔 이런 식으로 공을 받으면······.

“스트라잌!!!”

그래, 이렇게 심판이 스트라이크 콜을 외쳐 줄 때가 있다.

볼카운트 0-1.

타석에 선 애송이가 애써 침착한 척 하려했지만 소용 없었다. 어처구니없다는 감정이 그의 무표정을 뚫고 스물스물 올라왔다.

어떠냐. 애송아. 이게 바로 프로의 맛이다.

***

어처구니가 없었다.

아니, 그래 백번 양보해서 오늘 심판이 존을 넓게 봐주는 건 그래도 양팀 모두에게 일관성이 있으니까 그렇다고 치자. 실제로 우리 팀도 그 덕을 제법 봐서 무실점을 유지중이었으니까.

하지만 그래도 이건 좀 심했다. 홈플레이트를 스치기는커녕 홈플레이트보다 좌타자 배터박스 라인에 더 가까운 공이었으니까.

안 그래도 존이 태평양인데 포수의 어설픈 미트질까지 봐준다고? 설마 그거 내가 빈볼 날렸던 거 아무런 패널티 안 받은 것 때문에 꼰대들이 길들이기라도 들어간 건가? 물론 그게 말이나 되는 소리냐. 라고 되물을 수도 있지만, 그 말이 안 되는 소리가 가능한 게 이 바닥이다.

애당초 KBO에 심판은 일반인 출신이 거의 없다. 대부분 은퇴한 프로 선수들이 한다. 결국 까보면 저 양반들도 우리랑 선후배 하는 관계라는 의미다.

잠시 손을 들어 타석에서 물러나 장갑을 동여맸다.

후······.

가볍게 호흡하고 다시 타석에 섰다.

그래, 뭐 그래도 이 정도면 양반이다. 미국에서는 이미 한국에서 7년이나 뛰고 온 나를 신인 길들이기 한답시고 더 개 같은 판정을 준 적도 있었다.

두 번째.

투수가 세트 포지션에서 다시 공을 뿌렸다.

코스는 당연히 바깥쪽. 저딴 공까지 잡아주는데 몸쪽 승부를 할 이유가 없다.

살짝 돌아가던 배트를 멈춰 세웠다.

-뻐엉!!!

유인구. 슬라이더였다.

아무리 심판이 개차반이라도 이거까지는 스트라이크를 줄 수 없다. 거의 좌타자 배터박스 복판을 통과한 공인데 이걸 스트라이크 콜을 주면 이건 솔직히 감독이 달려 나와서 심판 멱살 붙잡아야 할 일이다.

볼카운트 1-1.

“어이, 후배님. 그렇게 바짝 다가섰다가 몸에 공이라도 맞으면 어쩌려고 그래? 우리랑 시리즈에서는 마운드에 서지도 못 하잖아.”

“에이, 어디 이번 시리즈만 시리즈인가요. 시리즈 끝나도 11경기나 더 남았는데 한 번은 만나겠죠. 안 그렇습니까? 선배님? 아, 맞다. 근데 그러면 누구한테 공을 던져야 할지 헷갈리겠네요. 이왕이면 선배님이 계셨으면 좋겠는데.”

게다가 별것도 아닌 놈이 끊임없이 말을 걸어오는데 솔직히 같잖았다.

미국에서 은근슬쩍 엿 같은 인종차별멘트도 견딘 나다. 게다가 다른 애들처럼 선배랍시고 헛소리 하는 놈들에게 참아줄 이유도 없다.

뜨면 그만이기 때문이다.

아, 물론 여기서 ‘뜨면’은 뜨면 열외에서 뜨면이 아니라 말 그대로 얼른 MVP 2번 하고 한국을 뜨면 그만이라는 뜻이다.

‘아니지. 우리가 올해 우승할 수도 있잖아.’

세 번째.

투수가 또 한 번 바깥쪽으로 살짝 빠지는 공을 집어넣었다. 앞선 경우를 생각하면 또 스트라이크 콜을 줄 가능성이 있으니 방망이를 휘둘러야 했다. 하지만 이런 건 어차피 쳐봐야 힘을 싣기도 힘들고 제대로 된 타구가 나올 가능성이 적다. 게다가 혹시 아는가? 심판이 갑자기 각성해서 존을 좀 제대로 봐줄지?

-뻐엉!!!

“스트라잌!!!”

그러니까 오늘 구심 이름이 허동중.

그 이름 내가 똑똑히 기억해뒀다. 다음번에 내가 등판했을 때 두고 보겠다. 아, 물론 심판 헤드샷을 하겠다는 말은 아니다. 그건 진짜 문제가 커지니까. 그냥 그때 스트라이크 존을 어떻게 잡아주나 지켜본다는 뜻이다.

볼카운트 1-2.

네 번째.

잠깐을 고민했다.

어차피 어지간히 빠져도 다 잡아주는데 이걸 루킹 삼진을 하면 심판이 개 같았다는 핑계가 있는 명예로운 죽음이겠지만 괜히 휘둘렀다가 뜬공 아웃이 되면 똥볼도 못 고르고 휘두른 멍청한 죽음이 된다.

그렇기에 답은 간단했다.

난 원래 명예보다 멍청한 짓을 좋아한다.

-딱!!!

이제 아예 대놓고 존에서 빠지는 공인데도 스트라이크 콜을 기대하며 던진 공을 두들겼다. 타구가 아주 쭉쭉 뻗었다. 1루 파울라인을 아득히 넘어 익사이팅존의 2층을 때리는 호쾌한 파울이었다.

그리고 다섯 번째.

바깥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2-2.

여섯 번째.

또 바깥으로 빠지는 슬라이더.

3-2.

오늘 심판은 진짜 거의 좌타석에 가까운 곳으로 공을 던져도 스트라이크 콜을 주는 아름다운 판정을 하고 있었다. 그렇기에 내가 투수라면 무조건 거기로만 집요하게 공을 던질 것이다. 근데 볼카운트 1-2에서 굳이 완전히 빠지는 바깥쪽 슬라이더를 두 개나 던진다? 그것도 내가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슬라이더를 골라내고 있는데?

“투수가 쫄은 건가? 이거 꽁으로 걸어 나가겠네.”

“뭐 인마?”

“아뇨, 그냥 혼잣말입니다.”

“하, 나 이 새끼가?”

물론 혼잣말이 아니었다.

흔한 도발이다. 당연히 저 멀리 마운드에 있는 투수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고, 포수 들으라고 한 이야기다.

공을 던지는 투수는 쫄았다.

근데 포수는 빡쳤다.

원래 포수는 투수를 케어해줘야 하는 포지션이다. 개복치 같은 투수 놈들을 우쭈쭈 달래는 게 그들의 본업이다. 투수가 도망가고 싶어한다? 그러면 그냥 도망가게 냅두는 게 보통 정답이다. 왜냐하면 도망가려는 투수를 억지로 승부하게 시켰을 때는.

-딱!!!

딱 이런 꼴이 나기 쉽기 때문이다.

[최수원!! 쳤습니다!! 타구 매우 큽니다!! 큽니다!! 넘어가느냐!! 넘어가느냐!! 넘어······, 갔습니다!! 1-2에서 연속으로 두 개나 공을 골라내며 풀카운트를 만들어낸 최수원 선수!! 결국 마승빈 선수의 일곱 번째 공을 두들기며 홈런을 만들어냈습니다. 시즌 3호 홈런이자 첫 원정 홈런을 잠실에서 만들어 냅니다.]

[참, 대단한 승부였습니다. 슬라이더를 정말 귀신같이 골라내고 살짝 안으로 몰린 속구를 그대로 통타해내네요.]

[8회 초, 이제 점수는 2:0. 이걸로 마린스가 2점을 앞서 나갑니다.]

마지막에 좀 아슬아슬하긴 했다. 특히 중견수 정창수가 담장 짚고 점프 뛸 때는 가슴이 철렁했는데 공이 살짝 높았다. 각도가 조금만 낮았거나 힘이 조금만 부족했어도 잡힐 뻔했다. 확실히 잠실이 넓긴 넓다. 메이저에 잠실보다 넓은 구장들이 있긴 한데, 그래도 거기는 외야가 직선인데 잠실은 이게 라운드다. 좌중간을 기준으로 봤을 때 잠실이 더 깊어 보인다.

뭐, 어쨌든 담장을 살짝 넘어가는 홈런이었지만 홈런은 홈런.

그라운드를 한 바퀴 돌아 홈플레이트를 슬쩍 밟았다. 오늘 재규어스의 포수가 똥 씹은 표정인 게 참 보기 좋았다.

[8회 승리의 쐐기포를 때려내는 최수원!! 시즌 3호 홈런포!!]

[최수원, 백강호 시즌 네 경기 만에 나란히 3홈런씩!! 벌써 시동 걸리는 홈런왕 경쟁?]

[백하민 여심을 저격하는 꽃미모는 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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